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CC게시판
제목: 룬의 아이들 2권 덫을 뚫고서, 폭풍 속에
지은이: 전민희
펴낸이: 서인석
출판사: 제우미디어
출판년도: 초판 1쇄 인쇄 2001년 8월 30일
초판 2쇄 인쇄 2001년 9월 6일
저자소개: 전민희
1975년 서울에서 태어나 건국 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역사와 문학, 신화 등을 비롯하여 최근 철학의 신조류까지 섭렵한 지식광이며, 판
타지 동회에서 남미 환상문학에 이르는 다양한 판타지에 깊은 애정을 지니고 있
다.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연구원을 거쳐 1999년 출간한 장편 판타지 소설
"세월의 돌"은 통신 연재사상 전설적인 400만회의 조회수와 더불어 전국 판타지
독자들의 입문 필독서로 자리잡았다. 4대 통신망과 유명한 인터넷 커뮤니티들마
다 작가의 팬클럽이 빠짐없이 결성되어 있으며, 현재 (주)이삭커뮤니케이션에서
<모룬드 온라인>이라는 이름의 3D 온라인 게임으로 제작중이다. 또한 "세월의
돌"은 총 5부작으로 예정된 <아룬드 연대기 Arund Chronicles>의 3부로서, 1부
격인 "태양의 탑"이 이듬해 출간되었다.
(주)소프트맥스의 온라인 커뮤니티 서비스 <4Leaf>의 제작에 참여, 배경세계와
스토리, 캐릭터 설정을 담당하였으며, 곧 출시될 온라인 게임 <테일즈 위버>에서
도 동일한 설정을 사용하게 된다. 현재 100만 명에 육박하는 회원들이 이용하고
있는 <4Leaf>의 아바타 캐릭터들이 직접 등장하여 지금까지 감춰졌던 이야기들
을 펼치게 될 연작 소설 시리즈가 바로 "룬의 아이들"이며, 그 가운데 "룬의 아
이들-윈터러"는 첫 번째로 공개되는 매력적인 비밀이 될 것이다.
룬의 아이들-윈터러
겨울을 지새는 자여, 그것은 아주 길고 긴,
결코 끝나지 않는 겨울일지도 모른다.
서리와 눈보라를 이기고
바람과 눈물을 견뎌
마침내 찾아올 그 봄은
네 시체 위에 따뜻한 햇살이 되어 내릴 지도 모른다.
그러니 마음을 푸른 칼날처럼 세워
천년의 겨울을 견딜 수 있도록 대비하라.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
1장. Empathy
1. 달과 검, 그리고 사악한 밤
한동안 만져** 않았던 짧은 칼을 잡은 채 캄캄한 복도로 뛰어나올 때까지는 아무런 생각
도 없었다. 결코 잃어버릴 수 없는 것을 놓친 것에 대한 극도의 자기 혐오 때문에 정신을
주체하기가 힘들었다.
겨우 이것밖에 안 된단 말인가.
눈 깜짝할 사이에 바뀌어버린 삶에 적응하려고 안간힘을 쓰던 시절, 형을 자기 손으로 묻
고 떠나온 지 채 한 달도 흐르지 않았다. 곧 죽게 된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고도 말없이 견
뎌냈던 형이었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남은 생명을 모두 다해서 여린 동생을 조금이라도 지
켜 주려고, 자신이 떠난 뒤에도 혼자 살아나갈 수 있도록 가르치려고 얼마나 애썼던가.
실제로는 그 자신이 훨씬 힘들고 아팠을 텐데.
벌써 그런 것을 모조리 잊어버린 것처럼, 자신은 마음이 풀어져 지켜야 하는 것조차 잊고
이토록 방심했었다. 형이 무어라고 했는데, 형이 그에게 무어라고 가르쳤는데!
반쯤 넋을 놓고 복도를 뛰다시피 걷던 보리스는 갑자기 멈추어 섰다.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문득 정신이 돌아왔다. 그제야 당연한 추리가 떠올라왔다.
윈터러는 방 안의 침대 아래에 놓여 있었고 그 안에 드나들 수 있었던 것은 자신과 란지
에, 그리고 새로 나타난 월넛 선생밖에 없었다.
게다가 월넛 선생은 그 자리에 누워서 네 시간도 넘게 자고 있지 않았던가. 그러는 동안
자신과 란지에는 몇 번인가 그 방을 비웠을 것이다. 그때 그가 어떤 식으로인가 검을 꺼내
어 숨겼다면?
"......"
자신의 어리석음을 생각하니 식은땀이 저절로 흘렀다. 오늘 처음 만난 자를 어떻게 믿을
수 있다고 윈터러가 놓여 있는 방에 혼자 있도록 했단 말인가. 아니, 믿고 안 믿고의 문제도
없었지! 처음부터 별 생각이 없었으니까!
어찌됐든 그 자가 명검을 찾아내어 횡재한 셈치고 당장 내뺀 것이 아니라면 아직까지 뻔뻔
스럽게 자고 있을 그의 방으로 달려가는 것이 순서였다. 그런데 그 월넛 선생에게 주어진
방이 어디인지 모른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이미 자정을 넘긴 시각이었다. 그가 이런 밤중에 멋대로 깨워도 좋은 사람은 한 명밖에 없
었다. 그는 오던 복도를 되돌아갔다.
자기 방 바로 곁에 있는 작은 방의 문을 두드린 뒤 대꾸도 기다리지 않고 들어갔다.
"란지에, 잠깐 일어나 봐."
평소 같았으면 이미 깊이 잠들었을 상대방을 이런 식으로 대뜸 깨우는 일은 결코 하지 않
았을 보리스였다. 그가 자신외 시종이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지금의 그에게 그런 것
은 생각나지도 않았다. 오직 윈터러를 찾는 일만이 급했다.
잠깐 사이를 두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리스‥‥ 도련님?"
일어나는 기척이 들리고 곧 촛불 하나가 밝혀졌다. 약한 불빛이 마주선 두 소년을 비췄다.
란지에는 졸린 기색이라기보다는 피곤해서 해쓱해진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제야 미
안하다는 생각이 났다.
"이런 밤중에 깨워서 미안해. 하지만 중요한 일이 있어서."
"제 의무입니다. 말씀하십시오, 도련님."
잠결에 일어났음에도 조금의 불쾌한 모습도, 더듬거리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보리스는
그것이 의무에 대한 성실함 때문일 뿐 자신에 대해 개인적인 충성심을 갖는다던가 하는 것
과는 관계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월넛 선생이 자고 있는 방을 찾아 줘."
"알겠습니다. "
왜 찾는지 되묻지도 않았다. 란지에는 방 한쪽에서 손잡이가 달린 램프를 찾아내어 불을
붙이더니 앞장서 나가려다가 문득 보리스외 모습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다시 램프를 내려놓
았다.
"그런 모습으로는 밖에 못 나가십니다. "
그제야 보리스도 자신의 꼴을 내려다 볼 정신이 들었다. 잠옷 차림에 무심코 집어들고 나
온 것은 길이도 허리까지밖에 오자 않는 데다 소매까지 부풀려진 엉뚱한 겉옷이었다. 란지
에가 돌아서서 장롱을 열더니 큼직한 회색 망토를 하나 꺼냈다. 그러더니 보리스 앞으로 다
가와 재빨리 손수 몸에 둘러 주었다.
보리스는 란지에가 순간적으로 손을 주춤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보리스의 손에
쥐어진 검을 보았지만 못 본 것처럼 나지막이 말했다.
"가시지요."
한쪽 어깨에 붙은 핀을 채우고 나니 온 몸이 망토로 가져져 자객이나 되는 듯한 모양새가
되었다. 그런 모습으로 서둘러 란지에의 뒤를 따라 위층으로 올라갔다.
월넛 선생에게 주어진 방 앞에서 란지에는 정중하게 문을 두드렸다. 대답이 없자 그는 보
리스를 돌아보았다.
"그냥 문을 열까요?"
끄덕, 하자마자 란지에는 문고리를 돌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보리스가 문간에 서 있는 동안
램프를 들어 방 안을 이리저리 비추던 그는 침대 쪽으로 다가가더니 보리스를 돌아보았다.
"계시지 않는군요. 잠시 자리를 비우셨나 봅니다. "
그러나 보리스는 도저히 란지에처럼 생각할 수는 없었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사라진 윈터
러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방 안을 전부 밝혀 줘."
곳곳의 촛대에 불이 붙여졌다. 방은 확실히 텅 비어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한쪽에 그
자가 입고 왔던-그리고 호두도 담아왔던-로브가 그대로 걸려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란지에도 그제야 보리스의 기색이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챈 듯했다.
먼저 창문으로 다가가 열었던 흔적이 있는가 확인하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보리
스에게 말했다.
"뭔가 찾으십니까? 이 방 안에는 장롱과 침대 밑 정도를 제하면 물건을 숨길 만한 곳이 없
습니다. "
란지에의 말 대로였다. 보리스는 점차 가설이 현실화되는 것을 느끼며 현기증마저 느꼈다.
"성문 밖으로 나가려면 경비병을 거쳐야겠지?"
"밤이 되면 주인님의 허락 없이 성문을 열지 못합니다."
"그 밖의 통로는?"
"다른 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북쪽문은 열려 있겠지만 정원에서 외부로 나가는 입구 쪽에
역시 경비병이 있습니다. 정원을 산책하려는 목적이 아니라면 그 문으로 나가보았자 소용없
을 것입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백작에게 알리는 것?
계약으로 맺어진 관계에 불과한데 자신의 개인적인 물건을 찾기 위해 자고 있는 백작을 깨
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고려에 앞서서 그 자신이 원하지 않았다. 마음 깊이 편하다
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에게 신세를 진다는 것은 늘 머릿속에 오랫동안 불편하게 남곤 했었
다. 백작은 그런 부탁을 할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아직 날이 새려면 대여섯 시간은 넘게 남아 있었다. 보리스는 여전히 판단을 제대로 내리
지 못한 채 무의식적으로 말했다.
"어쨌든 그 문으로는 지금 나갈 수 있다는 거지?"
달이 하얗게 떠올라 있었다.
어둡다는 것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정원의 풀들을 푸르게 적시는 달빛이 환했다. 오히려
성 안의 복도 쪽이 더 캄캄했던 것 같았다.
란지에가 램프를 낮추어 들고 앞장서서 걸어갔다. 보리스는 란지에가 걸쳐 준 망토 안쪽으
로 검 손잡이를 꽉 쥐고 있었다.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을 때 어떻게 행동하면 좋을지 아직
결정하지 못했지만, 일단 결정을 하게 된다면 결코 망설일 생각은 없었다.
하나밖에 없는 유품이다, 형과 아버지의... . 그것조차 지켜내지 못한다면 진네만이라는 성
을 가질 자격조차 없는 거다.
그러나 이미 멀리 달아나 버렸다면?
"잠깐..... ."
란지에가 갑자기 몸을 수그리는 순간이었다. 보리스의 눈에도 뜻밖의 모습이 띄었다.
뭔가 흰 불빛 같은 것이 짧은 꼬리를 끌며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그것은 하나인 듯했지만
또한 하나가 아닌 듯했다. 달빛이 잠시 반딧불로 화하고 유성처럼 날아 떨어지는 듯, 무어라
표현하기 힘든 광경이 그들의 걸음을 묶어 버렸다.
그가 찾던 그 자가 거기에 있었다.
사라졌던 윈터러를 손에 들고.
"..... ."
보리스는 당황해 있었다. 한 번도 **도, 생각지도 못했던 사실이었다. 분명 잘 알고 있는
물건이라 생각했는데, 윈터러는 이 순간 이미 그가 알던 그 검이 아니었다. 저 정체 모를 자
의 손에 쥐어지자 그 것은 이 세상에서 존재할 수 없을 듯한 엄청난 빠르기, 그리고 감당하
기 힘든 살기를 내뿜는 악마의 검으로 돌변해 있었다.
예프넨의 손에 쥐어졌을 때도 저러한 모습을 본 일은 없었다. 그 자가 손을 뻗어 검을 움
직이는 것에 따라, 눈뜨고 보기 힘든 광채가 곳곳으로 흩날려 갔다... 아니, 춤을 추었다.
뺨이 오싹해지면서 가슴속까지 선뜩해졌다. 겨울의 검이라는 별칭은 누가 처음으로 붙인
것일까, 보리스의 조상일지도 모를 그 사람은 지금의 저 자처럼 신들린 듯 검을 춤추게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을까. 어제 만났을 때는 저 자에게 검을 가르칠 만한 능력이 있는지
조차도 의심하고 있었는데.
"하아..... ."
빛, 보이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잠시 잠깐 동작을 멈출 때를 제외하면 윈터러의 모습은 육
안으로 식별할 수조차 없었다. 무덤가의 귀신불처럼 칼날 전체가 넘실거렸다.
똑바로 내찔러지고, 다시 걷어들여져 호를 긋는 듯하더니 어느새 머리 위를 단단히 봉쇄했
다. 하늘 꼭대기에는 그날따라 광기를 부르는 것처럼 하얗게 타는 달이 있었다. 산 자와 죽
은 자를 동시에 미치게 할 수 있을 듯한, 무생물조차 빨아들여 삼킬 듯한 빛으로.
그것은 단순히 기분이었을지, 또는 깨달음이었을지, 보리스는 저 윈터러가 지금껏 자신에게
본 모습을 숨기고 있었던 것만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지금 느껴지는 것은 단순한 두려움이
아니었다. 저 자에게 덤벼들어 이길 수는 없겠다는 그런 감정과는 질이 달랐다. 그가 지금
도저히 입을 떼지 못한 채 되풀이해서 절실하게 느끼고 있는 감정은 저 겨울의 검은, 결코
선한 목적을 위해 만들어지지는 않았다는 사실.
"저것이... 도련님의 물건입니까?"
곁에서 란지에의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 보리스는 그 목소리에 자신과 비슷한 감정이 실려
있음을 알고 놀랐다. 란지에는 다시 앞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무언가, 악한 역사가 존재하는 검 같군요."
마지막 빛이 화살처럼 쏘아져 무지개를 그리더니 이윽고 끊어졌다. 월넛 선생은 이미 자세
를 바로 하고 검을 내린 채 서 있었다. 그렇게 보아서일까, 그는 하늘에 뜬 달을 바라보고
있는 듯 생각되었다. 한참 동안 그렇게 달을 주시하던 그는 갑자기 두 소년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구경거리는 끝났으니 그만 일어나라고."
낮과 마찬가지로 익살맞은 어조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다른 듯 느껴지는 것이 있
음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마치 살인을 저지르고서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닌 양 얼버무리려는
사람 같은 목소리였다.
두 소년은 일어났지만 그림자처럼 선 채 말이 없었다. 월넛은 그들에게로 걸어왔다. 비록
아래로 내려졌건만 윈터러의 살인적인 광채는 여전히 피를 원하는 괴물처럼 번쩍거렸다.
보리스는 이를 악물고 한 걸음 앞으로 나서 상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것은 제 검입니다. 잠시 구경하신 것으로 알겠으니 그만 돌려주십시오."
머리 너머로 달을 인 채 역광으로 어두운 얼굴을 한 월넛 선생은 보리스를 향해 가만히 눈
을 내리깔았다. 그 눈동자가 이상하리만큼 번뜩인다고 생각했다. 뜻밖의 대답이 울렸다.
"그리고 넌 그걸 잃어버렸지."
보리스는 망토 속의 검을 움켜쥐며 몸을 긴장시켰다. 그리고 힘주어 대꾸했다.
"남의 집 식탁 아래에서 숟가락을 주웠다고 말하실 셈인가요?"
"네게 되찾을 능력이 있느냐?"
보리스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번에는 턱을 쳐들며 상대를 똑바로 쏘아보았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시는군요. 저는 당신이 제 검술 스승으로 온 줄로 알고 있었습니
다만."
'아니라면 당신은 도둑이었다는 말이냐'는 뜻이 함축된 말이었다. 역광속의 얼굴이 문득 일
그러지더니 미소 비슷한 것을 보였다.
"어린 녀석이 대담하구나, 그러나 이건 너 같은 아이가 쥘 수 있는 검이 아니다."
"아이도 어른이 되죠."
구름에 가려지기 시작한 달빛이 마지막으로 칼날처럼 두 사람의 옆얼굴을 쓸고 지나갔다.
월넛의 목소리에 이제 웃음기 따위는 없었다.
"그 전에 검이 네 피를 먼저 원할 것이다. 내 진지하게 묻겠는데, 이런 검을 어떻게 손에
넣었느냐? 이것이 바로 오래 전에 자취를 감추었다던 겨울의 검이냐?"
이제와서 숨길 이유는 없었다. 보리스는 짧게 대답했다.
"윈터러를 말하는 거라면, 바로 그것입니다."
"허."
여전히 월넛은 윈터러를 칼집에 넣지 않은 채 여차하면 상대를 벨 수도 있다는 것처럼 그
대로 잡고 있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단지 학생을 놀리
는 선생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인가? 아니면 실제로 이 검에 대해 어떤 욕망 내지는 불안감을
가지고 넘겨주지 않으려고 마음먹은 것인가?
이어서 그는 약간 고개를 기울이며 보리스를 자세히 내려다보았다. 몇 가지 사실을 가지고
추리를 하고 있는 듯, 침묵하던 그의 입에서 드디어 말이 떨어졌다.
"네 성은 본래... 진네만이군. 트라바체스의 진네만, 윈터바텀 킷 (winterbottom Kit)을 이루
는 두 가지 물건을 모두 소유했던 집안. 그렇지 않은가?"
보리스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 사실이 당신에게 중요합니까? 당신의 제자가 될 소년은 보리스 벨노어일 뿐인데. 그
이상의 것을 당신이 알 필요는 없습니다."
이제 그는 결심한 듯 윈터러를 칼집 안으로 도로 집어넣었다. 그 동작은 보리스가 기억하
는 그 누구의 것보다도 유연하고 빨랐다.
"검은 돌려주지 않겠다."
보리스의 눈동자가 어두워졌다. 그는 짧게 답했다.
"돌려 받겠습니다. 절대로."
월넛 역시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이제는 잔인하게까지 들리는 목소리가 대꾸해 왔다.
"빼앗아 가라."
보리스는 한 걸음 물러서더니 자세를 약간 낮추었다. 그리고 망토를 젖히며 검 손잡이를
내보였다.
위협 따위가 통할 리 없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죽더라도 결코
다른 사람의 손에 윈터러를 빼앗길 수는 없었다. 두 눈을 번히 뜨고 있는 동안은 더더욱 그
럴 수 없었다.
그가 내보인 것은 검이 아닌 그의 의지였다.
"조용히 떠나고 싶으면 지금 절 죽이시죠."
검은 보랏빛 구름이 빠르게 소용돌이치며 흐르고 있었다. 이지러지고 뭉쳐지고 다시 서로
를 앞지르며 달려갔다. 달은 언뜻언뜻 그 얼굴을 보였다. 침묵하는 밤은 흡사 진실로 피를
바라는 듯 숨을 죽인 채 기다리고 있었다.
갑자기 월넛이 커다란 목소리로 웃어젖혔다.
"하, 하하하, 하하하하......"
웃음소리는 구름 뒤에 숨겨졌을 마른 벼락처럼 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북처럼
둔중하게, 끊임없이 울리고 있는 것은 미칠 듯 뛰어오르는 심장의 박동이었다.
월넛은 한참만에 웃음을 그치더니 갑자기 한쪽 무릎을 꿇으며 자세를 낮추어 보리스와 눈
높이를 맞추었다. 그리고 그를 똑바로 보았다.
"이것 참, 흔히 보기 힘든 녀석이 아닌가. 날 그런 눈으로 ** 마라. 난 네 물건을 가지고
도망치지 않는다. 어린아이를 베는 일도 없고. 설마 내가 네가 휘두르는 검을 피해 도망쳐야
한다는 것은 아니겠지? 좋다. 나와 내기를 해 보겠나?"
"......"
대꾸가 없는 보리스를 향해 월넛은 계속해서 말했다.
"난 너를 가르치기로 했으니 가르친다. 내가 신용 없는 자로 보인다 해도 그것은 내가 원
해서 자초한 일이기도 하니 어쩔 수 없는 결과겠지. 하지만 나는 내년 봄까지 너를 가르치
겠다고 백작과 이미 약속했다. 그러니 그 약속은 지킬 테다. 그러니 그때까지 네가 방금 네
입으로 말한 죽음의 기간을 늘려주마. 어떤가?"
"무슨 뜻입니까?"
보리스는 여전히 조금도 누그러진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때까지, 매일같이 내 손에서 검을 빼앗을 기회를 주마. 만일 네가 성공한다면 나는 살아
있는 한 다시는 이 검, 윈터러에 손대지 않겠다. 하지만 만일 내가 떠나는 날까지 네가 성공
하지 못한다면, 나는 너를 베고 떠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이 검을 내 것으로 하겠다. 내 말
이 이해가 가나?"
"....."
살기 위해 해야하는 선택을 느쪘다. 살아남기 위해 명예를 버릴 수도, 명예를 버리고 단지
생존하기만 할 수도 없다면, 택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불안한 줄타기뿐이라고.
그의 어깨에는 형의 생명이 짐처럼 지워져 있었다. 결코 쉽게 죽을 수는 없었다. 목숨도 검
도 함부로 버릴 수는 없었다.
그는 언제까지나 살아남을 것이니까. 영원을 사는 저 불멸자들처럼.
"약속을 무엇으로 증명합니까?"
월넛은 망설임 없이 품속으로 손을 넣더니 단도를 하나 꺼내어 보리스의 손에 넘겨주었다.
그것은 가드(guard) 없이 칼날과 손잡이가 일직선으로 이어진 폭이 넓은 단도였다. 특별한
장식이 없어 단순하게 보이지만 칼집에서 뽑아보니 칼날 표면에 초승달 모양의 구멍이 뚫린
것이 이색적이었다.
손잡이에는 문장이 한줄 새겨져 있었다. '재앙을 기억하라'.
월넛이 말했다.
"그것을 징표로 맡겨 두겠다. 그것은 내게 매우 중요한 물건이다. 만일 네가 성공한다면 그
때 그 단도를 내게 돌려다오. 만일 끝내 성공하지 못한다면 내가 직접 그것을 네게서 되찾
아가겠다."
보리스는 단도를 손에 든 채 계약을 받아들일 것인지 잠시 망설였다. 이것은 그의 생애에
이루어지는 두 번째 계약이었다.
뜻밖으로 바로 뒤에서 란지에의 목소리가 들렸다.
"받으십시오, 도련님."
그것은 단순한 말에 불과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마음을 놓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보
리스는 천천히 단도를 망토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상대방을 다시 정면으
로 주시했다. 그 눈을 통해 방금 들은 말이 얼마나 진실 된 것인지 느껴 보려는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그의 예지가 퍼뜩 눈을 떴다. 방금 뭔가 중대한 것
이 두 사람 사이에 오갔었다. 단도라든가 검이라고? 아니, 그것보다 뭔가 더 중요한 것이 있
었다.
그의 몸 전체로 약하지만 짜릿한 전율이 흐르고 지나갔다. 이것은 열쇠이자 문인가? 아직
캄캄한 암흑이나 다름없는 인생에 첫 번째 지표가 되어 줄 선명한 별빛인가?
계약은 성립되었다. 월넛은 다시 몸을 일으키더니 두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그럼 돌아가라. 내일부터 수업이 시작될 것이니까."
보리스는 돌아서기 전에 천천히 입술을 열어 말했다.
사답게 신의를 지키시기를."
"그래, 네 이름대로 너 역시 전사겠지. 알겠다."
보리스가 그 자리를 떠났을 때 란지에는 잠시 지체하며 월넛을 올려다보았다. 월넛은 또
무슨 일인가 하는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란지에가 입을 열었을 때 나온 말은 뜻밖이었다.
"그것이 언제가 되든, 떠나기 전에 도련님의 검을 돌려 드리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
월넛은 피식 웃으며 약간 비꼬는 어조로 말했다.
"보기보다 충성스러운 하인이라 그건가?"
그는 이미 란지에가 주인에게 충성을 바치며 그것을 생애의 보람으로 삼는 형태의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란지에는 표정을 바꾸지 않은 채 나지막이 말했다.
"제겐 이미 당신의 정체가 짐작되는군요. 일단은 교육의 연장선상에서 생각하겠지만, 도련
님을 지나치게 놀린다면 저도 달리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월넛은 과장된 표정으로 눈을 크게 떠 보였다. 그러더니 말했다.
"조그마한 녀석이 다짜고짜 협박이군. 하지만 네가 모르는 것이 하나 있는데 말이야."
"그게 무엇입니까?"
월넛은 어조를 낮추더니 다시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네 행동은 지금 네 주인의 능력을 믿지 않는다는 뜻이 돼."
그러나 란지에의 대답은 차가웠다.
"그런 것은 저와 아무런 상관도 없습니다. 인간은 모두 자신의 가치를 독자적으로 증명하
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것은 어린 소년의 입에서 나올 법한 말은 분명 아니었다. 월넛은 겉으로는 아무 것도 느
끼지 않은 양 가볍게 답했다.
"단지 의무만을 행한다 그건가? 그것만을 최대한으로? 좋아. 난 너와 계약을 하지 않지만
네가 어떻게 하는지 지켜볼 마음은 나는군. 너도 좋을 대로 나를 지켜봐라. 무슨 결과가 오
든지 말이지."
그러나 이어서 나온 란지에의 말은 더욱 놀라웠다.
"제 자유 의지에 속한 일을 허락하듯 말하지 마십시오. 그럼 이만."
소년은 돌아서더니 앞서 간 자기 주인의 뒤를 빠른 걸음으로 되짚어 따라갔다. 월넛은 그
자리에 선 채 약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자유 의지? 자유 의지라고?"
그 말은 어린 소년의 입뿐 아니라 이 대륙에 살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대다수가 평생 들어
**도 못했을 단어였다.
그러나 월넛은 그 단어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2. 대륙의 검사들
다음 날부터 보리스의 검술 수련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보리스가 선생이 오기를 며칠 동안 기다리며 상상했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연습장
은 성 뒤쪽에 마련된 원형의 공터였는데 첫날 월넛은 백작으로부터 받은 소년용 검을 보리
스에게 내주어 허리에 차게 했다. 그러나 그 검은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심지어 열
흘이 지나도 단 한 번 뽑아지는 일조차 일어나지 않았다.
첫날, 맨 처음 보리스가 명 받은 것은 단순한 달리기였다.
"급하게 할 건 없어. 적당한 속력으로 성 주위를 돌기만 하면 되는 거야. 멈출 시기는 내가
알려 줄 테니까."
실은 그 명령을 받았을 때부터 뭔가 심상치 않았다. 보리스가 성을 두 바퀴 돌 때까지 그
래도 월넛은 처음의 자리에서 자기 검을 뽑아 몸이라도 푸는 체 하고 있었다. 그러나 세 바
퀴 째 돌 무렵 그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잠시 자리를 비운 것이겠거니 하고 네 번째 바퀴를 돌았다. 벨노어 성의 규모는 잘 알려진
대로 벨크루즈 최대라고 이름날 정도라, 그때쯤이 되자 보리스도 온몸에서 땀을 흘리고 있
었다. 월넛은 또 자리에 없었다. 아마도 돌아왔다가 잠시 다른 곳으로 간 것이겠지.
그러나 다섯 바퀴, 여섯 바퀴, 그리고 일곱 바퀴 째를 돌 때도 그는 자취를 감춘 채 코빼기
도 내보이지 않았다. 몇 바퀴 더 추가되자 이제 이것은 단순히 선생의 나태함 정도가 아니
라 죽고 사는 문제가 될 정도로 절박해졌다. 그만 뛰라고 해야 할 선생이 도대체 돌아오지
를 않으니 멈출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 정도면 이제 그만 해도 되련만, 보리스는 이런 점에서 묘한 고지식함이 있어서 월넛이
돌아와 그만 하라고 할 때까지 계속하는 것으로 처음부터 마음을 정하고 있었다. 아마도 전
날 밤 그 손에서 빛나던 윈터러를 본 후부터일까. 월넛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단순하거나
우스운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와 생애 두 번째 계약을 했다. 내기란 공정해야만 하는 것이라 그가 결코
자신을 나태하게 가르칠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장난하는 것처럼 나타나지 않고 있어도 다
이유가 있어서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물론 월넛이 대단한 검술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실상 정신상태는 형편없는 자여서 단지 보
리스를 속이거나 놀리려고만 하고 있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보리스
는 그런 가능성을 마음속에서 죽여 버렸다. 그런 것으로 불안해 할 바에는 처음부터 내기고
계약이고 시작하지 않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시작한 이상, 쉽게 꺾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야 말겠다고 결심하고 있었다. 자신이 그 검에 어울리는 주인이라는 것을, 이기기
위해서 뭐든 상대로부터 흡수해 내고 말리라는 것을.
어쩌면 보리스가 심할 정도로 진지하고 심각한 성격을 지닌 탓이었을까.
그래도 그것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하나 있기는 했다. 바로 란지에였다.
그러나 그는 지시 받은 일 이외에 어떤 다른 일도 하지 않으면서 예의 차가운 눈으로 보리
스를 지켜보기만 할 따름이었다. 그만 하라고 말리지도, 물이라도 한 잔 권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월넛 선생을 찾으러 가지도 않았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점차 눈앞의 길이 아득해져 갔다. 보아오던 길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애
쓰면서 문득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이란 존재는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이렇게 애를
쓰는데 몸이란 건 형편없이 약해빠진 거구나. 겨우 한두 시간의 달리기만으로도 죽을 듯 괴
로워서 어쩔 줄을 모르고, 좀더 계속한다면 정말로 죽기도 하겠지.
아니면 의식이 끊기고 무의식으로 돌아서는 순간, 육체는 다시 살아남기 위해 모든 행동을
개시할 것이다. 바닥에 쓰러진다든가, 남이 권하는 휴식이나 물 따위를 조건 없이 받아들이
겠지.
끝까지... 살아 남기로 했는데.....
휘청,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듯하더니 어느새 입가에 찝찔한 뭔가가 흘러 들어왔다. 머리를
바닥에 부딪친 충격을 느끼기까지는 오히려 시간이 걸렸다. 침을 몇 번 애써 뱉으며 다시
정신을 차려 비척비척 일어났다. 그러다가 다시 무릎을 꿇었다. 이미 몇 바퀴 째인지는 기억
나지도 않았다.
그러나 월넛 선생은 뛰라고 했지 기라고 하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끝까지 뛰어서... 자신이
살아남기에 적합한 자라는 것을... 증명하고야 말 테다.....
쿵!
그렇지만 주위가 이렇게 어두워서는..... .
다시 눈을 떴을 때 자신은 연습장으로 쓰이는 원형의 공터에 팔다리를 펼친 채 대자로 누
워 있었다. 눈뜨는 순간, 가을 햇빛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작렬하는 태양 빛이 곧바
로 각막을 뚫고 들어왔다. 오히려 그것이 다행이었다. 반사적으로 눈을 다시 감는 순간, 머
리 위에 찬물이 한통 뒤집어 씌워졌다.
오히려 시원하고 좋았다고 해야 할까, 보리스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탄력으로 그 자리에
서 곧장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눈앞에 란지에가 있는 것을 보았다.
란지에는 무표정한 얼굴로 바닥에 물통을 내려놓고는 보리스를 향해 마른 수건을 내밀었
다. 그것을 받아 얼굴을 닦는데 란지에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선생님께선 아직 오시지 않는군요. 제 임의로 한 행동을 용서해 주십시오."
마치 용서하기 싫으면 어디 좋을 대로 해 봐라, 라는 듯한 말투에도 보리스는 화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행동을 해 준 란지에가 친구라도 되는 것처럼 친근하게 느껴졌다.
몇 시간동안 고생을 해서 머리가 단순해진 탓이었을까.
"알았어. 고마워."
물이 옷 전체로 줄줄 흘러서 그는 허리에서 검을 풀어놓았다. 아무래도 물에 젖으면 그리
좋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리고 다시 아무 말 없이 본래의 코스로 돌아
가 뛰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바퀴 정도 다시 뛰었을 즈음인가, 월넛 선생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도
로즈니스를 곁에 데리고서.
사냥복 차림의 로즈니스는 손에 얇고 가벼워 보이는 연습용 검을 하나 들고 있었는데 보리
스와는 달리 이 모든 과정이 매우 신나고 흥미로웠던 모양이었다. 얼굴이 발그레하게 상기
되어서는 월넛 선생에게 끊임없이 종알종알 말을 걸고 있었다.
그녀가 든 검은 옷깃조차 베기 힘들 정도로 무딘 날에 장식만 화려한 물건이었다. 그것을
가지고 계속해서 허리에 꽂았다가 다시 뽑아 겨누는 동작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녀의 질
문을 어느 정도 받아주고 있던 월넛 선생은 이윽고 저만치에서 달려오고 있는 보리스를 보
았다.
그리고 안색이 변했다.
"멈춰!"
서서히 느리게 뛰면서 드디어 월넛 선생 앞에 가 멈출 때까지만 해도 보리스는 이 선생이
깜빡 잊어서 미안하다는 식으로 변명하면서 '그런다고 진짜 계속 뛰고 있다니 너도 참 대단
한 고집이구나' 정도의 말을 해주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떨어진 것은 뜻밖의 불호령이었다.
"왜 검을 풀어놓았느냐!"
보리스와 란지에 모두 월넛이 화내는 모습을 처음으로 보았다. 로즈니스조차 움찔 놀라서
하려던 말을 삼켜버렸다. 보리스는 잠시 멍해져서 상황이 어떻게 되었다고 설명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입만 벌리고 있었다.
"네가 지금 달리기 연습이라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내가 네게 가르치는 것은 검이
다! 무겁다고 검을 풀어놓는 정신으로 무슨 검술을 배우겠다는 거냐! 이런 한심한!"
물론 무거워서 검을 풀어놓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보리스는 이 순간 대꾸도 변명도 필
요 없다는 것을 직감하고는 당장 풀어놓았던 검을 집어든 채 선생 앞에 무릎을 꿇었다. 지
금까지 자기가 아버지가 아닌 그 누구 앞에서도 무릎 꿇은 일이 없다는 사실조차 잊었다.
월넛의 말을 듣는 순간, 그는 자신이 명백히 잘못했다는 것을 깨달았고 거기에 변명의 여지
따위는 없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그에 이어지는 말은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따위가 아니었다.
"벌을 주십시오."
월넛도 기다렸다는 것처럼 냉큼 대꾸해 왔다.
"그래, 벌을 주마."
로즈니스는 놀란 나머지 몇 걸음 물러서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저만치 캐미아가
선 것이 보이자 얼른 이리로 오라고 정신 없이 손짓했다. 자신 또한 이 월넛 선생의 제자가
되기로 한 까닭에 자신의 처지도 보리스와 다를 것 없다는 사실을 갑자기 깨달았던 것이다.
월넛 선생은 란지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늘 보리스가 벨노어 성을 몇 바퀴 돌았느냐?"
"열 다섯 바퀴입니다."
월넛은 다시 보리스를 내려다보며 딱잘라 말했다.
"앞으로 매일, 똑같은 일을 아침마다 해라. 내가 이 성을 떠나는 날까지."
로즈니스를 비롯해서 방금 달려온 캐미아의 얼굴까지 파래졌다. 이 성을 하루에 열 몇 바
퀴씩 돌라고?
그러나 보리스는 어려서부터 강한 개인임과 동시에 정치적 인간이 되도록 가르치는 트라바
체스에서, 응석을 받아주는 일 따위는 기대할 수도 없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커온 소년이었
다. 그는 짧게 답했다.
"감사합니다."
사실 로즈니스는 이 선생을 새삼 겁낼 필요가 전혀 없었다. 보리스와 이야기를 끝낸 월넛
은 고개를 돌려 두 꼬마 아가씨를 보더니 다시 실실 웃는 표정으로 돌변했다. 그리고 다시
장난감 놀이 같은 검술 지도를 위해 연습장 한쪽으로 걸어가 버렸다.
보리스가 몸을 돌리자 란지에가 어느 새 그가 마실 물 한잔을 받쳐 들고 서 있는 것이 보
였다. 여전히 복종하지 않는 이 시종의 손에서 물을 받아 마시면서 보리스는 그가 질기게
버터야 하는 이 싸움의 동지라도 되는 양 느껴졌다.
그러나 로즈니스와 캐미아가 검을 갖고 어울려 놀도록 해 버린 뒤 멀찍이 물러나 선 월넛
은 잠시 후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허, 참... 내가 도대체 왜 쓸데없이 저 녀석한테 화를 낸 거지. 정신이 잠시 어떻게 됐었
나."
그 일이 있은 후로 보리스는 다시는 검을 허리에서 풀어놓지 않게 됐다. 연습을 끝내고 쉴
때는 물론이고 식사를 하거나 백작 내외를 만날 때도 마찬가지였다. 잠잘 때에도 언제든지
뽑을 수 있도록 바로 머리맡에 놓아두고 잤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보리스는 검을 몸에서 떼어놓지 않는다는 행동의 의미에 대해 스스로 정
확히 깨닫게 됐다. 이곳은 평화로운 고장의 아름다운 성, 하인들은 모두 그를 섬기고 백작
내외는 겉으로 그를 아들처럼 대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모두 허상에 불과한 것이었다. 너무
도 당연한 일인데, 자꾸만 잊었던 것이다. 그러나 검을 항상 몸 곁에 둠으로써 그것은 이제
잊으려 해도 잊혀지지 않는 분명한 사실이 되어갔다.
자신은 적진 한가운데 내던져져 있는 것과 조금도 다를 것 없는 상태였다. 스스로가 아직
약해빠진 나머지 이 이상 경계한다 해도 일어날 일을 막을 능력이 없기 때문이지, 사실을
말하자면 밤낮으로 눈을 뜨고 있어도 모자란 상황이었다.
살겠다고 발버둥치고 있지만, 언제 누가 다가와 목을 베어버린다 해도 지금의 그에게 막을
방법이 있는가.
그러나 그 검이 뽑혀지는 일은 도무지 없었다. 연습장에서조차, 월넛 선생은 로즈니스와 캐
미아를 붙들고 시답잖은 놀이를 계속할 뿐, 보리스에게는 아무런 체계적인 지식도 주지 않
았다.
명령한 대로 매일같이 달리기를 하는 생활만이 한 달도 넘게 계속되었다. 달리기가 끝나고
나서도 시간과 기력이 남게 되자 마지못해 시킨 것이 검을 머리 위로 똑바로 올렸다가 아래
로 내려 겨누고, 다시 올리고 하는 일의 반복이었다. 마치 일부러 지루한 것만 골라 시켜서
지쳐 나가떨어지기를 바라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지루한 일을 반복하는 보리스를 유일하게 지켜보아주는 것은 항상 곁에 있는 란지
에뿐이었다. 어떤 평가도 조언도 격려도 하지 않았지만, 그 지켜보아 주는 눈이 있다는 것만
으로도 보리스는 묘하게 힘을 얻었다. 그조차도 없었다면 정말 지쳐버렸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말을 란지에에게 하지는 않았다.
"아가씨, 오늘은 아무래도 비가 내릴 것 같아요."
주방 아주머니에게 갔다가 이야기를 얻어듣고 온 캐미아가 자기도 뭔가 볼 줄 안다는 듯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 즈음이 되자 캐미아가 아니라 그 누가 보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하늘은 어슴푸레한 비구름을 품고 있었다.
"정말 그러네?"
로즈니스의 목소리는 일부러 월넛 선생더러 들으라는 것처럼 살짝 높아져 있었다. 예상대
로 선생이 곧장 대꾸해 왔다.
"그럼 오늘은 연습 그만두고 들어가서 이야기나 할까?"
"네!"
"재미있는 이야기예요, 선생님?"
누가 보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월넛은 보리스와 로즈니스를 드러내 놓고 차별했다. 로즈
니스가 뭔가 하자고 하면 뭐든 선선하게 들어주었지만 보리스의 경우는 전혀 그렇지 않았
다. 보리스가 본래 요구하는 것이 거의 없는 소년이기도 했지만, 월넛은 심지어 그와 대화하
는 것조차 피하는 것 같았다.
로즈니스까지도 이미 눈치를 채고 있을 정도였다. 본래부터 남들과 달리 특별 대우를 받는
데 익숙해져 있는 그녀였지만 그래도 보리스의 경우는 약간 달랐다. 일단 한 가지만 생각해
도 그랬다. 보리스가 그 뭐라는 소년을 이기지 못하면 바로 자신한테 재앙이 닥치지 않겠
는가! 백치한테 시집을 가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로즈니스는 여전히 검을 올렸다 내리는 연습을 하고 있는 보리스 쪽을 흘끗 보더니 말했
다.
"여기 있으면 비 맞을 텐데, 오늘은 오빠도 같이 들어가서 얘기 듣게 해요, 네?"
"그럴까?"
예상 대로였다. 로즈니스가 말하자 보리스와 란지에도 함께 성 안의 거실로 들어가게 되었
다.
그들이 들어가고 얼마 되지 않아 곧 비가 내렸다. 유리창 밖으로 푸른 직선의 비가 끊임없
이 그어지는 것을 보리스는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었다.
"이 대륙에는 많은 나라들이 있고, 또 많은 검사들이 있지. 오늘은 그들에 대한 얘기나 해
줄까."
드디어 월넛 선생이 입을 뗐다. 그러더니 사이를 두고 과자를 세 개나 집어서 한 입에 쑤
셔 넣었다. 그리고 목이 막히자 따뜻한 차를 물처럼 꿀꺽꿀꺽 마셔서 다 녹여버렸다.
"아, 거 맛 좋다. 갑자기 배가 더 고파지는데. 본래 뭔가 한참 먹고 있을 때 더 배가 고픈
법이란 말이야. 넌 그런 거 느껴 봤냐? 한참 배고프다가 드디어 음식을 잔뜩 쌓아놓고 먹어
대는데, 어차피 자기가 다 먹게 된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한시라도, 더 빨리 먹고 싶어서
초조해지고 안절부절못하게 되는 기분 말이다. 느껴 봤어?"
보리스는 어리둥절해져서 월넛을 올려다보았다. 검사 이야기를 한다고 하다가 이야기가 엉
뚱한 데로 샜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지독하게 배고프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는 보
리스였지만 아직껏 그런 감정은 경험한 일이 없었다. 이미 먹고 있는데도 더 먹고 싶고, 이
미 자기 것인데도 그걸 어서 씹어 삼키지 못해 안달하게 된다고?
실제로 배를 곯아본 일이 없는 로즈니스는 아예 황당한 듯한 표정이었다. 귀족인 그녀가
음식에 대해 저런 식으로 집착하는 것을 점잖게 느낄 리가 없었다.
그러나 월넛은 두 사람의 표정에도 개의치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식욕이란 것도 실은 대단히 강력한 욕망인데 말야, 거기에 사로잡혀서 도저히 그걸 억누
를 수가 없고 충분히 만족스러운데도 자꾸만 더 탐닉하게 될 때가 있다. 게다가 인간이 한
번에 먹을 수 있는 양에는 한도가 있기 때문에 그건 더 불안정한 욕망이지. '먹고 싶다!'라
는 것은 틀림없는데 조만간 더 먹지 못하게 될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란 말이야. 그러면 어
떻게 되느냐, 지금 먹고 있는 그것을 가능한 한 더 좋은 걸로 하려고 신경을 쓰게 돼. 한시
바삐 뱃속에 먹을 것을 쓸어 넣고 싶은 것과는 별개로 그 중에서도 최고의 맛, 최고의 조합
으로 배를 채우고 싶어서 골몰하게 되지. 평소 같으면 그냥 먹었을 맛없는 부분에는 손도
대지 않고 오직 가장 나은 부분만 골라서 먹는 거야. 문제는 이렇게 식사를 끝내고 나면 쓰
레기가 많아져. 먹다 남긴 것 투성이가 되거든."
보리스는 문득 이 이야기가 단순히 식욕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실은
그건 모든 욕망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가지고 또 가져도 더 갖고 싶고, 올라가고 또 올
라가도 더 올라가고 싶어진다고 했다. 그러나 식욕에는 분명 어느 순간 분명 한계가 오는
것이 틀림없는데 다른 욕망들은? 그런 욕망들은 언제 한계가 그어져 끊기는 것일까?
갑자기 월넛이 로즈니스를 보며 물었다.
"로즈니스, 네가 가장 원하는 것은 무어냐? 이렇게만 된다면 소원이 없겠다, 싶을 정도로
원하는 게 있냐?"
"네?"
평소 갖고 싶은 것을 참은 적이 없는 그녀인지라 그런 질문이 낯설었던 듯했다. 아버지가
'뭐가 갖고 싶으냐, 로즈?'하고 물을 때는 그 것을 주기 위해서 묻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은 아니었다. '아마 가질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소원이 있다면 그게 뭘까?' 라는 식의 생각
은 그녀에게 전혀 익숙한 것이 아니었다.
"전 다 갖고 있어요. 또 뭔가 갖고 싶으면 아버지가 다 해주시니까 걱정할 필요도 없고요."
"아닐 텐데. 아버지가 들어 줄 수 없는 '그 소원'이 있지 않으냐."
"그게 뭔데요?"
월넛은 고개를 젖혔다가 묶은 머리채를 쓰다듬으며 대꾸했다.
"하하... 아니, 아버지가 좀 도와줄 수는 있겠군. 너, 켈티카의 궁정에서 데뷔하게 될 때 가
장 아름다운 처녀로 주목받고 싶다고 바라고 있지 않으냐? 그래서 수많은 귀족 청년들의 프
로포즈를 받으며 누구를 택해야 할 지 고민하게 되고 말이지, 안그래?"
"네... 네에?"
로즈니스는 어찌 보면 그런 생각은 꿈에서도 해본 일 없다는 듯한 얼굴로, 또 달리 보면
완전히 정곡을 찔린 듯한 표정으로 입을 벌리고 있었다. 월넛은 이제 보리스를 돌아보았다.
"넌 어떠냐? 내가 말하기 전에 먼저 네 소원을 말해 볼 테냐?"
그 즈음 보리스는 이미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언지 확실히 결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별로
숨길 필요도 없는 것이라 분명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누구의 은혜도 입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자립할 능력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월넛은 대뜸 말했다.
"로즈니스의 소원보다는 이루어지기 쉽군. 적어도 경쟁자는 없을 테니까 말이야."
"경쟁자라고요?"
다짜고짜 그렇게 묻는 로즈니스는 방금 전에 소원 같은 건 없다고 말하던 것은 그새 잊어
버린 듯한 얼굴이었다. 월넛은 대수롭잖은 어조로 대꾸했다.
"아, 너한텐 경쟁자가 있어. 딱 네 나이 또래인데, 벌써부터 켈티카 사교계에서 아노마라드
최고의 신부감으로 자랄 거라고 소문이 자자 한 아이가 있거든. 그 애를 제치지 못하면 네
꿈은 물거품이 되겠지."
"게 누군데요!"
정말로 화난 것 같은 목소리였다. 보리스는 로즈니스가 아무래도 오늘 안에 기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티나 공작의 딸, 클로에 다 폰티나라는 애지. 직접 봤지만 정말로 미인이 되겠다 싶은 얼
굴이었다고."
"도 안 되잖아! 거짓말이야!"
월넛 선생은 로즈니스를 놀리고 있었지만 로즈니스에게 이것은 작은 문제가 아니었다. 처
음 왔을 때 호두열매 때문에 한 차례 속았다고 팔짝팔짝 뛰었던 적이 있는데도 월넛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그녀를 보며 보리스는 어이가 없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보리스는 솔직히
월넛이 말한 저 클로에라는 소녀가 실제 인물인지도 확신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 그만 하시고 하시던 이야기나 마저 해주시죠."
보리스는 월넛이 가끔 하는 장난을 달갑게만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았다. 그의 입장에서 저
자는 아직 속을 알 수 없는 경계 대상이었다.
뽀로통해져서 더 말도 하지 않게 된 로즈니스를 쳐다보며 한 차례 키득거린 월넛은 남은
과자를 우걱우걱 다 먹어버리고는 과자 가루를 곳곳에 흘리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아노마라드 최고라고 하는 기사가 누군지 아느냐?"
외국에서 온 지 얼마 되지도 않는 보리스였다. 당연히 모른다고 고개를 저었다.
"견문이 좁은 녀석이군. 강피르 자작이다. 기사답게 창을 잘 쓰고, 또 말을 다루는 솜씨에
있어서도 대적할 자가 없지. 벌써 마흔이 가까운 나이인데도 아노마라드 안에선 아직 그에
버금가는 기사가 없다고들 그런다. 현재 체첼 국왕 폐하의 근위 대장이고 폐하의 총애도 아
주 두텁지. 먼발치에서 봤는데 콧수염을 두 갈래로 날렵하게 기른 것이 무지 점잖아 보이는
자였단 말이야. 과연 평판 만큼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특히 부인네들한테 예의바르고 정도
에서 어긋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는 자라고 소문이 들었어."
그 정도 설명만으로도 대강 어떤 사람인지 짐작이 갔다. 월넛은 계속 말을 잇고 있었다.
"아노마라드 북쪽에 있는 오를란느(Orlanne)는 영토가 아주 좁지도 않은데도 공국을 자처
하며 아노마라드의 국왕 폐하를 죽 주군으로 모시고 있는 나라지. 그 방식의 편리한 점을
일찍이 깨달아버린 자인 것 같아. 그 오를란느의 공작이란 자 말이야."
또 옆길로 새는 건가 싶었지만 다행히도 그렇지는 않았다.
"그 오를란느 공작의 아들이 바로 그곳 최고의 검사라지. 이제 열여덟쯤 되었다고 했던가?
나이답지 않게 겸손한 자라서 그걸로도 상당한 명성을 얻었지. 몇 년 전 하이아칸(Haiacan)
의 항구 도시 엠그란드에서 열렸던 '실버스컬(Silver Skull)' 에서 우승을 하고도 그 영예를
주최국인 하이아칸의 소녀 여왕에게 돌린 일은 아주 유명하지. 그녀가 떨쳐 일어나 출전했
더라면 자신에게 이런 영광이 오지는 못했을 거라고 했던가? 덕택에 젊은 공자가 하이아칸
여왕에게 청혼하려 한다는 소문이 한동안 사람들의 입과 귀를 즐겁게 해 주기도 했고 말이
야."
"실버... 스컬이 뭐죠?"
보리스는 정말로 이런 일들에 대해서는 금시초문이었다. 앞서 말한 소문 역시 듣도보도 못
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월넛 역시 똑같이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실버스컬을 몰라? 열 다섯 살부터, 스무 살 생일을 넘기지 않은 대륙의 모든 소년 소녀들
이 루그란(Rugran) 국왕이 내리는 순은의 해골을 놓고 한 해에 한 번 무예를 겨루는 대회
라고! 본래는 루그란 전통의 풍습에서 시작했지만 이제는 전 대륙적인 제전이 된 경기지.
설마 트라바체스 사람들은 실버스컬에 출전하지 않는 건가? 하긴 아직껏 트라바체스 출신이
우승했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 본 일이 없긴 하지만 말이야."
보리스는 정말로 트라바체스 사람들이 실버스컬 대회에 출전하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몰
랐다. 그러나 형 예프넨을 떠올리지 않을 수 는 없었다. 형은 훌륭한 검술을 지니고 있었지
만 한 번도 그런 대회에 대해서 언급한 일이 없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트라바체스에서 그런
대회에 출전하는 것은 그리 일반적인 일은 아니었음이 분명했다.
