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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히 하라고 할까, 라는 마음이 불쑥 나오기 전에 저들에겐 자신의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돌이 되어 내리눌렀다. 그 위로 한 줄기 미풍이 인다. 타이름을, 혹은 놀림을 한 줄기 담은 듯한 음성을 실으며.
-너와 말이 통했다면 저들끼리 저렇게 있지도 않았어.
그 안에 담긴 말 한마디가 낯설다,라는 단어 하나를 지우고,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더니 보이지 않는 책장에 쌓인 먼지를 밀어내며 이름 하나를, 그 아래 빼곡히 들어서있는 이야기들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화선지에, 먹물이 번져 나가듯이, 하나씩 하나씩.
"...-"
이름을 입 속에 맴돌다 공기 중으로 밀어낸다. 소리들이 물러나고 정적이 내려앉는다.
한 번 더, 조금 더 크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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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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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허함 속에, 돌아오지 않는 답은 이미 한 번 확인했었던, 존재의 '부재'를 다시금 부각시키고, 옷의 화려함에 가려질, 단 하나의 비밀의 자물쇠로 채워진 상처의 흔적, 그 한 가닥 실의 감촉은 무엇을 남기고 갔는지를 상기시킨다.
허공을 잠시 떠돌던 손가락이 내려가고, 옷자락을 스쳤다가, 유일하게 시간의 흐름을 탄 책을 뽑아든다. 손 끝으로 무뎌진 종이의 모서리들이 잠시 들렀다 가고, 여백이었던 부분에서 멈춘다.
.......
주저없이 그어진 선을 따라, 쉬고 있던 손가락이 내려가고, 굽이치고, 떨어진다. 회색빛 눈동자에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빛이 감돌다 어둠 속으로 잠시 내려앉는다.
-안녕, 앤. 안녕, 조슈아. 다시 태어나도 그대들을 지키겠어.
거울 속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날의 기억을 이제는 단 한 명뿐인 벗과 나누고서, 남겼던 마지막 인사가 따스한 물결이 되어 메아리친다.
...그 때가, 지금이 될 수는 없는 건가요, 제멋대로인 걸 알지만, 그러면 안되는 건가요.
나...돌아가 버렸어. 당신을 처음 만났던 때로.
아니, 그 이전의...
유리인형으로.
켈스.
가볍게 감싸쥔 주먹이 가늘게 떨리고, 또 무엇이 문제야, 골칫거리 도련님. 그가 일을 만든 후 나타날 때마다 했던 말이 속삭이듯 아침 햇살을 타고 내려온다.
한 편,
그 시각 외투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서 교정을 걷는 이가 있었다. 머리도, 눈도 갈색 일색이지만 소년다운 체격에 너무나 잘 어울리는 빛의 그는 생각 속에서 나른한 빛을 감상하듯 하늘을 올려다 보았고...
" 눈부셔 죽겠구만"
투덜거리며 안경을 벗고 눈을 가렸다가 다시 썼다.
"어라? 막시민-"
그리고 다시 걸으려는 찰나, 들리는 음성에 귀찮아 하는 표정을 얼굴 한 가득 지으며 돌아보았다. 아니나다를까, 학원 내 기피대상 1호(...)인 소녀가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일찍 일어났네?"
"벌써 해가 중천이다. 그리고 몇 없는 황금같은 휴일에 어디 퍼질러 있는 지 모르는 회색 고양이처럼 시간을 허비할 순 없잖냐"
"응, 좋은 자세야. 그런데 회색 고양이라니?"
고개를 갸웃하는 소녀에게 소년은 조군 말이다, 조군. 약간의 신경질을 담아 대꾸하고는 잔소리 선생은 그 자식 못 봤냐. 하고 되려 묻는다.
"조슈아? 아니,못봤는 걸. 포도원에도 없었으니까 아직 방에서 쉬고 있는 것 아닐까?"
"그러냐. 속 편한 녀석이구만"
맥이 풀린 듯 뒷머리를 헝클인 소년을 보며 소녀는 옹호하는 말을 꺼냈고, 넌 어느 편이냐, 하는 시선이 뒤따라 보내다 귀찮음으로 넘겨 버리는 소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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