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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gos] - 3
찻잔에 들어있던 찻잎이 서서히 부서져갔다. 클로에는 똑바로 마주보던 시선을 거두어 동그랗게 말려 몽우리지는 찻잎을 바라보았다.
샤를로트는 잠시 생각이라도 하듯 한 손을 들어 턱밑을 쓰다듬었다. 물론 그녀의 행동은 클로에가 기대하던 반응은 아니였다.
"반역이라면 칼츠 상단도 위험하겠군요."
"......칼츠 상단은 막시민 리프크네의 연극을 후원하고 있죠."
"그렇다면 리프크네가 개인적인 정치적 성향을 연극에 드러냈다고만은 할 수 없어요. 칼츠 상단도 관련이 있는 듯 싶습니다."
꽤 머리가 좋은 여자였다. 클로에는 그녀가 정의감과 호승심, 의리에 휩싸여 조금은 발끈 하는 모습을 보일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의외로 그녀의 의도와는 다르게 샤를로트는 슬쩍 말을 돌려 후원하는 쪽으로 책임을 전가시키고 있었다.
오호라, 그래. 부쩍 유명세를 타게 된 리프크네라지만. 아무래도 평민에 불과한 그가 정치적 색을 자신의 무대에 선보이기엔 무리라는건가. 그렇다면 무언의 압력이 있을 수도 있는. 그의 연극을 후원하는 쪽으로 눈을 돌려 보자는 거군.
이 부분에 있어서 리프크네의 연극을 후원하고 있는 칼츠 상단은 꽤 쓸모있는 과녁이 됬다. 클로에의 의도와 다르게 화살이 다른 방향으로 나가자 그녀는 슬쩍 짜증이났다. 물론 표시는 내지 않았지만.
"아마 상단 측은 관련이 없을 듯 싶군요. 아노마라드 귀족가에도 상당한 후원을 아끼지 않는 편이라서......"
"상단을 비하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아노마라드에 후원을 아끼지 않는 상단이라 하더라도 근본은 역시 장사꾼입니다. 게다가 나라의 정세가 바뀌게 되면 가장 먼저 이득과 손해를 보는 것 역시 나라경제와 관련이 깊은 상단들 이겠죠. 민중의 벗도 이런 점을 간과하지만은 않았을 겁니다. 그들에게 계획이 있었다면 가장 먼저 매수할 가능성이 높아요. 만약 제 생각이 맞다면. 상단이 대의 명분을 위하여 그들의 손익을 포기했을지 아닐지는 알 수 없는 듯 싶습니다. 어찌되었든. 한가지 확실한건. 상단 역시 결코 정치에 무관심하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기대와는 다르게 무대가 점점 커지는군요."
"좀 더 알아봐야 할 문제인듯 싶습니다. 그러지 않길 바래야지요."
샤를로트는 자뭇 심각한 표정으로 무의식중에 허리춤에 매여진 자신의 칼자루를 만지작 거렸다. 클로에의 짐작이 맞다면. 아마도 샤를로트는 그녀 자신보다도 더 냉철하고 잔인한 면을 갖고 있을 수도 있겠다. 그 점은 클로에에게 상당히 도움이 될 수 있는 부분이였다. 그리고 위험하기도 했다.
찻잔의 모서리를 매만지며 클로에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런. 너무 늦기 전에 편지를 보내야 한다.
슬슬 정리 할 시간이군. 클로에는 얇은 입술을 오므리며 생각에 잠겨있는 샤를로트에게 말했다.
"대공 후계자께서 하신 말씀이 맞다면, 상단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일지 궁금하군요."
"결코 평범한 것만은 아닐것입니다. 위험한 자들과 어울린 다는 것은. 그들이 원하는 것도 위험한 것일 가능성이 큽니다."
샤를로트는 잠시 말을 끊더니, 한숨이 섞인 듯한 목소리로 뒷 말을 이었다.
"...... 물론 리프크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럼 그렇지.
아주 원하던 결과는 아니지만 어찌되었든 상황은 클로에에게 유리한 쪽으로 흘렀다. 멍청하고 쓸모없는 평민 나부랭이라도 안면이 있다면 위험한 상황에 내버려둘 수야 없겠지.
"잠시 리프크네에 대한 생각은 거둬주셨으면 합니다. 예전 부터 친분이 있던 자라 제가 책임을 갖고 좀 더 알아보겠습니다."
"내일 모레, 오를란느로 돌아가셔야 한다고 알고있었습니다만."
"잠시 일정을 미루도록 하지요."
샤를로트는 클로에에게 정중히 인사하며 말했다.
"시간이 늦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다음에 뵙도록 하지요."
"살펴가세요. 대공 후계자님. 상당히 즐거운 시간이였습니다."
