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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gos] - 4
"압생트는 말이지...... 예술가의 영혼이야. 영혼이자 노래고 사랑이며 영감(靈感)이고...... 또 좋은말 뭐 있냐? 넌 작가라서 좋은 말 많이 알잖아."
"...... 파멸이다."
"그거 괜찮네. 예술가의 파멸! 이야- 악상이 막 떠오르는데."
나름대로 막시민의 최고급 술잔(그나마 최고급이라는 말이다.)은 암록색의 청아한 술빛을 받아 기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막시민은 구멍이 뚫린 스푼 위에 있는 각설탕을 걷어내고 술잔을 들어올렸다. 그가 정말로 세상에서 제일 좋아라 하는 압생트라 할지라도, 지금 그의 기분은 최악중의 악이였다. 술잔을 손에 쥔 채 빙글빙글 돌리며 '초록빛 요정'이라는 압생트의 술 빛깔을 즐겨보려 해도 끝없이 우울해져만 가는 기분은 도저히 막을 수가 없다. 입가에 술잔을 올려놓고 조금 기울이며, 막시민은 안경 너머로 조슈아를 흘끗 쳐다보았다. 뭐가 그리 기분이 좋은지 흥얼거리며 눈을 감은 채 허공에 손을 뻗어 지휘라도 하듯 흔들고 있는 녀석. 좋은 건지. 좋은 척 하는건지. 알 수가 없지. 워낙 가면이 많은 녀석이니.
"뭐야, 듣자 하니. 진짜 연극에 음악이라도 집어 넣을 기세인데."
"극작가는 너지만, 기획 담당은 나잖아. 오늘 봐서 꽤 괜찮은 악상이 떠오르면 집어넣을 생각이야, 어때?"
"뭔 별 시덥지도않다, 음악이라니. 게다가 니 녀석은 내 원고도 아직 안봤잖아."
"아직 미완성 아니야?"
"미완성은 무슨. 벌써 끝났다."
"뭐?!"
조슈아는 기대앉아있던 의자에서 벌떡 몸을 일으켜 자세를 고쳐 잡았다. 막시민은 그런 그를 뾰루퉁한 표정으로 외면한 채 술을 홀짝였다. 일말의 기대감을 잔뜩 가진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 보는 조슈아를 보며 막시민은 인상을 쓴 채 딱딱 거렸다.
"이봐. 그래. 완성은 됬는데 말이지. 다시 써야돼."
"그게 무슨말이야. 빨리 원고 좀 보여주시죠. 작가님."
"그러니까 그게! 원고는 완성인데, 다시 써야 되는 부분이 생겼어. 그래서 원고를 완성하긴 했는데 다시 미완성이 됬다는 말이야. 그래서 보여 줄 수가 없다는 거지. 하지만 다시 완성이 되도 보여줄 수는 없어. 왜냐하면 미완성이 될 것 같거든. 젠.장, 이게 대체 무슨말이야!"
본인 말에 다시 한번 급격한 피로감이 엄습해오는 것을 느끼며 막시민은 안경을 벗어 미간을 꾹 짓눌렀다. 그런 막시민을 조슈아는 놀람 반 걱정스러움 반이 뒤섞이 애매모호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아무리 날라리 같은 공작님이라 하더라도 이 사실을 알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본인이 연출하는 공연일테고. 펄펄 날뛰지만 않으면 다행인데. 게다가 저 녀석은 내 일이라면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는 단점이 있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조슈아가 이 사실을 알던 모르던 조슈아 본인에게 피해는 분명히 가게 될 것이다.
막시민이 눈을 내리깐채 미간에 홈이 파일정도로 인상을 잔뜩 주며 이 난관을 어찌 해결할지 꿍하게 생각하고 있자니, 조슈아가 대뜸 말한다.
"임마, 너. 새초롬한 표정으로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닥치고 가만 있어봐. 이거 연극 한번 잘 못했다가 모가지 날아갈 판이야. 상당히 심각한 부분이라고."
"...... 폰티나 가에서 그리 말해?"
막시민은 손에 턱을 괴고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담배쌈지를 찾았으나 실패했다. '다 떨어졌군.'
골치가 지끈지끈 아파오는 것을 느끼며 그는 테이블 위에 놓여진 스푼으로 손을 가져갔다. 스푼 위에 올려진 각설탕을 테이블 위로 잠시 내린 뒤, 압생트가 들어있는 잔과 스푼, 그리고 각설탕을 차례로 나란히 늘어놓았다.