"어쨌든 그건 그렇고... 그럼 그 옆의 렘므(Lemme) 왕국으로 가볼까. 거기엔 진짜 무시무시
한 자가 두 명 있는데, 하나는 렘므 국왕의 여동생인 지나파 공주고, 또 한 명은 바로 님
(Nym) 반도 끝과 엘베(Elbe) 섬 등지에서 지금도 흩어져 살고 있는 야만족 캄자크의 한 전
사다. "
빗발이 점차 강해지고 있었다. 클로에라는 정체 모를 소녀의 일에 골몰하고 있던 로즈니스
도 슬슬 다시 월넛의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하는 중이었다.
"어때, 공주와 야만족이라니 꽤나 이질적이지? 그게 렘므의 방식이야. 가장 강력한 캄자크
를 비롯해서 대략 네 부족의 야만족들이 북방영토 내에서 활개치며 살아가고 있는데 국왕은
어느 정도 그것을 수수방관하지. 특별히 저들의 영역을 침범하지만 않으면 야만족들은 저
절로 렘므의 국경을 지켜 주거든? 물론 야만족들도 머리는 있는지라 강대한 군대를 가진 렘
므 왕국에게 정면으로 덤볐다가는 승산이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고. 하여간에 이 별난 공
생관계 덕택에 북 렘므, 즉 님 반도 끝과 그 근처 섬들은 호위 용병을 고용하지 않고는 감
히 돌아다닐 수 없는 곳이야. 야만족들은 렘므 사람을 잡으면 몸값을 흥정하지만, 그 외 다
른 나라 사람을 잡으면......"
월넛은 갑자기 로즈니스를 빤히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머리털이 붙은 채로 가죽을 벗겨서 썰매 장식을 만들지."
"엄마야!"
화들짝 놀란 로즈니스가 저도 모르게 보리스의 팔을 움켜잡았다가 다시 급히 놓았다. 그러
고도 안심이 안 되는지 두리번거리다가 옆에서 있는 캐미아를 붙들어다 손을 꽉 쥐고는 한
숨을 휴 내쉬었다.
월넛은 그저 씩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다지 만족한 웃음 같지도 않았다.
"지나파 공주는 렘므 왕가의 전통적인 혈통대로 타고난 무골이라 키도 크고 체격도 대단한
여**. 한때 야만족들이 렘므 왕국의 통치에 반발해서 전쟁을 일으켰을 때 지나파 공주가
선봉에 섰는데 그때 수많은 야만족들의 **을 빠갠 걸로 유명해진 것이 바로 그녀의 플레
일(flail) '새비지이터(Savage Eater)'야. 무기의 이름만 봐도 알 수 있다시피 그녀는 반항하
는 야만인들을 아주 싫어하거든? 그런데 그런 그녀한테 끝끝내 굴복하지 않는 야만인이 또
있으니 그 자가 캄자크 족의 시고누라는 자란 말이야. '꺾이지 않는 시고누', 들리는 바로 그
자는 무기도 필요 없고 아예 맨손에 맨몸 자체가 그대로 무기인 자라는데, 직접 본 일은 없
지만 기가 막힌 주먹질과 발차기를 구사한다고 하더군. 둘은 4차 엘베 전투에서 직접 마주
칠 기회가 있었는데 결판은 내지 못했어. 그래서 아직도 누가 최고인지 가리지 못한 거지.
둘은 직접적인 원한은 없다 해도 서로 결코 화해할 수는 없을걸."
"야만인이 공주를 이기지 못해서 다행이에요."
호르르 한숨을 쉬며 로즈니스가 말했다. 그녀는 지나파 공주에 대해 전혀 몰랐지만 야만족
이 공주의 머리가죽을 벗길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새삼 오싹해지는 모양이었다.
"마지막으로 루그두넨스 연방이다. 뭐 말할 것도 없이 레코르다블 출신일 거란 사실은 뻔
한 거고...... 바로 용병대장 두르가나라는 잔데, 그 자가 이끄는 용병단 '청동 번개'는 천여
명도 넘는 대규모 용병단으로 웬만한 왕들의 직속 부대보다 더한 규모와 전투력을 자랑하는
조직이란 말야. 레코르다블은 강한 세력을 가진 용병단들이 정권조차 좌지우지하는 곳인데
그 중에서도 '청동 번개'는 첫째, 아니면 둘째로 꼽히는 강력한 집단이다. 청동 번개의 중요
한 인물들은 다들 한 번 이상 두르가나에게 도전해서 굴복당하고 충성을 맹세한 자들이라는
이야기는 유명하지. 두르가나는 잔인하면서도 또 대단히 영리한 자라, 한 번 적대 관계가 되
었던 자는 언제라도 찾아내어 반드시 죽여버린다고 그래. 다만 그 자도 이제 나이가 들어서
웬만한 전투에서는 직접 선봉에 서는 일이 없어졌어. 그러니 실력은 좀 녹슬었을 수도 있겠
군."
이야기가 맺어지는 분위기인데도 트라바체스 이야기는 끝내 나오지 않았다. 모국에 대한
어설픈 애국심 같은 것은 보리스에게도 없었고, 다만 평소 항쟁으로 밤낮을 보내는 그곳에
서 이름난 전사 한 명 탄생하지 않았다는 것이 좀 이상하게 느껴졌다. 아니, 솔직하게는 한
심하다는 생각이었다.
"네 나라 얘기가 안 나와서 좀 섭섭하지?"
흡사 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한 마디 하더니 월넛은 벌렁 의자 등받이로 몸을 누이고 두 학
생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씨익 웃었다. 보리스는 그가 왜 웃는지
몰랐다.
"그것 참, 이상한 녀석들이란 말이야. 너희는 대륙에서 강하다는 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무슨 생각이 나냐? 응? 로즈니스부터 말해 봐."
로즈니스는 뭔 소린가 하는 표정으로 눈을 아래로 굴리다가 어깨를 움츠리며 말했다.
"우리나라의 용사가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강하면 좋겠구나, 뭐 그런 정도요?"
월넛은 단지 피식 웃기만 하더니 이번엔 보리스를 보았다.
"넌?"
보리스는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그들은 그들이고 저는 저고, 별 생각 없습니다. 적으로 마주치지 않으면 그만이지요."
월넛은 약간 진지한 표정을 했다.
"바로 그게 문제야. 그들보다 강해지고 싶다거나, 그들의 실력을 자신의 것으로 하고 싶다
거나, 그런 생각이 안 든단 말이지? 검을 배우기로 마음먹었으면서 최고가 되고 싶다는 생
각이 없단 말이냐?"
보리스는 월넛의 말을 들었지만 여전히 별다른 생각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저도 모르게 이
런 말이 나왔다.
"그렇게 많이 강해져서 무엇합니까? 제가 그들과 만날 가능성은 몹시 희박할 테고, 만나더
라도 적이 될 가능성은 더더욱 적겠죠. 전 그냥 큰 위험 없이 살아갈 정도면 족합니다. 오히
려 어줍잖은 실력으로 그들의 관심을 끄는 것이 더 죽기 쉽지 않을까요?"
"허, 허허, 허허허허......"
월넛은 이제 완연히 당황한 얼굴로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더니 보리스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빤히 쳐다보았다. 마치 얼굴에서 뭔가 특별한 것을 찾아내려는 사람처럼 그렇게 구석구
석 살펴보다가 말했다.
"넌, 네 목표는 단지 살아남는 것, 그것 하나뿐이냐?"
아주 쉽게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예."
"똑같이 살아남더라도 더 훌륭하게, 더 만족스럽게 살아남고 싶다는 마음은 없는 거냐?"
그것은 어조보다 훨씬 진지한 질문이었다. 보리스는 월넛이 그로부터 뭔가 구체적인 것을
끌어내고 싶어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떤 강한 것, 단단한 것, 씨앗 속의 핵과 같은
것을.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제게 그런 것이 허락되어 있는지 저는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가능한 한 더 오래, 덜 위험
하게 사는 길을 택할뿐이지요."
"허락이란 말은 모호하군. 운명을 거스르지 않는 한도 내에서, 운명의 눈에 띄지 않고, 조
용히 머리 숙이고 살겠다는 말이냐? 비록 짧은 인생일지라도 모두의 가슴속에 오랫동안 남
을 위업을 이루고 싶은 마음은 없는 거냐? 절정의 순간 화려하게 지는 꽃잎이 아름답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냐?"
서서히 보리스는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해답을 무의식중에 끌어내기 시작하고 있었
다. 자신조차 몰랐던 인생에 대한 느낌이 말이 되어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죽으면 그걸로 끝이지요. 누구도 보상해주지 않을 테죠. 고작 남은 사람의 가슴속에 남는
것이야말로 구질구질하게나마 살아남는 것보다 훨씬 시시한 일인 것 같습니다. 죽은 사람의
인생은 거기서 멈추는 거지요. 박제처럼... 화려하지만 아무 의미도 없는 그런 것...... 한 순간
불타올라 짧게 빛나고, 그걸로 끝나는 것은 싫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만족을 주는 것은 자신
도 만족할 수 있을 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게 되면, 그 후의
일은 어찌 되도 좋은 거죠."
월넛은 잠시 보리스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가 다시 천천히 입을 열더니 뜻밖의 질문
을 했다.
"지금까지 너를 위해 죽은 자는 몇이지?"
"'......"
말문이 막혔다.
구체적으로 '나를위해' 죽었다고 말할 만한 사람은 없었다. 형 예프넨조차 어찌 보면 손쓸
수 없는 상황에서 스스로의 안식을 택한 것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리스
는 누군가는 죽고 자신은 살아남았다는 사실의 대비를 아주 강렬하게 느끼고 있었다. 아버
지와, 어머니와, 고모와, 수많은 병사들...그리고 형은 죽었고, 자신은 살았다. 여기서 더 누군
가를 위해 죽는 일 따위가 필요한가? 죽어 누군가의 가슴속에 남는다는 것, 듣기는 좋지만
그건 실은 산 자의 짐일 수도 있는 것인데?
"...그런 사람 없습니다."
"넌 너무 여러 사람의 삶을 살고 있어. 그래, 네가 원하는 대로 오래 산다고 치자. 그런다
고 죽은 사람들의 생애를 모두 합한 만큼 오래 살 수 있을 거 같으냐? 넌 불멸자가 아니야.
인간은 다 죽는다. 그리고."
월넛의 눈동자는 죽은 나무와 같은 흑갈색이었다. 거기에서는 희미한 나무진과 재, 죽은 자
를 태우는 연기의 냄새가 났다.
"인간이 죽는 때가 바로 욕망이 죽는 때다."
무슨 의미였을까, 문득 보리스는 맨 처음에 음식에 대한 욕망을 이야기하던 목소리를 기억
해 냈다. 식욕에는 끝이 있는데 다른 욕망들의 끝은 어디인가, 그렇게 생각했던가?
"그러나 살아 있는 한 욕망을 부정할 수는 없어. 언젠가는 끊어지는 때가 온다는 것을 알
기에 현재의 욕망을 정성스럽게 충족시키고자 하는 갈망은 더 커진다. 마치 배가 불러질 것
을 알기에 일부러 가장 맛있는 것으로만 골라 배를 채우듯. 그런데 말이지, 욕망을 쉽게 충
족시킬 수 있는 자들일수록 고르고 고르느라 쓰레기를 많이 남기게 된단 말이야. 그런 자들
이 살아간 자리는 곳곳이 먹다 버린 쓰레기들이야. 그러나 자신의 욕망을 쉽게 채울 수 없
는 자들은 다르지. 언제 배가 고파질지 알 수 없다고 생각하면 닥치는 대로 먹게 되는 것은
당연하지."
그때까지만 해도 보리스는 월넛이 자신에게 하려는 말이 무언지 잘 모르고 있었다. 그 순
간, 갑자기 월넛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래서 난 네 생각이 부조리하다고 하는 거다! 넌 배고픈 자야. 그러면 땅에 떨어진 것이
든, 누가 먹다 남긴 것이든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먹어야 되는 거지. 게걸스럽다는 것은,
그게 인생에 대한 것일 땐 전혀 흠이 되지 않아. 그러나 너는 식탁에서 한 발짝 물러나 뚜
껑으로 가려진 접시들을 단지 바라보기만 하고 있어. 그러면서 오래 살겠다고? 굶어죽지 않
으면 다행이란 걸 알아야지!"
보리스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수많은 생각들이 오랫동안 삼켜 눌렀던 파도처럼 치밀
어 올랐다. 그는 그 자신도 놀랄 정도로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무리 배고프다 해도 먹고 싶지 않아서 안 먹는 건 자기 마음이죠! 굶어죽더라도 자기
책임인데 누가 참견합니까? 죽고 나면 모두 마찬가진데 왜 마음대로 살지 못하죠? 제가 강
해져서 저 위대하다는 용사들을 모두 죽인다 해도 달라지는 게 무엇입니까! 그런다고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이... 말을 하려 했었던 것일까.
다시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 죽은 사람.
그러나 월넛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은 채 매서운 눈으로 보리스를 쏘아보았다.
"틀렸어! 넌 네 삶을 스스로 더 빈약하게 만들고 있어. 네게 부족한건 바로 의지야! 죽은
사람의 삶은 그걸로 끝이라고 말하면서 어째서 네 삶의 가치를 자꾸만 그들의 죽음에 두는
거냐? 정말로 끝이라고 생각한다면 모조리 끝장내어 버리고 넌 너대로 네 욕망을 쫓으며 새
롭게 살아라, 아니면! 그들을 위해서라도 더 힘껏, 더 오래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 네가 불
멸자가 될 수 없는 한, 너는 네 삶의 밀도와 가치를 높임으로서 그들이 잃어버린 삶을 대신
할 수밖에 없다, 만일 네가 그러고 싶다면!"
어느 쪽이든 가리키고 있는 것은 한 방향이었다. 흡사 나침반의 바늘 같았다. 까닭을 알 수
없었지만 보리스는 그러한 삶의 지침이 자꾸만 회의적으로 느껴졌다. 무언가를 위해서 사는
것조차 다 쓸데없는 일처럼, 전에는 이렇지 않았었다..... 한때 그는 열렬히 그의 집안이 안전
해지기를 바랬고, 형이 살아남기를 원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모든 열정이 다 타버리고 재만 남은 것처럼 어떤 소원도 느낄 수가 없었다. 형처럼 윈터러
를 휘두를 수 있게 되기를 바라고 있었지만 그것조차 누군가에게 신세지거나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감정의 연장선상에 있을 뿐이었다.
살아남는 것, 그것만으로는 의미가 없다는 건가?
예프넨은 그에게 말했었다. 살아남으라고, 네 생애의 모든 가능성을 다 실험할 수 있을 때
까지 오래오래 살아남으라고, 그렇게 말했었다.
그는 쉽게 죽지 않을 것이다. 결코 쉽사리 굴복해서 잊혀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
게 해서 얻는 긴 세월... 그건 무엇을 위해 써야 하는 것일까.
긴 침묵을 갠 것은 로즈니스의 목소리였다.
"선생님은 왜 오빠가 가난한 사람이라고 말하시죠? 오빠는 우리 집에서 무엇 하나 부족한
것 없이 잘 살고 있어요. 배고파지는 일 같은 건 없다고요. 무슨 말을 하시는 건지 알 수가
없네요."
월넛은 갑자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표정이 서서히 평소의 그것으로 돌아오는 것을 보리
스는 여전히 낮게 가라앉은 눈으로 보고 있었다.
"아, 역시 그렇겠지. 하지만 난 배고픈 사람이라서 뭔가를 먹어야해. 란지에, 가서 뭔가 먹
을 것을 좀 달라고 해라. 따뜻한 게 좋겠어. 식당에 한 상 차려 주면 더 좋고."
란지에는 그때까지 그들 사이에 오가는 이야기를 말없이 계속 듣고만 있었다. 그는 천천히
일어서서 나가기 전에 보리스에게 다시 한 번 눈길을 주었다.
비 오는 날의 이상한 토론은 그렇게 끝이 났다.
3. 엇갈림과 겹침
그러나 밤의 그들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밤 11시가 되면 보리스는 흘로 검을 집어들고 연습장으로 나왔다. 거기에는 어김없이 월넛
선생이 한 손에는 윈터러, 다른 손에는 떡갈나무 막대를 든 채 기다리고 있었다. 둘은 마주
선 채로 서로를 쏘아보았다. 내려다보는 것은 달빛뿐이었다. 홀리게 하는 푸른 달빛.
"자, 다시 시작해 볼까?"
"......"
검을 뽑았다. 저기 저 자의 손에 흰 칼집의 윈터러가 쥐어져 있다. 그것을 빼앗는 것이다.
보리스는 땅을 박차고 앞으로 달려들었다.
트탁!
검이 단단한 막대에 부딪치자마자 몸 전체가 뒤로 밀쳐지는 것이 느껴졌다. 월넛은 윈터러
를 옆구리에 낀 채 떡갈나무 막대 하나로 보리스를 상대했다. 그러나 그 막대는 검에 맞아
도 잘라지지도, 부러지지도 않았다.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비틀거리며 물러났다가 다시 몸을 수그리며 공격으로 들어갔다. 이젠 월넛의 주위를 빙빙
돌았다. 보리스가 든 것은 날이 선 검이었고 그걸로 실제로 사람을 벨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보리스도 처음에는 이 대전에서 약간은 주저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보리스가 날이 선 검 아니라 저 윈터러를 빼어 들고 있었다 해도
월넛의 나무 막대 한 개를 뚫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실제로 한 번도 성공한 일이 없
었다. 처음 윈터러를 빼앗긴 날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매일 같은 시간에 이 자리에 나와
이 기이한 싸움을 벌였지만, 윈터러를 되 빼앗기는커녕 월넛의 옷깃 하나 베지 못했다.
"오, 꽤 빠른데?"
그것은 예프넨 형과 언덕에서 목검을 들고 대전하던 때, 형이 곧잘 던지곤 했던 칭찬의 말
과는 달랐다. 반쯤은 비웃음 같았고, 달리 보면 그를 부추겨 더욱 포기하지 못하게 만들려는
것 같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간에 보리스는 조금도 굴복하지 않고 계속해서 달려들었다. 넘어지고 쓰러져
도, 상처를 입고 피를 흘려도, 정해진 시간이 지날 때까지는 한시도 쉬려 하지 않았다. 달려
들고, 달려들고, 또 달려들었다.
언젠가는 모두의 관심에서 벗어나, 누구의 참견도 당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걸 위해서는 저 윈터러를 쓸 수 있을 정도의 힘은 지녀야 했다. 왜냐면 저건 수많은 사람
이 노리는 검이니까, 지키기 위해서는 확실히 실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건 수단일 뿐, 목적은 아니었다. 그는 조용한 삶을 위해서 필요한 만큼 강해지려
할 뿐 그 이상의 것에는 관심 없었다. 대륙의 강자들이 저들끼리 대륙을 나누어 가지더라도
그는 그가 숨어 있을 하나의 동굴을 발견해 낼 것이다. 또는 바다를 건너갈 것이다. 홀로,
누구의 위협도 당하지 않고, 하고 싶은 생각에 잠길 수 있도록. 원하는 만큼 슬퍼하고 울 수
도 있도록.
답답하다......
눈물 흘릴 수 없는 곳에 갇혀 있는 자신의 감정 때문에......
"딴 생각을 하는 게냐!"
갑자기 수비에 치중하던 월넛이 공세로 돌아섰다. 막대를 뽑아 앞으로 힘껏 내치며 보리스
의 어깨를 쳤다. 급히 피하려다가 발을 헛디뎌 바닥에 굴러 버렸다. 찝찔한 땀이 흘러 입술
에 고였다. 넘어지면서 무릎을 돌에 찧어 종아리가 한동안 마비될 정도로 얼얼했다.
그러나 월넛은 형이 아니었다. 달려와서 뺨을 감싸며 '다치지 않았어?' 하고 묻지는 않았다.
한달음에 다가오더니 곧장 막대로 보리스의 등을 찌르려 했다. 힘껏 뒤채며 옆으로 굴렀다.
젖은 뺨이 흙투성이가 되었지만 다음 공격이 오기 전에 급히 다른 쪽 무릎을 짚고 몸을 일
으켰다.
다리의 통증은 금새 사라졌다. 소매로 입가의 땀을 슥 닦으며 그는 다시 공격할 태세를 취
했다. 급한 숨으로 들썩이는 머리 위를 달빛이 하얗게 적시고 있었다.
"갑니다!"
탁, 탁탁... 힘껏 달리며 몸을 솟구쳤다. 키가 큰 월넛의 목을 노렸다. 월넛은 일부러 그런
것처럼 자세를 약간 낮추더니 막대를 가로로 횝쓸듯 휘둘러 보리스의 허리를 치려 했다. 그
러나 보리스는 그 자세에서 발을 올리며 다가오는 막대를 세게 걷어찼다. 자세는 좋았다. 그
러나 힘이 부족했기 때문에 막대는 주춤, 물러나다가 말았다.
"좋은데!"
검이 반짝, 광채를 머금고 월넛의 목을 향해 찔러져 들어갔다. 월넛은 목을 젖히더니 팔꿈
치를 확 올리며 검을 쥔 손을 쳐내 버렸다. 그러나 보리스는 검을 놓치지 않았다.
이 며칠간의 투쟁에 가까운 싸움으로 보리스에게는 점차 강한 투지가 길러지고 있었다. 이
대결에 제한 시간이 있고 그 후에는 멈추어야만 한다는 것이 그런 투지를 더욱 강하게 했
다. 매일 밤 한 시간, 자정이 되면 끝이었다. 잠간의 기회는 사라져 버렸다.
사실 이 시간을 제하면 월넛은 보리스에게 검을 잡게 하는 법이 없었다. 대련은 상상할 수
도 없고, 지금 맹렬히 공격하고 있는 저 막대 조차 꺼내는 일이 없었다. 로즈니스와 연습용
레이피어(Rapier)로 장난이나 치면서 보리스가 시킨 훈련을 다 하든 말든 관심도 쏟지 않았
다. 낮에 보리스는 월넛 선생이 아니라 란지에와 함께 훈련을 하는 기분이었다. 지켜보아주
는 것은 그 혼자뿐이었다.
"마지막 한 번!"
신기할 정도로 시각을 잘 아는 월넛이 그렇게 외치면 보리스의 투지는 한층 더 강하게 불
붙었다. 오늘이 아니면 내일이 있지만, 언제까지나 있을 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빼앗아야 한다, 반드시!
처음으로 보리스의 검이 강한 각도를 그리며 월넛의 막대가 예상한 방향을 비켜 가슴으로
찔러져 들어왔다. 월넛은 흠칫하며 막대를 검처럼 내밀어 마주 미끄러뜨렸다. 흠집이 난 일
조차 없었던 떡갈나무 막대가 칼날과 닿아 긁히면서 하얗게 가루가 튀었다.
월넛은 한쪽 손으로 윈터러를 들고 있었기에 막대도 한 손으로 잡을 수밖에 없었다. 두 손
으로 검을 쥔 보리스는 있는 힘을 다해 버티며 앞으로 나아가려 했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
"......"
월넛의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가 어렸다. 잘못 본 듯 했으나 아니었다. 잠시 후, 보리스의 입
끝도 살짝 올라가며 미소 비슷한 것을 그렸다. 둘은 마주 보며 미소짓고 있었다.
그때였다.
"방심하는 거냐!"
막대가 갑자기 주르륵 검의 가드까지 미끄러져 내려오더니 압도적으로 강한 힘을 이용해서
손을 짓이겨 눌렀다. 한 순간이었다. 팔이 휘청거리고 손가락이 풀리면서 검이 허공으로 날
아갔다.
절그럭, 척.
등뒤에서 검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보리스는 등줄기를 싸늘하게 타고 내리는 오한을
느쪘다. 며칠 밤을 싸웠어도 한 번도 검을 놓친 일은 없었다. 몸에서 검을 떼어놓지 않게 된
후로 그것은 한층 더 강하게 집착해 온 가치였다. 늘 졌지만, 쓰러질지언정 검은 놓지 않았
었다. 그런데......
월넛은 막대를 내린 채 보리스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갑자기 소년의 턱이 부르르 떨렸다.
울컥, 뭔가가 솟아올라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을 압박했다. 그러나 동시에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이런 한심한 녀석!"
외침과는 달리 막대를 바닥으로 내던지고 윈터러조차 놓아버린 월넛은 와락 달려들어 작은
소년인 보리스를 번쩍 들어올렸다. 강한 두 손이 그의 겨드랑이를 잡아 머리 위까지 올려
한 바퀴 빙그르르 돌리더니, 다시 왈칵 끌어안아 버렸다.
땀 냄새와 뜨거운 입김... 수염투성이 얼굴애 몇 번이고 소년의 보드라운 뺨을 비비는 그의
입에서는 도무지 감정을 집작하기 힘든 말이 계속해서 쏟아져 나왔다.
"한심하구나! 한심하구나, 이 녀석아! 정말로 한심하구나!"
그러나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듯, 견딜 수 없이 귀엽다는 듯 그는 소년의 몸을 몇 번이고
강하게 끌어안았다. 보리스의 눈에서 눈물이 몇 줄기 흘러내렸다. 이 상황 때문은 아니었다.
가슴속에 단단하게 응어리졌던 저 많은 것들 가운데 하나가 팍 깨지고 녹아버린 것처럼 거
침없이 눈물이 그렇게 흘렀다. 숨을 제대로 쉬기 힘들 정도로 소리 없는 울음이 쏟아졌다.
형이 죽고 나서, 그를 이렇게 힘껏 끌어안아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가 누구였던 가슴
은 뜨거웠다. 어떤 열렬한 감정을 느끼는 인간의 가슴이었다.
"넌 세상을 다 산 것이 아니야, 이 작은 녀석아.... 무얼 그렇게 참으려 애쓰는 거냐. 이 세
상엔 힘들지 않은 자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고 싶다는 욕망을, 그리고 더 훌륭하게
살고 싶다는 욕망을 숨기지 않으면서, 그렇게 살고 있단 말이다. 인간은 언젠가 죽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야. 한시라도 살아 있을 그 내일을 위해 살뿐인 것인데......."
귓가에서 뜨거운 목소리가 메아리쳐 들려오고 있었다. 달빛이 회오리치며 푸른 밤의 중심
을 흐르는 가운데, 위로 받으면서, 그러나 위로하지는 않으면서, 거친 숨을 공기 중으로 내
보냈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윈터러가, 마치 산 자의 감정을 흡수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한차례 부
르르 떨렸다.
10월이 끝나가고 있었다.
이틀 후면 이자보 다 벨노어, 즉 벨노어 백작부인의 생일이었다. 이날은 1년 중 벨노어 성
에서 가장 성대한 파티가 열리는 날이었다. 이미 오늘 도착한다는 기별을 보내 온 손님들도
제법 되었다.
어째서 백작이 아닌 백작부인의 생일인가는 좀 모호했지만, 어쨌든 하인들은 이것도 너그
러운 백작이 실천하는 아내 사랑 정책의 일환이라고 단순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보리
스가 보기에 그것은 어딘가 모르게 어색한 점이 있었다. 그 의문은 손님들이 도착하기 시작
하면서 서서히 풀렸다.
"오빠, 얼른 얼른! 켈티카에서 아멜리 이모님 내외하고 실비엣이랑 줄리나가 왔단 말이야!"
며칠 전부터 로즈니스에게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바에 의하면 실비엣과 줄리나는 백작
부인의 여동생이 아르장송 자작과 결혼하여 낳은 두 딸로서 나이는 열 다섯과 열 둘이었다.
둘 다 예쁘기도 하지만 수도의 세련된 예절을 익힌 소녀들이어서 지방에 사는 로즈니스로서
는 크게 부러워하는 처지이기도 했다.
"절대로 실수하면 안 돼, 알지? 그 애들한테 트집 잡히면 절대로 안된단 말이야!"
그렇게 지껄여 놓고서 금방 또 얼굴을 달리하더니 말했다.
"오늘은 주인이니까 주인답게 굴어야지! 게다가 난 백작 가문의 딸인걸! 그 애들한테 처질
것은 전혀 없지 뭐야!"
가끔 너무도 솔직한 로즈니스의 말을 듣고 있으면 세상이 모두 그녀가 관심 갖는 그런 일
들만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생각될 때도 있었다. 적어도 로즈니스는 새침 떨면서 자
기의 의도를 음험하게 숨기는 아이는 아니었다. 자기의 욕망에 충실하기도 했고, 그것에 대
해 분명한 열의도 가지고 있었다.
보리스가 로즈니스의 요구대로 완벽한 옷차림을 하는 데는 란지에의 손길이 크게 도움이
되었다. 캐미아까지 넷이서 응접실로 향하는 동안 로즈니스는 란지에를 흘끔 쳐다보며 피식
미소지었다. 보리스로서는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뭔가 사연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어서들 오너라."
처음 보리스가 이 저택에 도착했을 때 백작 가족과 마주앉았던 그 응접실이었다. 이번에는
사람이 여럿이었다. 백작 부처는 물론이었고 로즈니스가 말하던 아르장송 자작 가족, 그들의
하인들, 그 외에도 전혀 설명을 듣지 못찬 것 같은 사람들이 세 명 더 들어와 있었다. 성장
한 부인 한 명과 스물 안팎으로 보이는 부드러운 인상의 젊은이, 그리고 보리스 또래로 보
이는 소년 한 사람이 그들이었다.
갑자기 로즈니스의 얼굴이 빨개졌다.
"아, 아‥‥ 안녕하세요, 아멜리 이모님, 그리고 이모부님. 엘리노 아주머님도 오셨네요. 오
신다는 소식을 듣지 못해서 더욱 반갑게 생각됩니다. 사촌 분들도 모두 편히 쉬시다 가시길
바래요."
보리스는 백작이 해 주는 소개를 기다려야 하는 입장이었다. 로즈니스와 함께 테이블 앞으
로 가자 백작이 보리스를 가까이 서게 하더니 어깨에 손을 얹고 말했다.
"이 아이는 내가 오래 전에 양자로 들인 트라바체스 출신의 아이로 보리스 다 벨노어라고
하지, 본래는 어른이 될 때까지 친부와 함께 지낼 예정이었는데 불의의 사고로 친부가 사망
하게 되어서 당연히 내가 데려오게 되었네. 이제 우리 가족의 일원이 되었으니 얼굴들 잘
익혀 두도록 하지."
임시에 불과한 양자인데도 친척들에게 소개하는 말투에는 조금의 거리낌도 없었다. 보리스
는 그 사실에서 오히려 거리감을 느쪘다. 사실을 말하자면 친척들조차 속이고 있는 꼴이 아
닌가?
그런 것이 백작 가문의 명예라고 하는 것인가?
소개가 죽 돌아가고 나서 오랜만에 만난 친척들은 다과를 들며 점잖게 이야기꽃을 피웠다.
아르장송 자작부인인 백작부인의 여동생은 줄곧 보리스를 약간 불편할 정도로 쳐다보았는
데, 그 점에서는 언니와 정말 닮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역시, 벨크루즈는 소문난 휴양지가 될 만해요. 여기까지 오니 가슴 속까지 탁 트이는 기분
이군요. 날씨도 너무 좋고, 모레는 멋진 파티가 될 것 같아 가슴이 설레는군요."
엘리노 아주머니라는 사람은 키가 작고 부드러운 인상을 가진 여자 였는데 말하는 것도 솔
직하고 온화해서 아멜리 이모라는 사람과는 상당히 대조적이었다. 곧장 아멜리 이모가 말을
받았다.
"여기도 좋지만 역시 가장 멋진 곳은 루그두넨스 연방의 하이아칸 이지요. 저 남쪽 바다
아쿠아 코럴 제도(Aqua Coral Islands)의 섬에 별장 하나 갖는 것이 내 평생의 꿈이라니까
요. 딱 한 번 가보았지만 정말 천상의 경치였어요. 거기 가보셨어요?"
"아뇨. 하지만 전 여기로도 충분히 만족인걸요. 우리나라에서 가장 경치 좋은 곳이 여기잖
아요. 벨노어도 이름난 아름다운 성이고요."
그러나 자작부인은 손님으로 온 주제에 도무지 물러설 줄을 몰랐다.
"하이아칸과 아쿠아 코럴을 못 보셔서 그래요. 거길 가보시면 생각이 달라지실 걸요. 단순
한 시골 풍경이 아니라 새파란 바다와 흰 백사장 너머로 바라다 보이는 녹색 섬들이......."
그때 백작부인 이자보가 입을 열었다.
"아멜리, 그곳 이야기는 이제 그만 해라. 이미 그곳 별장을 알아보고 있으니까. 일이 잘 되
면 초대해 줄 테니 모두 함께 가보면 되지 않겠어."
각각 백작부인과 자작부인이 된 자매는 크게 나이 차이가 나지 않았지만 동생과 나란히 있
으니 언니 쪽이 훨씬 나이 들어 보였다. 그리고 그만큼이나 언니의 권위도 강했다. 부드러운
말투 같지만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 하라' 는 의미가 강하게 들어 있는 한 마디에 자작부인
은 즉시 입을 다물었다. 언뜻 보니 아르장송 자작이 아내를 보며 눈치를 약간 주는 모습도
보였다.
"그래, 이제 인사들 했으니 아이들은 저쪽 보리스의 방 거실로 가서 함께 놀도록 해라. 오
랜만에 만났으니 너희들끼리도 인사를 해야지."
백작부인이 말하자 로즈니스가 먼저 일어서서 어른들에게 나가 보겠다고 인사를 하고 나머
지 아이들도 일어섰다. 스물 가까이 되어 보이는 젊은이도 함께 일어서며 말했다.
"저도 이 아이들과 오랜만에 이야기나 하지요. 특히 로즈니스는 아주 오랜만이고요. 그럼
좀 있다 뵙겠습니다, 어머니."
문샤인 탑에 있는 보리스의 방에 들어서자 손님인 귀족 소년 소녀들은 다들 약간씩 놀라는
기색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 또래의 아이들이 쓰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규모도 크고 화
려한 방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솔직하게 입밖에 내어 말한 것은 한 사람 뿐이었다.
"우와, 이 방 정말 좋잖아. 멋진 곳이군."
엘리노 아주머니라는 사람의 둘째아들인 듯한 소년이었다. 이름은 에를 폰 하미즌이라고
했었다. 그는 휘둥그래진 눈동자를 천장까지 굴리더니 보리스를 보며 씩 미소지었다. 귀족
소년치고는 꽤 소탈한 미소였다.
"로즈니스의 오빠라면 형이군. 잘 부탁해."
로즈니스가 약간 과장되었다 싶을 정도로 까륵 웃으며 끼여들었다.
"아냐, 얘. 오빠는 사실 나하고 나이가 같아. 하지만 쌍둥이는 아니니까 그냥 우리끼리 오
빠동생 하기로 한 거야."
곁에서 줄리나라는 소녀가 불쑥 말했다.
"로즈너스는 양오빠하고 벌써 굉장히 친한 모양이구나?"
줄리나 드 아르장송은 아멜리 이모의 열둘 살 먹은 둘째딸이라고 했었다. 그런데 말투가
그리 곱지만은 않았다. 마치 근본도 모르는 양 오빠를 맞아들여 놓고 좋다고 나대는 것이
좀 천박하지 않느냐는 듯 한 어조였다.
로즈니스는 곧장 민감하게 반응했다.
"남매끼리 의좋게 지내라고 부모님께서 늘 말하시지 않아? 줄리나 너한테는 오빠가 없어서
잘 모를 지도 모르겠네."
줄리나라는 소녀도 지지 않았다.
"무슨 소리야. 실비 언니하고 나에게는 오빠 역할을 해 주는 사람이 얼마든지 많아. 켈티카
의 사교계에서는 좋은 가문 출신 아이들끼리 서로 의남매를 하는 것이 요새 유행이니까. 저
폰티나 공작 가문의 젊은 상속자만 해도 언니한테 얼마나 잘해 준다고. 하긴 로즈니스 너야
시골에서 사니까 우리 유행은 잘 모르겠구나."
로즈니스는 아직 어려서인지, 또는 성격 탓인지 은근히 비꼬는 데는 별로 익숙하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 줄리나의 이야기 속에서 최근 관심 있었던 이름이 튀어나오자 참지 못하고 묻
고 말았다.
"폰티나 공작 가문? 거기가 어딘데?"
"어머, 넌 폰티나 공작 가문도 모르니? 안리체 왕비 마마의 친정 가문 아니야? 거기라면
켈티카 사교계에서도 으뜸으로 쳐주는 가문인데 그런 곳도 모르다니, 너 나중에 수도에서
데뷔하려면 고생 좀 많겠다."
줄리나의 무시하는 듯한 말투에 발끈한 로즈니스가 감정을 잘 숨기지 못하고 얼굴을 붉혔
다. 그러나 귀족답게 교육받아 온 터라 하녀들에게 하듯 거칠게 말하지는 못하고 간신히 참
으면서 입을 열었다.
"그건 네가 걱정할 일이 아니야. 내가 듣기로는 폰티나 가문에는 대단한 미인인 딸이 있다
더라. 그런 누이동생이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히 안목도 높겠지."
"흥, 두말하면 잔소리지! 우리 언니를 봐. 요즘 귀족 젊은이들 사이에서 얼마나 인기 있는
지 넌 모를걸. 폰타나 가문의 딸이라면 아마도 클로에를 말하는 거겠지? 그 애가 예쁘긴 하
지만 우리 언니를 따라가려면 한참 멀었다고."
클로에라는 소녀가 실제 인물이긴 한 모양이다, 라고 보리스는 무심코 생각했다.
켈티카에서 자랐다는 줄리나는 로즈니스와는 달리 말을 조심하는 기색이 없었다. 로즈니스
는 시골 장원에서 자란 터라 오히려 옛 예의를 잘 지켰지만 또래 귀족 아이들과 어울려 그
들끼리의 사질계를 만들면서 경쟁해 온 줄리나는 벌써부터 어른들처럼 가시 돋친 말투에 익
숙해져 있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녀는 곧장 다음 말까지 내뱉고 말았다.
"실비 언니는 조금만 더 나이가 들면 공작 부인이 될 거라고!"
"조용히 해라, 줄리나."
그제야 말없이 앉아 있던 실비엣이 입을 열어 동생에게 주의를 주었다. 보리스는 그녀를
흘끗 쳐다보았다.
열 다섯 살이 되어 슬슬 처녀티가 나기 시작하는 실비엣은 날씬한 자태에 갸름한 얼굴이
좨 매력적이었지만 솔직히 눈이 번쩍 뜨일 정도의 미인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그뿐 아니라
보리스는 그녀의 얇게 내리깐 눈매와 무표정한 얼굴을 보며 좋은 인상만을 받지는 못했다.
무언가 청초해 보이는 듯 하면서도 음험한 인상이었달까.
줄리나는 입을 다물었지만 여전히 로즈니스를 향해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걸 잊
지 않았다. 그제야 이들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젊은이가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만나자마자 신경전이라니 보기 좋지 않구나. 사촌들끼리 의좋게 지내야지. 로즈,
줄리, 그리고 실비도."
로즈니스가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오스카 오빠. 이번에 다들 만나게 되어서 정말로 반가운걸, 이 근방에는 또래
친구가 없으니까 난 몹시 심심해요. 그래서 다들 오는 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요."
평상시 보던 로즈니스를 생각할 때 뜻밖이랄 정도로 어른스런 말이라 보리스는 오히려 의
아하게 느낄 정도였다. 보아하니 로즈니스는 이 친척 오빠에게 다분히 호감을 품고 있는 듯
했다. 그리고 그녀의 한 마디에 어느 정도 분위기가 누그러져 이것저것 친근하게 대화가 오
가기 시작했다.
"정말 다들 예쁘게 컸구나. 실비는 이제 완연히 처녀티가 나는데? 젤티카 사교계에서 얼마
나 인기 있을지 ** 않아도 다 알겠어."
오스카 폰 하미즌은 좀 약해 보이지 않나 싶은 외모에 미소가 입가에서 떠나지 않는 젊은
이였다. 실비엣과 줄리나는 작년 파티 때도 왔지만 친척이라 해도 꽤 먼 셈인 이들 하미즌
일가가 온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로즈니스가 처음 응접실에 들어서며 얼굴을 붉힌 것도
이 때문이었는데, 좀더 어렸을 때 그녀는 이 상냥한 오빠를 몹시 좋아하며 따랐던 것이다.
그러나 몇 살 더 먹은 지금 다시 보니 오스카 오빠는 지나치게 연약한 것처럼 보였다. 전
과 같은 관심은 일어나지 않았고 단지 친근감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로즈니스는 스스로도
자신의 면화가 신기하게 생각되었다. 그것이 무엇 때문인가는 깨닫지 못하면서도.
"보리스라고 했지? 난 오스카 폰 하미즌이다. 로즈니스하고 6촌이 되니까 너와도 마찬가지
이겠군. 앞으로도 잘 지내자."
"반갑습니다, 오스카 형."
둘은 악수를 나누었다. 보리스는 선량해 보이는 상대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에 약간의 죄책
감을 느꼈지만 간단히 눌러 없애 버렸다. 살기 위해서 하는 일에 무슨 죄책감이 있을 수 있
겠는가.
그것 말고도 자신과는 몹시 달라 보이는 이 이국의 귀족 아이들 사이에서 느끼는 불편함도
있었다. 그들이 불쾌하게 굴었기 때문이 아니라, 아무 걱정 없이 느긋한 그들과 생존을 위해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자신이 너무도 다르게 느껴졌던 것이다. 비슷한 또래들도 그랬지만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오스카 역시 마찬가지였다. 귀족 사회에서 보호만 받으며 자란 유약
한 젊은이인 그는 비슷한 나이였던 자신의 형 예프넨과는 느낌부터가 달랐다.
처음 혼자 방랑하다가 백작을 만나고, 그 사람이 아버지로서 로즈니스를 보호하는 것을 보
고 느꼈던 것과 같은 소외감은 이제 들지 않았다. 지금에 이르자 그런 사람들과 자신의 길
은 완연히 다른 것처럼 느껴졌다. 오히려 어른들의 그늘에 기대어 살고 있는 그들보다 자신
이 강하다고 생각되기까지 했다. 부당함이나 슬픔보다는 거리감이 느껴질 뿐이었다.
간식을 준비하기 위해 캐미아와 함께 나갔던 란지에가 혼자 돌아와 보리스에게 다가왔다.
"월넛 선생님께서 오늘은 수련을 쉬실 것이냐고 여쭤 보라 하셨습니다."
오늘부터는 손님들이 많이 오게 되니 로즈니스도 보리스도 공부는 파티 이후로 미루라고
백작이 말해 둔 터였다. 로즈니스는 그런 이야기에 뛸 듯이 기뻐했지만 보리스는 공부였든
파티였든 모든 것이 임무의 일환에 불과한지라 기쁨 같은 것도 별로 느껴지지 않았었다.
란지에도 그것을 모르지 않을 터인데 굳이 다가와 이렇게 말하는 까닭이 뭘까? 월넛 선생
이 사정을 모르고 오늘 일정을 물었다면 그가 백작의 뜻을 전해 주면 그만 아닌가.
"선생님은 연습장에 나가 계신가?"
"예."
로즈니스가 이상하다는 듯한 얼굴로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을 시작하려는 찰나였다.
"오늘은......."
그 순간 보리스는 마음속으로 뭔가를 깨닫고는 즉시 대답했다.
"곧 간다고 전해 줘. 기다리시게 하는 것에 대해서도 벌을 받겠노라고 말씀드려."
"알겠습니다."
란지에는 고개를 가볍게 숙여 보이고 밖으로 나갔다. 보리스가 나가는 그를 잠시 눈으로
쫓다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곁에서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눈을 돌려보니 실비엣이 관
심 있는 눈으로 보리스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4. 타인들의 연회
그 날은 보름이었다. 약간 쌀쌀해진 날씨라 파티는 실내에서 열렸다.
손님은 그 날 이후로도 꾸준히 도착해서 파티가 열리는 당일 오후가 되자 백여 명에 달하
는 방문객들로 성 전체가 북적거렸다. 절반 가량은 친척들이었지만 나머지 절반은 친분이
있다는 사람들이었는데, 그들 가운데 대부분은 거북하게 보일 정도로 인사치레니 선물이니
하는 것에 신경 쓰면서 백작부인이 여왕이라도 되는 양 비위를 맞추려 애썼다. 상류 사회의
경험이 없는 보리스의 눈에도 확연히 보일 정도였다.
백작의 영애인 로즈니스는 당연히 공주 대접이었다. 연 이틀 동안 벌떼처럼 몰려든 사람들
로부터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미인이라느니, 귀엽다느니, 영리하다느니, 흠잡을 데 없는 예
법이라느니 떠받들어지다 보니 처음에 사촌인 줄리나와 신경전을 벌이던 일 같은 것은 깨끗
이 잊혀진 모양이었다. 로즈니스가 이 파티를 손꼽아 기다리는 이유도 알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파티의 주최자가 아닌 까닭일 수도 있겠지만, 처음에 로즈니스 앞에서 잘난 체하던 사촌
아가씨들은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보리스는 그녀들이 속한 아르장송 자작 가문은 실제로 그다지 세력 있는 가문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다.
백작 부인의 친정이라는 크레산느 가문이 대 귀족이라는 것은 분명했지만, 그것만으로 이
만한 인원이 모인다는 것은 종내 불가사의였다. 만일 친정 집안의 위세 때문이라면 아르장
송 자작부인에게도 비위를 맞추어야 정상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모든 사람들의 관심과 아
첨은 모두 백작부인 한 사람에게 쏠려 있었다.
그 의문이 풀린 것은 수도에서 왔다는 귀족이 술을 한 잔 마시고 떠들어대는 소리를 들은
직후였다.
"이번에는... 왕비 마마에서는 안 오시는 모양이군? 마마에서 혹시나 오실까 싶어서 예물도
두 배로 준비했더니만......."
이자보 드 크레산느, 즉 벨노어 백작부인은 아노마라드의 왕비인 안리체의 소꿉동무였다.
아마도 매우 절친했던 모양이었다. 지방 귀족이긴 하지만 강대한 자치권을 누리고 있는 벨
노어 백작과 결혼한 후로도 몇 번인가 안리체 왕비는 이 생일 행사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
린 시절의 소꿉동무가 중요한 국경을 지키는 변경백(邊境伯)인 벨노어 백작의 부인이 된 만
큼 여러 가지 정치적인 고려도 있었겠지만, 그래도 왕비가 이런 남부까지 친히 행차한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현 국왕 체첼 다 아노마라드가 몇 년간 켈티카를 장악했던 공화국 정부를 군사력으
로 무너뜨리고 신 아노마라드 왕국의 국왕이 되는 데에 결정적인 배후 지원을 한 폰티나 공
작의 누이동생이자, 작전 참모로도 최고급이었다는 왕비 안리체다. 안리체 다 폰티나가 없
었다면 지금의 체첼 국왕도 없다는 이야기는 이미 정설이었고, 지금의 켈티카 궁정에는 두
국왕이 있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소문이 파다한 지금, 그녀의 친구라는 위세가 크지 않을 리
없었다.
"왕비 마마께서는 올해 왕자님 문제로 몹시 바쁘시잖나. 그 왕자님께서 좀 야단스러운 분
이셔야 말이지."
보리스는 어느 모로 보나 이 파티에서 불편한 존재였다. 사람들은 백작가에 갑작스런 양아
들이 생겼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았고, 보리스 역시 그들에게 억지로 적
응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이날 파티의 공공연한 화제 가운데 하나가 바로 보리스에 대한
것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양아들이 생겼다 해도 백작가의 작위와 벨노어 성을 물려받는
것은 로즈니스일 거라고 속삭였다.
보리스는 일부러 월넛 선생과 오후 늦게까지 수련을 하고 나서 땀에 젖은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느지막이 나타났다. 그리고 란지에에게 배워둔 바 있었던 아노마라드 식 예
법으로 사람들에게 인사 했다. 잠시 후 파티장 안에는 예의 두 번째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저 소년, 사실은 백작이 다른 데서 낳아온 자식 아닐까. 백작부인의 표정을 봐, 영 탐탁찮아
하는 것 같잖아?
파티 자체는 트라바체스 시골에서 온 소년의 눈을 휘등그렇게 만들기에 충분할 정도로 화
려했다. 흡사 '아노마라드 식'이라는 것이 무언지 보여주기 위해서 고안된 것들로 가득 찬
것 같았다. 풍요한 강대국 사람들의 머릿속에서나 나을 법한 끝없는 음식과 넘치는 술, 끊이
지 않는 음악과 춤.......
열정에 불타 온 몸을 바치며 노는 것도 아니면서, 그치는 일 없이 흘러나오는 이런저런 속
삭임들과 나지막한 웃음들로 밤을 새우는 데 익숙한 자들이었다. 갑자기 큰 소리를 내거나,
뭔가 설명하느라 약간 과장된 동작을 취하거나 하는 것조차 모두 무경우한 사람의 보기 싫
은 행동이 되었다. 부채로 입가를 가린 채 누군가 시선 끄는 행동을 한 사람을 힐난의 눈길
로 쳐다보고, 나른한 몸짓으로 잔을 들어올리는 것 이상의 행동은 견딜 수 없는 노동이라도
되는 것 같은 표정들을 짓고 있었다.
아이들은 한쪽에 모여 있다가 가끔씩 나아가 저택 구석의 연습실에서 가다듬었을 듯한 어
른다운 춤 솜씨를 능숙하게 선보이곤 했다. 멋지게 잘 해내면 주위 사람들로부터 작은 갈채
가 쏟아졌다. 그러나 그 것조차 로즈니스의 경우에 이르면 잘 하고 못 하고도 없었다. 그녀
가 치마 끝자락을 올려 들고 사뿐사뿐 걸어나오기만 해도 사람들은 나지막이 비명을 울리고
몸을 꼬며 사랑스러워 못 견디겠다는 듯한 표정들을 지으며 어쩔 줄 몰라했다. 심지어 백작
부인을 둘러싸고 선 사람들의 표정은 가히 희극적일 정도였다. 갑자기 하늘에서 꼬마 천사
가 강림했다 해도 그 이상 감명 깊은 표정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다.
"어쩜 저렇게 깜찍할까!"
"휴.... 벨노어 양은 정말 하늘이 내린 미모네요."
"세상에, 저렇게 앙증스럽고 예쁜 딸을 가질 수 있다면 무얼 내놓아도 아깝지 않겠어요!"
"켈티카에 간다면 내로라 하는 집안들마다 너나없이 청혼하지 않고는 못 배길텐데!"
보리스는 엉겁결에 그녀에게 붙잡혔다. 로즈니스는 어떤 것을 보여주면 사람들이 더 감탄
하여 찬사를 보낼 지 본능적으로 잘 알고 있었다. 키도 반 뼘 차이나 날까 싶은 귀여운 의
남매가 손을 맞잡고 댄스를 보인다면 누구도 눈을 뗄 수 없을 것이다. 그건 틀림없는 계산
이긴 했다. 단 한 가지 문제만 제한다면.
"나, 난......."
거절하고 어쩌고 할 틈도 없었다. 순식간에 그들은 파티장 한가운데 와 있었다. 그새 로즈
니스가 뭔가 시작하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이 눈길을 집중했다. 마침 음악이 바뀌었다. 로
즈니스가 가장 좋아하는 3박자 가야르(Gaillard) 춤곡이었다.
