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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슈아
소설

Reminiscences-1.덮여진 페이지

네냐플 스텔라타 2017-10-23 01:47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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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보면 펼치는 것이 당연할 정도로, 소년은 눈을 떴다. 아침의 햇살이 고요한 방으로 스며들어오고, 금빛 가루를 흩뿌린다. 그의 회색빛 머리칼에, 그와 같은 빛의 눈동자에. 

손이 움직여 차양을 만든다. 드리워진 그림자가 선명해진 시야를 반쯤 가리고 그 여백을 천장으로 채운다. 아직 끝까지 빛이 미치지 않아 그라데이션을 그리고 있는 그 빛에서 보고 있는 이것이 방 천장-이라는 답이 나오기까지 20초. 시선을 옮겨 벽지,창문,  진열된 가구들, 구석에 세워진 기타를 훑어보고 또 그 옆으로 옮겨 같은 부분과 문을 보고, 낯익음의 단계를 지난 익숙함을 느낀 후 자신이 묵고 있는 방이라는 해답이 나오기까지 50초. 몸을 누르던 무게감이 사라지면서 이불의 촉감을 느끼고 아까까지 잠들어 있었다는 사실이 나오기까지 또 10초.

 

 어둠 속에서도 그릴 수 있는, 아주 익숙하고도 당연한 것들을 1분이 넘는 시간을 소모하며 일일히 '인식'했던 것은 잠을 깬 후의 개운함은 간데 없이 뜻모를 부유함과 탈력감이 머릿속 한 켠을 지배했기 때문이었다.

보물창고에 일순간 도둑이 들어 모든 것을 털어간듯이.

다른 이라면 그저 잠이 덜 깼나 싶을 정도의 감각일 뿐이지만 그는 "기억'이라 통틀어지는 무언가의 상실이란 존재할 수 없는 이 이기에 그저 넘어갈 수는 없었다.

 

데모닉(Demonic),이란 이름이 그의 그림자에 따라붙는 이상.

 

무엇이 없어졌는지 알아야 한다.

 

소년의 발이 방 바닥을 미끄러지듯 딛었고 정적 속에 단 한 명뿐임을 알리는 발소리가 공기를 울렸다. 끼익, 문이 열리고 탁자 위의 구겨진 종이 뭉치, 그 사이의 서류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내용 작성의 중단을 알리는 끊어진 단어. 그를 이루는 유려한 글씨체를 따라 손끝으로 훑고 있으려니 서명 란의 이름이, 시야의 끝을 메운다.

 

'조슈아 폰 아르님'

 

옆에는 키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이건.

 

손을 그대로 내려가니 그 위로, 가려져있던 페이지의 일부분이 드러나는 환상이 무형의 파도에 쓸려왔다가, 지워진다. 딸랑, 어딘가에서 들리는 종소리가 부유함의 안개를 한 겹, 걷어낸다.

 

손을 떼며 주위로 시선을 멀리 보낸다. 침실과는 다른 분위기의 방이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세부적인 구조도를 펼쳐낸다. 자신의 기숙사 방이라는 것은 사소하면서도 변함없는 진실.

 

걸음을 또다시 옮기니 한켠에 개켜져 있는 교복과, 접하는 것은 한 번으로 충분하다는 상태를 보여주는 책들이 그를 반긴다. 또한 품질이 좋음을 그의 시선으로 한 눈에 보여주는 그것들은.

 

...그랬지.

 

대륙의 저명한 마법학원, 네냐-아플리아, 약칭 네냐플의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본 것은 그 고유의 이름.

마법사, 혹은 그 제자임을 뜻하는 로브도 없고 한 번 유일성을 침해 당할 뻔 하였지만.

 

..하였지만?

 

언제?

 

...누구에게?

 

그는 저절로 떠오르는 기묘한 웃음을 지우고 눈빛을 굳혔다. 그 대상들은 분명 각기 다른 이들을 가리키고 있었고 그에게 큰 지분을 남겼지만,

 

...그에 대한 것이 아무것도, 단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모두, 손이 닿지 않은 깊은 심해 속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잃어버린 것은 이것이었나.

 

하, 자조적인 웃음이 새어나왔다. 하필이면 그를 지탱하던 것들이 제게서 벗어나 버렸으니,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다시금 할 수 밖에 없었다.

 

가면을 다시 쓸 수 밖에 없었다.

 

그를 기억하고 있을 이들에게서, 평소의 그를 연기하기 위해.

 

 

다만, 다행인것은 오늘은 휴일이라 나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이참에 좀 쉴까.

 

...될리는 없겠지만.

 

관자놀이를 짚는 그의 주위로 그 만이 들을 수 있는, 수군거리는 음성이 적막을 깨뜨리며 칠흑빛 장막을 드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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