"말하기 상당히 귀찮지만 어쩔수가 없네. 대충 이런거야. 자 봐. 이 스푼을 내 연극이라 치자. 이 건 밑바탕과 무대가 되는 거지. 그 밑에는 이 잔이 이렇게......"
막시민은 스푼을 잔 위에 올려놓았다. 딸캉하는 경쾌한 소리를 뒤로 그는 말을 이어나갔다.
"...... 있지. 이 술은 그래, 폰티나 가문이다. 더 포괄적이겠지만 일단은 그렇게 치자. 그리고 난? 여기 스푼 위에 있는 초라하고 허접한 각설탕이 되는거지. 녹아들면 녹아들수록 술맛은 꽤 괜찮아 지겠지만 내 목숨은? 그냥 없는 셈 치자."
상당히 명쾌하고 우울한 결말이 아닐 수 없었다. 조슈아는 조용히 막시민의 설명을 듣더니 의자 뒤로 몸을 기대 누우며 코웃음을 쳤다. 그런 조슈아를 막시민은 불쾌하기 짝이 없다는 표정으로 노려보며 말했다.
"뭐가 그리 우스우실까?"
"그러니까. 오늘 폰티나 가의 클로에양이 오셔서 너에게 한 말이 대충 짐작이 가서 그래. 분명 오늘 와서 너에게 무언가 권유를 빙자한 협박을 한 것 같은데. 극작가인 널 협박할게 뭐가 있겠어? 뻔하게도 연극의 내용이겠지. 조금만 생각해보면 답은 나와. 너와 내 연극은 아노마라드를 비롯해서 왠만한 지역에 미치는 파급력이 상당히 큰 편이지. 그걸 이용하겠다는 거야. 게다가 요세 정세가 좀 불안하잖아? 클로에는 아마 오늘 낮에 너한테 와서 네 극본 안에다가 본인에게 유리한 내용을 넣어 줬으면 좋겠다고 한 것 같은데. 그녀가 원한 내용은 아마도...... 혁명단에 대한 내용인 것 같고."
막시민이 흠칫 거리자 조슈아가 쾌할하게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빙고." 그런 그를 보며 막시민은 씁슬하게 웃었다.
"넌 내가 아무리 귀신시나락까먹는 소리를 흘린다고 해도 제대로 주서받아먹는구나. 괴물같은놈."
"네가 말 안해줘도 처음 클로에 공녀에 대한 애기가 나올때 부터 대충 짐작은 했어. 요즘 들어 민중의 벗이라고 칭하는 혁명단 녀석들이 이슈화 되고 있잖아. 귀족들은 아닌 척 해도 은연중에 신경을 곤두 세우고 있다고. 귀족의 수장이라고 할 수 있는 폰티나 가문에서 뭔가 슬슬 움직이려 하나 보군. 아쉽게도 그들의 무대는 네 연극이 된 셈이고. 애꿋은 막시민 너만 골치아프게 됬어."
"망할. 난 정치 따위에는 쥐뿔도 관심 없다고!"
"관심 없는 척 하면서 네 연극에 정치 얘기가 빠진 적은 드물잖아."
"이봐 도련님. 그건 풍자라고 하는 해학적인 요소야. 비웃음 거리를 찾다 보면 정치만큼 제격인것은 없거든. 단지 코미디적인 요소로 추가시켰을 뿐인지, 막상 작가 본인은 정치에는 전혀 무뇌한인데 이러한 사실은 왜 아무도 모르는지 원."
"네 연극이 완성도가 높아서 그래."
조슈아는 말을 마치고는 술잔을 든 채 훌쩍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뒷짐을 지며 창가를 향해 걸어갔다. 달빛이 새하얗다. 막시민의 집은 허름하기 짝이없는 폐가 같은 구석이 있지만 그래도 하나 봐줄만 한건 자정이 되면 달빛이 창을 향해 정면으로 뜬다는 점이다. 매력적인 부분이다. 달빛을 받아 조슈아의 머리칼이 하얗게 빛을 품는다. 막시민은 그런 조슈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앞에 놓여진 잔을 비웠다. 이거 꽤나 감상적으로 변하잖아. 막시민이 술을 꿀꺽 삼킴과 동시에 조슈아가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며 툭 내뱉었다.
"란지에 로젠크란츠."
"으응...... 엉?"
"그 남자. 푸른 장미 말이야."
막시민은 턱밑을 타고 흐르는 술을 소매로 훔치며 얼떨떨하게 물었다. 조슈아는 창가 앞에 놓여진 서랍장을 밀어낸 뒤 창문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사뭇 진지하고도 심각한 표정이다.