그러나 실로 불행하게도 보리스로서는 전혀 익숙하지 않은 곡이었다. 란지에가 몇 가지 가
르쳐 주었지만 기본적인 춤들에 불과했고, 세 번에 한 번 도약해야 하는 가야르처럼 난이도
가 높은 곡은 쉽게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빠, 한 곡 추시겠어요?"
웃음거리가 되느냐 마느냐 하는 순간이었다. 이미 꽤 많은 사람들의 눈이 쏠려 있었다. 그
순간, 구원자가 나타났다.
"도련님, 주인님께서 급히 부르십니다. 잠시 같이 가시지요."
란지에가 둘 사이를 갈라놓듯 바로 곁에 다가와 한 말에 로즈니스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계획이 어긋나는 것을 몹시도 싫어하는 그녀인 것이다. 그러나 란지에는 곧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에롤 도련님이시군요. 도련님은 가야르에 능숙하시지요?"
의도가 뻔한 권유였는데도 두 사람 모두 금방 받아들였다. 서로 이유는 달랐지만 그 순간
만은 스스로를 위해서 의기투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로즈니스는 에롤 폰 하미즌과 손을 잡
았고 보리스는 란지에와 함께 사람들 틈을 빠져나왔다.
란지에는 곧장 정원으로 나갔다. 백작이 이런 곳으로 자신을 부르다니 좀 이상하다고 생각
할 무렵이었다. 성 곳곳을 환하게 밝힌 램프들로부터 멀어져 어스름한 그늘을 만들고 있는
나무들 사이까지 온 란지에는 걸음을 멈췄다.
"잠시 기다리시지요."
"이리로 오신다고?"
란지에는 보리스의 반문에 미소도 아닌 입 끝만의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그럴 리가요."
보리스는 상황을 짐작하면서도 다시 한 번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 왜 날 이리로 오게 한 거지?"
이어 나온 대답에 보리스는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이야기나 할까 하고요."
보리스는 란지에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나 상대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었다.
물론 그들은 늘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어 왔었다. 아니, 정확히는 이야기라기보다 일방적
인 도움을 받았었다. 보리스는 란지에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 어느 정도 궁금증을 느끼고
있었지만 그의 이야기를 듣게 되는 일은 아마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친절하고 예의
바른 것 같지만 결코 마음을 열지는 않고, 많은 배려를 베풀지만 그것이 단지 의무에 불과
한 듯 수행하는 상대였었다.
둘은 나무 아래에 나란히 주저앉아 있었다. 그러고도 한참 동안이나 말이 없었다. 먼저 침
묵을 깬 것은 의외로 란지에였다.
"당신도 부모님이 안 계시군요, 그렇지요?"
'당신'이라는 말은 지금까지 해오던 '도련님'과는 크게 어감이 달랐다. 그러나 그다지 불쾌
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본래부터 자신은 도련님 따위가 아니었으니까.
"네 부모님은 살아 계실 지도 모른다고 했지 않아?"
"아, 물론. 하지만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닙니다. 살아 있다 해도 달라질 것이 없어서."
바람이 불었다. 란지에는 손목에 채워진 단추를 하나 풀더니 양손으로 짧은 머리카락을 뒤
로 쓸어 넘겼다. 여전히 하인의 차림새였지만 지금까지 그가 그런 식으로 자연스럽게 행동
하는 것은 처음 본 듯 한 느낌이었다. 지금까지 그가 자신의 필요를 위해 뭔가 하는 것을
본 일이 있던가?
란즈미를 만났을 때를 제한다면 딱 한 번, 처음 만남 때 백작의 서재에서 책을 읽고 있던
모습이 유일했다. 문득 보리스는 자신이 줄곧 그에게 관찰당했을 뿐, 상대를 자세히 본 일은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에게는 형제도 없었습니까?"
예프넨의 얼굴이 눈앞을 스쳤다. 말해도 좋을까 싶었다. 아마도, 형이 한 명 있었다는 정도
는 말해도 상관없겠지, 이미 아무 의미도 없으니까.
"이 있었지만... 지금은 없어."
란지에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아마 당신을 잘 돌봐 주는 형이었겠지요, 그렇지 않나요?"
보리스는 무심코 자신이 고개를 숙였음을 깨닫고 머리를 들어 란지에를 다시 쳐다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내가 보살핌에 익숙한 사람인 것처럼 보인 건가?"
란지에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러면?"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듯 보였죠."
갑자기 가슴 한 구석에 굵고 날카로운 바늘이 쿡 찔러 넣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처음
으로 느끼는 것은 아니었지만 오랫동안 잊으려고, 숨기려고 했던 것 같은데.... 결코 겉으로
드러내어 보이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알았을까.
"넌......."
"그냥 지켜본 겁니다, 죽. 다른 할 일은 제게 없었으니까요."
긴 손가락들이 귓가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단추가 끌러져 흘러내린 소맷자락
안쪽으로 보이는 가늘고 흰 팔목은 검을 잡는 자신과는 대조적이었다. 그러나 신체적인 약
함과는 다르게 강한 중심과 같은 것이 그 안에서 느껴졌다.
"하지만 이제 내겐 가족들이 있어."
란지에가 갑자기 동작을 멈추고 보리스를 쳐다봤다. 별 표정이 없었음에도 힐난하는 듯한
눈빛이라고 느낀 보리스는 마음을 다잡고 침착한 얼굴을 했다.
"시간이 갈수록 더 익숙해지겠지. 아버지와 어머니는 좋은 분들이고 로즈니스는 귀여워. 모
두 친해질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니까. 난 자신이 있어."
란지에는 앞서의 눈빛을 거두지 않은 채 말했다.
"그보다는... 백작 가에서 자라면 미래에 도움이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라고 말하시는
편이 훨씬 그럴듯하게 들릴 겁니다."
"그게 무슨 뜻이지?"
그것은 언뜻 '사실 백작 가의 도련님이 되고 싶어서 싫은 사람들과 사는 것을 참고 있는
거지?' 라고 묻는 것 같기도 했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더한 함의를 품고 있었다. 지금 한 그
말이 '그렇게 말하는 편이 좀더 그럴듯한 거짓말이 될 테니까, 거짓말을 하려면 그 쪽을 택
하라'는 의미였다면, 그 말 내부에서 이미 보리스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점을 전제하고 있
지 않은가?
"솔직하지 못하시군요. 아니, 솔직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 언제고 존재할 수 있다는 것
은 알고 있습니다. 제가 실례되는 질문을 하고 말았군요."
란지에가 한 발 뺐지만 보리스는 물러서지 않았다.
"난 좀더 설명이 필요한데. 그럼 내게 이 집의 가족이 되는 것 말고 뭔가 다른 목적이라도
있단 말이야? 뭘 봐서 그렇게 생각한 거지? 불쾌함을 떠나서, 이유부터 듣고 싶은데."
도박이라고 할 만한 질문이었다. 뭔가 비밀을 알고 있다면 다 털어 놓아 봐라, 라고 다그친
셈이었다.
"아뇨. 전 아무 것도 모릅니다. 다만......."
란지에도 이번에는 전혀 모르는 체 하며 도망치려고는 하지 않았다.
"당신의 태도가, 진심으로 이 집 식구가 되려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만은 알고 있습니
다."
보리스는 가만히 숨을 삼켰다. 그리고 일부러 냉랭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건 나 개인의 문제일 뿐이야. 내가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일지 모르지
만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그 가장 큰 증거는."
란지에의 목소리가 살짝 굳어져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약간 격앙되어 있기도 했다.
"당신은 내가 하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종종, 실은 매우 자주 잊는다는 겁니다. 바로 지금
처럼."
보리스는 말없이 눈썹을 움찔, 움직이더니 말했다.
"내가 나만을 시중드는 하인을 두는 것에 익숙하지 못해서겠지. 트라바체스에서 살 때는
어렸을 적부터 돌봐 준 유모가 있었을 뿐이야. 너와 내가 동갑인데 한 명은 존댓말을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라는 것이 내게 그리 쉽게 당연해지지는 않아."
란지에는 일단 수긍하는 것처럼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가 이윽고 쳐들더니 보리스의 눈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그늘진 자색의 눈동자. 지금껏 한 번도, 성 안의 누구에게도 내보이지 않았던 자유로운 눈
빛이 어린 주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까지 늘 내리깔고 있던 눈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서
로 범접할 수 없는 경계를 가진 진짜 인간으로서, 동시에 상대가 달아나지 못하도록 움켜잡
아 멈추게 하는 본심의 눈동자.
그런 눈을 가진 자가 누준가를 섬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결코 상상될 수조
차 없는 일이다. 왜 지금까지는 그 눈 속에 가려진 것을 깨닫지 못했을까. 심지어 그가 그렇
듯 변할 수 있다는 것조차도.
"감사한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뿐만이 아니라는 걸 부인하지는 마시지요. 당신은 실은 조금
도 적응할 생각이 없습니다. 자신이 백작의 아들이 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지도 않고
로즈니스를 친누이처럼 여기지도 않습니다. 친척들에게 자신을 소개하고 싶어하지도 않죠.
벨노어 성 안에서 당신에게 주어진 물건들이나 하인들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합
니다. 이 성 안에서 당신의 태도는 하룻밤 파티를 위해 임시로 빌린 옷을 몸에 걸친 사람과
같습니다. 빌린 옷을 험하게 입을 수는 없는 것이죠."
란지에의 말 속에서 항상 '주인님'이었던 사람이 그냥 '백작'으로 불려지고, 로즈니스 역시
이름만으로 지칭되는 가운데에서도 보리스는 그런 어조가 낯설지 않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
런 것이 본래부터 당연했던 사람인 것처럼 그 목소리는 태연했다.
"로즈니스의 하녀인 캐미아를 아실 겁니다."
보리스는 말없이 그가 말하기를 기다렸다. 이제는 그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모조리 들
어보고 싶었다. 한 인간으로서, 그가 낯설면 서도 경이로웠다. 무엇을 보고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것일까.
"그 소녀가 처음에 당신을 좋아했더군요. 처음엔 비슷한 처지의 또래 친구처럼, 그 다음에
는 갑작스레 신분상승을 이룬 왕자님을 보는 느낌으로요. 그렇지만 이제는 좋아하지 않는
모양입니다. 그녀는 당신이 이제 둘 가운데 어느 쪽도 아니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챘습니
다. 당신은 먼발치에서 바라볼 동경의 대상도, 가까이에서 친하게 지낼 또래 친구도 아닙니
다. 그저 오직 멀리만 있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당신의 신분이 높다거나 태도가 차가워서 멀
리 있다고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세계는 우리 또래들이 흔히 머무는 그곳이 아니
고, 화려하거나 멋져서 동경할 만한 세계는 더구나 아닙니다. 그저, 아주 싸늘하고, 즐겁지도
않으며 접근하기조차 힘든 멀고 황량한 외국에 불과하니 그 누가 가고 싶을까요."
그때 보리스가 입을 열어 말했다.
"조금 의미가 다를 지 몰라도... 그건 너 역시 마찬가지인데?"
란지에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제 세계는 당신보다 훨씬 따뜻한 열의 세계입니다. 당신은 아마도 얼음의 세계에 살고 있
겠지만 말이지요."
이상한 말이었다. 란지에는 이어 말했다.
"그래서 제가 당신의 세상을 궁금하게 느끼나 봅니다."
란지에의 눈동자는 타오르는 불꽃같은 진홍빛이었다. 그리고 보리스는 얼어붙은 안개처럼
싸늘한 회색 눈을 하고 있었다.
"넌 어째서 이곳에 머무르지? 단지 란즈미 때문인 거야?"
그게 아니라면, 너 역시 이곳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시험하고 있는건가.
"언제까지나 이곳에서 살아갈 생각은 없습니다. 어느 날인가는 떠나게 되겠지요. 단지 지금
이 아닐 뿐."
아마도 보리스보다는 나중일 것이다. 그러나 사실을 털어놓을 생각은 없었다. 란지에를 믿
는 것은 위험했다. 매력적인 사람일수록 상대방을 속이기 쉬울 것이다.
"왜 너는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하지? 내가 만일 아버지제 지금 오간 이야기를 한다면, 넌
내게 한 몇 가지 말만으로도 충분히 쫓겨나고 남을 텐데. 네가 란즈미 때문에 여기에 남아
있고자 한다면 그 목적을 충실히 지켜야 옳잖아?"
란지에는 작게 미소지었다.
"그런 짓을 할 사람들은 내게 왜냐고 묻기 전에 이미 벌떡 일어나서 화난 목소리로 한두
마디 소리친 다음 가버립니다."
보리스는 자신이 란지에가 방금 말한 것과 같은 연기를 해내야 할 것인가 짧게 고민했다.
그때 란지에가 이어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렇게 할 만한 사람에게 이런 이야기를 꺼낼 저도 아니고요."
도대체 란지에는 어느 정도로 보리스의 성격을 파악하고 있단 말인가? 무엇이 그를 이토록
확신하게 하는 건가?
"어찌됐든 일단 좋아. 뒤의 행동은 내가 내키는 대로 결정할 거야. 그러나 묻는 말에는 대
답해줘야겠어. 네 말대로라면 난 정말로 너와 아무 관계없는 존재겠지. 그런 내게 굳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저의가 뭐지? 아무런 이익도 없잖아? 설마 심심해서라고 답할 참은 아니겠
지?"
"위험해 보여서죠."
짧게 잡아 끊는 말이 문득 보리스의 귓가를 강하게 파고들었다. 란지에가 뭔가 더 말하려
하는 순간이었다.
"아니 란지에, 너 여기서... 도련님도 계시네? 여기서 뭘 하고 계시죠? 지금 파티장에는 66
년 묵은 아라종 백포도주가 한 상자나 나와서 난리라고요. 가서 맛보시지 않을 거예요?"
지나가던, 그러나 실상은 그들처럼 파티장을 벗어난 사람들을 찾으러 나온 듯한 하녀에게
들키고 말았다. 그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지 궁금해할
틈도 없이 바삐 다른 나무그늘을 향해 뛰어갔다. 란지에가 보리스를 보며 미소지었다.
"백포도주 한 잔 가져다 드릴까요?"
란지에는 금방 돌아오지 않았다. 보리스는 한참이나 혼자 앉아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란지에가 어딘가에서 정보를 얻었다면 일단은 성 안에서 그의 일을 알고 있는 사람들을 의
심해 봐야 했다. 백작 내외와 그 비서는 일단 제쳐놓고, 로즈니스는 란지에를 매우 싫어하니
함께 앉아 이야기할 가능성이 극히 적었다. 기사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성 안의 소년 하인
과 친하게 지낼 리 만무한 자들이니까.
그렇다면 의심 가는 것은 윌라와 캐미아였다. 그리고 아까 란지에가 한 이야기로 미루어
짐작해 볼 때 캐미아가 뭔가 이야기했을 가능성이 가장 클 듯했다.
란지에의 말 중에서 '비슷한 처지의 또래 친구' 라는 말이 가장 먼저 걸렸다. 캐미아가 처
음 보리스를 만났을 당시의 모습에 대해 발설했을 가능성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연애상담과
비슷했을 둘의 대화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그 이상의 이야기도 했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보리스가 사람들을 속이고 있다는 것을 란지에가 눈치챘다 해도 이상 할 것은 없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백작에게 해야 할 지는 여전히 감이 서지 않았다.
당신의 세상이 궁금하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도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말일까.
더구나 보리스의 성격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듯했던 말들을 되새겨 보니 오한마저 끼쳤
다. 처음부터 란지에를 하인으로 삼은 것 자체가 잘못이었을지도 몰랐다. 실제로 보리스는,
란지에가 이보다 더한 말을 한다 해도 그가 저 불운한 소녀인 란즈미와 함제 밖으로 내쳐지
도록 백작에게 고자질할 수 있는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그런 성격을 간파
당하는 것은 약점을 잡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마지막으로, 위험해 보인다는 말은 무슨 의미였을까.
자신의 연기가 서투른 나머지 란지에조차 속이지 못할 정도로 틈이 많이 보인다는 걸까.
또는 그 말고 다른 의미가 있는 걸까.
그 모든 것을 떠나서 그가 란지에를 이대로 내버려두어도 괜찮을지 심히 망설여졌다. 아마
도 자신의 안전이 걸린 문제인 만큼 란지에도 자신이 알아챈 사실들을 남에게 함부로 발설
하지는 않을 것이고, 만에 하나 백작의 귀에 들어간다 해도 캐미아에게 책임을 떠넘기면 그
만일 터였다. 란지에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냉정하다면, 순진한 체 하며 보
리스와 캐미아를 동시에 옭아 넣고 자신은 빠져나갈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보리스가 반격
을 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서. 그러나 자신이 반격을 한다면?
마치 으뜸패 카드를 쥐었지만 상대방을 거지로 만들 것이 걱정스러워서 던지지도 못하고
서서히 져 가고 있는 것과 비슷한 꼴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까지도 란지에는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그 정도면 이미 파티장까지
세 번은 왕복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보리스는 몸을 일으컥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에게 꼭
기다려야 하는 의무는 없었다.
파티장의 불빛이 발끝에 느껴지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그는 바로 옆의 풀숲 너머에서 익숙
한 목소리를 들었다.
"말을 듣지 않겠다고? 내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잊기라도 한 거야?"
잘 아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목소리만으로도 확연히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아르장송 자작
의 딸인 실비엣이었다.
그러나 어조는 그가 알던 그녀의 말투와 판이하게 달랐다. 가만히 내리깐 얇은 눈매에, 조
용하면서도 싸늘한 목소리를 가졌던 그녀가 아니었던가.
지금의 말투가 수백 번은 그래본 듯 자연스럽지 않았다면 일부러 누군가의 흥내를 내고 있
지 않은가 의심될 정도로, 날카롭고 오만한 목소리가 말하고 있었다. 그것도 몹시 자신만만
하게, 상대방의 대답이 없자 그녀의 목소리가 한층 높아졌다. 아마 그렇지 않았다면 보리스
의 귀까지 들려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까 죄송하다고 말했지? 용서를 바란다면 무릎 꿇고 내 구두에 입을 맞춰 보라고! 내 말
이 농담처럼 들려?"
처음에는 끼어들 생각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어 대답하는 목소리를 들으면서 보리스는 저
도 모르게 급히 그 쪽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보리스 도련님 외에 다른 분을 시중들 의무가 제게는 없습니다."
란지에가 왜 빨리 돌아오지 않았는지 그제야 이해가 갔다. 그러나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
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모르는 상태에서 함부로 끼어들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
다.
보리스가 약간 주춤, 하며 걸음을 멈추는 순간 실비엣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처음의 화내던 목소리와는 딴판으로 달라져 있었다.
"변함 없는 고집이야, 정말. 작년과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네. 왜 내말을 듣지 않지? 너도
본래 켈티카에서 살았다고 했잖아? 고향에 돌아가고 싶지 않은 거야? 내가 네게 약속할 수
있는 것은 매우 많은데, 그게 뭔지 궁금하지도 않아?"
란지에는 대답이 없었다. 그러자 실비엣은 천천히 목소리를 낮추며 이어 말했다.
"나와 함에 있으면 좋은 일이 많을 거야. 일단 일상부터가 이런 시골구석에 박혀서 철모르
는 어린애들 시중이나 드는 것보다 훨씬 재미있는 일들 투성이지. 연일 저택마다 돌아가며
파티니 사냥이니 여흥 모임이 줄을 잇는 생활이 얼마나 멋지니? 켈티카는 돈 함부로 뿌리는
귀족들이 흔한 곳이고, 너 정도면 충분히 큰돈을 쥘 수도 있고 말이야. 어느 정도요령 있다
고 정평이 난시종이라면 자기 옆에 두고 싶어서 고액의 연금을 내거는 귀족들이 줄을 선다
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나와 함께 가자. 왜 이 정도의 조건이 네게 기회가 되지 않는
다는 거지?"
보리스는 걸음을 멈춘 채 그들의 대화를 엿들으려 하는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
나 그는 여전히 란지에의 대답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아가씨에게는 제가 필요 없습니다."
실비엣은 약간 당황한듯했다.
"왜지?"
"제게 아가씨가 필요 없으니까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사이를 두고 뭔가 후려치는 듯한 철썩, 하는 소리만이 조용한 정원을
울렸다.
"건방진‥‥ 내 앞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발에 입을 맞춘다 해도, 내가 네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아 가는 걸 막을 수 없을 때가 올 거다."
그 순간, 앞으로 나서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보리스가 모습을 나타내는 순간 두
사람의 눈동자가 모두 그쪽으로 쏠렸다. 그러나 둘 다 당황한 얼굴은 아니었다.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아서 그만 안으로 들어가려 하던 참이다. 내가 시킨 일은 어떻게 된
거지?"
일부러 딱딱한 말투로 란지에를 향해 말했다. 그리고 실비엣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뜻밖으로 미처 말하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 보리스로군. 내가 잠시 일을 시키고 있었어. 네 하인이라고 그런 것도 안 된다는 잔
아니겠지?"
실비엣의 목소리는 순식간에 평소의 그것으로 돌아와 있었다. 좋게 넘어가는 체 해도 될
상황이었다. 그러나 보리스는 저도 모르게 대뜸 대답해 버렸다.
"물론입니다. 필요할 때 제게 돌려주시기만 한다면 말이죠."
"흥......."
실비엣의 눈초리가 살짝 치켜 올라갔다. 그녀의 가늘고 섬세한 눈매에 의외로 잘 어울리는
표정이었다. 보리스는 이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잘라 말했다.
"제 하인을 꾸짖을 수 있는 건 저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실비엣 누님은 손님이시니 손님답
게 처신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실비엣의 얇은 입술이 살짝 떨렸다. 두 어린아이에게 놀림 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이
루 말할 수 없이 불쾌했다. 하나는 하인, 또 하나는 어디서 굴러 들어왔는지도 모를 양자 녀
석인데!
그러나 어디까지나 자신은 벨노어 가의 손님이었다. 보리스가 어떤 성격인지 아직 잘 모르
는 터라 더더욱 조심해야 했다. 혹시라도 울며 소란을 부리거나 해서 자신을 곤란하게 만들
지 어떻게 알겠는가?
마뜩찮지만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어린아이가 뭘 알겠어. 더 이야기할 필요도 없지."
실비엣은 즉각 몸을 돌리더니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 보리스가 란지에를 바라보자 란지에
는 약간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좀 전에 그를 놀라게 했던 표정과 마찬가지로, 그런 표정 역
시 아직껏 본 일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포도주는 아직 가져오지 못했군요. 그냥 안으로 돌아가시겠습니까?"
보리스는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란지에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방금 자신이 왜 그랬
는지 알 수가 없었다. 실비엣은 그가 잠시 몸담아야 하는 이 집안의 친척이었고, 기분을 상
하게 해서 좋을 것은 없는 상대였다. 그리고 평소 란지에를 이런 식으로 옹호하겠다는 생각
도 가져 본 일이 없었다. 방금 전에 했던 대화를 돌이켜 봐도 우호적 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서로 민감하게 다그치고 있지 않았나? 무엇이 이런 변화를 가져왔을까?
잠시 후 란지에가 다시 말했다.
"불편한 일을 만들어 드려서 죄송합니다."
문득 파티장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본래 아노마라드의 귀
족이 아니고 실비엣의 친척도 아닌 것이다
하인은 아니지만 가진 것 없는 처지라는 면에서 오히려 란지에와 더 비슷하지 않은가? 빈
손인 주제에 대담하게 행동한 것에 맥이 빠졌다.
"됐어.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들어 주겠어?"
죄송하다고 말한 끝이어서인지 란지에는 순순히 대답했다.
"제게 부탁하실 필요는 없지요. 그냥 명령하십시오."
"란즈미에게 가자."
그제야 '부탁'이라는 말을 쓴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란지에는 조용한 표정으로 잠시 눈을
내리깔다가 말했다.
"그러시지요."
란즈미의 방에 처음 들어왔던 날은 낮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밤이었다.
하얀 햇빛이 내리는 창가에 기대앉아 있던 병약한 소녀는 거기에 없었다. 아니, 없는 줄로
만 생각했다. 램프불이 ** 캄캄한 방 한쪽에서 약한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침대 쪽이었
다.
란지에가 가져온 램프를 높이 들어 방 안을 비추었다. 하녀 가운데 누군가가 램프를 침대
머리맡에 두었을 지도 모르지만 자기 정신을 잘 가누지 못하는 란즈미를 생각할 때 실로 위
험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니, 그녀에게뿐 아니라 성 전체에 위험했다. 자칫하다가
화재가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니까.
란지에가 침대 쪽으로 몇 걸음 내딛는 순간이었다. 들어올린 램프 빛이 가 닿자 낯선 그림
자 하나가 침대 앞에 앉아 있는 것이 드러났다.
그 다음 란지에가 보인 태도는 보리스로서도 깜짝 놀랄만한 것이었다. 램프를 거의 떨어뜨
리다시피 놓은 그는 다짜고짜 상대방을 향해 달려들었다. 무기 하나 없는 빈손인 주제에 잠
깐의 망설임조차 없었다. 그렇게 신속한 반응을 보이는 그를본 일이 없었다.
두 팔로 상대방의 목을 끌어안다시피 하는 순간, 그림자가 벌떡 일어나 소년의 몸을 번쩍
들어올렸다. 상대는 어른이었다. 그것도 몹시 키가 큰.
"쉿! 소란 피우지 말란 말이다. 중요한 순간이야."
익숙한 목소리.... 월넛 선생이 이곳에 왜?
월넛의 손에 붙잡혀 높이 들어올려졌다가 다시 바닥에 내려선 란지에는 아직도 경계심을
풀지 않은 얼굴로 월넛을 쏘아보았다. 나오는 말도 평소보다 거칠었다.
"무슨 일입니까. 어떻게 여길 들어오셨습니까. 여긴 멋대로 들어오실 수 있는 곳이 아닙니
다."
"쉿‥‥ 조용히 해. 나쁜 의도는 없으니까 가만히 지켜보라고."
그렇게 쉽게 상대방을 믿을 란지에가 아니었다. 소년은 월넛의 어깨를 밀치다시피 하고 침
대 쪽으로 바짝 다가갔다.
그때까지 뒤에 서 있던 보리스도 란지에가 내려놓은 램프를 집어들고 다가갔다. 그제야 침
대가의 희미한 빛이 램프가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었다.
란즈미의 자그마한 얼굴은 베개에 푹 파묻혀 있었다. 그 이마에 정체 모를 빛이 감돌고 있
었다. 빛 때문에 란즈미의 얼굴은 한층 더 창백해 보였다. 그러나 조금 더 자세히 보니 백랍
같던 피부에 발그레한 화기가 감돌고 있었다.
"란즈미...... 란즈미?"
란지에는 누이동생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 수 없게 되자 사나운 눈빛으로 월넛을
돌아보았다. 월넛은 대답 없이 다시 침대로 다가갔다. 무릎을 꿇은 채 팔꿈치를 침대에 올리
고 기도라도 하듯 눈을 감았다. 그리고 두 손을 삼각형으로 모았다.
잠시 후 소년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두 개의 룬(Rune)이 말해지며 간단한 수인이 맺어졌
다. 손바닥을 펼치고, 앞으로 내밀어 겹쳤다가 다시 본래대로 모으는 순간 덜거덕, 하고 창
가의 덧문이 세게 흔들거렸다. 작은 창을 통해 강한 바람이 몰아쳐 왔다.
그제야 밤인데도 창문이 아직 열려 있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보름밤의 달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짙푸른 달빛이었다.
그대는 영원히 소녀이겠는가. 어머니 달빛이 문을 두드리건만, 말 없는 영혼이여, 그대가
영원히 소녀이겠는가.
마지막 말은 여러 사람이 동시에 말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신비로운 음색을 띠었다. 흡사
파이프 오르간이 울리는 것처럼. 보리스는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검사라고만 생각했던 월
넛 선생이었다. 그것도 아주 뛰어난. 그런 그가 마법까지 쓸 줄 안단 말인가?
창의 덧문이 바람에 휘말려 요란한 소리를 냈다. 월넛의 커다란 손이 란즈미의 빛나는 이
마께 놓이는 순간, 소녀의 온 몸이 푸르스름한 빛에 휩싸였다.
다음 순간, 란지에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오빠......."
그가 들은 것이 정말로... 그토록 듣고자 했던 누이의 목소리란 말인가?
란즈미를 내려다보는 란지에의 어깨가 가누기 힘든 듯 가늘게 떨렸다. 그토록 오랫동안 닫
혀 있었는데, 껍질만 남고 혼은 어딘가 모를 데로 떠나버린 양 그렇게 침묵했었는데, 헤매다
집으로 돌아온 아픈 영혼처럼, 꿈인 듯 생소한 그녀의 목소리....... 망설이는 듯, 더듬거리는
듯 해도 분명 그가 기억하고 있는 어린 시절의 그 목소리로......
"란즈미......!"
월넛이 일어나 뒤로 물러서고,다가온 란지에는 누이의 몸을 와락 끌어안았다. 란즈미의 눈
은 여전히 감겨 있었지만 살짝 열린 입술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도 자신의 목소리를
되찾은 감격을 느낄 수 있는 것일까?
보리스는 월넛이 자신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것을 느꼈다. 두 사람만 있도록 내버려두고
나가자는 것인가? 그러나 언제나 처럼 월넛은 예상이 통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어때, 내 솜씨가? 학생답게 감탄한 표정이라도 지어봐. 나 좀 만족하게."
이, 이 자는......
그러나 보리스가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혀 있는 가운데에도 란지에는 가만히 란즈미를 끌
어안은 채 숨을 죽이고 있었다. 흡사 잘못했다간 다시는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될까 염
려하는 사람처럼, 손끝조차 움직이지 않았다.
월넛이 입을 열었다.
"누이동생은 이제 괜찮아. 지금은 몇 마디밖에 못하겠지만 차차 대화도 가능해질 거야."
보리스가 물었다.
"어떻게 하신 거죠? 마법도 할줄 아시나요?"
그때 란지에가 고개를 들더니 월넛 쪽으로 몸을 돌혔다. 한 손은 여전히 란즈미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하신 건지 꼭 물어야겠군요. 란즈미는 일곱 살 때의 사건 이
후로 지금까지 한 번도 입을 연 일이 없는 아이입니다. 그런 아이가 갑자기 변하는 것을 보
니, 저로서는 부작용이 염려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그 아이의 마음과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눴으니까. 오빠를 많이 생각하
더군. 아주 착해. 지금처럼 옆에서 지켜봐 주는 사람만 있으면 성인이 되었을 땐 정상적인
사람으로 돌아을 수도 있을 거다."
란지에는 란즈미의 손을 놓고 일어났다. 그리고 한 걸음 다가와 깊이 허리를 굽혀 절했다.
"말씀대로라면 평생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제 모든 힘을 다해 반드시 갚도록 노력하
겠습니다."
월넛은 예의 유쾌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만일 내 말이 틀린다면 사생결단이라도 낼 것 같군 그래."
란지에는 고개를 들더니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세 사람은 다시 말없이 란즈미에게 다가가 이제 눈을 뜬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았고, 알 수
없는 흐뭇함으로 밝은 표정이 되었다. 궁금한 것이 많았을 텐데도, 드물게 들려오는 소녀의
작은 목소리에 대답해 주기 위해 그들은 서로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램프 하나만 사이에 둔 채 그들은 가끔 빙그레 웃었다. 보리스는 왠지 모르게 몸속이 따뜻
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가 결코 진심으로 어울릴 수 없었던 아래층의 파티보다 지금
의 고요가 훨씬 더 마음에 들었다.
5 . 겨울나기
"실비엣 아가씨는 그냥 저를 이용하려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제가 거기에 응하지 않으니
화를 낸 것뿐이고요."
파티의 밤 이후로 란지에는 보리스를 '당신'이라고 부르는 일도, 백작이나 로즈니스를 경칭
없이 그냥 지칭하는 일도 없었다. 다만 란즈미가 입을 열게 된 후로 눈에 띄게 얼굴이나 태
도가 밝아졌다는 것 만은 느낄 수 있었다.
또한 그 날 밤 란즈미의 방에서 대화도 없이 밤을 새운 이후로 그들 사이에는 모한 유대감
같은 것이 생겨나 있었다.
찾아왔던 손님들이 하나 둘 떠나고 드디어 마지막으로 가장 먼저 도착했던 아르장송 자작
일가도 켈티카로 돌아갔다. 실비엣은 그때일 이후로 보리스에게 달리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못마땅하게 여기는 눈치는 분명했다. 그녀가 떠난 후 보리스는 오랜만에 그 날 밤의 일에
대해서 질문했다.
"이용이라고?"
보리스로서는 상당히 민감하게 와 닿는 단어였다. 란지에는 비교적 자세하게 답해 주었다.
"켈티카의 귀족들에게 사교 모임에서 인정받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인가 봅니다. 친분
있는 귀족들끼리 돌아가면서 여러가지 주제를 가지고 모임을 여는데, 실내 모임의 경우에는
보통 외모가 빼어나고 예법에 능한 어린 남녀 시동을 대동합니다. 요즈음의 그들에게 시동
은 왜 중요한 장식품이라 시동의 훌륭함이 귀족 자신의 가치를 결정 하는 척도가 되기까지
도 하는 모양입니다."
란지에는 거기까지만 말하고 적절히 말을 그쳤다. 그러나 궁정식 어법에 익숙하지 못한 보
리스로서는 슬슬 짐작이 가기 시작함에도 불구하고 정확히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단지 그것뿐?"
란지에는 약간 미소짓더니 말했다.
"도련님은 좋은 의미로 귀족답지 않으신 분이십니다."
보리스도 이젠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귀족처럼 되고 싶은 생각도 없었
다.
란지에가 말을 이었다.
"두 번째 이유는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정보를 알아내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
에 그렇습니다. 귀족들은 상대방의 시동이 마음에 들 경우 한동안 바꾸어 데리고 있는 경우
가 있습니다. 어차피 그런 자리의 시동이란 노리개에 불과한 처지라 그런 교환을 거부할
자격은 없고, 대신 상대 귀족의 정보를 캐 오는 임무를 저절로 맡게 됩니다. 그 귀부인은 누
구와 친하게 지내며, 최신 장신구나 드레스 같은 것은 어떤 경로로 구하는지, 그 집의 자식
들은 누구와 혼사가 오가고 있는지, 남에게 드러나면 명예에 치명타를 입을 만한 비밀은 없
는지. 영리하면서도 새로운 귀족의 총애도 받을 만한 아름다운 시동이 라면 더할 나위 없는
조건인 셈이지요."
두 소년이 잠시 침묵하고, 다시 란지에가 불쑥 말했다.
"도련님께서는 아노마라드가 한때 공화국이었던 시절도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공화국?"
보리스에게는 신물 나는 단어였다. 트라바체스 공화국은 그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갔던
것이다. 그에게 있어 공화국이란 존재는 선량한 사람들을 죽을 때까지 싸우게 하는 악의 근
원과도 같았다.
그런데 이 나라도 공화국이었던 때가 있다니?
"그게 정말이야?"
"아노마라드 왕국력 975년에 시작되어, 985년에 사라졌지요. 딱 10년의 역사였습니다."
아노마라드 왕국력 985년이라면 바로 작년이었다. 보리스는 놀란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그런.... 그래도 다행스럽게 다시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군."
그런데 란지에의 표정이 조금 이상했다.
"지금 정상이라고 하셨습니까?"
잠시 후 그는 다시 말했다.
"다행이라고요?"
보리스는 란지에의 얼굴을 천천히 살폈다. 그리고 그제야 그가 공화국이라는 것을 자신과
는 다르게 느끼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는 가지 않았다.
"그럼 너는 공화국이 마음에 든다는 거냐? 네가 무얼 생각하고 그렇게 말하는지 모르겠지
만 난 한때 공화국에 살았던 사람이야. 그게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충분히 알 수 있을 만큼
은 오래."
란지에의 얼굴은 서서히 평소의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는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트라바체스 같은 공화국만 세상에 있는 것은 아럽니다. 아노마라드 공화국의 10년은 안타
까울 정도로 짧은 것이었죠. 트라바체스 식의 타락한 공화정으로 변질될 시간조차도 없었으
니까요. 심지어 그 10년 내내 공화 정부의 힘은 수도 젤티카 일대와 몇몇 대도시에 한정 되
어 있었습니다. 공화국의 존재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던 구(舊)귀족들이 넓은 국토의 대부
분을 차지하고 있었고, 그들이 현 국왕과 폰티나 공작의 깃발 아래 모의하여 결국 갓난아기
에 불과한 공화국을 파괴했죠. 오랫동안 이어져 온 왕정 체제가 하루아침에 뒤집히기에 아
노마라드는 지나치게 넓은 나라입니다. 그 10년은 8년, 아니 5년으로 짧아져야 할지도 모릅
니다. 초반에는 지방 대귀족들에 의해 존재 자체조차 위협 당했고, 후반에는 공화국의 정체
를 떠나 단순히 생존을 위해 싸우는 것밖에는 할 수 없었던 불운한 정부였으니까요. 그러
나 그 단명한 공화국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걸었습니다. 선택받은 소수가 아닌 모
든 사람이 사람답게 살수 있는 그 나라를 위해서."
보리스는 잠시 입을 다물고 단호하게 흘러나오는 그의 말을 들었다. 란지에는 평소에도 농
담을 섞어 말하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방금의 그는 진지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열정적이기까
지 했다. 그것은 그에게 알 수 없는 불편함을 가져다 주었다. 그리고 그의 관점으로는 그 들
또래의 소년이 그런 어른들의 문제에 대해 이토록 구체적인 관심을 가지는 것조차 낯선 일
이었다.
" 이 나라의 역사에 대해서는 잘 몰라. 하지만 내가 태어나고 자란 나라가 겪은 일들은 알
고 있어. 네게 다 말할 수는 없지만 난, 공화국이라면 그 존재 자체조차 증오할 정도로 충분
히 당한 사람이야. 그래, 난 공화국이 실제로 어떤 장점을 지녔든 그런 것에는 전혀 관심도
없어. 내가 원한 건 내가 좋아하던 사람들의 생존과 평화였을 뿐인데, 공화국은 그것을 모조
리 빼앗아갔지. 평범한 사람들에게 평화를 줄 수 없는 나라라는 건 아무런 쓸모도 없는 거
라고 난 생각해. 공화국은 내가 알기로... 귀족 대신 평민들의 의견을 나라의 운영에 반영하
는 것이라지? 내가 봤을 때 그런 일은 불가능해. 물론 현재 트라바체스에는 귀족이 없고 내
아버지도 귀족은 아니었어. 하지만 내가 여기에 와서 보니 아노마라드의 귀족과 내 아버지
의 지위라는 것은 세력의 크기에 차이가 있을 뿐 실제로는 별다를 것도 없는 것이더군. 그
런 식이라면 귀족이 없는 나라라는 것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지?"
둘은 저도 모르게 구체적인 열의를 가지고 말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도련님께선 가짜 귀족과 진짜 평민을 착각하고 계십니다. 도련님의 아버님이란 분은 물론
이곳의 귀족들과 마찬가지였겠죠. 공화국은 이름만 바꾼 귀족들이 운영하는 곳이 아닙니다.
심지어 저와 같은 하인들조차 나라의 문제에 참여할 수 있는 곳,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는
제도가 만들어져 있는 곳이 진짜 공화국입니다. 아노마라드가 그런 진짜 공화국이었느냐고
요? 물론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 위한 과정의 하나로서 존재하려 했던 공화국이
었습니다. 아마 트라바체스도 그런 초기적 형태의 공화국으로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것이 잘 운영되지 못하여, 적어도 과거에 귀족이었던 자들의 권리를 차단하지 못하여 지금
과 같은 결과가 온 것이겠지요."
"네 말대로라면 네가 말한 진짜 공화국이란 건 아직껏 한 번도 이 세상에 존재한 적이 없
는 유령 같은 것이로군. 그렇다면 언젠가 정말로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을 무슨 수로 믿
지? 뭘 근거로 그런 과정을 위해 사람들을 희생시킬 수 있는 거지? 난 차라리 안정된 왕정
을 원해. 어차피 인간은 영원히 살지 않아. 그 인간이 사랑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곧 죽
지. 그들을 한시라도 더 일찍 죽게 하는 모든 것을 난증오해."
"도련님과 같이 생각한 사람들이 우리의 과거를 지배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우리는 발전
하지 못한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겁니다. 권리를 가진 사람들은 영원히 모르겠죠. 인간이기 때
문에,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기 위해 삶 대신 죽음을 선택할수도 있다는 것을."
"전혀. 인간은 살기 위해 존재해, 무엇이 죽음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거지? 누군가의 생명
을 빼앗아버리고서 그것을 보상할 수 있는 말이 정말로 세상에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런 것은 모두 변명에 불과해. 남이 아닌 자신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그런 변명!"
"나면서부터 인간인 자들에게는 인간 이전의 문제는 관심 없겠죠. 인간이 아니게 태어난
자들은, 그 당연한 가치인 '인간' 이 되기 위해 심지어 죽음도 불사할 수 있는 겁니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는 자유 의지를 깨달은 자들이라면 모
두 그렇죠. 공화국은 인간을 인간답게 합니다. 한 줌 밖에 안 되는 귀족들이 아니라 이 땅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을 말입니다!"
지금껏 둘이 이렇듯 민감하게 대립한 주제는 처음이었다. 보리스도 자신이 이렇듯 과격하
게 말한 것에 놀랐고, 란지에 역시 상대가 이토록 명확한 의견을 갖고 있을 줄은 몰랐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둘은 말을 멈추고 잠시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윽고 이성을 되찾은 란지에가 약간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됐습니다. 도련님께서 그렇게까지 생각하고 계신 줄은 모르고 제가 이런 얘기를 꺼냈군요.
사실 이 나라에서 이제 그 공화국의 일을 언급하는 것은 금기 이상의 것, 죽음이 두렵지 않
은 자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도련님은 백작 가문의 양자이시니까 그렇게 생각하시
는 것이 당연하겠지요."
보리스는 란지에가 더 이상 그와 의견을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이 정도
대립으로 자기 신념을 꺾을 란지에가 아니라는 것은 보리스도 충분히 겪어 알고 있었다. 그
러나 하인이라는 자신의 위치상 말을 적당히 끊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리스는 하
고 싶은 말이 있었다.
"네가 공화국의 이야기를 꺼낸 건 결국 귀족의 비리를 말하기 위해서냐? 그게 시시하다고
말하고 있는 게 아냐. 다만 공화국이 네가 말하는 대로 그렇게 숭고한 가치라면... 적어도 아
주 큰 이상(理想)으로 만들어진 곳이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다. 난 증오로 이루어진 나라
에는 흥미 없어. 누군가에게는 죽어야만 할 인간도 다른 사람에겐 소중한 가족들이다."
란지에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맞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간은 증오와 이상을 완벽히 구별할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이상을 가로막는 것을 증오하게 되고, 그 증오의 마음이 힘을 가져다주어 이
상으로 달려가게도 합니다. 그러나 도련님의 말씀대로 궁극적인 가치는 결국 이상의 실현
에 두어야 할 것이란 점에 대해선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보리스는 이제 평온해진 란지에의 얼굴을 가만히 보다가 나지막이 물었다.
"넌 처음에 어째서 그런 생각을 갖게 된 것일까. 아니, 그런 것은 묻지 않을게. 다만 수도
에 있다는 귀족들의 관습에 대해서 어째서 그렇게 잘 알고 있는가 하는 것은... 혹시, 그러니
까 실비엣 누나의 제안에 대한 것도......."
"앞서 말한 귀족의 시동, 그 자리에 직접 있어 보았으니까요."
보리스의 눈이 조금 커졌다.
"실비엣 아가씨가 저를 원하는 것도 제가 그녀에게 좋은 장식품이 되어 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생활로 돌아갈 생각은 이제 없습니다."
그런 더러운 요구들.... 자신이었다면 도저히 감당하지 못했을 것처럼 느껴졌다. 란지에는
할 수 있었을까. 트라바체스 사람들 사이에서 한 번 준 신념을 꺾지 않는 '강인함', 집안의
이름을 포기하지 않는 '자부심' 이라고 불리는 그런 특징들을 모자람 없이 갖고 있는 란지에
였다. 귀족들의 지저분한 요구들을 받아들이고, 남의 약점을 캐는 첩자 노릇을 하며 살아갈
만한 인간은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했다고 했다. 그 강인함도, 자부심도 꺾을 수 있는
동인이라면 단 하나밖에 없었다.
란즈미.
"어째서... 어떻게, 그런 일을 하게 된 거지?"
란지에는 별 감정 없는 어조로 조용히 말했다.
"아시지 않습니까? 아마도 제가 그들의 취향에 맞는 얼굴을 하고 있나 봅니다. 그래서 당
시 저와 동생이 뒷골목에서 쓰러져 죽지 않고 살아남는 데 약간의 도움이 되었지요."
살아남는다는 말을 듣는 순간 갑자기 정신이 번쩍 났다. 자신이 귀족의 성에서 잠시 생활
하느라 벌써 잊은 것인가. 살아남아야 할 강한 이유가 있는 사람에게, 살아남기 위해 못할
일은 없는 것을.
란지에에게 그것이 살아 있는 누이동생이라면, 보리스에게 그것은 이미 죽은 형이었다. 산
자와 죽은 자. 란지에가 연약한 동생의 미래를 대신 보호하기 위해 살아남으려 한다면, 보리
스는 불행했던 형의 과거를 대신 보상받기 위해 살아남으려 하고 있었다.
그것은 다른 듯 하면서도 상통하는 감정이었다. 그러나 어째서 둘은 달리 생각하게 된 것
일까. 보리스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지 못한 나라를 증오하여 떠나고자 했지만, 란지에는
그런 나라가 없다면 직접 만들어내고도 남을 듯한 태도를 보여 주었다. 어쩌면 란지에는 한
층 더 강한 사람일 것이다. 끝끝내 잃어버린 사람들을 잊을 수 없는 자신과는 달리, 더 많은
사람의 미래를 위해서 자신은 물론,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들까지도 결국은 희생시킬 수 있
을 듯한 그는.
서서히, 보리스는 해묵은 감정처럼 예감이 머리를 쳐드는 것을 느꼈다. 어떤 점으로 보아
두 소년의 처지는 비슷했다. 그러나, 그들의 신념이 발현되는 방향이 다르듯 걷게 될 길도
판이하게 다를 것이었다.
한 기점에서 만났으나 거기서부터 다시 갈라져 나아갈... 다시 만났을 때의 둘은 완전히 다
른 사람이겠지.
결코, 다시는 같은 길을 걸을 수 없는 사람이겠지.
겨울이 서서히 내리고 있었다.
보리스의 생활은 약간 바뀌어 있었다. 첫 눈이 내리기 전까지는 월넛이 시킨 연습을 꾸준
히 하고 있었고 밤이 되면 이제는 윈터러의 존재와 약간은 무관해져 버린 검술 수련을 거듭
했다. 그러나 평소 로즈니스와 놀아주거나 생각에 잠긴 채 보내던 낮 시간에 그는 책을 읽
기 시작했다.
월넛 선생이 오기 전처럼 심심한 나머지 아무 책이나 들춰보고 또 내려놓고 하는 식은 이
제 아니었다. 처음에 백작의 허락을 얻어 서재에 드나들게 된 것은 란지에가 원하는 책을
편히 읽을 수 있도록 배려해 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실제로 초반에 그는 서가에 꽂힌 책들
의 장정이나 구경하면서 란지에가 혼자 책을 읽도록 내버려두었고, 누가 들어온다 싶으면
얼른 알려주는 정도에 그쳤다. 그러나 며칠 동안 읽던 책을 다 읽은 란지에는 보리스에게
그 책을 넘겨주며 말했다.
"천천히 읽어보시지요. 재미있으실 겁니다."
가죽 장정의 두툼한 책이라 처음에는 엄두가 잘 나지 않았다. 그러나 서재 구경도 이제 할
대로 한 터라 시간이나 때울 겸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첫 페이지에 제목이 적혀 있었다.
"마법 왕국의 역사".
마법 왕국이라고 하니 떠오르는 것은 하나밖에 없었다. 한때 필멸의 땅(Mortal Land)에 존
재했다는 고대의 마법 왕국 가나폴리. 그러나 몇 페이지 뒤적이며 읽어나갔지만 가나폴리의
이름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익숙하지 않은 문어체 때문에 진도는 한층 더 나가
지 않았다.
......마법 왕국이라는 이름이 그 나라를 이루고 있는 모든 구성원들의 특성을 결정짓는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한 가지 드문 예외를 제외 한다면 평민 개개인들조차 크고 작은 마법을
일상으로 사용할 수 있었던 경우는 현재의 기록에 남은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 아노마라드가 위치한 이 대륙, 그리고 바다 너머에 존재하고 존재할 다른 대륙
들 모두에는 역사상 어느 시기에 마법사들이 한 사회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는 왕국들이
존재한 일이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국가들 모두를 '마법 왕국' 이라고 부르는 것은 학술적 접근에 있어 무가
치할 정도로 넓은 범주를 도입하는 실수가 될 것이다. 일견 단순화가 될 위험을 무릅쓰고라
도 본 필자는 본서에서 나름대로의 기준으로 마법 왕국이라는 정의의 범위를 다음과 같이
한정짓고자 한다.
뭔가 그럴듯한 이야기가 나올 듯한 기분이었다. 그래서 좀더 빨리 책장을 넘걱보았다.
'마법 왕국(The Kingdom of Wizardry)'이란 다음의 조건 가운데 절반 이상을 만족시키는
왕국을 말한다.
첫째, 지배자(국왕) 자신이 자국 내에서-사실 여부는 떠나-백성들에게 가장 강력한 마법사
로 인정받고 있는 것.
둘째, 새로운 지배자가 즉위할 때는 물론, 정치 내각의 중요한 인물들이 중용되는 과정에조
차 마법 수준의 측정이 공식적으로나 비공식적으로 요구되는 것.
셋째, 왕국 안의 지배층(귀족)에 해당하는 자들조차 그들의 자식이 다른 직업보다도 고위
마법사가 되기를 원하는 것.
넷째, 왕국 안에서 역사에 남은 인물들 가운데 절반 이상이 그들의 마법적 업적으로 인하
여 존경을 획득하고 있는 것.
다섯째, 당시 왕국 내에 존재했던 마법이나 마법사의 이름이 어떤 형태로든 단 하나라도
현재 민간에서 기억되고 있는 것.
여섯째, 왕국 내에서 널리 쓰였던 마법적 기술들 가운데 현재의 마법으로는 도저히 구현
불가능한 것들이 존재하는 것.
일곱째, 왕국이 크게 번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최후로 몰락해 간 원인과 과정이 매우 불분명
한 것......
그밖에도 책의 서장은 뜻밖이라 할 만한 희한한 정의들로 가득 차 있었다. 처음에는 복잡
하게 느껴졌는데 1장으로 들어서면서부터 그런 정의들이 자유자재로 사용되는 것을 보자 묘
하게 흥미가 생기기 시작 했다. 미리 정의를 해 놓고 이야기를 전개시킨다는 것은 굉장히
유용 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좀더 읽어나가자 드디어 그가 아는 유일한 마법 왕국, 가나폴리의 이름이 등장하기 시작했
다. 형과 함께 황야를 헤매고 다닐 때 만났던 야니카 일당이 언뜻 들려주었던 이야기는 그
게 거짓이었다 해도 몹시 매력적이었기에 지금도 잊혀지지 않았다. 열심히 책장을 넘기다
보니 불쑥 눈에 들어오는 글귀가 있었다.