짧은 머리를 매만진 뒤, 군모를 쓰며 나갈 채비를 하는 샤를로트를 보고 클로에는 희게 웃으며 인사했다. 재미도 있고 성과도 있는 시간이였다. 공국의 작위 후계자까지 움직인다면 재미 있을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막시민 너 이녀석......"
샤를로트는 떨리는 손을 애써 가다듬으며 폰티나 공녀의 방문을 조용히 닫았다. 정치적으로도 자신과 미묘한 관계인 폰티나의 앞에서 밑보이지 않고 채면을 차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어찌되었건 자신을 곤란한 처지에 내몰리게 만든 막시민에게 샤를로트는 분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으득 으득 이를 갈며 샤를로트는 빠르게 대공작의 집 복도를 걸어나갔다.
"말씀은 잘 나누셨습니까."
시종들과 후위무사 가르니에가 휘적휘적 걸어가는 샤를로트의 곁으로 황급히 뛰어왔다. 샤를로트는 정문으로 향하는 복도로 훽 몸을 틀며 가르니에에게 다그치듯 말했다.
"마차 물려요. 잠시 급하게 가볼때가 있으니 조용히 움직 일 수 있도록 준비 시키세요. 물론 나 혼자 갑니다."
"네? 공녀님과 무슨 얘기를 하셨길래......"
가르니에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묻자 샤를로트는 멈춰서서 가르니에를 바라보았다.
이내, 샤를로트의 표정을 읽은 가르니에는 흠칫 놀라며 대공작 저택의 정문을 향해 달려나갔고 샤를로트는 시종이 건네주는 두꺼운 검은 코트를 받아들고 뛰다 싶이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지나 정원쪽으로 향했다. 정원 쪽에 서서 코트를 걸치고 옷매무세를 다지던 샤를로트는 어느세 자신의 검은 흑마를 가지고 오는 가르니에를 보며 가죽장갑을 꼈다.
"마차는 시종을 시켜 물렸습니다. 정말 혼자 가실 겁니까?"
걱정스러운 가르니에의 말을 뒤로 하고 샤를로트는 훌쩍 말의 안장에 올라탔다. 그리고는 코트에 달린 검은 후드를 깊게 눌러 쓴 뒤, 빠른 속도로 말을 몰며 저택의 정원을 지나 정문을 향해 달려나갔다.
"루시안. 정말 이래도 되는 건가 싶은데."
"걱정하지마. 너와의 약속이기도 했고, 네가 그토록 궁금해하는 그 사람. 나도 한번 만나보고 싶었어."
루시안의 대답에 보리스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안 칼츠와 보리스 진네만은 의뢰를 끝낸뒤 섀도우 & 애쉬를 나서며 자신들의 말이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가을이라 해도 항구의 밤바람은 제법 차가웠다. 보리스는 심란한 표정을 감추기 위해 목을 덮은 망토자락을 올려 얼굴을 살짝 감췄다. 그런 그를 유심히 바라보던 루시안은 위로하듯 그의 어깨를 탁탁 치며 말했다.
"생각 같아선 액시피터에 의뢰하고 싶었지만. 이 쪽에도 유능한 사람들이 많으니 꽤 괜찮은 결과가 있을꺼야."
"......"
"그리고 말야. 네가 강조한것처럼 조심히 움직일 사람인 것도 같고. 어쨌든 마음에는 드는걸? 그렇지?"
"......그래."
오랫만에 돌아온 아노마라드는 크게 바뀐 건 없는 듯 보여도 보리스는 왠지 불안하게 흘러가는듯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흑의 검사를 찾아 산스루리아까지 당도했던 두 일행이였지만, 수소문으로 그를 찾아 해매여도 별로 건지는게 없던 와중에 우연히 그가 아노마라드에 있다는 정보를 듣고 결국 이 곳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워낙 불안정한 정세이니 만큼 둘이 움직여 그를 찾아 내기엔 상당한 위험부담이 있었다. 게다가 루시안은 칼츠 상단의 자제이기도 하고.
아노마라드로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은 루시안도 흑의 검사를 찾겠다는 보리스의 집념 앞에선 그 의견을 수그러 트렸다. 결국 다시 돌아온 루시안은 이제 아버지의 의견에 전적으로 따를 수 밖에 없다. 그런 루시안에게 보리스는 그저 미안할 따름이였다. 그럴 때 마다 괜찮다며 호쾌하게 웃어대는 루시안이였지만, 그의 꿈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아는 보리스로서는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그나저나 나르비크는 도대체 변한게 없는걸. 이게 몇 년 만이지? 한 2년 넘었을려나?"
"아마도."
"에이- 그냥 집에 돌어가긴 좀 그런데. 그렇다고 말을 타고 좀 걷자니 바람은 너무 차고. 주점이라도 좀 들리는게 어때, 보리스?"
보리스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루시안은 휘파람을 불며 '취한 흰수염고래'로 앞장서서 말을 몰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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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냐플 마리akfl2012.09.151편은 추천작품에 있어서 매일 본다는..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