"그 녀석. 네 연극을 보러 올지도 몰라."
"뭐하는 사람인데?"
"...... 그리고 그게 바로 폰티나 공녀가 원하는 바 일 수도."
"뜬구름 잡는 소리 하는 사람은 나 하나로 족하자. 대체 무슨 말인데 그게?"
"간단해. 공화정을 우호하거나. 혹은 왕정을 우호하거나. 둘 중에 하나를 강력하게 표방한 연극을 만든다면. 그걸 계기로 민중의 벗을 선동 해서 그녀석이 움직일 수도 있어. 보통 혁명을 위한 선동을 할때는 시작점이 필요해. 사람들을 선동하게 되는 계기. 그리고 계시."
"뭐가 점 점 이렇게 거창해 지는건데!"
"란지에 로젠크란츠는 민중의 벗의 수장이자 배후세력이지. 절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잡을 수도 없고 볼 수도 없지. 그런 그를 폰티나 가문이 움직여서 잡겠다는거야. 대신 본인들의 손에는 더러운 피를 묻히지 않겠다는 거지. 어느 누가 희생양이 된다 하더라도 상관이 없다는 건가."
말을 마치고는 조슈아는 잘생긴 얼굴을 구겨트리며 욕설을 내뱉었다. 그런 조슈아를 보며 막시민은 생각했다. ' 넌 원래 너랑 상관 없으면 어느 누가 죽어나가도 신경 안썼잖아. 이번에는 다른가보네.'
"...... 무섭구만."
"걱정마. 너 한테는 절대 무슨일 안생긴다. 내가 있잖아, 임마."
조슈아는 히죽히죽 웃으며 막시민을 향해 술잔을 들어올렸다. 그런 그를 보며 막시민은 무표정한 얼굴로 음울하게 대꾸했다.
"퍽이나 고맙소, 귀공자 나으리. 몸둘 바를 모르겠네."
너한테나 피해가 안갔으면 좋겠다고.
그게 막시민 본심이였다.
달빛은 휘양찬란하고. 구멍이 술술 뚤린 집에 스멀스멀 불어오는 바람은 차고 시원했다.
막시민 역시 몸을 일으켜 창가에 몸을 기댄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조슈아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조슈아는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지 막시민이 걸어오는 것 조차 깨닫지 못하는 것 같다. 독한 술김에 알싸하게 취했겠다, 좀 놀래켜 줄까나.
그때였다.
쿵!
"뭐...... 뭐야!"
검은 로브 같은 것을 걸친 사람이 현관문을 박차고 뛰어들어온 것은 순식간의 일이였다. 막시민은 걸어가다 말고 놀라서 휘청 거리는 바람에 바닥에 무릎을 찍으며 넘어졌고 조슈아는 차갑게 굳은 얼굴로 의자에 얹어둔 코트 안에 있는 스틱을 집어들었다.
조슈아가 스틱에서 칼을 꺼내려 했지만, 검은 로브의 사내의 섬광같은 레이피어가 조슈아의 동작보다 훨씬 빨랐다. 사내의 레이피어는 곧장 무릎을 감싸쥐고 끙끙 거리고 있는 막시민의 목덜미를 향해 겨눠졌다.
"뭐하는 녀석이냐."
조슈아는 검은 로브의 사내를 향해 칼을 겨누며 차가운 목소리로 낮게 내뱉었다. 그러자 검은 로브 안에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반역자 막시민 리프크네를 처단하러 왔다."
"하이고, 젠.장, 무릎이...... 조슈아. 얘 뭐라는 거냐."
"이 녀석에게 손끝 하나 댔다간 네 목 역시 성치 않을 것이다. 당장 칼을 거두거라!"
조슈아는 매섭게 사내를 향해 쏘아붙였다. 조슈아가 겨눈 칼 끝이 파르르 떨려왔다. 살기다. 그 것을 감지했는지 막시민의 목에 칼을 겨누고 있던 사내는 천천히 레이피어를 거두었다. 그리고는 이내 손을 들어올려 뒤집어쓴 검은 후드를 내렸다. 그 모습을 보고 막시민은 끙- 하는 신음 소리를 냈다.
"이스핀이냐?"
후드 안에서 나타난 얼굴은 오를란느의 공녀. 샤를로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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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민 조슈아 둘 다 예술가입니다ㅋㅋ 예술가들은 술을 사랑하고 조금 **적이긴 해도 상당히 매력적인 사람들이에요 우째 술 마시는 장면밖에 없네 19세 하도록 하죠 뭐...... 안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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