가나폴리는 바로 앞서 언급한 바 있는 유일한 예외, 즉 왕국의 지배자에서 평민에 이르기
까지 모든 구성원들이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던 진정한 마법 왕국이다.
신기했다. 그러면 가나폴리에서는 갓 태어나는 아기들도 처음부터 마법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일까?
심지어 가나폴리는 앞서 언급했던 조건들이 한 가지도 남김 없이 전부 해당되는 놀랄 만한
왕국이었다. 가나폴리의 지배자는 국왕으로 불릴 때보다 '모든 마법의 지배자' 라고 불릴 때
가 더 많았고, 내각을 비롯한 사회 지배층의 모든 인물들은 또한 훌륭한 마법사이기도 했다.
그들은 당연히 자식이 마법사가 되기를 원했으며, 이런 식이니 역사상의 위대한 인물들 가
운데 마법사가 아닌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보리스는 마법을 배운 일이 없었기에 몰랐지만, 현재 전 대륙에서 가장 이름을 떨치고 있
는 남부 아노마라드의 마법 학원 '네냐-야플리아(Nenya-Yaffleria), 즉 네냐플(Nenyaffle)'에
입학하는 학생들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은 학원 주위의 자연물까지 모두 장악하고 있
는 거대한 옛 결계였다. 학생들로서는 잘 모를수도 있겠지만 그 결계의 이름은 '안고니나의
커튼' 이라는 이름이었고, 안고니나는 가나폴리의 마지막 다섯 대마법사 가운데 한 명의 이
름이었다.
그리고 현재 그 땅의 명칭이 되어버린 '필멸의 땅(Mortal Land)', 이 이름 역시 가나폴리의
예언서 안에 왕국이 종국에 가서 갖게 될 이름으로 이미 기록되어 있었다는 놀라운 이야기
도 있었다. 그 예언서는 지금도 루그란 왕국의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쓰여 있었다.
지금은 도저히 그 원리를 알 수가 없지만 가나폴리에는 있었다고 전해지는 것은 대표적으
로 두 가지였다. 하나는 하늘을 나는 배, 즉 비행선이었고, 또 하나는 인간과 똑같은 모양에
어느 정도의 판단력과 감정까지 갖추고 있었다고 하는 '인형'이었다.
하늘을 나는 배 가운데 가장 컸던 것은 그 안에 백여 명의 사람을 태우고 십여 일 이상 날
아갈 수 있었다고 해서 보리스는 몹시 놀랐다. 백 명이나 되는 사람이 한꺼번에 하늘을 날
수 있다니, 그것도 열흘 넘게 버틸 식량 같은 것들까지 모조리 싣고서?
상상으로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뛸 정도였다. 비록 어떻게 생겼을까는 짐작이 가지
않아도 수많은 사람이 동시에 구름을 뚫고 하늘을 날아가는 기분은 참 멋지지 않을까 싶었
다.
물론 주로 애용된 것은 4,5명이 탈 수 있으면서 길게는 한달 가까이 착륙 없이 여행할 수
있는 작은 비행선이었다. 이 책을 쓴 사람의 묘사로는 보리이삭처럼 갸름하고 날렵하게 생
긴 몸체에 돛 대신 수천 마리의 빛나는 나비들이 내려앉은 것 같은 모습이라고 했다. 그림
이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앞뒤로 여기저기 펼쳐 보았지만 그런 것은 없었다.
잠시 후 보리스는 이 자도 가나폴리에서 살았던 사람은 아닐 텐데 어떻게 이렇게 정확히
알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거짓이라 해도 좨 아름다운 상상력이 아닌가, 그
렇게 생각하며 그의 입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어서 사람을 닮은 인형 이야기가 씌어 있었다. 역시 무엇으로 만들었는지는 알려지지 않
았지만 그들의 모습은 늙지 않는 영원한 미모, 자체였다. 식사도 휴식도 필요하지 않았고 마
법으로 만들어진 만큼 마법으로 파괴되기까지는 영원히 살아가는 인형이었다.
자신을 만든 마법사가 불어넣은 의지에 따라 주로 호위나 보초, 그 외에 지저분해서 누구
나 싫어하는 단순노동 따위를 맡았다는 이 인형들 덕택에 가나폴리의 사람들은 대단히 편하
게 지낼 수 있었던 모양 이었다. 최소한의 의사소통 능력도 있었고, 간단한 판단과 약한 감
정도 갖고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역시 문제는 있었다. 아침부터 밤까지 쉬지 않고 옷만을 꿰매는 아름다운 인형에게
반한 젊은이도 있었고, 인형에 불어넣은 마법사의 의지가 과하여 단순히 장난삼아 시비거는
사람을 잔혹하게 죽여버리는 사고도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인형이 대신해주는 일에 익숙해
진 사람들은 인형을 없애지 못했고, 그래서 그 인형들은 가나폴리가 멸망하던 그 날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멸망의 날.
그런 놀랄 만한 마법들과 함께 번영했던 가나폴리는 보리스도 들어 알고 있다시피 원인도
과정도 알 수 없는 갑작스런 멸망을 맞았다. 심지어 악한 마법이 땅을 뒤덮어 국토 자체가
오염되는 바람에 현재의 사람들은 당시의 아름다운 문명을 자취조차 구경할 수 없게 되어버
렸다.
그것은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땅에 세워졌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왕국의 이야기였다.
"재미 있으십니까?"
사흘째 책을 넘길 무렵 란지에가 꽤 열심히 탐독하고 있는 보리스의 어깨 너머에서 그런
말을 던졌다. 보리스는 고개를 돌려 씩 웃으면서 재미있다고 말했다.
책을 다 읽는 데는 보름 가까이 걸렸다. 어려운 부분은 중간중간 넘어갔지만 애써 이해하
려고 몇 번이고 되풀이해 읽은 곳도 있었다. 그 후로 란지에는 그가 재미있어 할 만한 책을
계속해서 골라주었다. 월넛이 검술 선생이라면 그는 보리스의 독서 선생이었다. 그가 권하는
책들은 모두 자신이 이미 읽었던 것들이었다. 얼마 후 보리스 스스로도 한두 권 골라 펼쳐
보고 마음에 들면 읽게 되는 일도 생겼다.
겨울이 깊어갈 무렵이 되자 자신과 관련 없다고 생각했던 서재의 책들이 갑자기 도전해야
할 끝없는 바다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검술 수련과 독서만으로 그 해가 저물어갔다. 그동
안 그가 읽은 책은 다음과 같았다.
"조개 반도 해적의 역사"
"잊혀진 역사의 나라, 동부 대륙과 그 너머"
"역사속의 무구(武具)들"
"마법 학원의 역사적 사건들"
"비밀 결사의 역사"
"주가(呪歌)의 역사와 변천"
"아노마라드 구(舊)왕국사"
기타등등.
첫 번째 책을 다 읽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된 일이지만, 란지에는 '역사' 라는 말이
들어간 책이라면 무조건 좋아하는 소년이었다.
2장. Cutaway
1. 그리고 봄이 왔다
아노마라드 왕국력 987년의 봄이 밝았다.
벨크루즈의 봄은 역시 아름다웠다. 벨노어 성 일대를 비롯한 구릉의 들판은 녹색의 풀잎과
각색의 꽃망울들로 화려하게 뒤덮였다. 성을 둘러싼 정원에는 가문의 문장에도 들어있는 하
얀 마르그리트 꽃이 피어나기 시작해서 초록빛 벌판 곳곳에 흰 리본을 매어놓은 것처럼 보
였다. 숲으로 조금만 들어가도 앵초니 제비꽃이니, 각종 야생화가 흐드러지게 핀 4월이었다.
곧 나무들도 한꺼번에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흰색과 분홍의 라일락들이 진한 향내
를 내뿜었고 소박한 목련도 흰 꽃잎을 갸웃이 내밀었다. 성문 앞에는 복숭아나무의 꽃이 연
분홍빛 구름처럼 탐스럽게 피어올랐다.
창문만 열어도 수십 가지 향기가 흘러들어 나날의 아침을 신선하게 깨웠다. 성 앞을 흐르
는 작은 시냇가에 나갔더니 뾰족하게 핀 수선화가 청초한 옆얼굴을 살짝 돌린 것이 보였다.
물 흐르는 소리마저 향기로운 봄이었다.
생일인 4월 8일이 지나 로즈니스는 열세 살이 되었다. 그러나 로즈니스는 나이만 먹었다
뿐이지 아직 철없는 꼬마 아가씨 그대로였고, 아직 생일이 지나지 않아 열두 살인 보리스
쪽이 오히려 사뭇 달라졌다. 본래부터 어른스러운 성격이었지만 겉모습만은 또래 꼬마와 다
를 것 없었던 보리스는 갑작스레 소년으로 성장해 있었다.
겨울 사이에 놀랄 만큼 쭉쭉 커진 키가 이젠 165센티미터, 벨노어 성에 온 이후로 무려 7
센티미터 이상이 자랐다. 처음에는 본래 나이에 비해 키가 큰 편이 아니어서 란지에보다도
작았는데 이제는 훌쩍 뛰어넘었다. 로즈니스하고는 이제 머리 하나 만큼은 차이가 나서 누
가보아도 오빠처럼 보이게 되었다.
전체적인 체격도 훨씬 소년다워졌지만, 유난히 팔다리의 근골이 강해지고 단단해졌다. 본래
어깨에 닿았던 머리카락도 한결 자랐다. 처음에는 월넛이 장난삼아 묶어 주었던 머리였지만,
이제는 정말로 묶지 않고 훈련을 하는 것은 무리일 정도가 되었다. 어른스럽던 눈빛은 한결
깊어졌다. 아직 수염이 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잘 깎은 조각처럼 발달된 턱선은 갓 면도한
듯 파르스름했다.
주위 사람들이 모두 놀라운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이렇듯 갑작스런 성장에 가장 놀란 사람
은 보리스 자신이었다. 한동안은 하루가 다르게 달라져 가는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어서 일부러 거울을 ** 않고 지냈을 정도였다. 왜일까 생각해 보았지만 전보다 규칙
적으로 몸을 움직이고 훈련한다는 것, 그리고 주위의 환경이 조금 좋아 졌다는 정도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물론 롱고르드의 진네만 저택에 있었을 때도 먹고 싶은 것을 참아야 한다든가, 피로한 일
을 강요당한다든가 하는 일 따위는 없었다. 그러나 여기는 무엇보다도 자연과 기후가 그가
나고 자란 트라바체스와는 완연히 달랐다. 사철 서늘한 기후 탓에 성장이 억눌려 키 작은
관목만 무성한 그곳과는 달리 아노마라드, 특히 남부 아노마라드는 모든 생물이 자유로이
생육하는 풍요로운 땅이었다. 흡사 모든 물자가 필요의 몇 배로 남아도는 벨노어 성의 모습
과도 같았다.
잔에서 술이 넘쳐도, 남은 음식이 즐비한 식탁에 새 요리를 가져와도, 누구도 탓하지 않는
화려한 파티. 필요한 정도의 몇 배나 되는 옷감을 들여 주름이 많은 드레스를 만들어 입고,
창고에서 썩은 곡식을 비료 삼아 밭에 뿌리는 그곳에 자신은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곳에 적응해버린 자신의 몸이 달갑지 않았다. 비록 사랑스럽지 않은 모국이라 해도
자신은 그 땅의 사람이었다. 특히 롱고르드, 그 키 작은 풀의 초원은 그의 고향이었다. 그와
예프렌의 추억이 깃들인 땅이었다.
"응?"
보리스는 책을 넘기던 손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이제 책 읽기에 아예 취미를 붙여버
린 양오빠 뒤에서 맴돌며 심심해, 심심해를 연발하던 로즈니스가 뭔가 이상한 얘기를 꺼냈
던 것이다. 책에 정신을 팔다 보니 정확히 듣지 못했다.
"방금 뭐라고 그랬니?"
로즈니스는 약간 삐진 듯 입술을 내밀더니 불쑥 말했다.
"나 어쩐지 오빠가 점점 좋아지는 것 같다고. 이제 곧 가버릴지도 모른다는 게 좀 아쉽단
말야. 이 말 했어."
"......."
보리스는 로즈니스의 녹색 눈동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가 벨노어 성에 온 것은 9월 초, 로즈니스를 처음 만난 것은 8월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분명 로즈니스는 아노마라드에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그녀가 그리 좋지는
않았다. 함께 지내면서 점차 어떤 성격인지 알아가게 되고, 그리 나쁜 아이는 아니란 것도
알았지만 그래도 역시 친근감은 들지 않았다. 솔직한 로즈니스, 미인이 되고싶어하는 소녀,
오만하지만 잊어버리기도 잘하는 꼬마 아가씨, 재미있는 일을 보고 못 견뎌하면서 깔깔 웃
을 때는 귀족답지 않은 사랑스러움도 가지고 있는 그녀.
그러나 자신은 언제나 적당히 거리를 두고 로즈니스를 대해 왔었다. 이곳에 머무르는 한
무례하게 굴 수는 없었고, 적당히 비위를 맞춰 주는 것이 편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녀
의 존재는 자신이 벨노어 백작과 하기로 한 거래의 한 부분에 불과했다. 자신에게는 그 거
래 기간 동안 그녀를 점잖게 대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끝나면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아마 다시는 돌아** 않을 것이다. 보고 싶어지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게 적당히 대해 왔는데 그런 자신에게 정이 들었다고 말하는 것을 들으니
보리스의 마음도 약간 움직였다. 좀 미안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여길 떠나더라도 나중에 다시 와 줄 거지? 나 보러 다시 올 거지?"
로즈니스가 미소를 지으며 보리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성 안에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해진 몇 명 외에는 결코 보여주지 않는 미소였다. 그걸 알기에 보리스
는 더욱 마음이 무거워졌다. 자신이 상대를 사랑하는 한,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는 듯 자신감이 깃들인 미소였으니까.
그렇기에... 역시 너에게 마음을 열 수는 없는 거다.
내 추운 세계 안으로 넌 결코 들어올 수 없을 테니까. 찬바람만 새어들어도 놀라 달아날걸.
"응. 보러 올게."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이상할 정도로 죄책감이 들지 않았다. 실은 돌아올 리가 없는 데도,
그는 로즈니스의 미소에 화답하듯 같이 웃음까지 지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로즈니스는 버릇대로 다그치듯 다시 물었다.
"정말이지? 꼭이다, 꼭 약속하는 거야?"
"그래."
자신이 여길 떠나 어디로 가게 될 지는 몰랐다. 그러나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점
만은 확신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아마도 잊어버리겠지. 너의 존재 같은 건.
그리고 너 역시 조금 더 지나면 나의 존재 같은 건 잊겠지.
열세 살이 된다는 것, 성장한다는 것은 어쩌면 그런 것일까.
밤이었다.
겨울에도 창문을 열어 놓고 잤던 월넛의 방 창가에 흰 새가 한 마리 앉아 있었다. 푸드덕,
한 번 날개 소리를 내더니 조용히 부리를 까딱거렸다.
침대에서 사람이 일어났다.
"요즈렐?"
창가로 다가온 그림자가 손을 내밀자 흰 새가 선뜻 날아올라 그 위로 올라갔다. 사내의 팔
뚝만한 몸길이에 순백의 깃틸과 황금빛 부리를 가진 새였다. 비둘기라고 하기엔 꼬리털이
좀더 길었고, 자태 또한 훨씬 우아했다. 새의 빨간 눈동자는 술잔 속의 포도주처럼 말갛게
빛났다.
"네가 직접 오다니 웬일이냐? 네 부하들은 어쩌고?"
월넛이 팔을 들어 새를 머리 근처로 가져가자 황금빛 부리가 그의 귓가로 다가가 조그맣게
재재거렸다. 새의 울음소리는 아니었다. 월넛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이 약간 어두
웠다.
"그렇구나. 알겠다."
월넛은 새를 존중하는 것처럼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인 다음 다시 창가로 걸어갔다. 팔을
창 밖으로 내밀자 새가 다시 푸드득, 하며 날아갔다. 하얀 자태는 곧 검푸른 하늘 너머로 사
라져 버렸다. 달은 없었다.
"예, 좋은 결과를 보여드리기 위해 계속 노력하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햇빛 잘 비치는 응접실에서 벨노어 백작 내외와 마주 앉았다. 열어 놓은 창문 너
머로 복숭아꽃의 향기가 흘러 들어오는 날씨 좋은 오후였다. 몇 마디 일상적인 대화가 오간
다음에 백작은 수련의 성과에 대해서 물었다.
"그렇단 말이지. 선생과 마음이 잘 맞는 것 같아서 다행이구나."
"감사하고 있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수련이 정말로 잘 되어 가고 있다고 해도 대답하기 전에 조금쯤 망설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달랐다. 보리스는 침착 한 어조로 명료하게 답했다. 그게 사실이었든,
아니었든.
물론 그도 부담은 느끼고 있었다. 백작은 며칠 전에 대결의 날이 5월 17일로 정해졌다고
통보해 주었다. 상대 소년은 벌써 월넛 선생이 말했던 실버스컬 대회를 준비할 정도의 실력
이라 했다.
어쩌면 보리스를 부추기기 위해 백작이 거짓 소문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어
느 쪽이든 좋았다. 최근 보리스는 빠르게 강해지고 있었다. 아직 월넛에게서 윈터러를 빼앗
지는 못했지만 낮에는 근력 훈련(어느새 이렇게 불리고 있었다)을 하고 밤에 짧게 대결하는
일과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24시간 중에 단 한 시간이라는 것이 얼마나 긴장과 집중을 배가시키는지는 이제 보리스 스
스로도 깨닫고 있었다. 그 한 시간을 위해 나머지 23시간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컨디션을
무너뜨리지 않도록 규칙적으로 휴식하고 잠들고 식사했으며, 거듭되는 훈련 외에 달리 흥분
을 불러일으키는 일을 피했다. 그리고 밤이 오면 온 정신을 집중하여 낮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한 월넛을 상대하는 것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월넛도 막대가 아닌 검을 들고 보리스를 상대했다.
물론 윈터러를 잡은 것은 아니었지만 이제는 보리스와 조건이 같은 것이다. 둘의 실력은
아직도 현격하게 차이가 났지만, 이제 보리스도 자신의 몸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서서
히 느끼기 시작하고 있었다.
모든 것은 단순한 검술, 또는 오랜 훈련의 문제가 아니었다. 어떤 알 수 없는 흐름을 쫓아,
또는 그것을 거스르거나 가로지르며, 그 모든 동선들이 마주치는 교차점을 찾고 있는 것이
다. 현재의 상태를 이대로 지속시키고자 할 때, 지금의 교착 상황을 깨고자 할 때, 똑같이
가는 체 하면서 의표를 찌르는 반격을 하고자 할 때, 그 모든 것은 흐름의 방향을 아는 것
에서 시작되었다. 그 방향을 알고서야 그것을 거스를 수도, 피할 수도, 뛰어넘을 수도 있는
것이다. 비록 그가 능숙하게 대처하는 기술은 아직 부족했지만 흐름을 읽는 법만은 하나씩
확실하게 깨쳐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월넛도 그의 그런 변화를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문제 말인데......."
백작이 빙긋 미소를 짓더니 다른 화제를 꺼냈다. 이미 봄이 오기 전부터 몇 번인가 들어
왔던 이야기였다.
"약속대로 네가 이번 대결에서 이긴다면 너에게 주겠다고 했던 그 상에 대해서 말이다. 네
가 다른 것을 원치 안는다면 꼭들어주고 싶은게 있는데 말야."
"뭐죠?"
몇 번인가 원하는 것을 말하라고 했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어서 머뭇거렸었다.
"네 가족을 돕고 싶구나."
전혀 뜻밖의 이야기였다. 보리스는 무슨 소린가 싶어 눈을 약간 치켜떴다가 나지막이 말했
다.
"제게 가족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물론 지금 네가 물려받았어야 할 집을 차지하고 있는 삼촌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아니란
다. 내가 말하는 것은 다른 사람인데 어때, 네가 맞출 수 있을까?"
그에게 다른 가족이 있었던가?
자신이 모르는 가족이 어딘가에 살아 있다고 가정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아직껏
존재조차 모르는 가족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그런 사람이 있든 없든, 죽든 살든 관계할
바가 아니었다.
"송하지만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습니다. 설명해 주십시오."
백작은 곁의 아내를 잠간 바라보고는 빙긋 웃었다. 백작부인도 평소 같지 않은 부드러운
표정이었다. 그들 사이에서는 이미 이야기가 된 모양이었다.
"게는 형이 있다면서?"
뜻밖의 충격이 보리스의 가슴을 치고 지나갔다. 형이라니?
지금껏 말이 없던 백작부인이 입을 열었다.
" 아버지는 트라바체스에 자주 드나드는 분이라 진네만 가문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아볼
수가 있으셨단다. 원한다면 네 삼촌의 요즘 소식도 들려줄 수 있을 정도지. 하지만 역시 형
의 소식을 더 알고 싶지? 진네만 가문에 아들이 둘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으시고서 벌써 작년
겨울부터 죽 행방을 찾고 재시단다. 어째서 너와 혜어진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친형제
간인데 보고 싶어하지 않았을까 하셨어. 곧 좋은 소식이 전해져 올 거다."
"실은 이미 좋은 소식이 있지."
"어머, 그래요?"
보리스는 그 자리에 못 박힌 채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의 형은 예프넨 한 명뿐
이고, 그는 죽었다. 자신이 직접 죽음을 보았고 손수 그 얼굴에 흙을 뿌렸으니까. 지금 자신
앞에 앉은 저 두 사람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인가?
"매우 흡사한 외모에 나이도 딱 맞는 젊은이를 찾았다는 소식이 오늘 전해져 왔다오. 다만
기억을 잃은 듯해서 무얼 말해도 이해하는 눈치가 아니라는군. 진네만 가문의 일이나 보리
스의 이름을 말해줘도 통 알아듣지 못하는 모양이오. 그렇지만 실성한 것은 아니고 하니 곧
좋아질 수 있겠지."
"잘 되었군요! 언제 데려올 수 있답니까?"
감당하기 힘든 기분이었다. 그들은 죽은 사람을 보았다고 말하고 있었다. 있을 수 없는 일
이었다.
그러나 마음속에서는... 그것이 사실이기를 바라는... 간절히 사실이기를 바라는... 부조리한
감정이 솟아나 가슴속을 팍 메웠다. 숨조차 내쉬기 힘들었다. 그것이 사실이기만 하다면, 예
프넨이 그를 향해 미소짓는 얼굴을 단 한 번만 다시 볼 수 있다면, 남은 생애를 다 내놓아
도 아깝지 않을 텐데.
애써 잊으려 했던 고통스러운 소원이 갑자기 그를 사로잡았다. 마치 이미 결과를 알고 있
는 소설을 다시 읽으면서 간절히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듯이, 이미 일어나 버린 비극을
되돌릴 수 있을 것처럼.
그러나 사실이 아니었다. 불가능한 갈망이었다.
"그 사람이... 아닙니다."
이 말이 거짓말이라면, 틀린 말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뭐라고?"
백작이 미심쩍은 얼굴로 보리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 않은 것을 어찌 확신하느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형은... 이미 죽었으니까요."
백작과 백작부인은 충격을 받은 듯한 얼굴이었다. 백작이 당황한 목소리로 약간 더듬거리
기까지 하면서 말했다.
"이미 죽었다고?"
보리스의 시선은 두 사람을 떠나 환한 들판이 펼쳐진 창 밖으로 향해 있었다. 잠시 이성을
잃은 사람처럼 무표정하고 초점 없는 눈이었다. 당연한 사실인데도 입 밖에 내기까지는 헤
아릴 수 없는 싸움이 필요했었다. 갑자기 기운이 쭉 빠졌다.
"제 손으로 직접 묻어 주었습니다."
그랬었지... 분명히 그랬었다.
"......."
백작과 부인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쉽게 입을 열지 못하는 듯했다. 그만큼 보리스의 얼굴
은 싸늘해져 있었고, 고통스러워 보였다.
형은 죽었어.
분명히, 틀림없이 죽었어.
죽은 사람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해.
4월이 끝이 났다.
월넛은 웬일로 그 날 낮부터 보리스를 불렀다. 흰 꽃이 점점이 흩어진 풀밭에 앉아 둘은
서로 잠시 마주보고 있었다.
"자신 있나?"
보리스는 그가 무엇을 묻는 것인지 순간적으로 헷갈렸다. 그가 이제 곧 이겨야 하는 귀타
프라는 소년에 대한 것일까, 아니면 윈터러를 다시 빼앗는 일에 대한 이야기일까.
월넛에게 대답하는 일에 대해서만은 보리스도 백작에게 하듯 자신 만만하지 못했다. 대답
없이 무심코 짚은 손끝에 하얀 꽃술이 부서졌다. 그는 잠시 망가진 꽃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넌 참 한심한 녀석이란 말이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월넛은 싱긋 웃고 있었다. 보리스도 이제는 월넛이 하는 저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었다. 어느 정도 함께 지내며 겪어 알게 된 월넛은 약삭빠르거나 야망이
높은 사람에게 끌리는 성격이 아니었다. 보리스의 욕심 없는 소박함이 오히려 그의 마음을
끌고 있는 것이다.
처음 그걸 깨달았을 때는 그것을 어떻게 이용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었
다. 그러나 얼마 후 그는 그런 생각을 접었다. 월넛에게는 솔직해지고 싶어서라든가, 남의
마음을 이용하고 싶지 않아서라든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아직 경험이 부족한 자신이 노련
한 사람을 대상으로 그런 모험을 하는 것은 오히려 나쁜 결과를 부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자신의 고지식한 순박함을 좋아하는 상대였다. 그러면 계속 그렇게 행동하면 되는 것이다.
본능에 따르는 일은 쉬운 것이니까, 일부러 꾸민 행동보다 당연히 성과가 좋을 터였다. 섣불
리 뭔가 시도하다가 오히려 신뢰를 다 잃어버리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
"자신이 없다 이거야? 내가 갑자기 사라져버리면 어쩔 거야?"
그 질문조차도 앞서의 두 가지를 포함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내가갑자기 가버리면
어떻게 그 애를 이길래?', '내가 갑자기 가버리면 윈터러를 어떻게 찾을래?'.
월넛은 그 두 가지 질문의 앞머리만을 잘라 다시 한 번 말했다.
"내가 어느 날 갑자기 가버리면 어쩔 거야?"
머리 위에는 흰 깃털구름이 휘감기며 흐르는 푸른 하늘이 있었다. 평화롭고 느긋한 날씨였
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고민하기에는 너무도 좋은 날씨, 행복해져야 할 것만 같은 날씨였
다.
그래도 행복해질 수 없는 사람이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많은 것을 잃고서 갑자기 커
버린 자신, 마음에 들지 않는 넉넉함과 한가함, 잊을 수도 없는 어두운 기억, 가슴만 아프게
해 놓고 재빨리 사라져버리는 희망.
"어디론가... 가시나요?"
어쩐지 그것은 진실일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월넛의 농담 속에는 항상 과육 속의 씨앗과
같은 진실이 있었다.
"그래. 간다."
뜻밖이어야 했다. 그러나 보리스는 아무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의 곁에 언제까지나 있
는 것은 없었다. 무엇이 사라진다 해도 놀라지 않을 셈이었다. 가슴속이 텅 비는 듯한.......
"어디로 가시나요?"
"아주 멀리."
월넛이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높이 묶은 긴 머리채가 바람에 휘날렸다. 거칠고 강한, 오래
된 나무 같은 사내였다. 달빛을 삼키고 자란 이끼투성이 바위 같은 사내였다 그가 보리스를
내려다보았다.
"내일이면 간다. 돌아오긴 힘들 거다."
그러나 보리스는 그를 바라보며 또 한 번의 예감을 느끼고 있었다. 다시 만나리라, 전혀 예
상하지 못한 곳에서. 그들의 생애는 몇 가닥으로 꼬인 실처럼 단단히 한 매듭 얽혀 있으리
라.
"네 검에 대해서 말인데......."
당연히 꺼냈어야 할 이야기였다. 월넛은 말을 하는데 있어 보통 망설이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번만은 달랐다.
"알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난 처음부터 네 검을 갖고 싶은 생각은 없었어, 아니, 실제로
가질 수도 없는 검이지. 넌 잘 모르겠지만 그건 내 신념에 맞지 않는 검이니까 말이다. 내겐
평생을 두고 지켜야 할 중대한 신념이 있어."
"......."
보리스가 말이 없자 월넛은 계속해서 말했다. 오해받을 수밖에 없는 말을 하면서도 최대한
그걸 피하고 싶어 애쓰는 듯 했다.
"그렇지만 네게 돌려주는 것은 더더욱 안 되는 일이지. 솔직히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어.
당장 어떻게 되기 때문이 아니라 미래에 일어날 일들이 불안하기 때문에 휠씬 더. 세 살 먹
은 어린아이에게 식칼을 들려 줄 수는 없는 것이니까. 정말,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그것은 월넛의 또 다른 모습이기도 했다. 그는 솔직할 때는 한없이 솔직해지는 사람이었다.
"그래, 내가 하는 말이 다 사탕발림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내가 이 검에 욕심이 나서 그러
는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거야. 그렇게 생각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하지만 난
걱정스러워. 차라리 내가 네 오해를 사는 한이 있더라도 그걸 네 곁에 두고 싶지가 않아."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그제야 입을 연 보리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전처럼 월넛이 훌쩍 들어올릴 수 있는
키는 아니었다.
"어차피 처음부터 제게서 빼앗아 가셨고, 저는 제 능력으로 되찾겠다고 약속한 것이었죠.
하루가 남아 있으니 그 약속 지켜보겠습니다. 아직 한 번의 밤이 더 남았지 않나요."
"하지만......."
월넛이 뭐라 말하려는 순간 보리스가 먼저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맡기셨던 것은 돌려드릴 테니까요. 떠나실 때 제방에 잠시 오셔서 가져
가세요."
본래의 사정을 떠나 오히려 어린 소년이 선생에게 베푸는 듯한 분위기가 되어버렸다. 월넛
은 약간 당황한 듯 입을 다물었다가 손을 들어 입가를 매만졌다.
무슨 말을 한다 해도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는 것은 무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하지 않
을 수는 없는 묘한 상황에 처해 버렸다. 변명으로 들릴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말을 안 할 수
는 없다고 할까, 그러나 월넛은 말하지 않는 쪽을 택해 버렸다.
"이해해 줘서 고맙다."
그것은 '내게 그 단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해줘서 고맙다'가 아니었다. 자신이 윈터러를
넘겨줄 수 없어서 죽 해왔던 고민을 이해해줘서 고맙다는 의미였다. 물론 상황은 전혀 그런
의미가 아닌 것처럼 보였지만 월넛은 그냥 자신에게 느껴지는 대로, 고맙다고 말했다.
그가 돌아서려는 순간, 보리스가 처음부터 물었어야 할 말을 불쑥 던졌다.
"하지만, 왜 가시는 거지요?"
월넛은 다시 몸을 돌려 보리스를 내려다보더니 그 손을 끌어당겨 잡았다. 그리고 가볍게
악수를 했다.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야."
설명은 그것뿐이었다. 보리스의 손을 놓은 월넛은 저벅저벅 걸어 그 자리를 떠나 버렸다.
그 날 밤, 마치 처음 윈터러를 놓고 대립했던 그 밤처럼 홀리게 하는 달빛이 뿌려진 연습
장에서 둘은 마주했다.
월넛과 보리스는 마지막으로 힘껏 서로를 위해 대결했다.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한 것이 당
연했다. 보리스는 가볍게 스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칼에 베이거나 찔린 상처를 여러 개
입었고 월넛도 옷깃 여기 저기가 칼끝에 긁히고 찢겼다.
한 번, 다시 한 번, 숨 돌릴 틈도 없이 달려드는 보리스 때문에 월넛도 몇 번인가 주춤거렸
다. 물론 그가 솜씨를 발휘한다면 보리스 정도 한 칼에 베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러
나 그는 이 소년이 다치는 것을 원치 않았고, 지금의 싸움으로는 더더욱 그랬다. 그런 까닭
에 월넛은 수세를 취하며 보리스의 공격을 흐트러뜨리는 데만 치중하고 있었다.
보리스는 달랐다. 잠시의 틈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이 한 시간 내내 그는 완전한 긴장
상태였다. 그가 좀더 솜씨가 좋았더라면 이날 밤의 상대를 죽이지 않고는 결코 끝내지 못했
을 정도로 전의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런 차이가 이 날 둘의 현격한 실력 차를 어느 정도 덮
어 주었다. 검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둘이 팽팽한 대결을 벌이고 있는 걸로 보
일 수도 있을 정도였다.
키가 커진 소년은 이제 팔만 높이 올리면 곧장 상대의 목을 찌를 수도 있었다. 물론 쉽게
그러지는 못했다. 그러나 밀쳐지고, 넘어지고, 구르고, 상처를 입어도 다시 벌떡 일어나는 보
리스에게는 잠시의 머뭇거림조차 없었다.
그러나, 한 시간은 짧았다.
"그만. 끝났다."
마지막으로 마주쳤던 검이었다. 월넛은 갑자기 강한 힘으로 맞닿은 검을 밀쳐 보리스를 바
닥에 쓰러뜨려 버렸다. 지금까지 적당한 정도로 치고 받아 주던 힘이 아니었다. 보리스는 바
닥에 처박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일 수 없어서가 아니었다. 이제 끝났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매일 밤의 대결은 끝이 나
버렸다. 한 번도 이기지 못한 채,
"일어나라."
월넛은 검을 내려놓더니 보리스의 몸을 부축하여 일으켜 앉혔다. 그리고 흙 묻은 머리를
쓸어 넘겨 주었다.
"너 같은 학생을 가져 본 것은 처음이다."
보리스는 대답이 없었다. 월넛은 갑자기 혼자 피식 웃더니 말했다.
"후훗, 실은 누군가를 제대로 가르쳐 본 것이 처음인 게야. 아직껏 가르칠 마음이 나는 녀
석을 만난 적이 없었어."
보리스가 약간 고개를 들었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너처럼 마음을 열 줄 모르는 녀석도 처음 본다."
월넛은 진실을 보고 있었다. 분명 보리스는 월넛을 싫어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과거에
만났던 아이들이 열렬히 선생을 흠모하며 그의 기술이라면 뭐든 배우려고, 가르쳐 달라고
덤비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자신만으로도 완벽한 것 같은 세계의 주인, 그 세상의 벽이
일부 무너졌다면 외부에서 돌을 주워 쌓을 것이고 도움의 손길도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그
러나 그 벽 안쪽으로 누군가를 들여놓지는 않았다.
확실히 보리스는 월넛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워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선생이 이끄는 대로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 페이스를 가지고 눈에 띈 방식들을 하나씩 자기 것으
로 만들어나가고 있었다.
아직 실력이 일천한 소년이 압도적인 선생에게 배우면서 자기 페이스를 갖는다는 것은 본
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한 것은 보리스가 남들의 몇 배나 되는 천재적인
소질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성격의 문제였다. 강해지고 대단한 실력을 갖게
되기보다는, 자신의 길에 올라 흔들리지 않고 걷는 것만이 목표인 보리스였다. 그 마음이 그
의 페이스를 만들었다.
월넛은 거기에 끼여들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도, 몇 번인가 열릴 듯 하면서도 결국은 열리
지 않았다. 보리스의 마음 속에는 묘하게 바깥을 향해 열린 어떤 부분이 있었다. 거기에 몇
번인가 중첩되면서 교감이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잡힐 듯 잡힐 듯 하면서도 사로잡을 수 없
는 소년이 그였다.
"다시 만날 수도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구나. 백작에게는 말하지 않고 조용히 떠날 생
각이야. 너도 모르는 체 해라.욕을 해대겠지만 나 같은 떠돌이를 고용한 이상 어쩔 수 없는
업보로 치라지. 그 동안 즐거웠다, 너처럼 이상한 녀석을 만나서."
보리스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나지막이 말했다.
"안녕히 가세요."
"대결에서는... 이길 수 있을 정도로 가르쳤다. 만일 진다면 네가 그걸 네 페이스에 잘 섞지
못한 탓이야."
둘은 가끔 그랬듯 방으로 올라가는 대신 아무도 없는 주방 쪽으로 걸어갔다. 월넛은 늘 숨
겨 두는 틈새에서 브랜디를 꺼내어 모조리 마셔버렸다. 이제 떠나는 판이니 끝장을 보는 모
양이었다. 보리스가 자기도 한 모금 달라고 우겼지만 아이들은 안 된다고 잘라 말한 그는
짓궂게 물통에서 물을 한 그릇 퍼 건넨 다음 브랜디와 건배했다. 보리스는 짧게 말했다.
"좋은 여행을 위해."
월넛과 헤어진 보리스는 땀에 젖은 몸을 찬물로 씻고서 침대로 기어 들어갔다.
다음날 새벽녘, 월넛은 약간 무거운 머리로 일어나 앉아 아침식사를 하고 떠날 것인가 심
각하게 고민했다. 비록 낮이 된다 해도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훌쩍 사라지는 것쯤은 그
에게 일도 아니었지만 배고픈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인 탓이었다.
더구나 이곳은 송로의 벨크루즈, 대륙의 미식가들이 한 입이라도 먹을 수 있다면 영혼이라
도 팔 듯 덤비는 그 검은 보물을 며칠거리로 먹을 수 있는 축복 받은 고장의 성이 아닌가.
본래 처음에 그가 벨노어 백작의 아들을 가르치겠다고 응낙한 것도 다른 무엇보다 송로가
그를 유혹한 탓이 었다.
"쓰읍, 참고 가야지 어쩌겠어."
안타깝지만 시간이 부족했다. 그를 부르고 있는 자는 약속한 날짜의 반나절도 어길 수 없
는 상대였다. 그도 이 부름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흰 새의 공주인 요즈렐이 직접 온
것만 보아도 알고도 남았다.
짐이랄 것 없는 소지품들을 간단히 꾸린 그는 윈터러를 꺼내려고 침대 밑으로 손을 넣었
다. 그리고 멍해졌다.
"선생님, 이제 가십니까?"
등뒤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에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자신도 몰랐지만 이때 그의 표정은 낭
패하여 심각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평소 그의 모습과는 너무도 달랐다.
보리스가 문간에 서 있었다.
둘은 잠시 서로를 쏘아보고 있었다. 자신이 몹시 분개해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까지도 약
간의 시간이 걸렸다. 그는 서서히 마음을 가라앉히며 눈빛을 달리했다. 그리고 짧게 말했다.
"날 보기 좋게 속였구나."
보리스는 웃지도 않고 말했다.
"선생님도 처음에 제 검을 몰래 가져가셨습니다. 배운 대로 했으니 칭찬해 주시죠."
월넛은 가만히 있다가 낮게 말했다.
"그래, 칭찬해 주지. 잘 했다."
성에 도착한 첫날, 월넛은 보리스를 붙들고 거짓말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놓은 일이 있었다.
그리고 보리스는 실제로 그것을 실천했다. 전날 밤, 상대가 충분히 지칠 정도로 잠시의 틈도
두지 않고 열렬히 달려들던 모습을 기억할 수 있었다. 또한 월넛은 브랜디를 마시고 푹 잠
들었고, 물을 마신 보리스는 정신이 맑았을 터였다. 또한 그 브랜디의 존재에 대해 보리스가
미리 알고 있는 이상 거기에 뭔가 약이라도 타지 않았다는 보장은 없었다. 그가 그런 것을
어떻게 손에 넣었을까는 별문제로 치더라도.
언제부터 그가 이 일을 기획했을까.
"......"
보리스가 손을 펴 내밀었다. 거기에는 월넛이 처음에 맡겼던 단도가 놓여 있었다. 윈터러는
다른 곳에 두었는지 보이지 않았다. 하긴 그런 식으로 되찾은 검인데 위험스럽게 그의 앞에
들고 나타날 정도로 어리석은 소년은 아니었다.
월넛은 다가가 그의 손에서 단도를 집어들었다. 자신의 손이 살짝 떨리고 있는 것을 보았
다.
"선생님에서 저를 걱정해서 그러셨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검은 저를 위해 죽
은 제 형의 단 하나뿐인 유품입니다. 그리고 제가 태어났던 집안과 연결된 유일한 물건이기
도 하지요. 아무리 위험한 것이라 해도 저는 그것을 제게서 떼어놓을 수는 없습니다. 저는
그 검을 제 형처럼 여깁니다."
보리스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월넛에게 이런 사실을 말하는 것이 처음임에도 불구하고 이
제는 더듬거리거나 목이 메이지도 않았다.
"그래, 그런 식이다."
월넛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도 착 가라앉아 있었다.
"반드시 그런 식으로 해라. 약속이나 맹세와 같은 것을 결코 어기지 않을 것처럼 행동한
다음, 결정적인 순간에 단 한 번 뒤통수를 쳐라. 그러면 결코 실패하지 않을 거다. 지금처
럼."
그것은 부드러운 이별이 되지 못했다. 월넛은 화를 내지 않았지만 자신의 감정을 감추려
하지도 않았다. 그가 느꼈을 감정은 명백했다. 분명 거짓말을 잘 해야 오래 살아남고 강해질
수 있다고 말했었지만, 실제로 그는 그런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이다. 보리스가 그런 사
람이 아니라고 믿었기 때문에 마음에 들어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을 다 알고 있었음에도 보리스는 이 계획을 포기할 수 없었다. 윈터러는 결
코 내놓을 수 없는 검이었다. 말로는 월넛을 설득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이 방법뿐
이었던 것이다.
실로 몇 달을 생각해 온 그대로, 그는 성공했다.
"......."
월넛은 작별 인사를 남기지도 않았다. 보리스가 막고 선 방문 쪽이 아니라 창가로 다가가더
니 뒤도 돌아** 않고 밖으로 뛰어내렸다. 보리스는 놀라 창가로 뛰어가거나 하는 짓은 하
지 않았다. 비록 여기가 3층이라 해도 월넛은 다칠 사람이 아닌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헤어졌다. 다시는 되찾을 수 없을 어린아이의 마음을 가진 채 어린 시절의
선생은 떠나버렸다.
완연한 봄이었다.
2. 바람이 남긴 손자국
"월넛 선생님 말입니다."
란지에가 그렇게 입을 열었을 때 보리스는 만개했던 꽃이 우수수 떨어져 내리는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복숭아꽃의 흰 꽃잎들이 점점이 떠올랐다가 흩어지고, 몇 줄기 바람에 휘
말려 들판으로 날아갔다. 눈가에서 흰 꽃잎이 스러지는 빛의 경계 너머로, 서서히 서녘 하늘
에 걸리고 있는 태양이 있었다.
보리스는 고개를 돌렸다. 란지에가 미소지을 듯 말 듯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 떠나셨는지 알고 계시는 것 같군요."
보리스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흑청빛 머리칼에도 꽃잎 같은 흰 햇살이 내려 있었다.
"어 디로 가셨는지는 모르시지요?"
보리스는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날따라 윈터러를 꺼내 든 채 그 손잡이를 만져보
고 있었다.
월넛이 떠난 후의 생활은 어딘가 모르게 맥이 빠진 듯했다. 이제는 혼자서 연습을 했지만
월넛과 함께 했던 밤의 한 시간이 사라진 후로 진전은 거의 없는 것 같았다. 그는 오히려
란지에처럼 책만 읽어도 좋은 처지가 부럽다 싶었다.
아니, 곧 그는 생각을 정정했다. 란지에는 지금처럼 그와 함께 책이라도 읽을 때를 제하고
나머지 시간은 모두 누군가의 치다꺼리를 하며 보내는 처지였다. 하인이란 하루에도 몇 번
씩 자존심을 꺾지 않으면 안 되는 자리일 것이다.
"저는 왠지......."
란지에가 드디어 망설이던 미소를 입가에 올렸다. 그는 책을 펼친 채로 테이블에 내려놓았
다.
"도련님과 월넛 선생님제서는 아주 특별한 방법으로 인질을 교환했을 것 같군요."
보리스가 맨 처음 윈터러를 되찾지 못하고 대신 월넛의 단도를 받았던 자리에 란지에도 있
었었다. 하지만 그 일이 어떻게 끝났는지 란지에는 직접 ** 못했고, 다만 윈터러가 보리스
의 손에 돌아와 있는 것만을 보았다. 보리스는 말을 할까 하다가 입을 다물어버렸다. 란지에
라면 이해해 줄 것도 같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솔직히 내보이기가 싫었다.
"그 검은... 무언가 사연이 있는 물건 같았는데 말입니다. 결국 다시 도련님의 손으로 돌아
왔나 보군요."
보리스는 한 손으로 윈터러를 쥔 채 검을 뽑기 직전의 동작을 취해 보았다. 갑자기 키가
자라서인지 이제는 허리에 차고 다닌다 해도 어느 정도 자세가 나을 법도 싶었다. 여러 가
지로 수련을 한 덕택에 이제는 가누기 힘들 정도로 무겁지도 않았다. 그러나 역시 바스타드
소드(bastard sword)를 자유자재로 휘두르기에는 아직 버거운 나이였다.
란지에는 보리스가 하는 양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역시 검과 같은 것은 어울리지 않는
소년이 그였다. 문득 정말로 그럴까 싶었다.
"보겠어?"
보리스는 갑자기 윈터러를 란지에의 손에 건넸다.
란지에는 얼결에 검을 받아들었지만 어느 손으로 검의 어디를 쥐어야 하는 지도 잘 몰랐
다. 윈터러의 귀족적인 흰빛은 그에게 잘 어울렸지만 보리스의 손에 있었던 때와는 달리 그
에게는 단지 장식에 불과한 것 갈았다.
잠시 후, 란지에는 검을 받아든 보통의 소년들처럼 그럴듯한 자세를 취해 보는 대신 그것
을 그냥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더니 길이를 가늠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두 팔을 벌려
양쪽 끝을 잡았다.
문득,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보리스는 이유도 모른 채 란지에가 하는 양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다시 손으로 흰
칼집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손잡이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손을 벌려 가드의 너비를 만져 보
았다. 그는 검의 아름다움이나 정교한 만듦새에 감탄하고 있지 않았다. 흡사 숨겨진 무언가
를 찾아내려는 듯한 눈빛이었다.
무엇을? 그가 느꼈다던 검의 사악함을?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란지에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갑자기 빠른 동작으로 검을 뽑았다.
".....!"
그 순간의 동작은 검이라고는 만져본 일도 없는 것처럼 보였던 좀전의 모습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정말로 검을 다를 수 있는가 하는 것을 떠나서 발검 하나만은 확실히 익힌 듯한 자
세였다. 그런 상대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았던 보리스로서는 실로 뜻밖이었다.
란지에의 시선이 번쩍이는 검날을 훑어 내렸다. 눈빛은 매우 진지했다. 오랜만에 보는 윈터
러의 날은 여전히 희었고, 어지러울 정도로 날카로웠다. 그러나 란지에는 겁내는 기색이 없
었다. 아니, 어떤 표정도 없는 그 얼굴은 오히려 윈터러가 지닌 싸늘함과 동류인 양 보였다.
"죄송합니다만... 도련님, 이 검은 이것 자체로 하나뿐입니까? 혹시 다른 어떤 물건과 이름
을 공유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처음에는 무슨 말인가 했다. 검을 뽑아든 채로 선 란지에의 모습은 생각지도 못한 섬뜩함
을 지니고 있었다. 보리스는 저도 모르게 대답하려다가 잠시 후 마음을 고쳐먹고 말했다.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나도 몰라."
"그렇습니까."
그는 검을 다시 꽃았다. 그 자세도 흠잡을 데가 없었다. 윈터러를 돌려주면서 란지에는 보
리스의 눈을 의식한 듯 말했다.
"제가 검을 들고 할수 있는 일은 방금 두 가지가 전부입니다."
보리스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어째서 검을 다루지 못하면서 그것만을 배울 수가 있지? 한두 번 연습한 자세가 아닌데?"
란지에는 자조적인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귀부인들의 놀이지요. 소녀처럼 생긴 시동들을 좋아하면서 가끔은 그들에게서 남성적인
매력도 느끼고 싶어하는 악취미의 부인들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란지에의 말은 종종 열세 살 먹은 소년의 입에서 나오는 것치고는 지나칠 정도로 신랄해서
보리스를 당황하게 하곤 했다. 란지에는 자리에 앉더니 검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어버린 것
처럼 말했다.
"전에 도련님께서는 제 과거에 대해 물은 일이 있으셨지요?"
그래서 그가 방금 한 말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귀부인의 파티 시동이라는 불유쾌한 시
절의 기억에 대해서.
보리스는 고개를 끄덕 였다.
"그래 ."
"제게도 도련님의 옛 이야기를 좀 해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갑자기 왜 그런 것을 묻는지 알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얼음 벽 앞에 마주선 것 같은 느낌
의 소년이었는데, 어느 순간 이후로는 가끔씩 이렇듯 솔직하게 말을 꺼내는 때가 있었다.
"내 이야기라고 해 봤자... 별로 말할 것은 없으니까."
"누구의 삶은 얘깃거리로 가득 차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뜻밖의 대꾸에 놀라 고개를 들었지만 란지에는 곧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의 얼굴에서 나
온 것 치고는 드물게 편안한 미소였다.
"남의 얘깃거리가 되기 위해 사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도련님의 평범한 삶 이야기가 듣
고 싶군요."
상대가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 시절의 이야기를 이미 들었으면서, 그런 부탁에 응하지 않는
것은 어쩐지 부당하게 느껴졌다. 잠시 후 보리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였다. 백작이 정해 준 범위 안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마음 쓰다 보니
자연히 아주 어렸던 시절의 이야기가 주로 나왔다. 그게 몇 살 때 일일까. 다섯 살? 또는 여
섯 살?
그의 인생에서 결코 뺄 수 없는 존재인 예프넨의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자 처음엔 떨렸지
만 곧 괜찮아졌다. 그는 가능한 한 조심스럽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느껴지도록 예프넨을 묘
사하는 일에 저도 모르게 집중했다. 그의 서툰 이야기 속에서 예프넨이 지녔던 빛이 바래지
않도록 애썼다.
보리스가 기억하는 소년 시절의 예프넨은 생각이 많은 사람이었다. 어딘가 구석에 숨어서
뭔지 모를 골똘한 생각에 잠겨 있는 형을 보리스는 반나절을 헤매서라도 반드시 찾아내곤
했다. 동생이 나타나서 '드디어 찾았다!'는 듯한 얼굴로 말갛게 미소짓고 있으면 '은둔자 예
프넨'은 어쩔 수 없이 슬슬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장난 반 원망 반으로 동생의 머리를 슬
쩍 쥐어박은 다음 곧장 놀아주러 뛰어나갔었다.
란지에는 보리스의 이야기에서 우러나는 애정 깊은 어조를 느낀듯했다. 그가 예프넨의 일
을 입에 올릴 때면 공감한다는 표정으로 주의 깊게 귀를 기울여 주었다. 곧 보리스도 느낄
수 있었다. 란지에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사려 깊음은 란즈미를 향한 눈빛에서만 느낄 수 있
었던 그런 것이었다.
어쩌면 그는, 아파하는 누군가를 돌보는 마음에 이미 익숙한 것일 지도 모른다.
이야기는 점차 최근의 일들로 이어졌고, 드디어 저택을 떠날 때의 일을 언급할 때가 왔다.
보리스는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블라도 삼촌에 대한 이야기를 빼고 아버지가 사고로 늪에서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고 나니 예프넨의 죽음에 대한 것이 잘 설명되지 않았다. 이야기를 지어내는
솜씨가 없는 보리스는 말문이 막혀 더듬거렸다. 지금껏 그렇게 자세하게 설명해왔던 예프넨
이 어떻게 죽었는지 모른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잠시 후 란지에가 조용히 말했다.
"그러니까... 도련님의 형님께서도 돌아가셨는데, 도련님께서 많이 상심하셔서 그 때의 상황
을 잘 기억하지 못하시는군요."
자신이 기억하지 못했던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순간적으로 형을 내버려두고 자신만 살아
남겠다고 도망쳤을 때, 그 때의 기억을 저도 모르게 스스로 지웠었던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을 형은 그 때의 일을 탓하지도, 다시 언급하지도 않았다. 예프넨에게 그건
용서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겁에 질린 어린 동생으로서 당연한 행동이라고 생각했던 것
이다.
"그... 래......."
란지에는 차가웠지만 어떤 때는 놀랄 만큼 사려 깊은 소년이었다. 보리스의 얼굴을 쳐다보
더니 더 묻지 않고 입을 열었다.
"죽었다 해도 누군가의 가슴에 남아 있는 사람이 전 오히려 부럽습니다. 사람은 가끔 산
채로도 다른 사람의 가슴 속에서 죽어버리는 일이 있으니까요."
무슨 소리일까.
란지에는 이어 말하고 있었다
"도련님이라면 그런 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난......."
그것은 보리스에게 낯선 이야기였다. 란지에는 또한 보리스가 짐작 할 수 없는 어떤 힘겨
운 일을 겪은 것이 분명했다.
"잘 모르겠어. 만일 나를 자신의 가슴 속에서 죽여버린 사람이 있다면, 나도 그 사람을 똑
같이 죽여 버리면 되지 않을까? 그 사람을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 그런 것."
그런 것이 대안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보리스도 잘 알고 있었다. 란지에는 그냥 한 번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역시 그렇겠지요. 그리고 대신 마음속에 살아 있는 사람에게 더 잘해 주고요."
보리스는 수긍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란지에가 갑자기 표정을 바꾸어 빙그레 웃었
다.
"그러니 도련님도 주위에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좀더 잘하십시오. 돌아가신 분은 그만 잊
고요."
갑자기 뜨끔, 하면서 월넛의 일이 생각났다. 월넛도 그와 비슷한 이야기를 한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자신에게 몹시 잘해 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도 처음엔 보리스에게
마음을 열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것은 이성으로 설명
할 수 없는 뜻밖의 변화이기에 그도 어쩌지 못했고, 보리스도 다 깨닫지 못했다.
마지막 순간 그는 완연히 실망한 얼굴로 그의 곁을 떠나갔다. 서로한 마디 변명도 하지 않
았던 것이다. 다시 만날 수 있다면 그때 자신의 행동을 설명할수 있을까.
아니... 아니라고 생각했다.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애정이란 꼭 상호적인 감정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에게는 여러 사람
을 한꺼번에 사랑할 수 있는 심장은 없었다. 그에게서 예프넨의 기억이 지워질 즈음......
하지만, 결코 지워지지 않을 테니까.
"영원히 죽지 않는 사람도 있어. 몸이 죽는 것과는 달라, 너도 널 지워버렸다는 그 사람의
실체까지 죽이지는 못할 거야. 살인자가 아니니까, 나도 마찬가지야, 마음 속의 어떤 한 사
람을 죽인다면 난 살인자가 되는 것보다도 더 큰 죄책감을 느낄 거야. 그러고 싶지 않아. 절
대로."
란지에는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은 채 보리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반론하지 않는 것
이 오히려 낯설었다.
한참만에 그가 입을 열었다.
"어려서 저는 어머니하고만 살았습니다. 란즈미까지 세 식구였죠. 별로 부족한 것은 몰랐습
니다. 집은 켈티카에서 사흘 거리 정도 떨어진 전원에 있었고, 몇 사람인가의 고용인들도 있
었습니다."
그것은 푸르고 깊은 터널로 들어가는 듯한 이야기였다. 란지에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그때 저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어머니가 어떻게 하녀를 부리고 아름다운 옷을 입고 우리
에게 좋은 식사를 줄 수 있는지 궁금하게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태어날 때부터의 일이고,
당연하게만 느껴졌던 생활이었으니까요. 그때의 란즈미는 수줍음을 타기는 해도 곧잘 사고
를 치곤 하던 호기심 많은 아이였습니다. 지금의 모습으로는 상상하기 힘드시겠지만 말입니
다."
"......"
보리스가 닫지 않은 창 너머에서 복숭앗빛 꽃잎들이 작은 폭풍처럼 몰아치고 있었다. 잘게
부서지는 햇살 아래, 봄의 폭풍이었다.
"한 달에 한 번, 또는 두 번 정도 찾아오는 점잖은 신사가 있었습니다. 그 분은 오시면 흔
히 우리들에게 작은 선물을 주셨고 어머니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셨지요. 어렴풋이 저는
그 분이 어머니의 생활을 도와주는 후견인일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어머니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고, 또 오시면 돈이나 서류 같은 것에 대해서 복잡한 이야기를 하곤 하셨으니까
요. 먼 친척인데 어머니의 재산을 대신 관리해 주신다던가, 그런 분일 거라고 짐작해서 란즈
미에게도 예의바르게 대하라고 일부러 주의를 주었습니다."
란지에가 펼쳐 놓은 책장이 창문을 흔들던 바람에 한두 장 넘어갔다. 바랜 듯한 양피지 책
장 위로 바람과 햇빛이 동시에 흩날려갔다.
"오후에 시간이 나게 되면 그 분은 어머니 곁을 떠나 저와 몇 마디 나누는 일도 있었습니
다. 제가 읽고 있는 책에 대해 묻기도 하고, 켈티카란 어떤 곳인가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주
셨지요. 어린 저에게 그 분의 식견은 존경할 만한 것이라 저도 모르게 가슴 깊이 따르는 마
음이 생겼습니다. 저는 그 분이 학자가 아닌가 생각했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정치가
의 풍모가 강한 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어쨌든 저는 어느새 어머니만큼이나 그 분을 앞서
더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분도 저를 사랑해 주신다고 믿었습니다."
문득 란지에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한때 하인을 부렸다던 그는 이제 하인의 옷을 입고 자
신에게 말끔한 존댓말로 말하고 있었다. 나이에 맞지 않을 정도로 침착하고 어른스러워져
있었다. 흘로 세상을 견디며 살아가야만 했기에. 언제부터?
란지에의 이야기 속에 든 것은 깨질 듯 불안한 행복이었다. 모든 것이 그저 꿈이었던 것처
럼 그렇게 깨어질. 곧 나을 이야기를 짐작하면서도 그 행복이 부서지지 않기를 바라고 있는
자신이 그 앞에 있었다.
"아홉 살 때겠군요. 어느 날 어머니께서 저희 남매를 부르시더니 짐을 꾸리게 하시더군요.
이 집을 떠나 켈티카에서 살게 된다고, 매우 흥분하면서 또한 기뻐하고 계셨습니다. 저는 왜
좋은 것인지 영문도 모르면서 짐을 챙겨 집을 나섰습니다. 오래 살았던 집인데 막상 돌아보
며 아쉽다고 느낄 사이도 없었지요. 포장이 쳐진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고, 마차는 곧장 저희
가족을 켈티카로 실어다 주었습니다. 켈티카까지 사흘 걸린다는 사실도 그때 알았습니다. 대
신 다시 되찾아가 라면 절대 혼자서는 가지 못할 것 같더군요."
꽃잎이 하나 둘 책장 위로 떨어졌고 다시 불어온 바람이 페이지를 넘기자 마룻바닥으로 날
려갔다. 기억 속의 세월이 흐르는 것처럼, 아무도 읽지 않는 책 속의 이야기가 흐르고 있었
다.
"어머니께서 저를 껴안으면서 그 분을 만나게 된다고 하셨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래서 저
도 드디어 켈티카에 온 희망이 있구나 싶었지요. 그때 제 소원은 그 분이 저희 집에 오래
사셔서 제게 늘 좋은 이야기들을 들려 주셨으면 하는 것이었으니까요. 그것 말고는 더 바랄
것도 없었고요. 그래서 저희 가족은 마차에서 내렸고, 어떤 좋은 여관에 들어가 그 날 밤을
묵었습니다. 그러나 다음날 일어났을 때 거기엔 저희 세 식구밖에 없었습니다. 마차를 비롯
해서 저희를 켈티카까지 데려온 사람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후였으니까요."
란지에의 눈가가 희다고 느꼈다. 꿈의 한 조각 같은 오후의 빛이 진홍의 눈빛을 아릿하게
했다. 아픈 사람처럼 뺨이 파리해져 있었다.
"어머니조차 처음엔 영문을 몰라 여관 사람들을 붙들고 물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귀찮아하
는 듯한 태도뿐이었습니다. 그 날 저녁 무렵까지 어떻게든 알아보려 애썼지만, 결국 여관에
서 나오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누군가를 찾아가야 하겠는데 어머니에서는 켈티카
의 지리를 전혀 모르셨고, 저희에겐 타고 갈 말 한 필도 없었습니다. 가져온 짐이 너무 많아
서 여관에 팔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저희의 급한 사정을 알고 있는 것처럼 그들도 비웃으
면서 물건에 제대로 값을 쳐주지 않았습니다. 처음엔 잠시 맡아 달라고 했지만 그것조차 거
부하더군요."
급전직하의 이야기가 느린 음악처럼 나직하게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께서는 쉽게 절망하는 분은 아니셨습니다. 일단 마음을 결정하시자 드레스
상자며 아름다운 모자들, 신발들, 귀하게 여기던 장식품들을 모조리 팔고 쉽게 가져갈 수 있
는 귀금속류만 단단히 챙기셨습니다 그때는 초가을이었는데 저희한테도 입을 수 있을 만큼
최대한 많은 옷을 입히시더니 다른 것은 다 팔아버리셨지요. 그리고 그 여관을 떠나 며칠
동안 거리를 떠돌며 누군가의 집을 수소문 하셨습니다."
란지에는 갑자기 보리스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미소했다.
"찾았을 것 같으십니까?"
말문이 막혀 쳐다보고 있는데 란지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바람이 넘겨버린 책장을
다시 한 장씩 되넘기고 있었다. 책장 사이로 들어간 꽃잎 몇 장이 사뿐 날아올라 그의 손등
에 떨어졌다. 꽃잎만큼의 핏기도 없는, 단단한 뼈대만 유난히 두드러진 손이었다.
"예, 찾았습니다. 대략 나흘 정도 걸렸지요. 위풍당당한 저택이더군요. 저와 란즈미가 꿈에
서도 상상해** 못했을 정도로."
그 목소리에서 처음으로 새로운 감정이 느껴졌다. 가벼운 경멸이었다.
"어머니께서도 약간 주눅이 드신 듯했지만 그래도 가능한 한 당당하게 문지기와 이야기하
시더군요. 잠시 후 저희는 저택 안으로 안내 되었습니다. 그러나 들어간 곳은 응접실이 아니
라 어떤 작은 방이었습니다. 그리고 집사처럼 보이는 사람이 어머니만 불러내서 나가더군요.
한참이나 기다렸습니다. 서서히, 저는 점차 뭔가 모를 불길한 기분이 치밀어 올라 견딜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점차 란지에는 세세한 부분까지 놓치지 않고 말하고 있었다. 전혀 흥분하지 않았고 어조조
차 변하지 않았지만 평소 보던 그의 모습과는 달랐다. 아니, 실은 같았다. 평소 그가 보이는
모든 모습이 단지 약한 반영에 불과하다면 지금의 저 모습이야말로 가장 본질에 가까운 이
데아였다. 실체와 그림자의 관계처럼, 근원과 갈래의 관계처럼.
"란즈미를 내버려둔 채, 저는 일어나 밖으로 나갔습니다. 정확히 말해 나가려 한 셈이었습
니다. 문 앞에는 지키는 사람이 있었고, 그는 거칠게 저를 다시 안으로 밀어 넣더군요. 두
번, 세 번째인가 저는 갑작스럽게 뛰어나가 그를 밀치고 앞으로 달려갔습니다 여러 사람이
뒤쫓는 소리가 들렸지만 이미 멈춰 되돌아가기엔 늦어 있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자 복도를
가로막은 문 너머에서 뭔가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비명 소리와 물건이 깨어지고 구
르는 소리 등등.... 무작정 문을 밀치고 이어진 응접실로 뛰어들었을 때, 저는 낯선 도시에서
헤매던 며칠 동안 정말로 간절히 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얼굴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보리스는 입을 열다가 멈췄지만 란지에는 곧장 이어 말했다.
"예, 그 분이었지요."
그 감정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다 짐작할 수는 없었다. 그가 예프넨을 잃었을 때의 감정을
란지에가 모두 이해할 수는 없듯.
란지에는 잠시 말을 멈춘 채 자신이 넘기던 책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얼굴에서는 나타나
지 않았던 그의 감정이 바로 거기에 드러나 있었다. 책장은 그가 찾으려 한 부분보다 훨씬
앞쪽까지 넘걱져 있었다. 그토록 침착하게 이야기를 하는 동안 반대로 그의 손은 이성을 잃
고 있었던 것이다.
"......"
둘은 말없이 그 책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려앉았던 꽃잎이 페이지 한구석에 작은 얼룩을
남겼다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찍은 듯한 자국, 바람이 눌러 두고 간 손자국인 듯.
아련하고 나른한 봄의 오후와, 어울리지 않는 아픈 이야기들.
정말로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란지에가 조용히 말했다.
"그 사람이 제 아버지입니다."
이야기는 짤막하게 조각난 상태로 좀더 이어졌다. 그 사람, 결국 란지에와 란즈미의 아버지
였던 그 남자는 어떤 중대한 혼담을 앞두고 있었고, 그것을 위해 시골 별장에 숨겨 두었던
평민 아내와 그 자식들을 내버리기로 마음먹은 자였다. 어린 나이로서 적지 않은 비극을 겪
었던 보리스 조차도 치가 떨릴 정도로 그 자는 잔인하고 야비했으며 심지어 교활하기까지
했다. 그는 대도시 켈티카 한복판에 내버린 이들 세 식구가 다시 찾아올 것을 미리 짐작하
고 있었으며, 그에 대비하여 철저한 대책을 다 세워 두었다. 아니, 처음에 버린 것 자체부터
가 이미 잘 짜여진 포석이었다. 갑작스럽게 나락으로 떨어뜨려 비참하게 만들고, 절망하게
하고, 결국 포기하게 만드는 것.
그 남자가 보는 앞에서 란지에의 어머니는 하인들에게 무자비하게 걷어차이며 구타를 당했
다. 란지에가 뛰어들어왔음에도 그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애정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다
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계산된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반쯤 정신을 잃은 어머
니와 충격으로 멍해져 버린 란지에를 빈손으로 내쫓은 건장한 집사는 집안에 혼자 남은 란
즈미가 안전하기를 바란다면 다시는 켈티카에 발을 들여놓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들이 어린 란즈미를 두고 떠날 수 있었을 리 없었다. 정신이 든 어머니는 며칠 동안 저
택 주위를 맴돌며 딸만 돌려준다면 다시는 나타나지 않겠다고 비굴하게 눈물을 흘리며 사정
했다. 꼭 열흘이 지나서 란즈미는 다시 두 사람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이미 지금과
같은 상태가 되어버린 후였다.
"사죄는커녕 연민도, 심지어 경멸조차도 없었습니다. 그는 돌멩이 세 개를 다루듯 저희 식
구를 다루었습니다. 그의 가슴 속에서 저희 세 사람이 완전히 죽었다는 것을 정말로 완벽하
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를 죽였습니다, 다시는 살아날 수 없도록."
란지에는 잠시 말을 끊었다. 그가 감정을 다스리는 방법이었다.
"마음 속으로 저질러지는 어떤 살해는, 어떤 면에서 산 자에게 저질러지는 것보다 더 잔인
합니다. 그곳에는 시체는커녕 한 조각의 감정조차 남지 않게 되며 환생은 꿈도 꿀 수 없습
니다. 그렇다고 텅 비어 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 자리를 대신 메우는 것은 가슴이 먹먹할
정도로 질러지는... 비명과 같은 것이죠."
결코 끝나지 않는.
산 자를 죽였을 때는 단한 번 듣는 것으로 끝났을 그 비명.
"저도 죽어서 누군가의 가슴속에 남을 수 있다면 좋겠군요."
가벼운 어조였지만 그것이 진심이라는 것을 그 어느 때보다도 잘 알 수 있었다. 보리스도
그 순간만은 그 마음에 동화되어 자신 역시 그럴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하고 싶어졌다.
이미 죽은 사람의 마음속에서만 살아가겠다고 생각한 자신인데.
"그렇게... 될 수도 있을 거야."
언젠가부터 느끼고 있었다. 란지에의 모습은 마치 거울 속의 자신을 보는 듯, 닮았으면서도
또한 정반대였다. 그가 오른손을 들면 거울속의 그림자는 왼손을 들어올렸다. 그가 왼쪽으로
돌아서면 그림자는 오른쪽으로 돌아섰다.
그러나 돌아선 순간조차도 그들이 닮은 뒷모습을 가졌다는 사실만은 변함이 없었다.
그들이 속한 어둠 속에서, 그들은 아마도 반대쪽으로 걸어나갈 것이었다. 그리하여 다시 만
났을 때 하나는 동쪽에서, 다른 하나는 서쪽에서 온 양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었다.
그 때야말로 그들이 다시는 닮지 않을, 태생부터 다른 족속이 되는 때였다.
"그렇게 되겠지요?"
3. 스노우가드
그것은 실로 뜻밖의 이야기였다.
이제 그 소년, 귀타프 메르데르와 대결하기로 정한 날이 채 사흘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다.
시합은 백작과 내기를 한 친구라는 메르데르 자작의 집에서 이루어질 예정이었기에 출발은
내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 시점에서 백작은 갑자기 이상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제 형의... 무덤이라고요?"
백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일전에 네 이야기를 듣고서 이자보와 함께 많은 생각을 했었다. 네 형이라고 생각했던 사
람도 곧 다른 사람으로 밝혀졌고, 해서 네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우리가 해줄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싶었지."
보리스가 자기 손으로 직접 형을 묻었다는 말에 제대로 된 무덤이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
었다고 했다 그래서 다시 찾아내어 좋게 장례를 치러 주고 싶다는 이야기였다.
"이제 며칠 남지 않았지만 너는 우리 집에서 잘 처신해 주었고 로즈니스도 너를 좋아하는
것 같아서 나는 매우 만족스러웠지. 내가 베푸는 것이 이유 없는 친절이라고는 생각하지 말
아라. 너는 그만큼의 일을 해냈으니 말이다. 네가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연습한 것을 유감없
이 발휘해서 그 아이를 이겨주기만 한다면 그 이상 바랄 것이 없을 정도다."
이런 자리에서는 언제나 란지에도 로즈니스도 없이 보리스와 백작 내외 세 사람만이 만났
다. 보리스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아직 어리기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그
럴 여력이 없었던 탓인지 예프넨에게 정식 장례를 치러 주겠다는 생각까지는 해본 일이 없
었다. 언젠가, 라고는 생각했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 가까운 미래라고 생각하진
않았었다.
"말씀은 고맙습니다만 좀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백작부인이 거들었다.
"생각해 볼 것이 뭐가 있겠니. 험하게 묻힌 사람은 땅속에서도 편히 쉬지 못한단다. 그리고
무덤은 네가 괜찮다면 벨노어 영지 안에 만들어줄까 생각하고 있지. 네가 한때 우리 아들이
었으니 네 형도 벨노어 가문과 전혀 인연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 않겠느냐. 또 너도 언제고
원할 때면 형의 무덤을 보러 와서 여기 묵어도 좋고."
본래 이곳을 떠나고 나서 쉽게 돌아올 생각은 없었다. 아니, 가능하면 돌아오고 싶지 않았
었다. 그것 역시 더 생각해 볼 문제임에 분명했다.
"조금만 더 생각해 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 가능하면 떠나기 전에 결정하는 것이 좋을 테니 내일 오전까지는 이야기하거라."
백작이 그렇게 말하고 그만 가도 좋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보리스는 응접실을 나와 방
으로 돌아갔다. 란지에가 마침 책장을 정리하고 있었다.
"예의 회담이군요. 요즘에는 잦은데요."
보리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게 잦았던가?
"아마도 그 날이 다가와서겠지요. 차 한잔 드릴까요?"
란지에도 그가 다른 소년과 검술 시합을 벌인다는 것까지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끝나면 성을 떠나게 된다는 것은 몰랐다. 보리스는 문득 란지에에게 말하고 싶은 충동을 느
쪘다. 다른 것은 몰라도 적어도 떠나게 된다는 이야기만은.
잠시 고민하던 그는 약간 다른 방향으로 입을 열었다.
"차는 됐고... 란지에, 네가 전에 해줬던 이야기에 대해서 말인데, 어머니께서는 어떻게 되
신 거지? 지금은 너희 둘뿐이라고 했던 것이 기억나서."
란지에는 내려놓았던 책을 마저 꽂느라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간단히 말했다.
"헤어졌지요. 사고였지만 어쨌든 그렇습니다. 어머니의 행방이나 생존 여부에 대해서는 모
릅니다."
"그래......."
그가 묻고 싶은 것은 그 다음 부분이었다.
"그럼 너희 둘만 남게 되었을 때 넌 괜찮았니? 동생은 아프고, 갈 곳도 없고, 그런데도 두
렵거나 하지 않았어?"
그 말을 하면서 보리스는 어쩐지 란지에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
고 있었다. 그러나 뜻밖으로 란지에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도 어린아이였는데요. 너무 막막하고 허망해서 란즈미의 손을 잡
고 강물에라도 뛰어들어 죽고 싶었지요."
그런 말을 하고 있는데도 란지에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고 가벼운 미소를 띤 그대로였
다. 책을 다 꽂은 그가 테이블로 다가와 앉았다. 그제야 보니 테이블 위에는 열쇠 다섯 개가
매달린 낯선 열쇠 꾸러미가 놓여 있었다.
"그렇지만 넌 지금까지 잘 해냈구나. 동생도 돌보고......."
"여러 가지 우연이 도운 것뿐이지요."
란지에는 열쇠 꾸러미를 집어들더니 열쇠들을 하나하나 만지며 그 가운데 한 개를 골라냈
다. 그것을 꾸러미에서 끌러내더니 탁, 소리를 내며 보리스 앞에 놓았다.
보리스는 설명하라는 듯한 눈빛을 했다. 란지에는 아무렇지 않은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4층 전시실로 들어가는 비밀 됫문 열쇠입니다. "
"전시실이라고?"
전시실에 대해서는 로즈니스에게 언뜻 들은 일이 있었다. 백작이 개인적으로 수집하고 있
는 고서적과 값진 필사본들, 특히 오래된 태피스트리들을 모아 놓는 곳이라고 했다. 아주 중
요한 손님이 아니면 보여주지 않기 때문에 보리스는 물론이고 로즈니스조차도 함부로 들어
갈 수 없는 곳이기도 했다.
"그곳은 왜지?"
란지에는 여전히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답했다.
"내일 떠나시지 않습니까? 가시기 전에 한 번 보시라는 마음에서요"
보리스는 흠칫 놀랐다. 그가 떠나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란지에가 알기라도 한
건가?
그러나 란지에는 이어 말했다.
"어차피 돌아오시겠지만 그 전에 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아마 많은 것을 느끼실 수
있으실 겁니다."
란지에는 나머지 네 개의 열쇠가 달린 꾸러미를 자기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보리스는 테이
블 위의 열쇠를 내려다보다가 그토록 중요한 곳의 열쇠치고는 좀 지나치게 소박하게 생겼다
는 생각을 했다. 보석이나 장식은커녕 기껏 노끈에 질끈 매어진 누르스름한 쇳조각이 아닌
가.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마치 진짜 열쇠를 본을 떠서 조악하게 만든 모조품인 것처럼 보
였다.
"새벽으로 하지요. 4시경에 도련님을 깨우러 오겠습니다."
보리스는 또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느꼈다. 란지에가 그에게 의견도 묻지 않고 이렇듯 일방
적으로 일을 정해버린 일은 한 번도 없었다.
맨발로 걷는 바닥은 푹신하면서도 까칠했다. 벨노어 성에 온 후로는 늘 실내화를 신고 지
낸 까닭에 맨발의 느낌은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진네만 저택에서는 맨발로 뛰어 다니는 일
도 잦았었는데.
캄캄한 복도였다. 램프를 겉옷자락에 감춘 채 걷는 일은 몹시 조심스러웠다. 자수로 장식된
벽이 이어지다가 어느 즈음에서 끊어지고 싸늘한 대리석 벽으로 바뀌었다. 그가 멈춰선 곳
은 남쪽 탑의 경계였다.
앞서 걷던 란지에가 망설임 없이 벽 한쪽에 붙은 작은 쪽문을 열었다. 문은 잠겨 있지 않
았다. 그 안은 하인들이 청소 용구 등을 두는 창고였다. 둘은 안으로 들어섰다.
내부는 벽을 타고 좁고 길게 연결되어 있었다. 어쩌면 이런 식으로 성 전체를 빙 두르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드문드문 작은 쪽창도 있었다.
램프를 꺼내 들고 걷다가 드디어 한 곳에 멈추었다. 란지에가 손짓하는 곳으로 다가가자
엷은 빛이 새어나오는 틈새가 보였다. 거기에 문이 있었다. 그러나 한 사람이 웅크리고 간신
히 기어나갈 수 있을까 싶게 작아서 정말 인간이 드나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인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더구나 벽과 완전히 같은 재질로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에 얼른 봐서는 쉽사리 눈
에 띄지 않을 듯했다.
열쇠를 꺼내 문을 땄다. 그때 란지에가 말했다.
"저는 여기서 돌아가겠습니다. 너무 오래 계시면 날이 밝는다는 것, 잊지 마십시오."
보리스는 바닥에 무릎을 꿇으려다 말고 란지에를 올려다보았다. 램프빛으로 어렴풋하게 보
이는 란지에의 눈가가 희푸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들어가기 직전, 등뒤에서 그의 마지막 목소리가 들렸다.
"저를 다시 찾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무슨 말인가 생각하면서 보리스는 작은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붉은 천을 바탕으로 한 태피스트리에는 수백에 달할 듯한 군대가 각개 전투를 벌이는 장면
이 모사되어 있었다. 뿌옇게 보이는 태양이 서녘마루로 졌다. 천에다 짜 넣은 것이라 병사들
의 모습이 자세하지 않았고, 따라서 잔인한 장면도 없었지만 이상하리 만치 섬뜩한 태피스
트리였다. 마치 전쟁의 한 시점을 그대로 잘라온 듯, 핏빛 연못에서 방금 꺼내어 걸어 놓은
듯.
서재와 거의 맞먹는 크기인 전시실은 흡사 수많은 깃발이 서 있는 광경을 연상케 했다. 걸
어 놓을 벽이 모자랐기 때문인지 일부 태피스트리들은 받침대에 세워진 채 걸려 있었다. 보
리스가 지나가자 시간이 멈춘듯 보이던 그것들이 서서히 흔들리며 기척을 냈다.
기사 서임을 받는 젊은이는 은빛 갑주를 걸친 채 숙였던 고개를 약간 움직였고, 네 계절의
모습은 조금씩 서로의 시간을 향해 접근한 듯싶었다. 달빛이 내리는 절벽 위의 성, 구름다리
를 건너는 여왕과 시녀들, 룬(Rune)이 빼곡한 진(陳) 안에 앉아 눈을 감은 마법사, 숲을 향
해 일제히 화살을 쏘아보내는 궁수들.......
태피스트리 너머에는 고서(古書)들이 들었을 법한 상자들이 벽을 따라 죽 놓여 있었다. 그
는 천천히 구경했다. 태피스트리들은 모두 정교한 솜씨를 자랑하는 고급이었고, 아름다웠다.
몇 개인가 상자를 열어보기도 했지만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 뿐이라 다시 닫고 말았다. 필
사본이라고 했던 책들 가운데 몇 개는 세밀화가 그려진 아름다운 물건들이었다.
그렇게 태피스트리들 사이를 걷자니 좁은 통로를 따라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문득 태피스트리는 끝나고 낯선 물건들이 좌우에 늘어서기 시작하고 있었다.
창, 방패, 단검, 갑옷.......
백작이 이런 것을 수집한다는 이야기는 란지에도 하지 않았었다. 그는 좀더 앞으로 걸어갔
다. 그리고 걸음을 딱 멈췄다.
눈앞에 무언가 사라지고 빈 듯한 자리가 있었다. 어쩌면 지금까지 무언가 놓여진 것만 보
다가 맞닥뜨렸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보리스를 멈추게 한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알 수 없는 직감이 그의 시선을 떼지 못하게 했다.
그것은 검 모양처럼 생긴 빈 자리였다. 마치 주물을 뜨고 남은 틀이라도 되는 양, 그렇게
십자형으로 패인 자리를 흰 비단이 윤곽만 남기며 덮고 있었다. 보리스는 다가가 약간 망설
이다가 손을 대어 보았다.
그의 손이 천천히 십자 모양의 자국을 훑으며 내려갔다. 그 자리에 없는 검, 그 검의 인상
을 머릿속에 떠올리는 순간 전율이 그의 몸을 타고 내려갔다. 손이 멈췄다.
그것은 윈터러였다.
손잡이 끝에 달린 폼멜(pommel)의 둥근 고리 모양과 약간 위로 휘어진 좁은 가드(guard),
그리고 바스타드 소드의 긴 검신... 그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검이었다. 한때 그의 몸을 짓누
르며 걸음을 더디게 했던 검, 움켜쥐고 휘둘러보려고 몇 번이고 무한히 시도했던 그 검의
모양과 폭, 길이까지 그는 명확히 알고 있었다.
시선을 아래로 떨구자 더 놀라운 것이 보였다. 브레스트 아머(breast armer)인 스노우가드
가 들어가면 딱 맞을 듯한 상자였다. 역시 안은 흰 비단으로 싸여 있었다.
두 가지 물건을 기다리고 있는 받침대 아래 작은 금빛 명패가 붙은 것이 보였다. '윈터바텀
킷(Winterbottom Kit)'.
보리스는 몸을 떨었다.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가리키는 것은 너무도 명백했다. 그러나 너무 갑작스러워서 머리가 어떻게 되기라도 한 것
처럼 잘 판단이 되지 않았다. 몇 번이고 숨을 가다듬은 다음에야 겨우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가 있었다.
배신.
방안 가득한 수십 장의 태피스트리가 다가올 전운을 느끼는 전장의 깃발들처럼 떨고 있었
다. 그 아래 주인 없는 검의 자리를 바라보고 선 그는 전투에 쉽쓸리지 않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달아나야 하는 어린아이였다. 의지할 수 있는 거라곤 잘 다룰 수도 없는 검 한자루 뿐.
그런 그를 아예 빈손으로 만들기 위해 오랫동안 노려 왔다는 명백한 증거가 지금 눈앞에
놓여 있었다.
자신이 아노마라드로 오기까지 겪은 모든 일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뜻밖의 만남, 갑작스런 제안, 바뀌어진 운명, 그리고 지나칠 정도로 평온했던 가을과 겨
울.......
그동안 그는 방심하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마음을 놓고, 스스로 조심하고 있다고 믿으면서
실제로는 방심했던 것이다!
왜 무력한 어린아이인 자신의 물건을 다짜고짜 빼앗지 않았는가? 그것은 지금 눈앞에 만들
어진 윈터바텀 킷의 자리를 보면 명백히 알 수 있었다. 백작은 윈터러 하나만이 아니라 완
성된 윈터바텀 킷을 원했다. 그리하여 가면을 쓴 얼굴로 보리스를 돌보는 체, 그가 스스로의
입으로 스노우가드의 위치를 말해버리도록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예프넨의 무덤을 만들어주겠다고?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그가 그 가식적인 마음에 지레 감동하여 형을 묻은 곳의 위치를
말해버렸다면, 지금 자신이 과연 살아남아 있기나 했을 것인가?
지독하다.......
분노보다도, 치욕보다도 더 견디기 힘든 것은 바로 실망감이었다. 자신을 속인 대상들에 대
해서가 아니라 속은 자신에 대한 실망감이었다.
처음인가? 아니었다, 결코 아니었다. 이미 몇 번이나 마음을 다잡고 타인에게 속지 않겠다
고 다짐하지 않았던가? 윈터러가 없어졌을 때 느꼈던 그 지독한 심정은?
그들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신뢰하고 있었다. 경계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경계하고 있지 않았다. 무심코, 그래, 무심코 믿고 있었던 것이다. 어째서 자신의 마음
은 이토록 무르디 무르고 약해빠졌나.
지금껏 속으면서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그렇게 어리석은 선량함에 빠져서, 꿀이 든 단지
에 빠진 날벌레처럼.......
"후우, 후......."
이제 숨을 가다듬었다. 실망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나가야 했다. 이곳을 나가서 여길
떠나야 했다. 더 기다릴 때가 아니었다. 짧은 평화는 본색을 드러내었고, 그는 달아나야 했
다.
그러나 그냥 갈 수는 없었다. 결코 잃어서는 안될 물건, 윈터러를 되찾아야 했다. 이제는
그것을 잠시나마 자기 몸에서 떼어놓았다는 사실조차도 무한한 자책감으로 이어졌다. 그때
서야 그는 이곳에 들어오기 직전에 란지에가 마지막으로 한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자신의 충고를 받아들인다면 한**삐 여길 떠나라고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에게 다
시 돌아와 감사를 표할 것도 없이 즉시.
이제 그의 말을 따를 때였다.
램프조차 내버려둔 채 복도를 통과해 갔다. 창 틈으로 들어오는 빛이 있어서 이제는 그리
어둡지 않았다. 밖은 조금씩 훤해지고 있었다. 날이 밝는 것이 분명했다. 아침이 되어 사람
들이 일어나기 전에 떠나야만 했다.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란지에는 과연 어디까지 알고 있었던 것일까. 무엇을 의도
했기에 그를 이곳으로 들여보내고 그에게 이런 깨달음을.......
"오빠! 어딜 갔다왔어?"
순간적으로 숨을 훅 들이킨 보리스는 온 몸이 경직되는 듯한 충격을 느끼며 그 자리에 섰
다. 로즈니스가 방문 앞에 지키고 선 채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일찍 일어난 거야? 산책해?"
처음에는 그녀가 일부러 말을 꼬며 그를 다그친다고 생각했다. 이미 자신이 어디에 갔다왔
는지도 다 알고 있으면서. 그러나 곧 그런 생각은 긴장한 자신이 만든 착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로즈니스는 순진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오늘 오빠 싸우러 떠나잖아. 내가 행운의 선물을 주려고 했는데 방안에 없어서 깜짝 놀랐
어. 이렇게 일찍 일어나다니 너무 긴장한 것 아니야?"
로즈니스가 내민 손바닥에는 예쁜 네 잎 클로버가 수놓아진 작은 플란넬 주머니가 놓여 있
었다. 보리스는 간신히 입을 뗄 수 있었다.
"넌, 너도... 너무 일찍 일어난 것 아니야?"
로즈니스는 씨익 웃더니 대꾸했다.
"아냐. 나 잠 안 잤어. 밤 새워서 겨우 완성했단 말이야."
그제야 살펴보니 로즈니스의 눈가가 푸석한 것이 밤잠이 부족해 보였다. 자신에게 일어난
충격적인 사건에 너무 골몰해 있어서 그녀의 모습 따위를 자세히 살펴볼 여유가 없었던 것
이다.
"...피곤해 보이는구나."
주머니를 건네 받고 나서 침착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생각에 애써 미소를 지었지만 표정이
흔들렸다. 그러나 로즈니스는 착한 아이처럼 미소하며 말했다.
"오빠, 너무 긴장하지 마. 오빠가 져도 난 그 백치한테 안 시집갈 거니까. 그렇지만 열심히,
최선을 다해 줘. 알았지?"
보리스가 겨우 고개를 끄덕이자 로즈니스는 하품을 하더니 손을 흔들며 자기 방으로 돌아
갔다 보리스가 맨발이라는 사실도 눈치 채지 못한 채로.
그러나 이미 다른 사람들 몰래 탈출하기에는 늦어 있었다. 하녀 몇 명이 복도를 지나갔다.
그는 전시실 안에서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보내고 말았던 것이다.
방으로 들어갔을 때 창밖에 약한 비가 내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침이 되었는데도 밖이
밝지 않았던 이유가 그것이었다.
마차에 탈 때까지도 반쯤은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았다. 어떻게 아침 식사를 하고 어떻
게 여행 준비를 마쳤는지 생각도 잘 나지 않았다. 그는 반쯤 유령처럼 움직이고 휩쓸린 끝
에 이곳까지 와 앉아 있었다.
말끔한 사냥복 차림에 소년용 검, 비스듬하게 쓴 모자, 깨끗하게 닦아진 부츠. 어느 모로
보나 벨노어 가의 도련님으로 손색이 없는 모습을 하고 있는 자신이 거기에 있었다. 그 모
습이 지금처럼 낯설었던 적이 없었다.
윈터러는 저택에 그대로 남겨져 있었다. 그것을 가져오려 한다면 당장에 의심받을 것이 뻔
했다. 눈치챘다는 기색을 조금이라도 보인다면 모든 것은 끝장이었다.
비는 그쳤지만 날은 여전히 흐렸다. 그 탓인지 백작도 이번에는 말이 아닌 마차를 탔다. 백
작과 마주 앉은 채로 감정을 숨기는 일은 상상외로 어려웠다. 그런 일에 익숙하지 못한 그
는 굳은 표정을 쉽게 풀지 못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백작 역시 로즈니스처럼 그가 대결을 앞두고 긴장해서 그렇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마음을 편히 가지라고 한 마디 한 뒤 혼자 생각하도록 그냥 내버려두었다.
여행하는 것은 백작과 보리스, 비서 휴, 란지에를 비롯한 몇 명의 하인들, 그리고 열두 명
의 호위 기사들뿐이었다. 백작부인은 물론 로즈니스도 가지 않았다. 란지에의 이야기로는 백
작이 외부로 여행할 때면 수도로 가지 않는 이상 항상 열두 명의 기사를 대동한다고 했다.
"역시 마음이 내키지 않는 거냐? 아니면 오늘은 그런 생각까지 하기에는 좀 힘겨워서 그러
느냐?"
저택을 떠나고 한 시간 정도 지났을 무렵 보리스는 백작이 묻고 있음을 깨닫고 문득 정신
을 차렸다 언제부터 말을 걸고 있었는지 알 수 가 없었다.
"예? 아뇨... 예......."
얼결에 입을 열어 놓고 스스로 창피했다. 왜 더듬거리고 겁을 낸단 말인가. 좀더 대담하지
못하고. 저 자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새해가 오도록 끈질기게 기다렸는데, 왜 자
신은 감정 하나 숨기지 못하고 어쩔 줄을 모를까.
"좀 늦긴 하겠지만 오늘 밤 안에 도착하게 될 거다. 정한 날짜가 하루 남았으니까 그 동안
쉬면서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겠지. 그때 조용히 생각해 보거라. 이런 일은 떠올랐을 때 얼
른 결정하는 편이 좋지."
그러더니 백작은 다정스런 목소리로 덧붙여 말했다.
"이자보가 말한 것처럼 험하게 묻힌 사람은 편히 잠들지 못한다고 하니까 말이다. 네가 아
끼는 사람이라면 얼른 쉬게 해 주어야 하지 않겠니."
어제 사실을 알지 못했더라면 마음이 동했을 법한 이야기를 들으며 보리스는 새삼스러운
증오심을 느쪘다. 동시에 그 가증스러움에 치가 떨렸다. 그제야 느낀 거지만 백작의 태도는
최근 눈에 띄게 부드러워져 있었다.
스노우가드가 형과 함께 묻혀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 보리스는 천천히 그에게 일
어난 일들을 되새겨 보았다.
처음에 백작은 보리스가 이름을 말하자마자 진네만 가문을 알고 있다고 말했었다. 아마도
거짓이 아닐 것이다. 일 관계상 자주 트라바체스를 드나든다고 했던 만큼 진네만 가문에서
일어난 항쟁과 그 결과에 대한 이야기도 그 당시, 또는 그 후에라도 전해 들었을 가능성이
컸다. 블라도 삼촌의 손에 윈터바텀 킷이 한 가지라도 남아 있었더라면 그것은 당연히 칸
선제후에게 넘어갔을 테고, 그 소문이 곳곳에 나지 않았을 리 없었다. 칸 선제후는 다른 사
람의 눈을 두려워하여 좋은 물건을 감출 필요가 없는 명실공히 트라바체스의 일인자이니까.
당연히 널리 자랑했을 것이다.
보리스는 백작을 만났을 당시 윈터러의 존재를 감출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지만, 백작은
일부러 거기에 대해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었다. 아니 그래, 그때부터 이상하게 생각했어
야 했다. 딱 보기만 해도 사람들의 눈을 끌 정도로 좋은 검인데 그것의 출처를 묻지도 않았
고, 살펴보고 싶어하지도 않는다는 것은 분명 이상했다. 보리스가 방심하고 있지 않았더라면
벌써 그 사실을 눈치챘어야 했다. 그때 백작은 보리스가 지닌 윈터러를 눈여겨보고 스노우
가드도 갖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일까?
이렇게 되자 한층 더한 의심이 생겼다. 처음에 백작을 만나게 된 사건 자체는 과연 우연이
었을까? 여행 중에 우연히 만난 소년이 좋은 검을 갖고 있었고, 그가 알고 보니 진네만 가
문의 아들이었고, 그래서 윈터바텀 킷을 갖기 위해 즉시 계책을 꾸몄다는 가설은 어쩐지 신
빙성이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백작은 사실 진네만 가문의 일을 미리부터 알고 있거나, 또는 적어도 원터바텀
킷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는 것인가?
그 순간, 정말로 무서운 생각이 떠올랐다.
지금 그가 메르데르 자작의 집으로 가고 있는 목적, 과거에 했던 내기에 얽매여 로즈니스
를 그 집안의 백치 아들에게 주지 않기 위해 두 아들을 대결시키기로 했다는 이야기조차...
실은 모조리 꾸며진 것이 아닐까!
사실 여부를 알 수 없다 해도 그런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쿡쿡 찔리는 기분이 들
었다. 과연 그가 그토록 치밀한 백작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윈터러를 가지고 탈출할 수 있을
까?
그것은 전적으로 그가 얼마나 연기를 잘 해내는가에 달려 있었다.
4. 빛 없는 밤을 넘어
"어서 오게, 이 밤중에 오느라 고생 많았네."
"여기 오는 것도 정말 얼마 만인지 모르겠군 그래."
벨노어 백작과 메르데르 자작, 두 사람은 백작의 말에 의하면 어린시절 함께 같은 학원에
서 공부한 사이였다. 켈티카에 있다는 왕립 그 로메 학원은 한때 아노마라드가 공화국이었
던 시절에도 문을 닫지 않고 잘 버텨낸 곳이었다. 물론 두 귀족이 학원에 다니던 때는 아노
마라드가 공화국이 되기 전인 구(舊)왕국 시절이었다. 그 시절과 구별하기 위해 현재의 아노
마라드는 신(新)왕국이라고 불렸다.
메르데르 자작의 집은 파노자레 산맥에 속한 파노 산 산자락에 위치하여 저택이라기보다는
흡사 산장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는 사교 모임 같은 것보다는 탐험 여행이나 등산, 그리고
사냥을 유난히 좋아 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한눈에 봐도 호탕해 보이는 인상을 가진 몸집
큰 남자였다.
"이 아이인가? 이야... 양아들이라면서 어째서 이렇게 닮은 거야? 수상쩍잖아, 이 친구."
별로 말을 조심하는 성미도 아닌 듯했다. 그러나 백작은 화를 내기는커녕 크게 웃으면서
대꾸했다.
"이런, 의심 많은 친구야, 그럼 자네를 닮은 **곰 같은 아들이나 얼른 데려와 보라고."
그 아들은 마침 문을 열고 들어서고 있었다. 보리스는 자기 생각에 골몰하느라 그때까지
두 사람의 대화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지 않았으나 그때만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상대
방을 보았다.
"귀타프, 이리로 와서 인사드리거라."
"예, 아버지."
실버스컬 대회를 준비할 정도로 검을 잘 쓴다고 했던가? 그러나 어쩐지 검보다는 도끼, 심
지어 철퇴라도 휘두르는 것이 적당할 듯한 모습을 한 소년이었다. 키는 보리스와 비슷할 정
도였지만 딱 벌어진 어깨와 팔뚝이며 목, 허리 같은 곳은 정말 곰이라는 말이 딱 어울릴 정
도로 튼튼하고 우람했다. 게다가 인상 역시 영리하거나 날렵한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두 소년은 악수를 나누었다. 그는 그리 작은 편이 아닌 보리스의 손을 자기 손바닥에 묻어
버릴 정도로 털이 부숭부숭한 커다란 손을 가지고 있었다.
"밤이 늦었으니 오늘은 푹 자고, 내일은 몸이나 풀 겸 아이들 데리고 사냥을 가면 어떻겠
나? 요새 근처에 멧돼지 몇 마리가 어슬렁거리는 것 같은데 한 마리 잡아서 바비큐 파티나
해보자고. 어때?"
귀족치고 비교적 소탈한 어조로 떠들고 있는 메르데르 자작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보리스는
다시 한 번 의문에 사로잡혔다. 이 자는 정말로 귀족일까? 정말로 백작의 친구일까? 이 집
은 그의 집이 맞을까?
"그리고 자네의 그 예쁜 딸은 왜 안 데려왔나? 이거, 나는 딸 없는 아버지라서 그런지 유
난히 그 애가 귀여워 보이는데 말이야. 꼭꼭 숨겨 놓고 안 보여주긴가?"
"로즈는 가벼운 감기에 걸렸어, 집에서 안정을 취하고 있네. 안 그랬다면 오랜만의 걸음이
고 하니 데려왔을 텐데 그랬지."
"저런! 얼른 나았으면 좋겠군."
물론 로즈니스가 아프다는 이야기는 거짓말이었지만 보리스는 이제 사소한 거짓말 따위에
신경 쓸 기분이 아니었다. 이미 자정이 넘은 시각이었다. 간단한 밤참과 함께 가졌던 인사
자리가 끝나자 백작과 보리스는 각각 침실로 안내되었다.
하루 종일 마차를 탔으니 피곤했고 또 밤이 깊었지만 보리스는 쉽게 잠을 이를 수가 없었
다.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이 모두 짜고서 연극을 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문득 로즈니스가 생
각났다. 그 애도 그 연극에 동참하고 있었던 걸까?
조금 마음이 가라앉자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로즈니스는 그 자만심 때문에라도 자기
감정에 충실하고 솔직한 아이였다. 죽 곁에 있으면서 봐 왔기 때문에 평상시의 모든 행동을
그만큼 가짜로 해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기에는 너무 성격 자
체가 미숙했다.
잠은 점점 더 오지 않았고 보리스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이미 침실에 들어온 지 한 시간은
넘었다고 생각되었다. 잠이 오지 않는다면 주위 사정이나 살펴 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살금살금 걸어가 창문 밖을 살펴보았다. 2층이었지만 사정이 급하다면 뛰어내릴 마음도 있
었다. 그러나 창 아래쪽은 가시덤불이었다. 문 쪽으로 가서 손잡이를 돌려보았다. 문은 열렸
지만 복도는 램프들로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아까 메르데르 자작이 이 근처에는 가끔 짐승
들도 출몰하기 때문에 저택에 불을 끄지 않는다고 말했던 것이 생각났다.
갑작스런 일에 대비해서 그는 검을 껴안은 채 자리에 누웠다. 윈터러를 가지지 않고 도망
칠 마음이 없는 이상, 그럴듯하게 연기하며 저택까지 돌아간 다음 달아날 방법을 구상하는
수밖에 없을 듯했다.
그러나 다음날은 내키지 않는 사냥이었다.
밤잠을 ** 못해 피곤했지만 어깰 수 없는 노릇이었다. 백작은 열두 기사 중에서 일곱 명
을 선발했다. 메르데르 자작은 자신이 거느리고 있는 사냥꾼들을 십여 명이나 불렀다. 사냥
개도 수십 마리였다. 저택 앞마당이 온통 개 짖는 소리로 가득 찼다.
"사냥꾼 다섯 명과 사냥개 열 세 마리를 빌려주지. 자네와 자네 아들, 그리고 우리, 누가
먼저 멧돼지를 잡나 경쟁해볼까?"
"좋지. 하지만 데려갈 사냥꾼은 내가 고르겠네."
"좋을 대로 하게, 이 사람아. 내가 자네를 놀리는 사람인가."
보리스는 저택을 떠난 후로 처음 란지에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이상하게도
함께 있지 못하고 내내 떨어져 있었다. 보리스가 란지에를 쳐다보자 그가 눈을 약간 크게
뜨더니 몇 번 깜빡였다. 영문을 몰라 당황하고 있는데 백작이 말했다.
"하인은 두고 가거라. 말을 타고 달려야 할 테니까."
문득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 보리스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제가 이런 일에는 워낙 경험이 없다 보니 함께 가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세요."
"별 도움이 안 될 텐데......."
백작은 마땅찮은 얼굴로 둘을 내려다보다가 란지에를 보고 말했다.
"말을탈 줄 아느냐? 탈 줄 안다면 데려가마."
보리스는 바짝 긴장했다. 하인이 말을 탈 줄 아는 경우는 드물었지만 란지에는 일전에 검
을 뽑을 때도 특이한 재주를 보여준 일이 있었던 것이다. 란지에가 눈을 내리깐 채 대답해
왔다.
"탈 줄 압니다."
"흐음... 그래. 그럼 따라와도 좋다."
여전히 불만스러운 듯했지만 자신이 먼저 말한 이상 허락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탈 줄 알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그런 말을 꺼낸 것이 뻔했다.
메르데르 자작이 약간 으스대며 보리스에게 내준 말은 그 집에서도 특별히 정성 들여 키우
고 있다는 흰 콧잔등의 검은 말이었다. 란지에에게는 비교적 얌전한 갈색 말이 주어졌다. 다
른 사람들도 말에 오르고 이윽고 일행은 서쪽 숲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아침 숲은 이슬에 젖어 있었다. 속력을 내기 시작하자 오솔길 위로 내밀어진 잎새들이 이
마 위를 스치며 물방울을 뿌렸다. 말발굽 아래 풀들이 사각거렸다. 아직 뜨겁지 않은 태양이
목 뒤를 따끈따끈하게해 주었다. 피로로 인한 두통도 점차 가셨다.
오랜만에 타는 말이었고, 그 흔들리는 느낌이 오히려 좋았다. 숲으로 들어갈수록 점차 정신
이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저쪽이다!"
메르데르 자작은 신이 났다. 안 그래도 손님들에게 자기 사냥꾼과 개들의 솜씨를 보여주고
싶었는데 멧돼지가 일찍 나타나 준 것이다. 그는 신이 나서 소리 높여 명령했다.
"아조프! 계속 쫓아라! 도웰은 남쪽 진로를 막고! 징검다리 시내 쪽 절벽으로 모는 거다,
알겠지!"
컹, 컹컹...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하게 앞으로 몰려갔다. 멧돼지는 남서쪽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백작이 웃으면서 말했다.
"역시 전문가는 당하기 힘들군."
그러나 웃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방금 개들이 질러간 숲 쪽에서 갑자기 다른 멧돼지가 세
마리나 쏜살같이 달려왔다. 개들이 들쑤셔 놓는 바람에 놀란 것이 분명했다. 이 근방을 돌아
다닌다는 멧돼지들은 떼지어 이동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런!"
사냥꾼들이 활을 메길 사이도 없었다. 말을 탄 자들은 이리저리 흩어졌고 개들은 가까이
있는 적의 털가죽을 맹렬히 물어뜯었다. 세 마리나 되었기 때문에 공격은 체계가 없었다. 사
냥꾼들이 한 마리만 공격하게 하려고 개들에게 소리를 질러댔지만 한 번 흥분한 개들은 쉽
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게다가 멧돼지들은 이제 각자 다른 방향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사
냥꾼 한사람이 악을 썼다.
"카를! 돌프! 크렐! 이쪽이다! 휘익! 이쪽이라니까!"
메르데르 자작의 사냥꾼들은 거의 다 처음 나타난 멧돼지들을 따라갔기 때문에 이곳에 남
은 것은 백작 일행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백작도 당황하지 않고 곧장 명령을 내렸다.
"둘로 나눠져서 저 왼쪽의 한 마리만 몰아라! 델레메르! 그로미어스! 너희들은 다른 멧돼지
들이 공격하지 않도록 측면을 원호해라!"
기사들은 사냥에 큰 열의가 없는 편이었다. 그러나 백작의 명령이었으므로 별 수 없이 검
을 뽑아들었다. 백작은 곧장 한 무리를 지휘하며 달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숲 사이로 사
라졌다.
곳곳에 솟은 큰 나무들 때문에 공간이 좁아서 말에서 내려선 사냥꾼들은 기사들의 이동을
방해했다. 한 명이 말발굽에 채여 비명을 지르자 한 기사가 불쾌한 듯 욕설을 내뱉었다.
"저 자식이 죽고 싶어서 길을 막나......."
그 순간, 보리스는 저 말을 어딘가에서 들은 일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아주 생생한 광경이었다. 자신을 향해 똑같은 말이 던져졌던 그 때, 그는 매우 힘겹
고 고통스러웠으며 의지할 곳 하나 없는 고독한 상태였었다. 그래서 더 정확한 기억인 것일
까. 잊혀지지 않는 기억인 것일까.
"죄, 죄송합니다......."
사냥꾼은 그때 남은 거라곤 악밖에 없었던 보리스처럼 행동하지는 않았다. 사냥꾼이 주춤
거리며 비켜나자 델레메르라는 기사는 흥, 하고 코방귀를 뀌더니 말머리를 다른 쪽으로 돌
렸다. 그의 손에는 길다란 말채찍이 들려 있었다.
왜 지금까지는 저 모습이 비슷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은 비참
한 인형처럼 함부로 농락 당했을 뿐이었다.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은 이제 모조리 깨어졌다.
여덟 명의 기사, 그랬다. 항상 열두 명의 기사를 대동한다는 백작이 트라바체스에서 돌아올
때는 단지 여덟 명만을 데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여관 앞에서 그에게 시비를 걸었던 남
자들은 모두 넷이었다. 이쯤 되면 바보라도 알 수 있는 셈이 되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그 네 사람은 아노마라드 사람들만이 쓰는 '귀족' 이라는 단어를 썼었
다.
"도련님, 이쪽으로."
곁에서 란지에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보리스는 멍해지는 머리를 추스르며 간신히 그
를 뒤따랐다. 사람들이 흩어지고 있었다. 몇몇 기사들은 딱히 주어진 일이 없으니 멋대로 다
른 멧돼지를 쫓기 시작 했다. 그들 가운데 한 무리를 따라 정신없이 달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란지에와 그, 두 사람만이 숲 사이를 달리고 있었다. 앞선 란지
에는 능숙한 솜씨로 말을 몰아 달려갔다. 옅푸른 머리가 일정한 리듬으로 흩날리는 뒷모습
은 흡사 귀족 자제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그들은 서서히 무리 지은 사람들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란지에는 뒤도 돌아** 않았고
멈추지도 않았다. 커다란 나무들 사이로 접어들어 더욱 깊은 숲 속으로 달렸다. 주위에 아무
도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곳곳에 드리워진 나무 그림자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곳으로.
과악!
숲의 어두운 틈새에서 검은 새들이 솟아나 달려들었다. 포물선을 그리는 날개, 한 순간 스
러지는 깃, 긴 어둠 끝의 빛.
수많은 소리가 들리고 있는데도 고요라고 생각되었다. 물방울이 떨어지고, 잎새가 소곤대
고, 바람이 휘파람을 불고, 볕이 잔 그림자를 남기며 흘러갔다. 긴 터널을 지나 서서히 바깥
의 공기를 느끼기 시작하는 사람처럼 호흡이 트이고 있었다. 착각일지라도 이대로, 좀더 오
랫동안 달리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리고, 멈췄다.
히히히히히힝!
말이 길게 울부짖었다. 검은 말의 목에는 땀과 함제 흰 윤기가 후광처럼 흘렀다. 알 수 없
는 숲 속이었다. 나무로 둘러싸인 공터에는 봄볕이 뿌린 열기가 가득했다.
란지에는 말의 방향을 돌리더니 훌쩍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보리스도 말에서 내려섰다.
란지에가 입술을 약간 움직이더니 웃었다.
"결국 못 가셨군요."
"......"
보리스는 대답하지 못한 채 란지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란지에는 그에게 대답을
듣고자 하지는 않았다.
"자, 시간이 없습니다."
란지에가 타고 온 말의 옆구리에는 사냥 나온 다른 사람들처럼 간단한 도시락과 화살통이
매달려 있었다. 그는 도시락 꾸러미를 끌러 보리스에게 내밀었다.
"...란지에, 넌......."
"받지 않으실 겁니까?"
도시락을 받았을 때 보리스는 팔이 휘청하는 것을 느꼈다. 그가 버틸 수 없을 만큼 무거워
서가 아니었다. 기껏해야 빵을 비롯한 몇 가지 음식이 들어 있어야 할 도시락이 예상외로
묵직했기 때문이었다.
"이건?"
"멀리 가시려면 반드시 필요한 것이겠지요."
그제야 짐작했다. 아마도 돈이나 그 밖의 여행 물품일 것이다. 이런 것을 어떻게 란지에가
손에 넣었을까?
"그리고." *
란지에가 이번에는 화살통을 내렸다. 그 안에 갈색 가죽과 끈으로 싼 길쭉한 물건이 있는
것을 그제야 보리스도 알아보았다. 그는 할 말을 잃은 채 란지에를 쳐다보았다. 말을 하려
해도 목이 막혀 나오지 않았다. 란지에가 물건을 꺼내자 반대쪽 끝에서 익숙한 검의 머리가
드러났다.
자신이 가지고 나오려 했다면 분명히 백작의 눈에 발각당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러나 하인인 란지에의 물건은 백작도 주목해서 ** 않은 모양이었다. 그것은 그의 눈에도
마치 화살을 여러 개 싸서 묶어 놓은 것처럼 보였으니까. 활을 쏠 줄 모를 것 같은 란지에
가 떠나기 전에 활과 화살을 달라고 했을 때 보리스는 그 이유를 전혀 몰랐었다.
"어째서 내게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넌... 넌 내가 어떤 처지에 처한 줄도 모르면서......."
"모릅니다만, 짐작은 갑니다."
란지에는 이런 것쯤 부담스럽게 느낄 필요 없다는 듯 가벼운 표정이었다. 그는 말등을 쓰
다듬으며 몸을 약간 기댔다. 오랜만에 보는 그 자신다운 표정이었다. 파티의 밤에 소매를 끄
르고 머리를 넘기던 때처럼.
"다만, 죄송합니다. 좀더 일찍 확신했더라면 더 나은 때를 잡을 수 있었을 텐데, 저 역시
도련님을 조금쯤 의심하고 있었던 거지요. 제가 이 검을 보다 일찍 살펴볼 기회가 없었던
것이 유감입니다. 그랬다면 제가 품었던 모든 의문에 좀더 빨리 답을 내릴 수 있었을 것이
고, 지금보다 위험을 덜 무릅쓸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보리스는 아직까지도 란지에를 완전히 믿어야 할 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
것이 지금껏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큰 친절이었기에, 그리고 큰 친절을 베푸는 자들은 보통
그 뒤에 더 큰 **를 숨기고 있었기에.
"어떤 의문이었지?"
란지에의 눈동자가 점차 계산된 침착함에서 자유인만이 가질 수 있는 그것으로 변해 갔다.
그는 자유 의지로서 보리스를 돕고 있었다. 동정심, 연민, 충성심, 보답과 같은 감정과는 무
관하게 일대일의 사람으로서.
"저는 처음부터 도련님께서 정말로 양자가 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은 아니라는 느낌을 받
았습니다. 그러나 한동안은 도련님 역시 백작의 **에 동참하여 무언가 모를 목적에 봉사
하고 있다고 여겼지요. 도련님 때문이 아니라 백작이 무언가 획책하고 있다고 여겼기에 그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겠다고 마음먹었고, 그리하여 천천히 도련님을 관찰해 왔습니다. 그리
고 아마 잘 모르시겠지만......."
란지에가 약한 미소를 띄웠다. 평소의 진지함보다는 편안함이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도련님께서 이곳에 오기 전부터 저는 이 집안의 여러 가지 비밀들을 손에 쥐고자 노력해
왔었습니다. 그것만이 제 살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본래 저를 사들였던 켈티카의 귀족
으로부터 도망쳐 온 몸 입니다. 백작은 그 사실을 다 알고서 저희 남매를 받아들였습니다.
아마 필요하다고 느낄 때 란즈미를 미끼로 제게 거절할 수 없는 요청을 하려 할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일지도 이미 짐작이 갑니다. 그래서 저는 그때 제시할 반대의 카드를 손에 쥐기
위해 이곳에 도착한 첫날부터 부단히 노력해 왔습니다. 백작의 서재, 침실, 숨겨진 서랍들의
열쇠를 차례로 손에 넣었고 비밀로 하고 있는 서류들을 조금씩 읽어 나갔습니다. 그 즈음
도련님께서 오셨고, 도련님의 목적을 관련시켜 추리해 나가는 과정에서 윈터바텀 킷이라는
물건의 존재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이름과 월넛 선생님 때문에 보게 된 그 검을 연관시키
게 되는 데는 좀 시간이 걸렸습니다. 전 윈터바텀 킷이라는 것이 무엇을 가리키는 말인지
전혀 몰랐으니까요. 제가 읽으라고 권해드린 "역사 속의 무구(武具)들"이라는 책에도 이것에
대한 언급은 없었지 않습니까?"
란지에는 책 한 권조차 이유없이 권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 때도 보리스의 반응
을 떠보고 있었을 것이다.
"도련님께 직접 사실을 확인하는 대신 백작의 전시실 열쇠를 구해서 들어가 보았습니다.
그리고 도련님께서 본 것과 똑같은 것을 보았지요. 물론 그렇게 하기까지는 몇 달이나 되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 즈음 도련님제서는 제게 검을 자세히 볼 기회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복숭아꽃이 흩날리던 날 검을 뽑아 들었던 란지에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때 그가 살핀 것
은 윈터러의 모양새와 전시실에 마련된 자리와의 유사함이었다.
"아마 그 전에 도련님께서 제게 돌아가신 분의 이야기를 해 주시지 않았더라면, 전 도련님
역시 그 검의 가짜 주인으로서 실제로는 백작의 목표를 위해 봉사하고 있을 뿐이라고 결론
내렸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보리스는 뭐라 답하지 못했다 란지에는 그가 짐작한 것보다 훨씬 지독한 줄타기를 하며 살
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실수없이 그 모든 일을 해낼 정도로 뛰어난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란지에가 불쑥 말했다.
"이제 의심이 풀리셨습니까?"
보리스는 자신이 란지에를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가 눈치챈 것이 부끄러웠다. 그러나
그냥 이대로 떠날 수는 없었다.
"왜지? 왜 이런 위험을 무릅쓰는 거지? 나의 일일 뿐인데, 그것이 너와 무슨 관계가 있다
고?"
란지에는 이제 가벼워진 말에 올라탔다. 그리고 말했다.
"제게 별로 재능은 없습니다만, 그나마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은 힘의 흐름을 깨닫는 것입
니다. 힘이 어디에서 발생해서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하여 종막에 이른 힘이 무슨 작용을
일으키게 되는지. 바로 당신에게는 하나의 힘이 뭉쳐져 있군요. 그것을 흘려 보내려는 것뿐
입니다. 아직은 부딪쳐 폭발할 때가 아닙니다. 아마도 저는 당신을 좋아하지만......."
란지에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갑자기 삼켜버린 것처럼 나직이 말했다.
"저는 별로 순수한 인간이 못 됩니다."
보리스도 이제 말에 올랐다. 그는 마지막으로 물었다.
"이제 돌아가면 넌 어쩌지? 백작이 이런 일을 안다면......."
란지에는 그 말을 끝까지 듣고 싶지 않다는 듯 고개를 젓더니 약간 웃으면서 말했다.
"모든 일을 제쳐놓고 도련님을 가장 우선으로 모시라고 하셨으니, 주인님께서도 별 말씀은
못하시겠지요."
보리스는 그것이 우울한 농담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란지에가 이런 짓을 하고서 백작의
손에서 무사할 수 있을까? 아니면 그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영리한 란지에이니 만큼 무슨
다른 수를 꾸며 두었을까?
모른다, 그것은.
그러나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그는 가야 한다. 그것이 어떤 것이었든, 과정에 불과한 아픔
은 이겨내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에.
비록 고통을 남기더라도.
두 마리의 말이 다각거리며 서로 돌아섰다. 란지에는 서쪽으로 뻗어 내려간 사면을 가리켜
보였다. 그 아래는 백포도주의 아라종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보리스는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나지막이 말했다.
"잊지 않고... 꼭 갚겠어."
말이 달리기 시작했다. 가파른 내리막이었다.
"다시 만날 때는, 당신의 이름을 부르겠습니다."
보리스가 마지막으로 들은 말이었다. 달리기 시작한 말발굽 소리에 묻혀 목소리는 환영처
럼 아련히 울렸다.
다시 밤이 시작되고 있었다.
어느새 접어든 평야를 가로질러 달리고 있었다. 왜 이렇게 어두울까, 누구의 눈에도 띄고
싶지 않은 그를 숨겨 주려 그런 것이리라. 달빛도, 별빛도, 왜 이리 흐릴까. 알고 있던 것을
모두 잊고 다시 처음부터, 하나씩 새로이 알아가라는 것처럼.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몰랐으나 돌아설 수 없다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 두려웠으나 동시에
두려워하지 않았다. 껍질을 벗어버린 듯 홀가분했지만, 동시에 남기고 온 것들이 마음에 걸
렸다.
다시 혼자였다. 그러나 전보다는 성장해 있었다.
아주 오래 달려나갈 것이다. 이 길이 어디로 가 닿든 간에.
어둡지만, 어두워서 더욱 모든 것을 감싸줄 것 같은 밤속으로.
빛 없는 밤을 뚫고서.
3장.Intensify
1. 첫 살해
다음날이 밝아올 무렵, 보리스는 온 몸에서 통증을 느꼈다. 뼈와 살이 어긋나 제멋대로 삐
걱거리는 느낌이었다. 산길을 내려오고 평야를 달리는 동안 가끔씩 느려지다 빨라지다 했지
만 너무 오랫동안 말 위에서 흔들렸던 것이다. 더구나 마지막으로 말을 탄 것은 이미 작년
의 일이었다. 그의 온 몸 근육은 최근 말타기에 적합하게 단련되어 있지 않았다.
그가 추적을 깨달은 것은 푸르스름한 새벽이 하늘 곳곳으로 번져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처음에는 반쯤 중독된 듯 앞으로 달리기만 했기에 앞일도 뒷일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밤이 올 무렵부터는 어지럽던 머리도 맑아져 냉정한 판단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다
시 혼자라는 것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다시 아무도 보호해 주지 않는 혼자로 돌아간
것이다.
백작이 언제쯤 그가 없어진 것을 깨달을 수 있을까. 점심 시간이 가까워 올 무렵이었으니
만큼, 식사시간이 되었을 때 돌아오지 않는다면 수상쩍게 생각할 것이었다. 데리고 간 기사
를 풀어서 주위를 수색할 테고, 란지에를 만난다면 아마도 추궁하겠지. 그가 뭐라고 대꾸를
할까. 그로서는 짐작하기 힘든 노릇이었다.
메르데르 자작 역시 거느린 무사들이 소수 있었고, 그들 역시 추적에 동참할 것이 뻔했다.
벨노어 성으로도 곧장 연락을 넣겠지. 빠른 말을 탄 연락자에 의해 소식이 들어가기까지 걸
리는 시간은 대략 반나절. 곧장 남은 기사들이 총동원되어 그를 찾기 위해 기를 쓸 테고,
그 즈음이면 그도 완전히 숨기는 어려울 것이다.
어디로 가는 것이 적당할까. 사람이 없는 곳? 아니면 오히려 사람이 많은곳?
어느 쪽이 좋다고 생각되든, 그에겐 선택해서 갈 수 있는 방법조차 없었다. 그가 있는 곳이
지금 벨크루즈인지 아라종인지도 구별할 수 없는 그였다. 동서남북을 간신히 판별하는 것이
다였고, 주위는 온통 비슷비슷한 산마루와 녹록한 평야였다 아노마라드는 지독히 넓었다. 작
은 점에 불과한 그가 밤낮으로 달리고 달려도 벗어나기 힘들 정도로.
그래서 추적자를 만났을 때, 그는 오히려 덜 당황할 수 있었다. 어차피 닥칠 일이라고 생각
하고 있었다. 그가 말을 타고 하루 반 동안 갈 수 있는 거리란 뻔한 것이었다. 추적자는 두
명의 기사였고, 그들은 소년을 보자 박차를 가해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인적 하나 없는 새벽녘의 들판과 짙푸른 빛이 번져 가는 하늘, 등뒤로 솟은 산, 곳곳에 돌
부리와 바위가 솟아오른 길 없는 땅.......
"하아!"
푸르릅!
보리스의 말은 지쳐 있었다. 도망자와 추적자가 포물선을 그리며 들판을 꺾어 돌았다. 회색
바위들이 시야에 뛰어들었다가 획획 뒤로 지나쳐갔다. 애써 다리에 힘을 주었지만 오래 버
틸 수 없으리란 것을 직감했다. 메르데르 자작의 말이 그래도 훌륭했기에 지금까지도 잘 버
텨준 셈이었다.
말라비틀어진 잡목들이 흩어진 나지(裸地)가 나타났다. 흙먼지가 일어나 말발굽을 하얗게
뒤덮었다. 보리스는 최대한 몸을 말 등에 붙인 채 달리고 있었다. 오래 전 형이 가르쳐 준
대로 잘해내고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러나 잘해내는 것만으로는 소용없었다. 살아남지 못하면 다 쓸데 없었다. 그가 나이에 비
해 뛰어나다고 해도 어른들과 상대하고 있는 처지였고, 그들에게 이기지 못하는 한 객관적
인 평가 따위는 말장난에 불과한 것이었다.
드디어 싸우지 않으면 안될 때가 왔다. 두 마리 말은 이제 10여 미터 뒤까지 따라붙었다.
그중 한 명은 창을 들고 있었다.
도망칠 수 없었다.
어디서 내려서야 할까. 그는 자신의 실력에 대한 확신을 떠나 상황이 요구하는 대로 행동
했다. 그때 저만치 낮은 허공에 무리 지은 새들이 빙빙 돌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들
가운데 한 마리가 쏜살같이 아래를 향해 활강했다. 다른 새들도 뒤를 이었다. 그 모습은 곧
시야에서 지워져 버렸다.
위험한 도박이 머릿속에서 떠오른 것은 그때였다.
조금 더, 조금 더 가까이 접근해갔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말은 마지막 힘을 짜내
어 ** 듯 달리고 있었다. 너무 빠르다고 느껴질 정도로... 그것은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여
기쯤일까, 아니, 조금 더일까, 이미 지나쳐 버렸을까.......
"하!"
힘껏 고삐를 움켜쥔 채 강한 선회를 감행했다. 빨리 달리던 말은 제대로 방향을 틀지 못했
지만, 그는 최대한의 힘과 실력을 다해 있는 대로 몰아붙였다. 아니면 죽음이었다. 간신히
오른쪽으로, 조금 더 틀어진 채로 말은 아슬아슬하게 가장자리를 스쳐갔다. 발굽이 찬 돌부
리가 부서져 아득한 소리를 내며 저 아래로 떨어져 갔다.
타닥, 툭, 툭, 툭, 투두둑.......
"억!"
외마디 비명 소리가 왼쪽 귓전을 때렸다. 찢어질 듯 울부짖는 말의 소리도 들렸다. 날카로
운 것이 돌을 긁어내는 듯한 파열음과 부서져 흐르는 돌멩이들의 소리, 생각보다 더, 폐부를
깊숙이 찌르고 들어오는 소리들.
귀를 막고 싶었다. 그러나 손은 고삐를 놓을 수 없었다. 성공했을까, 둘 다 떨어졌을까.
아아아아아아악.......
그 끝은 절벽이었다. 결국 한 명의 적은 속력을 이기지 못하고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
다.
"저 쳐죽일 놈!"
뒤늦었던 말 한 마리가 간신히 절벽 끝에서 멈출 수 있었던 모양이었다. 보리스의 말이 지
쳐 속력이 떨어지는 동안, 분노한 소리를 지른 적의 말이 질풍처럼 휘몰아쳐 왔다. 눈앞은
잡목숲이었다. 그가 다시 한 번 방향을 틀려고 애쓰는 동안 직진한 적이 곧장 따라붙었다.
결국 말은 잡목숲 속으로 뛰어들어갔다. 몸을 가리기에는 어림없었지만 진로를 방해하기에
는 오히려 충분했다. 마음을 비워야 할 시점이 왔다. 보리스는 말의 속력을 늦춰가다가 윈터
러만을 움켜쥐고 바닥으로 뛰어내려 한 바퀴 굴렀다. 말은 그러고도 몇 미터 더 가서 쓰러
질 듯 멈췄다.
"이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아!"
적이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도 말에서 내렸다. 장검을 뽑아들고 성큼 다가서는 그
모습이 저 호수의 괴물만큼이나 위압적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여기엔 그를 지켜줄 형은 없
었다.
보리스도 윈터러를 뽑아 들었다.
"......."
떨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비록 저 노련한 전사와는 비교도 안 되겠지만 그도 최대한의
노력으로 지난 겨울을 보냈었다. 산 자는 점점 더 강해진다. 살아남아서 더 강해질 것이다.
형이 물려준 검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도록, 비록 죽더라도.......
아니, 난 결코 죽지 않아!
"하아아압!"
지난 겨울 동안 그의 유일한 대련자는 월넛이었다. 그와 수십, 수백 번을 되풀이하여 싸운
결과 그는 어느새 그와의 싸움에서 다칠 것을 두려워하여 몸을 사리지 않게 되었었다. 지금
적이 그 자라고 생각했다. 그때처럼, 그렇게 해보리라 마음먹었다.
챙!
그러나 검이 첫 번째로 부딪쳤을 때, 그는 손목이 꺾어질 듯한 고통을 느끼며 압도적인 힘
의 차이를 절감했다. 맞붙었던 검이 떨어지는 순간, 간신히 뒤로 물러났지만 적은 전혀 사이
를 두려 하지 않았다. 월넛은 그를 가르치고자 했지만 이 자는 적이었다. 더구나 상대는 생
쥐만도 못한 어린아이였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다만, 소년이 쥔 검만은 그의 눈길을 끌었다.
새벽에서 아침으로, 이제 붉게 변한 햇볕이 표면에 닿을 때마다 현란한 광채가 눈을 부시
게 했다. 게다가 소년은 비교적 검을 가볍게 썼다. 보리스가 있는 힘을 다했기 때문이었지만
사정을 모르는 기사의 눈에 저 검은 보기보다 가볍다는 인상을 주었다.
바스타드는 제대로 수련하지 않는 한 스무 살이 되어도 제대로 휘두르기 힘들다. 철로 만
들어진 검이라면 일정한 무게가 있을 텐데 저토록 가벼운 검의 정체는 뭐지?
백작은 부하들에게 윈터러에 대한 이야기를 해준 일이 없었다. 두번 검이 맞부딪치고 다음
순간, 보리스가 민첩하게 왼쪽으로 몸을 빼며 검을 똑바로 찔렀다. 순간적으로 검의 모습을
보며 한눈을 팔다가 팔꿈치를 찔리고 말았다. 소년은 그가 얕본 것보다 기본기가 탄탄했다.
"건방진 **가!"
그래, 단지 장식품만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팔꿈치에 두터운 가죽 보호대를 붙이고
있었는데 소년의 검은 간단히 그것을 잘라 버리고 팔꿈치에 제대로 된 상처를 입혔다. 피가
서서히 흘러내려 손목을 적셨다.
"원대로 죽여주지!"
적의 검이 순식간에 빨라졌다. 강한 힘으로 검을 눌러 밀치고 사슬 건틀렛(Gauntlet)을 낀
손으로 검을 쥔 보리스의 손을 짓눌렀다. 동시에 발을 들어 배를 걷어차려 했다.
그러나 일전에 난데없이 시작했던 달리기로 오랫동안 다리를 단련해 온 보리스는 재빨리
발을 올려 상대방의 오금을 비스듬히 걷어차 버렸다. 약간 비틀거린 적은 급히 물러나 곧장
베기로 들어갔다. 어깨를 한 번 피하고, 다시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려 피한 보리스는 상대방
이 그를 죽이려 하지는 않는다는 걸 눈치챘다.
백작은 그가 생포되어 오기를 바라는 모양이었다. 아마도, 스노우 가드를 함께 얻어 윈터바
텀 킷을 완성하기 위해서겠지. 그가 죽는다면 스노우가드의 행방을 말할 사람이 아무도 없
을 테니까.
다만 팔이나 다리 하나쯤 잘라 버린대도 문제될 것은 없었다. 적은 보리스가 의외로 검을
여러 번 연속해서 받아치는 것에 의아해하고 있었다. 다시 한 번 부딪쳤을 때, 윈터러가 희
한한 소리를 내며 우웅, 하고 떨었다. 보리스는 깜짝 놀랐다. 마치 프로즌 브레이크(Frozen
Break), 극저온 폭발이 일어날 때와 비슷한 소리가 아닌가!
그러나 지금 그에게는 스노우가드가 없는데?
적도 흠칫 놀란 모양이었다. 약간 떨어져 경계 태세를 취하다가 다시 생각을 바꾼 듯 성큼
방향을 돌렸다. 반 바퀴 뒤로 돌아가자 보리스도 몸을 돌렸다. 검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날
아왔다.
츠컥!
검은 보리스의 옆구리를 후벼팠다. 갑옷이 없었기 때문에 단숨에 핏줄기가 솟았다. 허리가
끊어지는 듯한 아픔이 온 몸을 휩쌌다.
"......."
이토록 큰 상처를 입어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당황한 마음이 더욱 컸다. 페이
스를 잃는 순간 적은 어느새 검을 쥔 손을 강하게 내리쳤다. 비척, 검이 손에서 떨어져 나가
려는 순간 반대쪽 손으로 간신히 부여잡았다. 검을 놓치는 것만은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
다.
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적은 칼등으로 그의 옆얼굴을 냅다 후려쳤고, 보리스는 쓰러지
지 않으려고 검을 바닥에 짚었다. 적은 곧장 접근하더니 한 손으로 그의 목을 움켜쥐어 졸
랐다.
"어린놈이 제법 버텼다만 이제 끝내야지."
적은 바닥에 짚은 보리스의 검을 옆으로 탁 걷어차면서 그를 바닥에 쓰러뜨렸다. 그리고
흙 묻은 발로 손을 밟으면서 윈터러를 보리스의 손에서 비틀어 빼냈다.
"흐음......."
눈빛에 서서히 탐욕이 어렸다. 검은 놀랄 만큼 예리하고 신기할 정도로 가벼웠다. 또한 아
름답기까지 했다. 그는 눈으로는 칼날을 훑으면서 발로 소년의 가슴이며 머리 등을 가리지
않고 걷어찼다.
"이런 검을 갖고 도망쳤으니 주인님께서 네놈을 잡아오라고 하셨구나. 제 분수도 모르는
놈 같으니라고."
윈터러를 잠시 흙바닥에 푹 꽃아 넣고 그는 보리스의 멱살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축 늘어
진 소년을 나무 등치로 밀어젖히며 몇 번 처박았다. 백작을 만났을 때 그를 족치던 자들의
방식과 확실히 유사했다. 보리스가 의심하고 있는 그대로.
그는 보리스를 도로 바닥에 내던지더니 윈터러를 다시 한 번 흘끔 보았다.
"쓰읍......."
이 자는 이제 확실히 고민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몹시 탐나는 검이었다. 검사 생활 십 몇
년 만에 이렇게 좋은 검은 처음 보았다. 방금 바닥에 찔러 넣을 때도 놀랄 만큼 부드럽게
들어가지 않았던가.
그러나 겨우 검 한 자루 때문에 오랫동안 섬겨 온 주인을 배반하기는 좀 뭣했다 다만 모든
일이 숨겨질 수만 있다면 검도 갖고 백작에게도 시치미를 뗄 텐데 싶었다.
그때 저 교활한 녀석의 계략으로 절벽에서 떨어져 죽은 동료가 생각났다.
그래, 저 녀석도 말과 함께 절벽으로 밀어 버리자. 떨어져 죽은 시체 옆의 검을 누가 집어
갔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닐 테고, 그는 단지 소년을 ** 못한 체 하면 되는 것이다. 죽
은 자와 소년은 맹렬히 추격전을 벌이다가 둘 다 절벽을 ** 못하고 아래로 떨어져 죽은
것처럼 보일 것이다. 방금 전에 저 동료 기사와 마주친 것도 우연이었으니 다른 녀석이 또
이 길을 탐색하러 올 테지. 백작이 상금을 제대로 내걸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보리스는 쓰러진 채 상대의 얼굴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가 어떤 문제를 생각하고 있는지도 대강 짐작 했다. 그러나 손쓸 방법이 없었다.
"일어나."
한 손에는 윈터러를, 또 한 손에는 자신의 검을 든 적이 턱짓하며 말했다. 보리스는 자리에
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패배한 몸에 남은 상처는 한층 더 고통스러웠다.
"이리 와. 자, 얼른."
기사는 도망치지 않고 서 있는 보리스의 말을 향해 다가가며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그
리고 자기 말안장에서 밧줄을 꺼내 들었다. 그 밧줄로 보리스의 목을 몇 번 감아 꽉 묶더니
그 끝을 자기 손에 단단히 감아 잡았다.
"말에 타라."
그 말에 따르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보리스는 말에 올랐다.
그때까지만 해도 보리스는 이 자가 이대로 자신을 백작에게 데려가려는 줄로만 알았다. 자
신이 달아나려 마음먹고 말의 배를 걷어찬다 해도 저쪽에서 밧줄만 당기만 목이 졸리거나
바닥에 나뒹굴게 되어있었다. 도망칠 길이 없다고 생각하니 가슴속은 초조한 심정으로 가득
찼다.
그 순간, 그는 한쪽 손이 안장에 달린 란지에의 도시락 주머니에 닿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래로 늘어진 주머니의 주둥이에는 뭔가 단단한 것이 약간 튀어나와 있었다 그것은 별다른
동작 없이도 그의 손에 충분히 잡혔다.
기사는 만족한 얼굴로 검을 허리에 찬 칼집에 꽂은 다음 윈터러의 칼집도 찾아 꽂더니 자
기 말안장에 매달았다. 그리고 말에 훌쩍 올라탔다.
"말 몰 줄 알지?"
그리고 그는 보리스를 앞세워 서서히 절벽을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적당히 다가간 다음 밧줄을 놓으면서 채찍으로 보리스의 말을 한 대 후려칠 생각이었다.
그러면 저절로 떨어져 줄 것이다.
그러한 계획을 보리스가 알아챈 것은 이미 절벽 근처까지 가까이 간 후였다. 순간적으로
등골이 싸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보리스는 돌아보았다.
"어, 어떻게......."
이미 돌이키기에는 늦은 상황이었다. 기사는 대답하는 대신 비릿한 웃음을 보였다.
"잘 가라고."
더 생각할 여유도 없는 상황이었다. 기사가 고삐를 잠시 놓고 채찍을 드는 순간, 보리스는
다리의 힘만으로 힘껏 말 등을 박차고 가능한 한 먼 곳으로 떨어져 굴렀다. 동시에 순간적
으로 목이 꽉 졸리며 거의 정신을 잃을 지경에 이르렀다.
"어 억 !"
기사는 손에 감아쥔 밧줄을 아직 풀지 못한 채였다. 갑자기 줄이 당겨지자 그 역시 순간적
으로 몸을 가누지 못한 채 함께 말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말고삐를 놓은 채 한 손에는
밧줄, 또 한 손에는 채찍을 들었던 행동의 결과였다. 그는 급히 정신을 추스르고 일어나려
했지만 절벽이 근처라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더듬거렸다. 좀 전에 동료가 떨어지는 모습을
바로 곁에서 보았던 탓이 컸다.
보리스는 얼굴을 심하게 바닥에 부딪쳤지만 곧 죽을 지도 모른다는 절박한 심정 때문에 벌
떡 일어날 수 있었다. 동시에 도시락 주머니에서 빼든 단도로 목을 감았던 밧줄을 끊었다.
옆구리의 통증도 잊었다. 저쪽에서 정신을 차리고 검을 뽑는 순간 상황은 뒤바뀌게 되어 있
었다. 짧은 순간, 기회는 단 한 번뿐. 망설이면 자신이 죽는다!
손에 쥐어진 단도에 힘이 실렸다. 한달음에 달려간 그는 단도를 힘껏 상대의 등에 꽂아 넣
었다.
"크억......!"
무슨 일을 저지른 것일까.
순식간에 옷 전체로 번져 가는 핏자국을 보며 보리스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멍해졌다.
그가 찌른 곳은 목과 등이 이어지는 언저리였고 검붉은 피는 그야말로 물밀 듯 쏟아져 나왔
다. 급박한 상황에 처해 인간이 아닌 무엇을 찌른 듯 느꼈던 기분은 순식간에 생생한 살해
의 감정으로 변했다.
온 몸이 덜덜 떨렸다. 단도를 찌를 때까지만 해도 다른 생각은 할 겨를도 없었고, 공격하지
않으면 자신이 죽는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으으윽......."
상처는 깊었지만 적은 아직 죽지 않았다. 분노하고 동시에 당황한 기사는 몸을 돌려 보리
스의 목을 움켜잡으려 했다. 그러나 보리스는 자신이 저지른 일에 충격을 받아 반쯤 넋이
나간 상태였다. 저도 모르게 손이 뻗어 나갔다. 단도를 너무 꽉 움켜쥐고 있었던 것일까.
푸욱!
날카로운 칼날은 곧바로 상대의 목을 뚫고 들어갔다. 너무도 쉽게, 그렇게 찔러져 버렸다.
그 순간, 옷을 타고 번지던 방금 전과는 달리 맹렬한 핏줄기가 솟구쳐 그의 얼굴에 피보라
를 씌웠다. 동시에 상대방의 크게 열린 동공이 바로 눈앞에 생생히 들어왔다. 죽어 가는 자
의 눈, 주마등처럼 흘러가는 과거를 주시하고 있을 지도 모를 흰 눈**와 똑바로 눈이 마
주쳤다.
아니, 그것은 자신이 살해한 자의 눈이었다.
"으... 아...... 으......."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며 적은 풀썩 쓰러졌다. 피는 쏟아진 우유처럼 흙바닥을 적시며, 다시
는 주워담을 수 없을 몸 속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썰물처럼, 그렇게.
부르르.
보리스가 몸을 떠는 것과 함께 시체도 몇 번인가 간헐적으로 떨렸다. 이윽고 단말마의 고
통은 완전히 멈췄다.
그러나 보리스는 멈출 수 없었다.
"아, 하, 으흐... 하악, 학......."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가 않았다. 너무도 꽉 쥐었던 단도는 아직도 손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손이며 얼굴, 가슴 언저리가 모조리 피범벅이었고 곳곳에 맺힌 피가 뚝뚝 떨어졌다. 이대로
몇 명이고 계속해서 죽여도 더 달라질 것조차 없을 정도로.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죽은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자신을 위해서도 아니
었다. 왜인지 알 수도 없게 그냥 울음 비슷한 것이 먹먹하게 가슴을 메우고 있었다. 무어라
고 표현해야 좋을 지 몰랐다. 슬픔도 아닌, 고통도 아닌, 안도감도 아닌.
뭔가 엄청난 일을 저질렀는데 누구도 그를 안고 '괜찮다'고 말해주지 않았다....... 한 생명이
삶을 그쳤는데 자신은 그를 위해 슬퍼할 수도 없었다. 폭풍이 그친 아침에 둥지에서 떨어져
죽은 ** 새를 보고도 슬퍼할 수 있는데, 저 사람만은 애도할 수 없었다. 그의 생명을 자기
손으로 없애 버렸다. 그것도 바로 이 손으로.
그것은 좀 전에 절벽으로 떨어진 사람에 대해 느꼈던 것과는 분명히 달랐다. 절벽으로 떨
어진 자에게 죄책감을 느쪘다면 지금 느끼는 것은 공포와 혐오감이었다. 세상일은 본래 아
무 것도 돌이킬 수 없는데, 이것만이 돌이킬 수 없는 양 그렇게 두렵고 아득했다.
동시에 자기 자신이 무서웠다. 누군가를 죽인 손, 마치 자기 자신도 죽일 수 있을 것 같았
다.
"형......."
그의 입술이 저도 모르게 형을 찾았다. 그 순간, 그는 형이 자신의 눈을 들여다보며 슬픈
얼굴로 한말이 생각났다.
형도 할 수 있는 일인 거야. 아버지뿐만 아니라... 형도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거다.
너도 마찬가지야.
형의 말이 옳았다. 이제 그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인간이 되었다. 모든 인간이 다 닥치는
순간 해치울 수 있게 되는 걸까. 본래 그런 걸까.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일에 대한 경험.
그러나 그것은 성장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돌아올 수 없는 길에 본의 아니게 한 걸음
들어와 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점차 환한 낮이 되어가고 있는데도 그의 마음은 피로 얼룩진 듯 어두워졌다 첫 살해를 저
지른 피투성이 소년의 머리 위로 이윽고 흰 태양이 떴다.
"놓쳤나!"
속속 들어오는 보고를 들으며 백작의 얼굴이 단단히 굳어져 있었다. 다음날 아침까지 칠십
여 명에 달하는 추적자들을 벨크루즈와 아라종 일대에 풀었는데 소년의 그림자라도 보았다
는 자조차 없으니 답답하다 못해 울화가 치밀 지경이었다.
그들 가운데 보리스의 얼굴을 모르는 자가 아무도 없고, 심지어 절반 이상은 전날 점심 식
사가 채 끝나기 전부터 수색을 시작했는데도 그 지경이었다. 도대체 그 놈이 도망친 시점은
언제인 거지? 왜 아무도 ** 못하고 있었던 거냐!
벨노어 성으로 급히 돌아와 밤새 보리스가 쓰던 방을 뒤집어엎다시피 수색했지만 물론 윈
터러는 나오지 않았다. 그 녀석을 이곳으로 데려온 이후로 처음으로 멀리 내보내게 되는 터
라 백작 자신이 일부러 눈여겨봤다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숨겨서 갖고 나갔는지 모를 노릇이
었다.
영문을 모르는 로즈니스가 아침에 깨어나자마자 달려와 오빠의 행방을 캐물었지만 백작은
그녀의 질문에 대답할 기분이 아니었다.
"오빠가 졌나요? 그래서 아빠가 오빠를 쫓아낸 거예요? 그런 거죠? 네? 말씀해 주세요!"
"시끄러우니 네 방으로 가라!"
백작이 딸에게 이런 식으로 소리지르는 일은 좀처럼 없었기에 로즈니스는 금방 눈에 눈물
이 그렁그렁해졌다. 그러나 어리광쟁이인 만큼 고집도 보통이 아닌 그녀였다.
"아빠가 미워요! 오빠는 착했는데.... 아무리 졌다고 해도 어떻게 집에도 데려오지 않을 수
가 있죠? 난 오빠한테 인사라도 하고 싶었는데... 아빠가 이럴 줄은 정말 몰랐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작이 별 대꾸조차 하지 않자 로즈니스는 마음이 몹시 상해서 밖으로
뛰어나가 버렸다. 그러나 백작은 머릿속으로 이미 다른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가서 란지에를 데려와!"
반쯤 끌려오다시피 해서 백작 앞에 나타난 란지에는 매우 놀란 듯한 얼굴로, 그러나 동시
에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백작을 바라보았다. 백작이 위협적인 말투로 입을 열었다.
"너, 그 날 사냥 중에 보리스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본 것이 언제냐!
"예?"
백작의 눈에 란지에는 갑작스런 질문의 의도를 몰라 당황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잠시
더듬거리다가 입을 연 그는 기억을 애써 더듬는 듯한 표정이 되었다.
"그러니까... 멧돼지 세 마리가 갑자기 나타나서 다들 매우 놀라서... 저는 멧돼지를 처음 봤
기 때문에 너무 무서워서 급히 말을 돌려 도망쳤습니다. 그때 도련님께서도 마찬가지로 놀
라시는 것 같았는데... 달리다 보니 어느 쪽으로 가셨는지는......."
말만은 그럴듯했다 백작은 한쪽 눈을 약간 작게 뜨면서 날카롭게 다시 물었다.
"분명 너희 둘이 같은 쪽에 있는 것을 보았다. 너는 그의 시종인데 멀리 떨어졌다는 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란지에는 갑자기 자리에 주저앉아 무릎을 꿇더니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주인님. 제가 책임을 다하지 못한 거라면 무슨 벌이든 받겠습니다. 제가 살펴
드리지 못해 도련님이 위험해지신 거라면......."
끝까지 란지에는 보리스가 단지 행방불명이 된 걸로 아는 듯 행동했다. 백작은 어이가 없
어서 혀를 찼다. 이 녀석은 자신이 무엇 때문에 화를 내고 있는지조차 모르지 않는가. 그런
녀석한테 시간을 들여 추궁할 가치나 있겠는가.
그렇게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백작은 다시 한 번 다짐하듯 소리를 높였다.
"설마 너, 내게 감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녀석이 떠나는 것을 보았으면서도
못 본 체 한 것이 밝혀진다면 이후 살아남지 못할 줄 알아라!"
란지에는 눈빛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당황한 듯한 얼굴 그대로 답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가장 가까이 있어야 할 제가 도련님의 행방조차 모르는 것에 대해
서는 무슨 벌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만.... 하지만 도련님께서 왜 저택을 떠나신다고 생각하
시지요? 단지 숲 속에서 길을 잃으신 것은 아닐지......."
백작은 란지에의 말을 더 듣고 있지 않았다. 비서 휴에게 몸을 돌리며 명령했다.
"계속 수색하도록 하고, 찾지 못하고 돌아온 자들의 몸수색을 철저하게 해라! 만일 그 녀석
을 보고도 거짓을 고하는 자가 있다면 이후 목숨을 보전치 못하리라고 말해라!"
"예, 주인님!"
백작이 계속해서 몇 가지 명령들을 더 내리는 동안 란지에는 엎드려 있다가 일어나 천천히
물러 나왔다. 복도를 따라 걷던 그의 발걸음이 문득 멈췄을 때, 그는 문샤인 탑 2층의 그 방
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이곳으로 오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다시는 저기에 들어갈 일이 없겠지.
그는 쓴웃음을 한 번 짓고는 창 밖의 푸른 하늘로 시선을 보냈다. 거기에는 대열에서 떨어
진 작은 새 한 마리가 힘찬 날갯짓으로 들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란지에 로젠크란츠는 손
을 올려 눈가의 햇빛을 가린 채 오랫동안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2. 북방 선원의 나라,
렘므로 가며 겪은 세 가지 일들
대장간 주인 드와릿은 느지막이 그 날의 일을 접으려 하고 있었다. 그의 대장간은 마을에
서 약간 떨어진 화강석 채석장을 등진 곳에 있었지만 근방에 알려질 정도로 실력이 좋았기
때문에 벌어먹고 사는데 별 지장은 없었다.
그러나 그 날은 별다른 손님이 오지 않았다. 인근 마을에서 농기구를 고치러 온 농부가 두
엇, 아버지의 녹슨 철검을 손봐 달라고 가져온 소녀 한 명이 전부였다. 그래도 며칠 전부터
맡아놓은 일이 많았기 때문에 그는 늘 저녁 시간 전까지 일했다. 나이가 들었지만 결혼도
하지 않았고, 당연히 자식도 없었기에 일하는 시간은 그가 내키는 대로였다.
저녁 생각도 별로 없는데 오늘은 마을로 나가서 맥주나 몇 잔 마실까.
풀무니 수건이니 하는 것들을 한쪽으로 치우고 가죽 앞치마를 벗어 걸쇠에 거는데 저만치
들판 쪽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언뜻 보였다. 농번기가 다가오는 봄철이라 할 일 없이 돌아다
니는 사람은 드문 편인데, 멀리서 온 여행자인가 싶었다.
그림자는 점차 다가왔다. 바람이 긴 날개처럼 들판을 부드럽게 쓸어 내렸다. 그 바람 속에
서 검푸른 머리카락이 흩날리고 있었다.
말을 탔고 여행자의 몸차림이었지만 어른치고는 키가 좀 작다 싶었다. 대장장이가 장갑을
벗어 선반에 얹고 돌아보니 그림자는 이미 몇 걸음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아직 앳된 뺨을 가진 소년이었다 그런데 온 몸이 물에 빠졌다가 방금 나오기라도 한 것처
럼 흠뻑 젖어 있었다. 그런 모양이니 당연히 소년은 떨고 있었다. 봄이 깊었다지만 아직 저
녁 공기는 싸늘했다.
소년은 대장장이 앞에 오더니 말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 일은 끝내신 건가요?"
소년은 가진 것이 별로 없어 보였다. 안장에는 도시락 주머니 비슷한 것이 매달려 있었고,
손에는 검이 한 자루 들려져 있었다. 그런데 그 검의 모습이 희한했다. 오랫동안 대장장이로
잔뼈가 굵어 온 자신조차 한 번도 ** 못한 재질로 만들어진 칼집이었다.
"무슨 볼일인데 그러느냐?"
"이 검의... 칼집을 새로 구하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대장장이는 저도 모르게 놀란 목소리로 말하고 말았다.
"그 검을?"
그가 보기에 칼집은 전혀 문제가 없어 보였다 낡기는커녕 흠집조차 없는 순백의 아름다운
표면을 가지고 있었고, 또한 거기에 꽂힌 검과 아주 잘 맞았다. 그런 칼집을 왜 바꾸겠다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소년은 대장장이의 기색을 보고는 그런 생각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아직 어린데도 그의
표정은 어두웠다. 눈가는 더욱 움푹하게 그늘져 있었다. 못 볼 것을 많이 본 눈... 대장장이
가 문득 떠올린 생각이었다. 소년은 단순한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새 칼집은 가능한 한 눈에 띄지 않는 단순한 것이라면 좋겠습니다. 물론 돈은 치르겠어요.
아아, 그리고 기다릴 시간이 없어서... 가능하다면 다른 검의 칼집을 그냥 제게 주시겠습니
까? 잘 맞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대장장이는 소년의 얼굴을 잠시 들여다보았다.
죽은 조카도 저와 비슷한 날카로운 턱을 가지고 있었다.... 그 아이는 아버지를 죽인 자를
죽이겠다고 말했고, 결국 자신의 목숨조차 원수에게 맡기는 것으로 짧은 생애를 마무리지었
다. 그는 형을 말리지 못했고, 조카를 말리지 못했으며, 홀로 살아남았다. 아이를 낳지 않겠
다고 결심한 것은 밤을 틈타 조카의 시체를 훔쳐 몰래 묻어주던 무렵 이었던가.
"들어와라."
대장장이 드와릿은 대장간 안에서 자신이 만든 바스타드 소드들을 모조리 끄집어내어 소년
에게 보였다. 원하는 것을 가지라고 눈짓했다. 그 가운데는 영주나 인근의 부자에게 바치기
위해 만든 훌륭한 것들도 섞여 있었다. 청동에 보석의 원석이 아로새겨진 것도 있었고, 정교
한 문양으로 표면을 다듬은 것도 있었다.
그러나 소년은 한참을 살펴보다가 마치 투핸드소드(two-hand sword)에나 어울릴 법한 폭
이 넓고 묵직한 칼집을 골랐다. 끝이 닳지 않도록 둥그런 쇠가 박힌 투박하고 거친 모양새
였다. 그러더니 소년은 자신의 칼을 뽑았다.
아, 하고 대장장이는 경탄했다. 사십여 평생을 대장장이로만 살아왔는데 아직껏 저런 검을
** 못했다니 헛살았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 광채와 그 예기(銳氣), 완벽한 선과
단호한 이음매를 보는 눈이 시릿할 정도였다. 소년은 흰 칼집을 내던지고 투박한 칼집을 집
어 검의 광채를 가렸다. 보고 있는 대장장이가 안타까워질 정도였다. 저토록 완벽한 결합을
떼어버리려 하다니, 저토록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하나의 신물(神物)을 어지럽히다니.
"이걸로 하겠습니다. 얼마를 치르면 될까요?"
"꼭 그렇게 해야겠느냐? 지금 그건 네 훌륭한 검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데......."
탐욕이 아니라 검이라는 존재에 대한 진지한 애정으로 대장장이는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소년은 고개를 저었다. 별다른 표정은 없었다.
"상관없습니다. 이 칼집은 어차피 버릴 테니 원하신다면 드리겠습니다. "
대장장이는 고개를 젓다가 잠시 후 다시 끄덕거렸다. 소년이 내려놓은 흰 칼집을 집어든
그는 홀린 듯한 눈동자로 그것을 훑어보다가 다시 고개를 저었다.
"돈은 치를 필요 없다. 아니, 오히려 내가 네게 이 칼집의 값을 쳐주어야 할 것 같구나."
소년이 미처 거절하기도 전에 대장장이는 대장간 한구석을 뒤지더니 누런 가죽으로 된 특
이한 허리띠를 하나 찾아 내주었다. 두 갈래 가죽끈을 엇갈리게 해서 어깨까지 이어지도록
만든 그것은 묵직한 검을 허리 뒤로 돌려 가로로 걸고 다니도록 만들어진 물건이었다. 재료
로 쓴 가죽과 버클의 만듦새는 말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소년은 거절하려다 그만두고 짧은 말로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그것을 이용해서 지금껏 들
고 다니던 검을 찼다.
둘은 길게 인사를 나누지 않았다. 소년은 말에 올랐고, 아주 먼 곳으로 멀어져 갔다.
비가 내렸다.
이미 젖어 있기에 더 이상 젖지 않았다. 온 몸에서 물이 흘러내렸지만 그것이 오히려 마음
에 들었다. 몸에서 한없이 씻어내고 싶은 것이 있었기에 이렇게 계속 젖어 있는 편이 좋았
다. 피 냄새가 사라질 때까지 물 속에 푹 잠겨 있고 싶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속에서 짧은 망토는 묵직해지고 부츠에서는 물이 질벅거렸다. 지칠 대
로 지친 말을 잠시 쉬게 하려는 마음에서 걷기 시작한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여행을 멈출 수
는 없는 노릇이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낮에서 밤, 밤에서 낮으로 넘어가는 경계의 하늘에 번진 붉고 푸른 광채
는 단색의 하늘보다 항상 황홀했다. 비가 내리고 있는데도 어째서 지는 햇빛이 보이는 것일
까. 참으로 이상한 날씨구나.
비도 그치고 어두워질 무렵 들어선 곳은 작은 마을이었다. 정말로 작아서 마을 안의 모든
집을 합쳐도 서른 채도 안될 법한 그런 곳이었다. 돈은 있었기 때문에 어딘가에 유숙을 청
할 셈이었다. 아직 어리긴 했지만 이제 어엿한 소년 검사로 보이는 자신이었으므로 작년 여
름이 끝나갈 무렵처럼 사람들이 두렵지는 않았다.
그러나 마을 안쪽으로 들어설 무렵, 그는 뜻밖의 광경을 목격했다.
"죽여라!"
"저 놈, 죽여버려!"
사람들이 한 사람의 희생자를 둘러싼 채 욕을 퍼부으며 돌을 던지고 있었다. 창칼을 든 사
람은 없었지만 쇠스랑이나 낫을 든 사람은 있었다. 다행히도 찌르지는 않았고, 대부분은 발
길질이나 썩은 사과를 던지는 정도로 자신들의 감정을 표현했다.
"어딜 남의 동네에 와서 그딴 말도 안 되는 수작이냐!"
"저런 놈은 국왕님께 보내서 단숨에 목을 치게 해야 돼!"
"퉤! 멀정히 조용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 괜스레 그런 문제에 끌어 들이지 마라!"
지나쳐 걸을 수가 없었다. 둘러싸인 채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있는 사람은 예순은 넘어
보이는 노인이었다. 무슨 잘못을 했기에 저렇게 핍박받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또한 끼여들려고 하지는 않았다. 자신도 깨끗하고 정직한 인간은 이미 아니었다. 남
의 불행을 좀 지나친다고 해서 뭐가 문제가 되겠는가? 또한 돕는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랴?
돌과 가래침 세례를 받던 노인은 잠시 후 벌떡 일어나더니 알아듣기 힘든 목소리로 뭐라
중얼거리다가 갑자기 버럭 외쳤다 둘러싼 사람들이 움찔할 정도로, 그러나 보리스의 귀에는
그 말이 얼른 들어오지 않았다. 마지막 몇 마디를 제외하고는. 그 내용이 너무 낯설었기 때
문일까.
"......너희는 사람답게 사는 것을 저버린 자들이야! 어서 날 죽여라! 당장 죽이란 말이다! 이
제 결코 다시는 너희 같은 자들을 위해 싸우지 않겠어!"
분노한 사람들의 발길질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노인은 더 말하지 못한 채 몸을 구부리고
자리에 쓰러졌다. 피와 침... 흙과 먼지에 뒤엉켜 흩뿌려지는 인간의 흔적을 보며 보리스는
뒷걸음질쳤다.
다행히도 사람들은 노인을 죽이지는 않았다. 화풀이를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하자 그들은 욕
을 내뱉으며 하나 둘씩 떠났다.
그 자리에 아무도 남지 않게 되었을 때 보리스는 한 걸음 다가가 섰다. 그리고 쓰러진 노
인을 내려다보았다. 노인이 마지막으로 외친 말이 어딘가 모르게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아직
까지도 마음 속에 남은 한 사람이 했던 말과 같았기 때문일까.
"......."
보리스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데도 노인이 먼저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상대방이 누
구이든 상관없다는 듯, 얼굴을 쳐다**도 않았다.
"뭐지... 큭, 아직까지 날 비웃을 자가 남아 있었나... 컥, 쿨럭! 가버려라! 어차피 뒤집히지
도 않을 세상......."
보리스는 나지막이 물었다.
"아저씨는 공화국 지지자입니까."
노인의 시선이 문득 보리스 쪽을 향했다. 그리고, 그제야 보리스는 노인의 눈이 거의 보이
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보리스의 턱 언저리에 어설픈 시선을 보낸 채로 말했다.
"당신은 누구요? 목소리는 아이 같은데 모습은 어른이로군 이제 와서 왜 내게 그런 걸 묻
는 거요? 당신이야말로 날 저 국왕놈에게 넘겨 목이라도 자르게 할 셈인가."
죽기를 각오하지 않은 다음에야 '국왕놈' 이라는 말을 내뱉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보리
스는 여전히 선 채로 물었다.
"당신은 무엇을 위해 공화국을 지지하는 건가요? 트라바체스 공화국 같은 꼴이 그렇게 좋
아 보인단 말씀입니까?"
"그건... 모르는 소리야......."
노인은 천천히 일어나 바로 앉았다. 그리고 잘 보이지 않는 눈을 허공을 향해 굴리며 비교
적 똑똑한 목소리로 말했다.
"트라바체스는 공화국이 아냐. 그 나라에서 평민들이 투표에 참여 하던가? 오직 영주놈들
이 선제후를 뽑고, 선제후들이 통령을 뽑을 뿐이지. 몇 명 안 되는 자들 사이에서 강자가 되
려니 사분오열하여 서로 전략적 제휴만 노리는 것은 당연한 노릇이고, 그 와중에 겉모양
만... 프흡, 쿨럭! ...다른 신념들을 내세워 수많은 정파들이 탄생하는 거야. 정권을 잡기만 하
면 그것으로 그만, 갑자기 세력이 약화되지 않는 한 종신에 가까운 통령직, 대대로 세습되는
영주의 장원, 거기에서 뽑히는 반 세습의 선제후....... 절반뿐인 공화제는 그렇게 무섭지. 그
렇게 되지 않으려고 우리 아노마라드 공화국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국민 총 투표를 실시하
려 했어. 하지만 단 한 번도... 오히려 계속되는 귀족놈들의 켈티카 공략을 막는데 급급했을
뿐 그렇게 애썼던 국민 투표는 켈티카 내에서도 단 한 번 시행되는데 그쳤단 말이야. 켈티
카 공방전... 사방을 포위한 신국왕군 놈들의 총공격을 기다리며 새웠던 사흘 밤... 결코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지. 아니, 죽어도 잊을 수 없을 거야. 수 차례에 걸친 항복 권유를 받아들
이려는 자는 아무도 없었지. 마지막 새벽이 밝을 때 수천의 군대가 몰아** 인간 사슬을
이루고 있던 동지들을 갈가리 난도질하는 것을 난 분명히 보았어. 흥... 그 누가 다시 산 시
체가, 가축 같은 노예가 되기를 바라겠나? 저 전쟁 포로들만 노예인 줄 아나? 이 땅에 살고
있는 자들은 모조리 노예야. 저 귀족들만 빼고!"
보리스는 말문이 막힌 채 노인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아직도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투표해서 대표자를 뽑는다는 것이 그토록 중요한 일인지, 또 그렇게 한다고 해서 과
연 평민이 영주나 귀족과 같아질 수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평민과 영주란 태어날 때
부터의 신분적 격차보다 실제로는 돈과 권력의 유무에서 더 큰 차이가 나는 것 아니던가?
투표를 하게 된다고 돈이 생기거나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또한 돈이 없는 자에게 권력
이 생길 리 만무한 것이다.
"정말로 그것뿐입니까? 그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고 죽은 이유가 겨우 자신의 투표로 대
표자를 뽑을 수 있는 권리, 그것 하나를 얻기 위해서란 말입니까?"
보리스의 질문에 노인은 이상하게도 힘을 얻는 것처럼 보였다.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국민의 투표로 선출된 그 대표자는... 국민의 지지가 없으면 다시 실각하는 거다. 임기는
정해져 있고, 그 안에 국민이 지지할 만한 정치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만일 임기 안
에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국민에게는 그를 쫓아낼 권리가 있어. 그러면 국민이 지지할 만한
정치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올바른 법의 제정이야.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적용되는 법
을 만들어서 올바르게 시행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만민이 바라는 정치가 되는 거지."
보리스는 고개를 저으며 반박했다.
"그 법이 잘못 제정된다면? 아니, 올바른 국왕이 있어서 처음부터 잘 정치한다면 그런 법
따위가 다 무슨 소용이지요? 게다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두 옳은 일만을 생각한다는 보
장이 어디 있습니까? 보통 사람들이라고 해서 선량한 것은 아니잖습니까? 그들 역시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린아이를 팔아 넘기고 남의 물건을 뺏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족속인
데 그들에게서 무슨 올바른 합의가 나올 수 있죠?"
그것은 뼈아픈 경험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가 만난 사람들 가운데 조건 없이 선량했던 사
람이 있던가? 아니, 그런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고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모두 남을 등쳐먹
을 궁리만 하고 있는, 기회가 온다면 곧장 강도로 돌변할 수 있는 인간뿐이지 않았는가?
"뼛속까지 악한 사람은 드물지... 그런 결정의 문제를 공공의 영역으로 끌어내게 되면 사람
들은 사회적인 정의에 마음이 쏠리게 된다. 평소에는 저질적인 범죄를 저지르고 있더라도
자신을 다스리는 자가 악을 저지르기를 바라는 사람은 적어. 아니, 모두 올바를 필요도 없
다. 그 가운데 절반 이상만 올바르다면 돼. 투표의 결과는 옳은 쪽을 가리킬 테니까. 옳은
것을 바라는 열망은 결국 전달된다. 그것이 전달될 통로만 있다면 말이지. 그게 바로 투표를
비롯한 권리들이야. 빈민이든 평민이든 누구나 지휘자가 될 투표의 장에 후보로 나설 수 있
고, 또 지지할 수 있는 그런 나라가 공화국이다. 그것을 원하지 않는 것은 기득권을 가진 저
귀족들 뿐이야. 악한 왕을 몰아낼 권리가 우리에겐 있어야만 하는 거다."
보리스는 한 발 물러서며 말했다.
"저라면 전 국민의 절반이 올바르기를 바라기보다 그들 가운데 몇 명이 올바르다는 쪽에
걸겠습니다. 무리 지은 사람들은 처음엔 서로 눈치를 **만 한 방향으로 횝쓸리기만 하면
더 큰 죄도 서슴없이 저지르지요. 악한 왕을 몰아낼 권리, 좋습니다. 하지만 그걸 위해서 파
괴되는 사람들과 그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무엇으로 보상받지요? 세상에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들이 있는데, 그걸 잃고 나서 모든 사람이 행복해졌으니 수긍하라고 한다면 전
거부하겠습니다. 더구나 사람이란 옳은 일보다는 이익에 민감한 법이고, 뭔가 이해 관계가
걸려 있기만 하다면 서슴없이 악한 쪽을 지지할 겁니다. 그런 불완전한 것을 위해 목숨보다
아끼고 있는 것들을 내놓을 수는 없습니다."
노인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자네는 귀족답지 않은 귀족인 모양이군."
그 말은 한때 란지에가 그에게 했던 말이었다. 보리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공화국은 많은 사람들의 피를 흘리게 하지만, 그들을 인간답게 해주는 나라다. 인간이기에
피도 흘릴 수 있는, 그런 나라. 인간이 아니었던 자들은 인간이 되는 순간 죽어도 여한이 없
을 수 있어. 처음부터 가졌던 것이 있는 자들만 잃을 수 있는 거지. 잃을 것이 없는 자에게
두려울 게 무에 있겠나?"
어쩌면 그렇게 과거 자신이 들었던 말과 같을 수가 있을까.
"당신은 누구입니까?"
보리스는 문득 알 수 없는 압박감 같은 것을 느끼며 그렇게 말했다.
말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 저 노인은 공화국을 대단히 낭만적인 무엇으로 느끼는 사람인 듯
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공화국을 원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저렇게 이상을 위
해 자신의 목숨 따위 헌신짝처럼 내버릴 수 있다고 말한단 말인가? 트라바체스에도 이념을
논하는 자는 많지만 그걸 위해 죽을 수 있는 사람은 소수였고, 오히려 자신의 머리가 되는
주군 또는 주인의 명령 몇 마디에 목숨을 걸었다. 어떻게 눈에 보이는 권력자가 아니라 미
래조차 불분명한 하나의 정체(政體)를 위해 저토록 헌신하는 사람들이 많을 수가 있을까?
"늙고 병들어 이젠 쓸모없는 공화주의**. 공화주의자, 그건 인간다운 삶을 위해 목숨이라
도 바치고자 하는 자들의 이름이다."
노인을 처음 보았을 때는 사람들에게 매나 맞는 어리석은 자로밖에 보이지 않았었다. 그가
문득 외쳤던 한 마디만 아니었다면 멈춰 서서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공화국이란 인간을 분열시키는 존재다, 라고 그는 굳게 믿고 있었다. 분열이 가져오는 비극
이란 폭군의 정치보다 몇 배 두려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한 명의 폭군을 모두 증오
하고 있는 편이 훨씬 나았다. 아끼고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 서로 죽고 죽여야 하는 상황에
비하면.
그러나, 확실히 공화국이란 참으로 이상한 존재였다.... 사람들의 마음을 중독시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도록 빠져들게 하는 마력적인 흡인력을 가진 존재였다.
노인은 일어났다. 그러더니 천천히 마을 바깥쪽으로 돌아서며 말했다.
"트라바체스라, 가보고 싶은 곳이군. 거기에는 또 어떤 인간 아닌 자들의 비극이 있을까."
노인이 발을 끌며 멀리 떠나갈 때까지 보리스는 그 자리에 못 박힌듯 우뚝 서 있었다.
트라바체스는 자신이 돌아갈 수 없는 나라였다. 그 나라를 사랑하지는 않았지만, 그 이름을
생각할 때마다 이해할 수 없는 애증이 자신의 가슴을 짓눌렀다. 아마 트라바체스에서 태어
나고 자란 자가 아니라면 그 비극을 다 이해할 수는 없으리라.
그리고 아노마라드, 이곳 역시 그가 머무를 수 없는 나라였다.
'공화국' 이라는 이해할 수 없는 괴물에 대해 생명과도 바꿀 열정을 불사르는 사람도 있었
다. 낭만적인 늙은 공화주의자 뿐만 아니라 란지에와 같이 영리한 소년의 마음조차 온통 사
로잡아 버린 존재인 것이다. 이곳에도 그가 이해할 수 없는 역사가 있었다. 다시는 공화국으
로 되돌아갈 수 없을 지라도, 이곳은 천혜의 아름다운 국토만큼 행복만이 가득한 땅은 아니
었다.
이 나라의 그 풍요로움을 한 때 증오했었다. 그러나 그 땅에서도 가지지 못해 저토록 새로
운 나라를 열망하는 사람이 있었다. 풍요란 여러 사람에게 나누어지지는 않는 것일까. 동전
의 양면처럼 두 가지 얼굴을 가진 아노마라드, 그는 그 두 가지 면에 모두 적응할 수 없었
다.
이 나라를 떠나자, 그는 생각했다. 다른 곳으로 가자.
트라바체스에서는 그를 잡으려는 블라도 삼촌의 손길이 있을 테고, 이곳에서 당연히 백작
이 그를 찾아내려 혈안이 되어 있을 것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현실들을 억지로 이해하려
하기에는 그 자신에게 주어진 고뇌가 너무나 컸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보다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논할 넓은 땅이 아니라 방해없이 홀로 숨을 수 있는 외딴 동굴이었다.
문득, 월넛 선생이 말해 주었던 북방 야만인의 땅이 생각났다. 외부에서 들어온 자들을 싫
어하여 머리 가죽을 벗긴다고 하던 야만인들이지만 적어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을 강요받지는
않아도 될 듯한 기분이 들었다. 북방 선원의 나라, 야만인과 공존하며 살아간다는 거친 국민
들의 땅. 깎아지른 해안 절벽과 차고 검푸른 파도의 땅.
렘므.
이제 그는 추위의 땅으로 가고 싶었다. 받아들이기 힘든 기묘한 풍요의 됫면에는 빈곤자들
의 지독한 열망이 새겨진 이 땅을 떠나기를 원했다.
봄이 끝나가고 있었다.
갈색 망토 안쪽으로 허름한 칼집의 검을 비스듬히 차고, 길고 검푸른 머리카락과 훌쩍 큰
키를 가진 소년이 번화한 길거리에 서 있었다. 그 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스쳐지나가고 있
었다.
아노마라드 안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도시인 잔포드는 국경 근처 길목에 위치한 도
시인지라 곳곳에 외지인들이 들끓었다. 그 가운데 특히 많은 것은 상인들이었다. 오를란느와
아노마라드, 그리고 렘므 왕국에 이르기까지 세 나라의 영지가 맞닿아 있는 대륙 최대의 호
수 로젠버그(Rosenberg) 호는 대륙 북부 상업의 중심지였고, 잔포드는 바로 그 호수의 남쪽
호반에 위치해 있었다. 조금만 더 동쪽으로 가면 렘므와의 국경이었다.
"훠어이! 드메린 칼츠 님의 행차이시다! 얼른 길을 비켜라!"
귀족인가, 하고 생각했지만 단지 이름뿐이고 작위를 말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런 건 아
닌 것 같았다. 큰 거리를 메우고 있던 사람들이 개미떼처럼 갈라져 흩어지고 그 중앙에 당
당한 가마의 행렬이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요즘 시절에 마차도 아니고 가마라니, 대단히
특이한 사람이 아닌가 싶었다.
화려한 금빛 천으로 만든 휘장 주위로 정교하게 세공한 보석이 빙둘러가며 십여 개나 장식
된 것이 보였다. 가마꾼들의 모습 또한 같은 복장으로 통일된 것을 보니 대단히 돈 많은 사
람의 행차인 모양이었다. 꼭대기에는 가문의 문장으로 보이는 것이 새겨져 있었는데 바로
금빛 까마귀였다. 까마귀는 재보를 모으는 짐승이니 아마도 이 자의 정체는 상인일 터였다.
사람들이 곳곳에서 수군대며 감탄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드메린칼츠라는 자는 외지인들
에게조차 유명한 상인인 모양이었다.
지나쳐 가려나 했던 가마가 그 자리에서 멈추더니 바닥에 내려졌다. 한쪽 휘장이 들리고
온통 비단과 보석으로 치장한 풍채 좋은 남자가 걸어나왔다. 키도 크고 금발에 비교적 잘생
긴 얼굴인데 배만은 이상할 정도로 불룩 튀어나와 있었다. 아마 저 배 때문에 마차보다는
가마를 선호하는 모양이었다.
"칼츠 상단의 대표이신 드메린 칼츠 님께서 오셨다! 얼른 나와서 인사드리지 않고 뭘 하
나!"
우스운 광경이 벌어졌다. 가마가 멈춰 선 곳은 3층으로 된 대형 주점의 앞이었는데 급사들
이 혼비백산해서 뛰어들어가고 곧 주인으로 보이는 잔뜩 치장한 여자가 구르듯 달려나와 허
리를 굽혔다. 그 뒤로 대여섯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다같이 코가 땅에 닿을 듯 절을 하고
있었다.
"어, 어쩐 일이십니까, 이런 누추한 곳까지 직접 오시다니요....... 아랫사람을 시켜 기별만
주셨으면 저희 쪽에서 만사 제치고 달려갔을 터인데......."
여주인은 보기에도 안쓰러을 정도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는데 아마도 이전에 뭔가 잘못한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아무리 상대가 강대한 상단의 인물이라 해도 저토록 어쩔 줄 몰라하
는 것은 확실히 수상했다.
아니나 다를까, 배를 내밀고 선 칼츠의 호통이 떨어졌다.
"어쩐 일로 왔냐고? 지금 그걸 몰라서 묻고 있는 겐가! 정말 몰라서 물어? 지금 나와 장난
을 치자는 건가 뭔가!"
여주인을 비롯한 주점의 사람들은 모두 부들부들 떨었다. 칼츠라는자의 한 마디가 주점의
문을 영영 닫게 할 수도 있는 듯한 분위기였다. 구경거리를 보러 모여든 사람들도 다들 불
안한 얼굴로 그 모습을 주시했다.
"저, 저로서는... 정말로 무슨 일로 그리 역정을 내시는지......."
드메린 칼츠는 더욱 분노한 얼굴이 되었다. 한층 더한 불호령이 주위 사람들이 귀를 막을
정도로 쩌렁하게 울렸다.
"내 하나 뿐인 아들녀석! 그 녀석이 여기 왔지 않아! 설마 모른다고 잡아뗄 생각은 아니겠
지!"
여주인의 낯이 흙빛이 되었다. 그녀는 뒤의 사람들을 돌아보며 그 아들이란 자를 본 사람
이 있으면 얼른 말하라는 듯 눈을 부라렸다. 그러나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얼른 내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그 뒷말을 결코 듣고 싶지 않은 듯, 여주인은 갑자기 바닥에 납작 엎드리면서 애원하는 목
소리로 말했다.
"저희는 정말 모르는 일입니다, 어르신...... 귀하신 아드님께서 본래 변장을 즐기시는 터라
우매한 저희가 혹시나 알아** 못하고 죄를 짓게 된 거라면......."
그때 보리스는 자기 옆에 선 소년 한 명이 소리 죽여 키득키득 웃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
다.
처음에는 이런 상황에서 웃다니 도대체 겁이라고는 없는 녀석인가 싶었다. 그러나 소년은
남루한 옷차림에도 불구하고 하얀 뺨에는 귀하게 자란 듯한 기품이 흘렀고, 머리카락은 햇
빛처럼 곱게 반짝이는 금발.......
보리스는 배가 나온 칼츠 씨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두 사람의 얼굴 윤곽이 비슷한
것은 물론, 금발의 빛깔조차 거의 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시 소년을 바라본 그는 문득 화
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잠시."
손을 뻗어 소년의 어깨를 잡고 사람들 속으로 끌어당겼다. 웃어대고 있던 소년은 영문을
모르는 표정으로 낯선 소년인 보리스를 쳐다보았다. 새파란 눈동자를 보는 순간 갑자기 예
프넨이 연상되었지만 이 소년이 가진 것은 근심 걱정의 기색 따위는 티끌만큼도 보이지 않
는 해맑은 눈이 었다.
"왜 그래?"
묻는 것조차 아이처럼 천진했다. 정말로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한 모든 책
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은 알지도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얼굴이었다. 갑자기 말문이 막혔
지만 결국 입을 열어 말했다.
"저 사건의 원인은 아마도 너겠지?"
"어? 어떻게 알았어? 본래 내 얼굴 알고 있었던 거야? 나, 완벽하게 변장했다고 생각했는
데......."
완벽한 변장은 무슨, 얼굴에 흙이라도 찍어 바르고 나서 그런 소릴 해라, 보리스는 더 말할
것도 없다는 듯 소년의 등을 떠밀었다.
"으, 왜 미는 거야?"
"가서 너라는 걸 밝혀. 저 사람이 너 때문에 벌을 받게 되어도 좋단 말이냐?"
너 같은 철없는 장난꾸러기 때문에, 라는 말이 나오려는 것을 눌러 참았다. 자신 역시 그리
많은 나이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혹시 시무룩해지거나 화를 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소년은 보리스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갑자기 말했다.
"응, 네 말도 맞는 것 같군. 그건 알겠는데 너 말야, 왜 그렇게 심각한 표정이야? 얼굴 좀
풀고 살라고."
뭐라 대답할 틈도 없었다. 소년은 그 자리에서 갑자기 앞으로 튀어나갔고 순식간에 드메린
칼츠의 등 뒤로 접근해서 와락 껴안아 버렸다. 시킨 보리스조차 당황해서 멍해질 노릇이었
다.
"아버지, 나 여기 있어! 이 사람들은 아무 죄도 없다고! 그러니까 이 사람들 혼내지 말고
내가 가서 대신 혼날게. 그러면 되지? 음... 사흘 동안 외출 금지할까?"
드메린 칼츠와 주점의 여주인은 물론이고 모든 사람들이 그 순간 멍해지다 못해 동작을 멈
추고 있었다. 그러나 소년은 눈치 없는 눈동자를 한 바퀴 굴리더니 이어서 말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사흘은 너무한 거 같다. 하루만 근신하면 안 될까? 대신 저녁에 삶
은 당근이 나와도 한 번은 얌전히 먹을 테니까......."
"으이고, 이 철없는 녀석아!"
드메린 칼츠는 갑자기 아들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더니 곧장 자기가 타고 온 가마 속으로
와락 밀쳐 넣었다. 그리고 여주인 쪽으로 몸을 돌려 애써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 덕분에 아이를 찾아냈으니 근시일 내에 사례하도록 하지."
여주인은 사례고 뭐고 간에 방금 위기를 넘긴 것만으로도 십년 감수한 듯한 표정이었다.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화려한 옷자락에 묻은 흙을 털 생각도 하지 않고 머리를 조아
리며 말했다.
"사례라니, 당치도 않으십니다. 루시안 도련님께서 안전하신 것만으로도 저희는 충분히 기
쁘게......."
드메린 칼츠는 여주인의 말을 끝까지 듣고 있지 않았다. 몸을 돌려 자기도 가마 안으로 들
어가 버렸고 얼른 가마꾼들이 휘장을 내렸다. 가마는 다시 번쩍 들려서 휑하니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
가마가 바로 옆을 지나갈 때 보리스는 문득 자기에게 거는 짓궂은 목소리를 들었다.
"얼굴 펴라니깐!"
살짝 들렸던 휘장이 내려지면서 가마 안에서는 아들이 또다시 아버지에게 꿀밤을 얻어맞는
소리가 들렸다. 물론 이런 소리도 들렸다. '으씨, 왜 두 번씩이나 때려요!', '집에 가면 하인
을 붙여서 꼼짝도 못하게 만들어 줄 테니 각오해!'.
보리스는 그 자리에 잠시 선 채로 당황해 있었다. 주위에서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칼츠 님의 저 개구쟁이 아드님 말이야, 올해 열세 살 생일을 넘기셨는데도 아직도 그대로
니 칼츠 님도 속 깨나 썩이시겠어."
"자네 루시안 도련님 생일 잔치 가봤나? 4월 초였잖아. 진짜 눈이 돌아갈 정도로 음식이며
술이며 원 없이 나왔다던데? 그런 구경이 다시 없었다고 들었어."
"나오다 뿐인가! 아예 저택 문밖에 하인들이 서서 길가는 사람들한테까지 모조리 과일이니
과자니 하는 것들을 뿌렸다니까, 자기 생일 인데도 사람들에게 선물하고 싶다고 그렇게 우
겼다지 뭐야?"
"저 도련님이 칼츠 상단을 물려 받았다간 3년도 안 가서 거덜나겠구먼 그래."
보리스는 다른 이야기는 듣고 있지 않았다. 저 아이가 자신과 같은 해 태생이라는 것, 그것
만이 귀에 선명하게 들어와 박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은 왜 이토록 다른 것인가. 둘에게
는 같은 숫자의 해가 주어졌는데 그것은 얼마나 다른 일들로 흘러가 버렸단 말인가.
다른 사람이 앞서의 말에 반박해서 말하고 있었다.
"아냐. 저렇게 돈에 대해 개념없는 철없는 도련님들이 사업을 물려받고 나면 갑자기 아버
지들보다 더한 장사꾼으로 변신하는 일도 허다하다고."
3. 굴복하는 법, 치욕을 견디는 법
드디어 렘므의 관문이었다.
잔포드에서부터는 상인들의 행로를 따라 죽 여행해 왔다. 그들 대부분은 렘므와 아노마라
드 사이를 오가며 중개 무역을 하는 자들이었기에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라도 지름길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을 따라온 보리스는 꽤 빠른 여행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관문 도시인 사스포네에 이르러 그는 뜻밖의 문제에 봉착했다. 아니, 실은 그가 아
직 어렸기 때문에 지금까지 중대하게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가 구체화된 것이라 할 수 있었
다. 그에게는 국경을 넘을 수 있는 통행증이 없었다.
통행증을 얻을 방법도 없는 주제에 무작정 국경으로 오다니! 조금만 세상 물정을 잘 아는
어른이었다면 이런 바보 같은 일은 저지르지 않았겠지만, 많은 일을 겪었다고는 해도 보리
스는 아직 그런 문제에 대해 무지한 어린아이였다. 그나마 지금까지 별 충돌 없이 안전하게
여행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야말로 청천벽력의 상황이 닥친 셈이었다.
상인들은 대부분 렘므와 아노마라드를 오갈 수 있는 양국의 허가증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
서 안전하게 관문을 통과해 갔다. 본래 아노마라드와 렘므를 잇는 국경선은 대륙의 중앙을
가로지르는 드라켄즈 산맥(Drakens Mountains)으로 가로막혀 있었기 때문에 로젠버그 호수
근처에 자리잡은 로젠버그 관문을 비롯하여 몇 군데의 관문을 제하면 제대로 뚫린 곳이 거
의 없었다.
떠들썩한 여관이었다. 렘므로 넘어가기 위해 온, 또는 렘므에서 방금 넘어온 사람들이 무리
지어 모여 앉아 저마다의 이야기를 소리 높여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 절반 가량은
로젠버그 관문의 개방 시간인 내일 오전 10시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여관 한구석
에 놓인 램프시계가 서서히 기름을 줄여나가고 있었다.
밤새 걸어온 터라 몹시 피곤했지만 보리스는 어떻게 해야 할까 궁리하느라 쉴 수 있는 마
음의 여유가 없었다. 따뜻한 우유를 한 잔 주문한 그는 그의 긴 머리카락과 큰 키가 나이를
가려 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구석진 테이블에서 등을 돌린 채 앉아 있었다.
그런데 바로 등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두 남자가 애써 목소리를 낮추어 가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하니까 말이오. 4백 엘소 정도면 적당하리라고 보는데."
"에이, 이보소! 4백 엘소면 켈티카까지 한 번 더 갔다 오겠구려. 그런 소리 말고 딱잘라서
2백 엘소만합시다. 응?"
"어허, 4백이면 4백인 거지 웬 잔말이 그리 많소? 싫으면 관두시구려. 안 그래도 돈 낼 사
람은 널렸으니까."
"거기에 한 명 더 얹으면 당신 이익이지 내 이익이오? 너무 그러지 말고 끼워 주시구려.
한두 해 거래하고 지낸 사이도 아닌데."
"쳇, 돈을 내기 싫으면 통행증을 만들어 가지고 올 일이지! 나도 이 짓 해서 벌어먹는 거
이제 얼마 안 남았단 말이오. 렘므 쪽에서 눈치를 챘다는 소문이 있어서 말이야. 요새 아주
아슬아슬해 죽겠어."
"엣다, 그럼 2백50! 딱 요렇게만 합시다. 내 돌아을 때 당신 마누라 손에 쥐어 줄 선물 한
두 가지 안 가져다 줄 줄 아오?"
남자는 여전히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지만 오가는 말과는 달리 둘은 그다지 대립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잠시 후 두 사람은 남은 술을 다 마시더니 서로 몇 푼 안 되는 술값을 계
산하겠다고 실랑이를 벌였다. 결국 2백50 엘소 내겠다는 사내 쪽이 이겨서 술값을 냈다. 그
리고 서로 고개를 맞대고 뭔가 작게 속삭이면서 거리로 나갔다.
보리스는 돌아앉은 채 단편적으로 들은 이야기만으로도 상황을 대강 알아들었다. 로젠버그
관문을 통하지 않고도 렘므로 넘어가는 길이 어딘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 길 안내자가 지금
값을 흥정하는 중일 것이다. 4백 엘소라면 그에게도 있었다.
보리스는 일어나 주인에게 돈을 치르고 그들을 따라나갔다. 그때 한구석에서 보리스를 가
만히 지켜보고 있던 사람 하나가 슬그머니 그 뒤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푸르스름한 달이 그림처럼 빛났다. 새벽 4시의 하늘은 두터운 휘장으로 덮인 듯 낮게 내려
앉아 있었다.
보리스는 걸음을 서둘렀다. 남자들은 골목 모퉁이를 돌아가더니 어느 야트막한 지붕을 가
진 집 안으로 들어갔다. 문간에는 다른 남자가 지키고 서 있었는데 그들을 보더니 별 말 없
이 들여보내 주었다.
보리스는 잠시 망설였다. 저들을 믿어도 될 지 확신이 서지 않아서였다.
저들은 어른이고 전부터 서로 잘 아는 사이여서 서로 속이지 않을 지도 모르지만 그의 입
장은 달랐다. 한패끼리는 짐짓 좋은 사람인 체하는 자들도 낯설고 약한 상대를 발견하면 돌
변해서 자기 뱃속을 채우려 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4백 엘
소라는 큰돈을 가진 것을 보면 더 많은 돈이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 하고 강도짓을 하려
할 지도 모른다. 그에게는 아직 몇 백 엘소의 돈이 더 남아 있었고 말도 한 필, 그리고 무엇
보다도 윈터러가 있었다. 모험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둠 속에 선 채로 머뭇거리고 있는 동안 문 앞을 지키던 남자는 하품을 하더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 밖에는 처마에 달린 램프 하나만 달랑 남았다.
보리스는 그 아래 한 가지가 더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에는 거무스름한 뭉치, 또는 작은 자루가 아닌가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잠시 후 그
것은 보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한 것처럼 슬그머니 움직였다. 나무 기등 옆에서 몸을 약간
비틀더니 어깨를 부르르 떨며 기지개를 켰다. 길쭉한 꼬리가 동그랗게 말리며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왔다.
놈의 정체는 고양이였다.
보리스가 살았던 트라바체스에는 고양이가 드물었기에 그는 호기심으로 눈을 동그랗게 떴
다. 회색과 검은색으로 된 줄무늬에 파란 눈을 가진 고양이였다. 처음에 고양이는 보리스의
존재는 안중에도 없다는 것처럼 한참 동안 이리저리 몸을 비틀며 털을 손질하고 있었다. 그
러나 조금 지나자 이윽고 한 걸음 램프 빛 아래로 걸어나와 자길 지켜보는 인간더러 이보라
는 듯 당당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제야 자세히 보니 고양이는 드물게 큼직할 뿐만 아니라 온 몸 털 구석구석 성한 곳이 없
을 정도로 만신창이인 놈이었다. 꼬리는 절반 정도로 잘렸고, 눈 한쪽이 짜부라졌으며, 다른
고양이의 발톱으로 털이 뜯겨나간 듯한 상처가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귀조차도 이상한 모
양으로 접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리를 절거나 몸이 아픈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구석에 숨어서
갑자기 움직였다가는 발견한 사람 쪽에서 오히려 흠칫 놀랄 정도로 큰 몸집에 튼튼한 골격
을 가지고 있었고, 거친 인상만큼이나 느긋한 여유까지 지닌 고양이였다. 흡사 노련한 전사
의 풍모를 지닌 고양이랄까. 용병, 또는 방랑 검객이랄까.
"......."
입을 한바탕 벌렸지만 특유의 야옹거리는 소리도 내지 않은 채 몇 걸음 걸어가더니 구석에
고인 구정물을 조금 핥았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보리스는 고양이가 따라오라
고 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잠시 동안 아이다운 심정으로 돌아간 보리스는 손가락을 들어 자신을 가리키면서 조그맣게
말했다.
"나?"
고양이는 흡사 대답하듯 날카로운 이빨이 가득한 입을 크게 벌렸다가 다시 다물었다. 여전
히 소리는 내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따라오라고, 네게 보여줄 것이 있다고 하는 것처럼.
보리스는 저도 모르게 고양이가 가는 쪽으로 몇 걸음 내딛었다. 그리고 망설임 따위는 뒤
에 남겨둔 채 고양이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고양이는 다시 뒤를 돌아**는 않았다. 그저 반쪽뿐인 꼬리를 흔들거리며 성큼성큼 걸어
서는 통이 잔뜩 쌓인 골목으로,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창문을 여는 거리로, 그
리고 마을 외곽을 삐져나와 로젠버그 관문이 있는 방향의 산길로 계속해서 가고 있을 따름
이었다. 중간에 엉뚱한 곳을 기웃거리거나 멈춰서 다른 일을 하는 법도 없었다.
보리스가 꽤 많이 따라오고 말았다고 생각했을 무렵, 고양이는 갑자기 처음으로 소리를 냈
다. 약간 목이 걸걸한 사람이 흉내내고 있는 것처럼 거친 가르릉 소리였다.
"이리 와."
흠칫, 보리스는 고개를 들어 난데없이 나타난 사람을 쳐다보았다. 눈앞에는 길고 검은 로브
로 온 몸을 감싸고 후드를 깊게 내려 얼굴조차 보이지 않는 사람이 서 있었다. 고양이는 그
사람 앞으로 다가가더니 발치에 가만히 엎드렸다.
보리스는 말문이 막혀 잠자코 있었다. 내가 왜 여기까지 따라왔지?
"무슨 볼일이냐?"
낯선 목소리가 묻고 있었다. 보리스는 머뭇거리고 있기보다는 정직하게 대답하리라고 생각
했다.
"고양이를 따라왔을 뿐이에요. 당신의 고양이였다면 미안합니다."
"내 고양이는 아냐. 이 놈은 누군가한테 속할 고양이가 아니니까."
뜻밖으로 시원스런 대답이었다. 그러더니 오히려 그쪽에서 되묻고 있었다.
"이쪽 길이라면 로젠버그 관문을 넘어가나 보군. 렘므로 가나? 아니면 렘므에서 넘어온 건
가?"
별로 숨길 필요는 없었다.
"렘므로 갈 생각이었지만 통행증이 없어서 못 가고 있습니다."
"통행증이 없다고? 그러면 통행증이 있는 사람과 일행인 체 하고 함께 가면 될 텐데?"
그건 한 번도 생각해 본 일이 없는 해결책이었다. 하긴 상인들이 데리고 있는 수십 명의
일꾼들이 모두 다 자신의 통행증을 갖고 있지는 않을 터였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려줘
서 고맙다고 말하려 했다. 그런데 상대가 먼저 가로채어 말하고 있었다.
"정체도 모르는 자들한테 돈까지 내고 밀수 통로를 안내 받는 쪽보다는 휠씬 안전하지."
마치 자기 마음속을 들여다본 듯한 말에 보리스는 이상한 표정이 되어 상대방을 올려다보
았다. 그러나 상대의 얼굴은 후드 때문에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다만 매우 키가 큰 사람이라
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어쨌든...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전 그만 가보겠습니다."
돌아서려 하자 남자가 다시 말했다.
"이 고양이를 따라온 걸 보고 넘겨짚은 것 뿐이야. 이 놈은 주로 밀수꾼들의 뒤를 잘 따라
다니니까 말이지."
별다르게 물은 일은 없었다. 그러나 남자는 또다시 이어서 말했다.
"어때? 내가 데리고 넘겨 줄까?"
순간 마음속에서 의심이 확 일었다. 보리스는 차갑게 대꾸했다.
"당신도 정체 모르는 사람이기는 마찬가집니다. 실은 밀수꾼보다 더한 사람인지 겉만 보고
어떻게 알겠습니까."
갑자기 남자는 보리스를 내려다보며 키들거리기 시작했다.
"후훗, 훗훗, 어린아이면서 꽤 똑똑한 체 하잖아? 하지만 그런 식으로 정체도 모르는 사람
의 비위를 함부로 건드리면 곤란하지. 내가 '날 밀수꾼과 비교하다니, 이런 건방진!' 하고 외
치면서 검이라도 뽑아들면 어쩔 거지?"
점점 더 이상한 소리만 지껄이는 남자였다. 보리스는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대꾸했다.
"저도 검을 뽑겠죠. 하지만 당신과 싸우고 싶지는 않으니 그만 가겠습니다. 실례를 저질렀
다면 사과 드리겠습니다."
"저런, 기대를 저버리면 곤란하지. 그럼 잘 가라고."
기대를 저버리면 안 된다, 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는 돌아서서 걸으면서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일꾼 자리는 쉽게 얻을 수가 없었다. 보리스는 본래 거래를 잘 하는 사람이 아니었
기 때문에 '자, 저를 국경 너머로 데려가 주시면 2백 엘소 드리겠습니다'와 같은 말을 쉽게
하지도 못했고, 애써 비위를 맞춰 가며 데려갈 마음이 내키게 행동하지도 못했다.
이윽고 오전 10시가 가까워졌다. 보리스는 다시 한 번 그 남자와 마주쳤다. 전사 고양이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어이, 함께 갈 패거리는 구한 거야?"
그가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면 같은 사람인지 알아보는 것도 실은 무리였다. 그 자는 여름
이 가까워오는데도, 그리고 날이 밝았는데도 여전히 후드를 젖힐 줄을 몰랐다.
보리스는 어이가 없으면서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유연하게 대꾸하고 있었다.
"그래서 당신과 한 패거리가 될까 궁리 중이었죠."
"흥, 내 조건은 까다로운데. 들어 볼 마음이 있다면 말해 줄 수도 있고."
이상스럽게 개구쟁이 같은 저 태도는 누군가를 연상하게 하는 점이 있었지만 근거 없는 억
측은 접어버렸다.
"말해 보시지요. 돈이라면 약간 드릴 수도 있어요."
"난 돈은 필요 없어. 대신 성격에 문제가 있는지 누군가를 학대하는 걸 엄청 좋아해서 말
이야.... 국경을 넘는 동안만 내 제자인 척 하라고. 다만 그동안 내가 온갖 욕지거리며 손찌
검 따위를 계속해서 퍼부을 텐데 모조리 꾹 참아야 되는 거지. 무슨 일이 있어도 반항하거
나, 토를 달거나, 쥐어박는 내 손을 피하거나 해서는 안 돼. 국경을 넘어서 헤어질 때까지만.
무슨 말인지 알겠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이상스런 조건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그 조건의 내용을 들으면서 보리
스는 이 자가 자신을 속이려는 것은 아니라는 기분이 들었다. 본래 누군가를 등쳐먹으려는
자는 처음에 친절하고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체 하는데 이 자는 정 반대이지 않은가.
"좋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그리하여 계약은 성립되었다.
"일루 와! 어딜 기웃거리는 거야, ****처럼! 좀 빨리빨리 못 와? 왜 그리 굼떠? 빌빌대
는 꼬락서니하고는, 죽도 못 얻어 처먹었냐?"
"야, 이 빌어먹을 곰**야! 여기 서 있으랬더니 어딜 지 멋대로 싸돌아 다니는 거야! 덜떨
어지기는 곰보다도 못해서는... 저, 저, 누가 또 그러고 오래? 엉?"
"로브 앞쪽 단정히 하랬지! 나이 그만큼이나 처먹은 놈이 아직 옷도 제대로 입을줄 모르
냐? 만사가 그 따위니까 장로님이 하루가 멀다 하고 매타작을 놓는 거야, 알어? 그래놓고
찔찔 짜기는 **같이......."
"이제 그만하면 이불에 오줌은 그만 쌀 때가 됐잖아! 아침마다 내가 여관 주인한테 이렇게
빌어야 되겠어? 세 살 먹은 애**보다 못한게, 눈 치뜨지 마! 아래로 뜨랬지!"
"언제 글 좀 읽게 될래? 여기 뭐라고 쓰여 있는지 아직도 몰라? 내가 여기 올 때마다 너한
테 크게 읽어서 가르쳐줬잖아, 이 **아! 로, 젠, 버, 그, 관, 문, 로젠버그 관문이라고 쓰여
있잖아!"
......조건은 생각보다 횔씬 어려운 것 같았다.
로젠버그 관문까지 채 가기도 전에 평생토록 들어온 것보다도 더 많은 욕지거리를 듣고 수
십 번은 더 쥐어 박혔다. 그렇게 많은 종류의 욕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그러나 그런
욕이 단순히 귀에 들려오는 것과 자신을 향해 말해지는 것 사이에는 도저히 간격을 좁힐 수
없을 정도로 크나큰 차이가 있었다.
몇 번인가 자신의 처지를 잊어버릴 정도까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애써 꾹꾹 눌러 참았
다. 어떤 때는 억울해서 손까지 떨릴 정도였으나 힘껏 자신을 억제했다. 그런 자신을 보며
보리스는 스스로가 보기보다 자존심이 강하다는 사실까지 부수적으로 발견하고 있었다. 어
린 나이에 지금껏 별별 꼴을 다 당해온 터에 욕 몇 마디 듣는 것쯤 어떠랴 했는데, 생각과
는 천지 차이인 인내심의 시험이라는 것을 깨달은 셈이었다.
그래도 욕하는 것은 어떻게 참겠는데 사실이 아닌 것까지 마치 사실인 양 혀까지 차며 말
하는 것은 심해도 너무 심했다. 관문 근처까지 올 즈음이 되자 비슷한 거리에서 함께 걸어
오던 사람들이 모두들 보리스를 흘끔거리며 수군대기 시작했다. 멀정하게 생겼는데 사실은
몇 번씩 가르쳐 준 글자도 못 읽는 바보에 아직까지 소변도 가릴 줄 모르는 지진아라고.
뺨이 귀밑까지 붉어지다 못해 앞서 가는 사내처럼 후드로 얼굴이라도 가리고 싶은 심정이
었다. 이 정체 모를 남자가 그에게도 거무튀튀한 로브 한 장을 내주긴 했다. 그러나 불행히
도 거기에 후드는 달려 있지 않아서 꼼짝없이 사람들에게 ***의 얼굴을 선전하는 꼴이
되어버렸다.
"이리 와, 멍청아! 여기 얌전히 서!"
관문 앞에서 남자는 특이한 통행증을 내밀었다. 그것은 전 대륙을 순례하며 봉사하는 것으
로 일생을 보내는 프라바(Prabha) 순례인의 표지인 은으로 만든 납작한 판이었다. 거기에는
단지 드래곤(Dragon)한 마리의 모습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을 뿐 통행증에 필수적인 유효기
간이나 승인 사증을 비롯한 어떤 것도 나타나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문 수비대
는 그 표지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보리스 쪽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 남자가 말했다.
"아직 견습이어서 표지가 없네. 한 바퀴 죽 돌아야 자격이 생기지."
그러자 수비대는 보리스도 무사히 통과시켰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간단했지만 보리스는 아직도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다. 그 남자는 이
제 곧 보리스와 헤어지게 된다 싶으니까 아예 한시도 입을 쉬려 하지 않았다. 뺨을 꼬집기
도 하고 어깨를 툭툭 치기도하는 데다 심지어 발로 걷어차기까지 하며 가능한 모욕은 다 주
었다. 그러나 보리스는 묵묵히 참아냈다. 세상에 쉬운 일은 없을 터였다. 일단 자신을 속이
지 않고 안전하게 통과할 수 있게 해준 이상 어떤 모욕이라도 다 견뎌 줄 참이었다.
인고의 시간도 이제 끝났다.
"마지막으로 무릎 꿇고 안녕히 가시라고 인사해라. 그러고 나면 이제 다 끝나고 헤어지는
거지."
아직껏 아버지와 또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무릎 꿇어 본 일이 없는 그였지만 말없이 무릎
을 꿇고 안전한 여행이 되라고 이야기했다. 순간 순간 울컥 하고 치밀어 모두 다 때려치우
고 싶은 마음이 들곤 했지만 결국 이렇게 참아낸 자신이 대견하게까지 여겨졌다. 긴 고갯길
로 이루어진 관문을 모두 통과하는 데는 몇 시간이 걸렸을 뿐이지만, 아직껏 시간이 이렇게
느리게 느껴진 일은 다시 없었다.
"자, 끝났다. 생각보다 힘들지?"
끝났다는 말을 들으면 마음이 편해질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갑자기 방금 전까지 억
울했던 것을 모조리 갚고 싶은 마음이 와락 드는 것을 느끼며 스스로도 놀랐다.
"분통 터지는 상황에서 분연히 화를 내고 행동을 개시하는 것은 물론 용기다. 그렇지만 견
뎌야 할 때 끝까지 자신을 억누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닌 것이지. 안 그래?"
비웃는 건지 충고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불편해도 계약은 계약이라고
생각하며 간신히 자신을 억제했다. 그런 보리스의 표정을 보며 상대는 희한하게도 유쾌한
목소리로 웃었다.
"내가한 가지 제안하고 싶은 게 있는데 말야."
"뭐죠."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굳어져 있었다. 계약이었을 뿐이니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도 잘 되지 않았다.
"렘므 왕국을 여행할 생각이라면 나도 길이 같은데 말야, 우리 동행이 될까?"
"......."
뻔뻔스러움도 정도가 지나치다 싶었다. 이만큼 했으면 췄지 또 뭘 얼마나.......
그러나 갑자기 다른 생각이 들었다. 저 자는 단지 동행하자고 했을 뿐이지 지금과 같은 관
계를 계속 유지하자고 하지는 않았다. 한 차례의 계약이 끝났으니 당연히 방금 전의 규칙이
적용될 리 없었다. 그는 단지 동등한 상태로 동행하자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조금도 내키지 않았다.
"싫습니다."
"감정에 횝쓸려 득과 실을 구별하지 못해서야 쓰나. 내 곁에 있으면 배울 것도 많을 테고,
또 검술도 가르쳐 줄 텐데 그래도 싫어? 또한 안전하기도 할거란 말이다. 난 한 번 마음먹
고 약속한 일은 어기는 법이 없는 사람이니까. 혼자 여행하기에 너 자신이 너무 어리다고는
생각 하지 않나?"
희한할 정도로 친절한 권유였지만 보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당신 말이 다 옳지만 그래도 싫은 건 어쩔 수 없군요. 그만 가겠습니다. 덧붙이자면 다시
는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고요."
"정 그러면 좋을 대로 하셔. 나중에 후회는 말고."
둘은 헤어졌다. 보리스는 일부러 그 자리를 빨리 벗어나려는 것처럼 지금껏 끌고 오던 말
에 올라타 배를 걷어찼다.
처음에는 아노마라드와 다를 것도 없는 자연이다 싶었다. 그러나 밤이 되는 순간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다.
차갑고 강한 바람이 나무조차 몇 그루 없는 휑뎅그렁한 들판을 가득히 메웠다. 바람 소리
가 가장 확연히 낯설었다. 트라바체스의 들판에 불던 바람과는 얼굴에 닿는 느낌부터가 달
랐다. 아노마라드에서 불던 훈풍과는 비교조차 무용했다.
그리고 그 바람만큼 거친 환경이 처음부터 그를 맞았다.
"꼬마야, 가진 것 다 내놓고 조용히 떠나거라."
그들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몰랐다. 산적? 또는 강도질을 하고 싶어진 상인들? 그도 아니면
이 일대의 깡패들? 어느 쪽이든 십여 명 가량 되는 무리는 태연한 모습으로 다가와 보리스
를 둘러쌌다. 그 표정이며 태도가 그렇게 여유 있을 수가 없었다.
"말 들었지? 말에서 얼른 내려. 말도 내놓고 짐도 다 내놓고 몸만 가지고 얼른 꺼지는 거
야. 이해가 가냐?"
"그 자식 느리네! 빨리빨리 하라고!"
눈을 돌려 주위를 훑었다. 열한 명. 모두 말을 탄 어른이고 검을 비롯한 무기들을 뽑아든
채 기세 등등하게 포위하고 있었다. 적이 모조리 실력자들은 아니라 해도 십여 명을 당할
재주가 한 사람에게 있기란 힘든 노릇이었다. 더구나 저들은 어른, 자신은 아직 아이. 처음
부터 대결이 성립되지 않았다.
불안감과 함께 답답함과 좌절감이 동시에 느껴졌다. 한때 채찍으로 그를 핍박했던 저 가짜
깡패들 앞에서도 무릎꿇지 않았던 자신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단지 만용에 불과했다는 사실
도 잘 알고 있었다.
"얼른 말 엉덩이를 한 대 때리는 거야. 그러면 말이 이쪽으로 오지. 그러면 넌 조용히 걸어
서 떠나면 되는 거라고."
마음속에서 한 번 대항해 볼까 하는 마음이 머리를 쳐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그때
문득 무례한 순례자가 한 말이 떠올랐다. 그때는 충고로 느끼지도 않았는데 정말로 갑자기
그 말이 마음을 사로잡아 버렸다. 그리고 그 소리야말로 자신의 인생관에 딱 맞는 이야기라
는 생각이 들었다.
참아야 할 때 참지 못해서 죽어버릴 수는 없는 거니까.
"말하고 짐을 드리면 정말 보내주시는 거지요?"
"두말하면 잔소리야. 얼른 얼른 해."
보리스는 말에서 내렸다. 오랫동안 타고 다니던 말에 꽤 정이 들었었지만 하는 수 없었다.
짐이라고 해 봤자 란지에가 준 도시락 주머니 속에 들어 있던 단도와 금화 조금, 약간의 여
행용 물품들과 식량이 전부였다. 그리 아깝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말 엉덩이를 툭 쳤다. 말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앞으로 걸어갔고, 사내들 가운데 한 명이 고
삐를 잡았다. 보리스는 됫걸음질로 물러나서 등 뒤로 둘러싼 두 사내의 말 사이로 걸어갔다.
사내들은 말에 달린 주머니를 끌러서 풀어 보고 있었다. 든 것이 별로 없자 실망하는 눈치
가 역력했다. 막 포위를 빠져나가려는 참인데 갑자기 한 사람이 말했다.
"저 녀석, 검도 괜찮아 보이는데?"
다른 사람이 말을 받았다.
"저 허름한 거? 저게 뭐 좋다고......."
"아냐, 잘 봐. 칼집만 허름하지 손잡이는 그럴듯하게 생겼다고. 제대로 만든 검 같은데."
저들끼리 몇 마디 수군대는 소리를 들으며 보리스의 가슴이 심하게 두방망이질 쳤다. 걸음
을 서두르려 하는데 한 사람이 소리 높여 외쳤다.
"야, 꼬마야! 허리에 검도 풀어서 내려놓고 가거라. 살펴보고 쓸만한 거면 이 어른이 좀 쓰
셔야 되겠다."
보리스는 걸음을 멈추었다. 어떻게 해야 할 지 쉽게 판단이 서지 않았다. 돌아서지도 않았
고, 검을 풀지도 않았다.
형은 분명 윈터러보다 목숨을 소중히 여기라고 말했었다. 그러나 그가 그런 치욕까지 견디
면서 구차하게 살아남으려 해야 하는가? 아직껏 자신의 실력도 한 번 시험해 ** 못한 채
아끼는 것을 함부로 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아니다, 할수 있는 일이 있다면 끝까지 해보아야 하는 거다.
보리스는 돌아섰다. 손이 부르르 떨렸지만 그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아 이마가 땅에
닿도록 고개를 숙였다.
"제발 용서해 주세요. 이 검만은... 돌아가신 아버지께 받은 마지막 유품이라 생명처럼 아끼
고 있습니다. 별달리 좋은 것도 아니니 그냥 가져가도록 허락해 주세요. 베풀어주신 은혜
는...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
한 남자가 동료들을 돌아보았다.
"그냥 보내 줄까? 별로 좋은 것도 아니라는데."
다른 사람도 말했다.
"아버지 유품을 뺏기란 좀 꺼림칙하군 그래. 그냥 보내자고. 아직 어린앤데 저렇게까지 말
하잖냔 말야."
"으음......."
약간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았다. 몸을 숙여서 얻을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얻을 참이었다.
치욕을 견딜 수 있는 자만이 더 큰 것도 지킬 수 있다는 생각이 생생하게 가슴속을 채웠다.
자신은 약자였다. 약자의 생존방식을 몸에 익혀야만 했다.
그러나 의견은 반반으로 갈렸다. 다른 남자가 목소리를 높였다.
"무슨 소리야! 안 좋은 거라고 헛소리하는 놈들이 갖고 있는 게 본래 제일 좋은 거라는 거
몰라? 저렇게까지 하는 걸 보니 더욱 수상쩍은데, 난 꼭 뺏어서 봐야겠다."
"내 생각도 마찬가지야. 겨우 말 한 필에 동전 몇 푼 뺏고서 알짜를 놓치면 안 되지. 꼬마
야, 허튼 수작 하지 말고 그 검 풀어놓고 조용히 **라."
"들었지? 얼른 시키는 대로 하라고!"
"......."
보리스는 쉽게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그는 다시 한 번 목소리를 낮게 해서 호소했다.
"그냥 보내 주세요, 제발.... 이 검을 잃어버린다면 저 세상에 계신 아버지와 다른 가족들을
만날 면목이 없습니다. 집안 전체에서 겨우 저 한 사람 남았는데... 이 검은 제 가족이나 마
찬가집니다. 지금껏 이것 때문에 죽지 못하고 살아남았습니다. 다른 것이라면 뭐든 시키는
대로 다 하겠습니다. 부디 자비를 베풀어주세요, 훌륭한 어르신들......."
몇 마디 하다 보니 이제는 애원하는 것뿐 아니라 상대방을 높여 말하며 자기 자존심을 꺾
는 것까지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얼마 전의 자신이었다면 상상도 하지 못했을 일이었다.
"조그만 녀석이 횡설수설 말도 많네. 으씨, 얼른 가랄 때 가. 알아들어?"
"안 돼! 어딜 맘대로 가려고! 검 안 내놓고 가면 목을 따버린다!"
"너무 그러지 말라고. 우리가 언제부터 어린애 놀리며 사는 사람들이 었다고......."
"놀리긴 개뿔! 이 짓 한두 해 해먹는 거냐! 저런 놈들이 가진 건 분명히 좋은 거야. 어디,
내 손으로 직접 뺏어서 봐야겠다!"
한 남자가 성큼 말에서 뛰어내렸다. 그러더니 검을 빼어들고 보리스가 있는 쪽으로 다가갔
다. 일이 그쯤 되자 말리던 사람들도 더 이상 별 소리를 하지 않게 되었다.
"일어나! 얼른!"
보리스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오른손을 윈터러의 손잡이에 얹은 채, 그리고 차가운 눈동
자로 상대방을 쏘아보았다. 그 남자는 지금까지 애원하던 녀석의 갑자기 달라진 표정을 보
고 어이가 없어진 모양이었다.
"이 자식이 갑자기 미쳤나, 뭘 째려봐! 흰눈 뜨고 보면 네 주제에 뭘 어쩔 건데!"
"......."
보리스는 대답 없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보리스는 이미 포위망
에서 약간 벗어나 있었다. 적이 검을 불쑥 코앞으로 들이댔다.
"이 자식이! 한 번 해보겠다는 거야, 뭐야!"
"꼬마야, 후회하게 될 걸?"
보리스의 손은 윈터러의 손잡이를 힘있게 움켜쥐었다. 다른 손이 칼집을 잡았다. 이제 더
물러설 곳은 없고, 오직 싸움만이 있을 뿐이었다.
"누가 후회하게 되나, 두고 봅시다."
스르릉.
드디어 낡은 칼집에서 순백의 칼날이 뽑혀 모든 사람의 눈앞에 내밀어졌다. 새파랗게 맑은
하늘이 푸르스름하게 비칠 정도로 맑은 검신, 싸늘한 냉기가 파랗게 뿜어 나오는 아름다운
검이 소년의 손에 있었다. 사내들은 눈이 휘둥그래지다 못해 말문이 막혔다. 한 명이 화가
치미는 듯 소리쳤다.
"저것 봐! 저런 걸 두고 지금 그냥 가자고 한 거냐!"
"빌어먹을!"
보리스는 칼집을 허리띠에서 빼어 내던졌다. 그리고 펄쩍 뛰어 뒤로 물러나면서 검을 세워
**을 상대를 노렸다. 가장 먼저 소리친 남자가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고, 다른 자는 말의
배를 걷어찼다. 말발굽으로 뭉개 버릴 셈인 듯했다.
싸아악!
사내의 검이 윈터러의 칼날과 닿아 미끄러졌다. 손잡이까지 가기 전에 힘껏 밀치고 다시
물러났다가 곧장 앞으로 찔렀다. 두 손으로 손잡이를 단단히 움켜쥔 채 공격과 방어를 겸했
다. 윈터러를 진짜 바스타드답게 사용하는 것이다.
트팍! 턱!
보리스의 팔 힘은 이제 생각보다 많이 강해져 있었다. 과거 죽기 직전의 예프넨만큼은 아
니라 해도 보통 성인 남자의 검 정도는 쉽사리 밀칠 수 있었다. 윈터러의 날이 얼음 칼날처
럼 사내의 목으로 쇄도했다. 목을 꿰뚫지 못하는 대신 턱을 찢었다. 진한 핏방울이 허공을
갈랐다.
"오냐, 네놈이 죽을 자리 잘 만났다!"
이번에는 두 개의 검이 한꺼번에 양쪽에서 찔러져 들어왔다. 아래쪽으로 들어오는 검을 단
련된 발로 걷어차 넘기면서 동시에 다른 쪽을 검으로 받았다 살짝 당겼다가 와락 밀쳤다.
그리고 곧장 가로로 휘둘러 베었다.
"크윽!"
이번에는 제대로 된 상처였다. 사내는 리벳(rivet)이 박힌 가죽 갑옷을 입고 있었지만 윈터
러의 날은 리벳까지 모조리 베어버렸다. 그러면서 동시에 배에 깊숙이 그어진 상처를 입혔
다. 말을 타고 달려들려 했던 남자는 동료들이 보리스와 뒤엉킨 까닭에 제대로 하려던 일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보리스는 일부러 사내들이 모여선 쪽으로 빠르게 뛰어들었다. 그리고
검을 사방으로 돌리며 자신을 방어했다. 결국 말에 올랐던 사내들도 다 내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 생각보다 적들의 검 실력은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저 자식! 죽여버려!"
"감히 우리를 속이려 해? 오늘 여기가 네놈 무덤이 될 거다!"
기회를 보아 말에 올라타야 했다. 어느 말이든 좋았다. 잘 훈련된 말들은 주인들이 내렸는
데도 멀리 가지 않고 약간 떨어진 곳에서 맴돌고 있었다. 그 가운데 하나를 잡아타지 않는
한 이 싸움은 승산이 없었다.
"하압!"
이제는 놀랄 만큼 가볍게 자신의 손에서 윈터러가 휘둘러지고 있었다. 비록 완벽한 검술은
아니라 해도, 이제 형이 했던 것처럼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이 검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짐이 아니라 무기였다. 자신의 분신인 양, 바로 자신을 위해 싸우고 있는 검이었다.
마치 몸의 일부가 된 것처럼.......
두 사내가 목덜미와 어깻죽지를 찔렀지만, 대신 보리스도 허벅지와 등에 날카롭게 찔린 상
처를 입었다. 사내들은 뜻밖으로 제대로 정련된 검술을 만나 약간 당황하고 있었으나 곧 자
신감을 되찾고 서서히 포위망을 짜기 시작했다. 열한 명 대 한 명이었다. 진다면 말이 되지
않았다.
츠르르... 번뜩!
저런 것이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소년의 검은 미치도록 훌륭했다. 저런 것이 소년의 손에
들려 있기에 망정이지 만일 제대로 된 검사의 손에 들려 있었더라면 정말 오합지졸 열한 명
쯤은 순식간에 쓰러뜨리고도 남을 검이었다. 솔직하게 저 검 하나만의 가치만 해도 몇 백
명 군대에 맞먹을 정도였다. 검 하나로 그 정도를 이길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드물
고 가치있는 물건이란 뜻이었다.
그런 것을 어린애한테서 빼앗지 못하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보리스는 처음부터 너무 긴장하여 싸운 나머지 점차 몸 곳곳이 지치는 것을 느꼈다. 그러
나 그에 비례해서 정신은 더욱 맑고 또렷해졌다. 늘 가지고 다니기만 했던 윈터러에서는 쓸
수록 더한 가치가 느껴졌다. 단도로 처음 사람을 죽였을 때 느꼈던 충격과 죄악감조차 이
검의 중독적인 아름다움 앞에서는 빛이 바랠 듯했다.
검이란 살해를 위해 태어난 물건이고, 그 목적을 위해 완벽한 것이 검의 아름다움이 아닌
가. 그것을 두려워하고 피할 필요가 무엇이겠는가.
지금껏 한 번도 해** 못한 생각이 머릿속을 속속들이 채웠다. 자신이 왜 이런 생각에 사
로잡히고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이상하게도 검과 일체가 되어 그것을 휘두를수록, 더 나은
솜씨로 검을 능숙하게 쓰면 쓸수록, 그는 어딘가 모르는 곳에서 솟아나는 힘을 느끼고 그것
을 온전히 가지고 싶어졌다. 거기에 익숙해지고 싶어졌다.
더 강하게!
윈터러의 날이 드디어 한 사람의 가슴을 뚫었다. 피가 허공으로 솟구치며 샘솟았다. 그러나
그 모습은 오히려 그를 흥분시켰다. 전처럼 사람을 죽였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멍해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단지 잘 해냈을 뿐이다, 그런 생각과 함께 그는 오히려 빨라진 몸놀
림으로 뒤쪽으로 다가드는 검을 낮게 후려쳤다. 반원을 그리며 날아간 칼날이 사내의 발목
을 잘라 버렸다. 아주 깔끔하게, 단숨에 잘라져 버렸다. 보리스로서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큭... 크아아아아악!"
비참한 비명 소리가 허공을 찢었다. 윈터러는 처음 그가 사용하던 때보다 더욱 날카롭게
잘 들고 있었다. 방금 간단한 동작으로 사람의 발목을 잘라버린 것은 도저히 보통 검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기이한 광채가 검날 전체를 감싸고 서서히 번져나가고 있었다.
"한꺼번에 달려들어!"
닿기만 하면 잘려나가는 검 앞에서 그들도 이제 무작정 덤벼들 수는 없게 되었다. 사내 세
사람이 말을 잡아탔다. 그리고 사납게 몰아 바로 앞까지 달려왔다. 피하면서 보리스는 다시
검을 휘둘렀다. 말 한 마리의 다리가 잘라지는 것이 보였다. 이상하게도 상쾌한 기분이 몸을
감쌌다. 그러나 다음 순간.......
"***아, 받아라!"
한 사람이 날린 짧은 단도가 정확하게 보리스의 등에 푹 꽂혔다. 정확히 그 순간부터였다.
보리스는 갑자기 온 몸에 오한이 일며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가 하는 생각에 쉽싸였다.
등뒤에 꽂힌 단도... 그것은 자신도 과거 한 번 했던 일이 아닌가?
고조되었던 감정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손에 힘이 빠졌다. 상처는 극심했지만 그것보다
정상으로 돌아온 그의 정신이 갑작스레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면서 심한 충격을 가져다 주었
다. 비틀거리는 그를 한 사내가 재빨리 움켜잡았다. 다른 사내는 검을 든 손을 비틀었다. 윈
터러가 손에서 떨어졌다.
한 사람이 검을 도로 줍지 못하도록 발로 짓밟았다. 또 다른 사내가 등에 박힌 단도를 뽑
았다. 대신 주먹이 날아와 턱을 강타했다.
"이 자식아, 넌 오늘 죽었다! 되지 못한 목을 쳐서 산채 앞에 내걸어놓을 테다!"
발목이 잘린 남자가 바닥에 쓰러진 채로 욕설을 퍼부었다. 다른 사내들이 보리스의 두 팔
을 단단히 움켜잡았다.
그때 갑자기 상황이 바뀌었다.
슈욱!
등뒤에서 벌어진 일이라 처음에 보리스는 왜 사내들이 자신을 놓아버리고 황급히 물러나는
지도 몰랐다 맥이 다 빠져 있었던 까닭에 저도 모르게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때 한 사
내의 발 밑에 깔린 윈터러가 보였다. 그 사내도 그걸 주우려 했고, 보리스도 그것을 잡으려
했다.
손은 거의 동시에 닿았다.
"저리 **!"
손잡이 부분에서 둘의 손이 맞닿자 사내가 버럭 소리지르며 보리스의 손을 밀쳤다. 그러나
보리스는 필사적으로 이번에는 검날을 움켜잡았다. 당장 손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러
나 놓을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이 자식이!"
그때였다. 머리 위에서 검은 옷자락이 획 스쳐 지나가고 동시에 윈터러의 손잡이를 쥐었던
사내가 비명을 울렸다. 한 사람이 그 너머에 가뿐하게 내려서고 있었다. 고개를 드니 긴 장
검이 사내의 등에 꽂혀 배까지 관통된 것이 보였다. 로브의 남자는 어려운 기색 없이 검을
도로 뽑았고 다시 한 번 폭풍 같은 기세로 적들을 향해 달려들어갔다.
보리스는 윈터러를 집었다. 오른손에서는 생각보다 많은 피가 철철 흘렀다. 착각일지도 모
르지만 윈터러는 방금 전투를 벌이는 동안 이상스러을 정도로 매우 날카로워져 잠깐 손대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상처를 입혔다. 좀더 쥐고 있었다면 정말 손가락이 잘려나갔을 지도 몰
랐다.
윈터러를 쥔 보리스는 바로 몸을 돌렸다. 비스듬하게 들어오는 수 많은 사선들의 엇갈림...
무한히 빠르게 번뜩이는 검. 그의 눈에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들어왔다.
장검 하나를 든 로브의 사내가 눈 깜짝할 사이에 적들을 해치우고 있었다. 그의 모든 동작
은 눈으로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빨랐고, 또한 유연하고 정확했다. 검은 윈터러와 비슷한
크기의 바스타드였으며 그 자 역시 두 손으로 검을 썼다.
한 사내의 목을 긋고 동시에 다른 자의 뺨을 푹 찔렀다. 몸을 수그렸다가 뒤로 접근하는
자를 냅다 올려 찼다. 한 발로 딛고 몸을 솟구치더니 말을 탄 사내의 팔을 베어 버렸다. 동
작 하나 하나가 날래고 완벽했으며, 그 손에 쥐어진 검 역시 한껏 힘을 머금은 듯 보였다.
순식간에 사내들 가운데 절반이 쓰러지고 나머지는 황급히 달아나기 시작했다.
낯선 남자는 달아나는 자를 뒤쫓지는 않았다. 흡사 귀신이라도 본 듯한 얼굴로 허겁지겁
말을 집어타고 달아나는 자들을 감상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지켜보고 있었
다. 군데군데 뿌려진 핏자국, 그리고 두 사람만이 남았다.
보리스의 말은 달아나지 않고 근처에서 어슬렁대고 있다가 주인에게 다가왔다. 그러나 보
리스는 말을 돌보기보다는 눈을 크게 뜬 채 우뚝 서서 상대방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당신......."
그랬다. 첫 번째로 저 익숙한 로브와 후드는 그날 오전에 로젠버그 관문을 넘자마자 헤어
진 그 불쾌한 사내의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보리스가 입을 떼지 못하고
있는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헛것을 본 듯 지금 자신이 본 것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 검
술, 그에게 너무도 익숙한 동작과 몸놀림들.
어떻게? 어떨게 이 순간, 이 자리에, 이런 식으로?
남자는 몸을 돌리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그 검, 칼집에 어서 꽂아라. 더 늦기 전에."
저도 모르게 그 말에 따르고 있었다. 허름한 칼집은 저만치 말발굽에 약간 짓밟혔던 흔적
과 함께 떨어져 있었다. 칼집을 들어 윈터러를 꽂는 순간, 그는 자신의 가슴속에서 소용돌이
치고 있던 무언가가 갑자기 사라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윽고 윈터러의 흰 광채는 완전
히 가려졌다.
"첫 번째 가르침은 잘통하더냐?"
보리스는 허리띠를 주울 생각도 하지 않고 상대방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등의 통증과 함께
여러 가지 혼돈이 휘몰아쳤다. 상대방이 다시 말하고 있었다.
"생명의 은인에게 보답도 해야지?"
"당신은......."
들판의 풀이 날렸다. 북부의 차가운 바람이 맴도는 황량한 벌판에도 여름이 오고 있었다.
어디에서든 언젠가는, 꼭 또다시 오고 말 여름이었다.
"별로 멋은 없지만......."
상대방의 목소리가 서서히 바뀌었다. 약간 고음의 짜증스런 목소리였는데 점차 가라앉으며
부드러운 저음으로 변했다. 단순히 목소리를 약간 다르게 낸 정도가 아니었다. 두 사람의 목
소리가 한 사람에게서 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변화는 마법이 아닌가 느껴질 정도로 기이한
경험이었다. 그 이상한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보리스도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당장 알아보았
을 것이다.
후드가 젖혀졌다. 높이 올려 묶은 갈색 머리카락이 허리에 닿을 듯 늘어뜨려진 모습을 잊
을 수 있었을 리 없었다.
"이런 식의 만남도 괜찮겠지?"
울컥, 긴장이 풀리며 가슴 속에서 단단히 매어져 있던 끈 하나가 툭 풀어졌다. 그 사람이었
다. 그가 실망시켰던 사람, 그 실망한 얼굴을 감추지도 않은 채 그의 곁을 떠났던 사람, 바
로 그였다.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4. 호수 속 금빛 그림자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깨끗한 시트와 소박하지만 정결하게 청소된 방, 약간 열린
창문, 그리고 누군가 떠다 놓은 세숫물이 있었다.
자신은 침대 위에 엎드린 채 잠들어 있었다. 몸을 일으키려다가 갑자기 등을 찌르는 지독
한 통증에 도로 쓰러질 뻔했다. 그제야 등에 입었던 상처 생각이 났다. 어제 약을 발랐지만
아직 나으려면 한참은 걸릴 듯한 상처였다.
애써 조심조심 일어나 침대 아래로 내려왔지만 세수를 하기 위해 팔을 들어올리는 것조차
도 거의 초인적인 노력을 필요로 했다. 그냥 얼굴을 물 속에 잠시 넣었다가 꺼내면 안될까
궁리했지만 대야가 야트막해서 그것조차도 용이하지 않았다. 꾹 참고 왼쪽 손만 움직여 얼
굴을 닦았다. 상처는 오른쪽 어깻죽지 근처였다.
죽는 것도 아닌데 이까짓 상처쯤 견디지 못하는 것은 우습다고 생각하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어나 방문 밖으로 걸어나가는 것이 왜 이렇게 힘든지 몰랐다. 그래서 아래층으
로 내려왔을 때 보리스는 벌써 그 날의 할 일을 다 해버린 사람처럼 맥이 빠져 있었다.
"여 어."
아아... 아는 사람의 얼굴.
자신이 그를 좋아했던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조금쯤 좋아하고 있었을 것이고, 불
명확한 교감도 몇 번인가 느꼈었다. 그러나 꼭 다시 만나야겠다고 마음먹을 정도는 아니었
다.
그런데도 몹시 반가웠다. 오랫동안 홀로 떠돈 결과 그는 안면 있는 사람의 얼굴에 몹시 굶
주려 있었다.
"와서 아침 들어. 아무도 안 떠먹여 주니까."
아픈데도 불구하고 갑자기 웃음이 나려 했다. 입가는 약간 움직였지만 가슴에 무리가 가는
순간, 등의 상처가 심하게 쑤셨다. 웃는 것은 고사하고 말조차 크게 할수 없을 지경이었다.
애써 자리에 앉고 보니 자기 앞에는 곡식죽과 빵 두 개가 놓여 있었다. 그런 주제에 상대
방 앞에는 삶은 닭고기가 한 사발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넌 상처 때문에 고기는 안 돼. 거기다 빵이나 찍어 먹으라고."
보리스는 불만 없이 주어진 음식을 들었다. 비교적 질 좋은 음식을 먹으며 자라왔고, 한때
벨노어 성에서 최고급 요리들도 수없이 먹어 본 그였지만 이상하게도 음식에 대한 욕심은
별로 없었다. 입맛도 상당히 관대했다. 미적지근한 죽과 빵을 금방 다 먹어치우고 물러앉는
그를 보며 상대방이 말했다.
"먹는 것이 단순한 자는 뭐든 할 수 있다, 라고 했던가."
보리스는 고개를 들어 그를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월넛 선생님......."
갑자기 그 자가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이젠 그 이름이 아니지. 사는 땅이 바뀌었잖아? 그 이름은 잊어버려. 이젠 이실더다. 이실
더 산. 딱 렘므 사람 같은 이름이잖아?"
이제 이실더가 된 월넛 선생은 전보다 더 건장해진 듯 보였다. 머리도 더 길어졌다. 뺨 곳
곳에 비죽비죽 튀어나온 수염은 그대로였지만 얼굴은 좀더 그을었고, 그리고.......
"이마가 넓어지신 것 같네요."
무심코 튀어나온 솔직한 감상이었는데 이실더 산은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무슨 소리야! 전에도 이거 그대로였다고 설마 내가 대머리가 되어 가고 있다고 말할 셈은
아니겠지?"
그런 의도는 없었지만 이런 데서는 눈치 없다 싶을 정도로 솔직한 보리스는 툭 던지듯 대
꾸했다.
"그 추측도 나름대로 신빙성이 있겠는데요."
"그런 근거 없는 추측이 네 건강에 미칠 영향을 생각해 보고서 말해라."
"추측이 아니라 사실일 경우 선생님 본인의 건강에 미칠 영향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닐 듯
한...."
전에도 이렇게 티격태격했었나 싶었다. 그러나 이실더의 식사가 다 끝나도록 둘은 비슷한
쓸데없는 주제를 가지고 주거니 받거니 소리를 질렀다가 웃었다가 했다. 보리스는 크게 웃
을 수가 없는 처지여서 몇 번인가 힘겨운 신음 소리를 내는 걸로 웃음을 대신했다.
이번에는 보리스가 소리칠 차례였다.
"무슨 소리예요! 로즈니스와 저는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요!"
"왜 아무 사이가 아니야? 한때 '의남매' 였던 사이잖아!"
"그런 얘기가 아니고......."
조금 더 있자 다시 이실더가 소리를 지르게 되었다.
"말도 안 돼! 내가 널 가르치기 싫어서 도망쳤다면 왜 지금 와서 또다시 만나고 있겠냐?
그때 나는 부득이하게 내가 참석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 때문에......."
"저런, 결혼을 앞두고 계셨군요?"
"그, 그런... 컥! 켁!"
이실더는 먹던 닭고기가 목에 걸렸는지 한참 동안 불쌍할 정도로 기침을 했다. 보리스는
웃지 않고 자세를 유지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안 하던 농담까지 하고 있는 자신이 생각
외로 마음에 들었다. 반가운 심정을 어떤 식으로든 표현하고 싶었다.
겨우겨우 식사가 끝났다. 둘은 서로 눈을 흘겼지만 화난 상태와는 거리가 멀었다. 심지어
보리스가 힘겹게 다시 2층으로 올라가는 동안 뒤따라오던 이실더는 키득키득 웃고 있기까지
했다.
둘은 보리스의 방으로 들어와 마주앉았다. 이실더는 로브를 벗었는데 로브의 안감은 전과
같은 나뭇잎 색깔이라 보리스는 새삼스러운 감회에 잠겼다.
"넌 영 사랑스럽지 않은 놈이다."
이실더는 중얼거리듯 첫 마디를 떼더니 한동안 잠자코 있었다. 그도 뭔가 할 말을 궁리할
필요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보리스가 먼저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저를 찾아내신 거죠?"
금방 대답이 날아왔다.
"널 찾아내다니, 내가 널 찾아다닐 만큼 할 일 없는 사람으로 보이냐?"
"할 일이 있으신지 없으신지는 모르겠지만......."
보리스는 빙그레 웃었다. 이렇게 쉽게 웃을 수도 있는 자신이라는 것을 전에는 잘 모르고
있었다.
"제가 뭔가 필요한 순간을 잘도 알아내셔서 두 번이나 나타나 주셨군요. 고맙습니다."
분명 비꼬려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대사에서는 진심말고도 분명 장난스러운 어조가
느껴졌다. 이실더는 한참 보리스를 노려보고 있다가 결국 할 말이 없었는지 턱을 치켜들고
고개를 내두르며 말했다.
"우연이야, 우연이라고."
"고양이까지 보내주시고......."
"우연이랬잖아!"
푸후훗.... 보리스는 웃기만 하면 등의 상처가 아프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만히 속
으로 웃는 것으로 대신했다.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그런데 로젠버그 관문에서는 왜 그렇게 저를 욕하셨던 건가요? 그렇게 저한테 쌓인 원한
이 많으셨나요?"
낯선 사람한테 욕을 얻어먹고 있을 때는 화가 나서 어쩔 줄을 몰랐는데 그 사람이 월넛,
아니 이실더라는 것을 알고 나니 흥분되기는커녕 오히려 유쾌한 생각까지 들었다. 그와 마
지막으로 헤어진 후 씁쓸했던 감정이 그 욕지거리로 인해 다 날아가 버린 것처럼 속시원했
다. 마치 오래 묵혀뒀던 셈이 저도 모르게 끝나버린 느낌이랄까.
"넌 욕 들어도 싸. 앞으로도 계속해서 욕해줄 거다."
보리스는 이번엔 등의 상처에도 불구하고 정말로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아아, 그러면 역시 이제부터 저와 함께 다니기로 하신 거군요? 푸하하핫... 아얏!"
여유가 생긴 것일까.
예전에 벨노어 성에서 '월넛'과 함께 지내던 자신과 이제 다시 '이실더' 와 마주친 자신은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때 그를 대하던 경계심 섞인 감정과 이제
더 숨길 것이 없는 자신의 태도 사이에는 어떻게 메워졌는지 모를 정도로 큰 격차가 있었
다.
믿어도 좋을 것 같은사람...을 만난 것이 얼마 만인 걸까.
"내가 그렇게 친절한 사람인 줄 알았냐?"
이실더는 불만스런 얼굴로 툭 한 마디 내던지더니 허공에 팔베개를 하며 허리를 한바탕 젖
혀 폈다.
보리스 뿐만 아니라 월넛과 이실더 사이에도 변화는 있었다. 전엔 벨노어 백작의 가짜 양
아들을 가르치던 스승이었지만 이젠 속한 데 없이 떠도는 소년을 만난 방랑 검사였다. 휠씬
자신의 본질에 가까운 태도였으며, 여유마저 넘쳤다. 그때의 그가 좌충우돌하는 사람이었다
면 이제의 그는 당연한듯 자유분방했다.
"어제 하다가 만 얘기를 해야지. 생명의 은인에게 무엇으로 보답할 테냐? 난 셈이 철저한
사람이라 받아 챙길 것은 하나도 안 놓치거든. 난 이제 네 선생이 아니라고. 널 구해줘야만
하는 의무가 없단 말이야."
그러면 로젠버그 관문에서 그렇게 헤어진 주제에 몰래 뒤따라오고, 지켜보다가 딱 필요한
순간 나타나 도움을 준 이유는 뭐란 말이죠? 보리스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내색하지 않은 채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어떻게 보답하면 되겠습니까?"
"음, 글쎄."
그런 것도 생각해 놓지 않은 주제에 다짜고짜 물었던 모양이었다. 잠시 후 이실더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말했다.
"보답 대신 그 검은 어때? 다시 내놓는 거 말야."
보리스는 방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진지한 얼굴이 되어서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합니다."
"방금 전에 그 검이 어떻게 변하는지 좀 느꼈을 텐데?"
"예?"
그게 자신의 착각이 아니었단 말인가?
"그래도 네가 계속 지니고 다녀도 될 것 같단 말이냐? 그 검은 살인을 당연하게 즐기는 것
같던데. 그 검에 익숙해진다면 몸을 지키기에는 좋을지 몰라도 너 자신은 지금과 다른 사람
이 되어버려. 피에 무감각해지다 못해, 그걸 즐기게까지 될 지도 모르지. 아니지, 어쩌면 그
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닐 지도 몰라. 정체를 알 수 없는 마법이 깃들인 물건이란 것은 인간
에게 좋은 결과보다 나쁜 결과를 더 자주 가져오지. 또는 처음부터 파멸을 위해 만들어지는
것도 있단 말이야."
보리스는 뜻밖의 이야기에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러나 잠시 후 생각을 가다듬고 말했다.
"그럴 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능성이 얼마나 높은가 하는 문제를 떠나서, 정말로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제가 일생 지키기로 마음먹은 검입니다. 쉽게 깰 수 있는 결심은
결코 아니고요. 검은 어차피 검일 뿐, 인간이 자신을 위해 사용하기 마련 아닐까요? 아무리
악한 의지가 이 검을 사로잡고 있다고 해도, 제가 굳게 마음먹기만 한다면 인간의 의지가
설마 검의 의지를 이기지 못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이실더는 잠시 감탄한 건지 비웃는 건지 모를 표정으로 보리스를 건너다보았다. 그러더니
말했다.
"좋은 생각이긴 한데 말이지, 그리고 나도 그렇게 되길 바라긴 하는데 말이야. 과연 잘 될
지 모르겠다. 아니, 잘 될 수 있는지 어디 적당한 사람한테 물어가서 알아봐야 되는 건지도
몰라. 넌 그 검에 대해 뭘 알고 있지? 네 집안에서는 처음에 어떻게 그 검을 손에 넣은 거
지?"
보리스는 스노우가드의 이야기를 해야 할지 약간 망설였다. 그러나 오래 망설이지는 않았
다.
"한 짝이 되는 갑옷이 있습니다. 스노우가드라는 이름이죠. 합쳐서 윈터바텀 킷이라고 부릅
니다. 하지만 지금 제 손에는 없습니다. 다시는 찾을 수 없는 곳으로 사라져 버렸으니까요.
그것 외에 제가 아는 것은 없습니다. 제 조상이 어디서 그 검을 찾아내어 손에 넣게 되었는
지에 대해서도, 그리고 무슨 힘을 가졌는가에 대한 것도."
이실더는 스노우가드의 행방을 캐물으려 하지는 않았다. 다만 오히려 약간 안심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그 검은 힘이 약화되어 있다는 말이겠군. 짝이 되는 물건이 영영 나타나
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의 입가가 올라가며 미소가 떠올랐다. 벨노어 성의 연습장에서 한밤중에 대결을 보이다
가 문득 서로에게 보냈던 그 미소처럼 친근한 웃음이었다.
"좋다. 과연 인간이 이기나 검이 이기나 보기로 할까, 시도도 해** 않고 포기하라는 말은
나도 못하겠군. 그래, 하지만 일단은 그 검을 함부로 휘두르지 말아라. 부득이하게 뽑게 되
더라도 그걸로 인해 네 마음 속에 뭔가 다른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지 주의 깊게 살피도록
하라고. 만일에라도 무언가 불안한 변화가 있거든 즉시 내게 말해라. 가능한 상황이라면 검
을 어서 칼집에 꽂는 것이 가장 좋겠지."
보리스는 가슴 속에서 서서히 치밀어 오르는 즐거움을 흡족하게 맛 보고 있었다. 자신이
이만큼이나 기뻐하게 되는지, 정말로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하게 된 건지 궁금했지만 그보
다 ***인 기쁨이 앞섰다. 이제 혼자가 아니게 될 지도 모른다는 것, 다시 누군가와 서로
의지할 수 있게 된다는 것.
"그럼 역시 저하고 함께 있어 주실 거군요?"
이실더는 손가락을 하나 빼들었다.
"내가 로젠버그 관문 앞에서 이미 너한테 한 번 동행을 제의한 적이 있다는 거 기억하냐?
그때 아주 냉정하게 거절하던 게 지금도 생생히 기억나는데? 게다가 다시는 만나지 말자고
그러지 않았냐?"
이 양반이 애들처럼 응석을 부리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보리스는 피식 웃었다.
"사과 드릴게요."
"아냐, 아냐. 이건 사과로 끝날 문제가 아냐. 처음 온 기회를 놓친 사람에게 똑같은 기회가
다시 오는 법은 없어. 더구나 넌 내게 지금 빛을 졌지? 좋아, 어제 한 계약을 다시 적용해
볼까?"
보리스는 눈을 둥그렇게 뜨며 반문했다.
"설마 다시 그때처럼 욕을 하시겠다고요?"
사실 이실더는 그런 짓을 하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빙그레 웃더니 더 재미있
는 것이 없나 생각하는 듯한 얼굴이 되었다.
"그런 걸 매일 하라면 나도 힘들어서 못할 노릇이고... 그래, 이번엔 백작가 도련님도 아니
고 동등한 동료도 아니라, 진짜 제자답게 내 시중을 들어라. 난 널 보호해 주고, 넌 내 심부
름을 하는 거지. 어떠냐?"
보리스는 자신도 놀랄 정도로 시원스럽게 대꾸했다.
"그러죠."
"만만찮게 부려먹을 텐데 버틸 수 있겠어?"
보리스는 작게 웃더니 말했다.
"선생님은 본래 만만찮았어요."
그 말을 듣더니 이실더가 불쑥 말했다.
"날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마라. 이젠 그런 관계가 아니니까. 왠지 껄끄러워,"
"그럼 뭐라고 부르죠?"
"이름을 불러, 그러면 되잖아."
"그럴 순 없어요. 그건 제 쪽에서 오히려 불편하군요."
이실더는 잠시 고민하는 듯한 얼굴이 되었다. 한참이나 궁리하더니 그는 결국 어쩔 수 없
다는 듯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당신, 이라고 부르면 되잖아. 별 대안도 없고."
그 말은 어쩐지 란지에가 말한 일 있던 '당신'을 연상시켰다. 별로 친근감 있는 호칭은 아
닌데도 그 때문인지 상대방을 한결 가깝게 부르는 말처럼 느껴졌다.
둘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즈음 보리스는 자신이 왜 백작
의 성을 나와 이런 곳에서 떠돌고 있는지에 대해 이실더가 전혀 묻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
다. 마치 모든 사정을 다 알고 있는 사람처럼 말이다. 하지만 성을 떠날 때는 분명히 몰랐을
텐데?
이실더의 두 손이 갑자기 불쑥 내밀어지더니 보리스의 양 뺨을 감싸쥐었다. 약간 거친 손
짓이긴 했지만 몇 번 쓰다듬으며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보리스는 문득 느꼈다. 그의 얼굴
을 이렇게 감싸주었던 옛 사람, 그 사람에게서 느쪘던 기분을 지금 다시 느끼고 있다고. 똑
같지 않더라도 분명히 그러고 있다고.
이실더가 나지막이 말했다.
"아아, 한심한 자식. 정말이지 눈앞에 없으니 불안해서 못 견디겠더라니까. 오죽이나 한심
하면. 정말이지, 정말이지."
"란지에가... 그랬단 말이지."
벨노어 성에서 마지막으로 벌어졌던 일들에 대해서 막 이야기가 끝나고 있었다. 키 큰 선
생과 그보다는 작은 제자, 둘은 렘므 땅의 돌투성이 평야에서 말 한 마리를 끌며 걷고 있었
다.
함께 여행하게 된 후로도 이미 어느 정도 시일이 흘렀다. 저녁무렵이 되어가고 있는 하늘
이 몹시도 높았다. 북부를 여행하기에 가장 좋은 계절인 여름이 와 있었다.
"아직도 그 애의 정체를 잘 모르겠어요. 아니, 그 애가 과거를 거짓말로 꾸며서 말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 속을 잘 모르겠다고요. 도저히 제 또래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어른 같지도
않은 것이... 친해질 수도 미워할 수도 없달까요. 불쌍한 것 같지만 동정의 대상은 아니고,
강한 것 같지만 분명 약점도 있었죠. 그러니까......."
"다시 만난다 해도 친구가 되기는 어려을 것 같다, 이거지?"
이실더의 말은 정곡이었다. 보리스는 란지에와 친구가 될 수 없었고, 그 후로도 될 수 없을
거란 사실을 아쉬워하고 있었다.
"내 생각엔 말이야."
이실더는 묶어서 늘어뜨린 머리채를 버릇처럼 만지작거리면서 보리스의 긴 머리를 내려다
보았다. 그리고 그 머리도 조만간 묶어줘야지, 하고 마음먹으면서 말했다.
"란지에는 상당히 정치적인 녀석이다. 미워한다고, 마음 속에서 죽여버렸다고 하긴 했지만
결국 어느 정도는 자기 아버지를 닮아 있는 거야. 백작의 성안에서 무게 중심을 잃지 않은
채 잘 해내는 줄타기라든가, 이후에 닥칠 일을 대비해서 미리 백작의 뒤를 캐내고 하는 것
들, 당연히 보통의 아이로서는 생각도 하지 못할 일들이다. 물론 고생을 많이 했기 때문이겠
지만 단지 그것만은 아니야. 그 애를 이루고 있는 정신을 내가 분명하게 느꼈던 때가 있는
데, 바로 란즈미의 말문을 열게 해 줬을 때 보인 모습이지. 기억해? 내 도움이 진심이라면
평생 잊지 않고 보답하겠지만, 만일 일이 잘못된다면 사생결단도 불사하겠다는 듯한 태도."
보리스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정치적인 사람이란 어떤 식으로 행동하는 겁니까?"
아직 정치에 대한 감각이 없는 보리스로서는 '정치적 인간'이라는 말의 의미를 정확히 이
해할 수가 없었다. 보리스의 관심사는 여전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차원의 애증에 국한되어
있었다.
"은혜와 원한의 경계가 확실해서 우유부단하게 망설이지 않는 것, 자신의 위치를 알고 있
어서 주위의 유동하는 상황에 정확히 대처할 대책을 미리 찾아 놓는 것, 불확실한 행운이나
호의를 믿지 않고 하나하나의 행동에 미래를 위한 포석을 깔아 놓는 것. 한 가지 행동을 해
도 그 행동이 연못에 던진 돌처럼 일으킬 파문들을 모두 계산하고 있는 것. 그리고."
이실더는 갑자기 고개를 돌려 보리스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너 같은 사람을 만났을 때 그 사람의 성격이 지닌 장점과 단점을 짧은 시간 내에 파악하
는 것."
보리스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말했다.
"어쩌면 그럴 지도 모른다고 이미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라면 저를 도와서는
안 되지 않겠습니까? 당시 제가 그에게 줄 수 있는 도움이라고는 전혀 없었고, 앞으로 대단
한 위치에 오를 것 같지도 않은 저인데요."
"그 애가 널 도와준 것은... 모호한 표현이겠지만, 특별한 일이면서 동시에 근본적인 일이었
어. 좀더 연결해 보자면 위험을 무릅쓰고 널 돕는 그런 심정은 그 애가 란즈미라는 여동생
을 소중하게 돌보는 것과 상통하고 있는데, 그 녀석의 정치성 한 가운데에 든 핵이 약한 인
간에 대한 연민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랄까. 또한 그 안에는 더 먼 미래에 대한 예감 같
은 것도 깔려 있었을 거야. 네가 어떤 사람으로 자랄 것인지 미리 짐작해 보고 아주 긴 수
를 던진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연민에 기초해 있다 해도 정치적인 인간은 강하지. 그 애
가 좀 더 자라서 그 빼어난 정치력을 자신이 원하는 공화국을 위해 정말로 발휘하게 된다
면......."
이실더의 목소리는 약간 낮아지면서 동시에 진지해졌다.
"신왕국 아노마라드는 어쩌면 쓸만한 적을 하나 갖게 될 지도 모른단 말이야."
보리스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등의 절반 가량을 덮을 정도로 자란 흑청빛 머릿결 아래 황색 가죽띠로 연결된 곳, 이실더
로부터 얻은 검은 망토 안쪽에는 윈터러의 낡은 칼집이 있었다. 오른손이 돌려져 검의 손잡
이를 만지작거렸다. 많은 것을 지키려 애썼지만 많은 것을 잃었고, 그리고 이제 자신에게 남
은 것이었다. 그것을 남기도록 도와준 사람이 란지에였다. 언젠가는 반드시 갚겠다고 말했었
다. 둘은 우정으로 연결된 사이가 아닌데 어떤 식으로 그것을 갚을 수 있게 될까.
렘므가 북방의 추운 땅이라는 것을 알려 주려는 것처럼 서늘한 푸른 빛 하늘이 머리 위를
뒤덮고 있었다. 밤이 가까워오는 검푸른 하늘 이었다.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어느새 걸음을 멈추고 있는 이실더를 보았다.
"당신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지요?"
이실더는 입 모양으로만 미소하며 가까이 다가왔다. 발을 들어 돌멩이 하나를 멀리 차보냈
다.
"인간은 땅에서 와서 땅으로 돌아가는 거잖아."
"그런 것 말고요. 당신에게 가족이나 고향은 없나요?"
이실더는 검을 뽑지 않은 빈손인 채로 정면을 향해 검을 겨냥했다가 당기는 듯한 몸짓을
했다. 그의 옆얼굴이 말했다.
"달이지."
획, 존재하지 않는 검이 허공을 가르며 바람 소리를 냈다.
"마음의 고향."
모닥불을 바라보고 있으면 오래된 이야기가 떠오르는 법이었다. 보리스는 같은 불을 보며
그의 형이 피웠던, 그리고 스스로는 아무리 해도 피울 수 없었던 그 불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 불이 꺼지고, 그는 차가운 세상으로 들어왔었다.
"달을 옛 어머니로 받들며 섬기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많지 않은 동류를 모아 부락을
이루었고, 제사장을 뽑아 옛 재앙을 속죄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지. 그 삶 속에는 검과 노래
가 같이 들어 있어서 서로 혼연 일체로 융합되어 있는 거야. 용서와 복수가, 온화함과 잔인
함이 동일시되는 한 잊혀진 문명이다. 이 검을 들어."
이실더가 단검 하나를 뽑더니 갑자기 바닥에 푹 내리꽂았다.
"한 생명을 죽임과 동시에 해방시켜 줄 수도 있는 것처럼."
푸른 안개가 그들의 주위를 감돌았다. 모닥불조차 약간 젖어 있는 듯했다. 숲 너머에는 넓
지 않은 호수가 있었다. 렘므의 땅이 차듯 호수의 물도 뺏골까지 시리게 할 정도로 찼다. 그
들은 그 물에 세수를 하고 손을 씻고 돌아와 잠들기 전에 몇 마디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그 문명이 당신의 고향인가요? 그곳은 어디 있지요?"
"가보고 싶으냐?"
고개를 돌려 보리스를 보는 이실더의 눈은 그리 친절해 보이지 않았다. 이중적인 감정이
깃들인 눈이었다. 어떤 곳인지 보여주고 싶으면서 또한 그런 곳으로 가는 것을 막고 싶기도
한 듯, 불안정한 눈동자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꼭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만... 당신이 태어나 자란 곳이라면 궁금하게 느껴지는데요. 당
신은 훌륭한 검술뿐만 아니라 뭔가 이상한 것들을 많이 가지고 있어요. 전 아마도 배을 수
없겠지만......."
"배우고 싶은 거냐?" "......."
이실더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보리스를 향해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둘은 호숫가로 갔다. 모닥불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에 호숫가는 그림자조차 느낄 수 없을 정
도로 어두웠다. 그곳에 둘은 나란히 섰다. 이실더는 말없이 품안으로 손을 넣더니 뭔가를 꽉
쥐었다.
"네가 무엇을 보게 될 지는 모르겠지만, 또는 무엇을 보고 싶은 지도 모르겠지만......."
이실더가 품에서 손을 꺼냈다. 보리스의 눈에도 오랫동안 익숙했던 단도가 거기에 있었다.
칼날 표면에 초승달 모양의 구멍이 뚫리고, 섬뜩한 글귀가 새겨진 그 단도.
이제 이실더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검은 호숫물이 찰랑거리며 밀려와 바지자락을
적셨다. 보리스는 선 채로 호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단도가 서서히 물 속으로 들어갔다.
거기서부터 황금빛 물결이 만들어져 넓게 퍼지기 시작했다.
마치 열쇠를 꽂아 빛의 세계로 향하는 문을 연 것 같았다. 금빛 물결은 이윽고 수면 위에
서 거대한 거울처럼 둥그렇게 자리잡았다. 처음에는 단지 빛뿐이었다. 그러나 곧 거기에 어
떤 영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런 건......."
그것은 이실더가 쓰고 있는 마법이 아니었다. 전적으로 그 달빛 무늬의 단도가 가지고 있
는 놀라운 힘이었다.
이실더가 나지막이 말했다.
"마음을 고향으로 돌려보내 주는 힘이랄까, 그런 것을 가진 물건이지, 네가 보고 싶은 것을
이 단도, 루네트(Lunette)는 이미 알고 있을 거다. 그게 무얼까."
금빛으로 반들거리던 수면 위에서 서서히 어떤 영상의 윤곽이 잡혀 갔다. 가장 먼저 나타
난 것은 높은 산의 봉우리였다 비탈져 솟은 산 아래 이곳처럼 호수가 고였고, 여름 풀벌레
들이 노래하는 풀꽃의 골짜기가 긴 자락을 펼쳤다. 산 고원에 핀 야생화의 천국, 그 아래로
나무 틈새며 바위 너머에 숨겨진 얕은 지붕들이 내려다보였다.
영상은 물처럼 흘러갔다. 높직한 돌이 일곱 개, 빙 둘러 세워진 풀밭이 눈에 들어왔다. 중
심에 커다란 베개처럼 생긴 네모진 돌이 놓여 있고, 둘러선 돌의 표면엔 알 수 없는 문양들
이 새겨져 있었다. 어쩌면 보리스가 알지 못하는 옛 마법의 룬이었을 것이다.
그곳은 평화로운 도피처 같았을까.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지만 아마도 행복할 듯했을까. 대
륙에서는 사라진 신비로운 마법이 그곳에서만 살아 있고, 모두에게 잊혀진 고대의 이야기들
이 여전히 속삭여 말해 지고 있는 그런 곳이었을까.
이실더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힘들이듯 느리게 말했다.
"바다 건너, 아주 머나먼 길을 가야 하는 곳이지. 길을 모르는 사람은 우연하게라도 찾아들
수 없을 정도로 험난한 해로 너머, 주가(呪歌)의 도움 없이는 결코 살아서 건너기 힘든 바다
의 끝에 있는 땅이다. 대륙의 사람들은 그 존재를 모르고, 그들 역시 알려지기를 바라지 않
아. 옛 '재앙' 이후로 단절된 역사를 가지고 홀로살아온 사람들이 그곳에 있지."
"하지만 당신은 거기에서 왔잖아요?"
"응, 그리고 다시 돌아가기도 하겠지."
잠시 후 그는 다시 말했다.
"그리 아름답기만 한 곳은 아냐."
그러나 보리스는 그 영상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조용한 곳일 것 같은데요."
금빛 태피스트리처럼 영상이 부드럽게 나부꼈다.... 소리까지는 들려오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정말로 정적이고 고요한 곳인 듯 느껴지는 장소였다. 산을 떠나, 마을을 떠나, 높
직한 절벽 언저리에 외따로 떨어져 있는 집이 비춰질 때까지 보리스는 알 수 없는 평화로
움에 취해 물속을 바라보고 있었다.
"......."
무언가 말할 듯했던 이실더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무언가 언뜻 스쳐지나간 듯했던 그림
자, 잠시 후 보리스는 그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한 여인이었다.
넓은 벨트가 달린 아마빛 긴치마 위로 하얀 허리가 설핏 드러나는 헐렁한 스웨터, 거친 털
로 짜 만든 듯한 녹색 웃옷 차림이었다. 여자는 집 옆에 놓인 항아리 뚜껑을 열어 안을 들
여다보고 있었다. 이윽고 뚜껑을 닫더니 천천히 걸어 풀밭으로 내려왔다.
짧게 쳐 올린 금빛 머리칼이 달빛에 젖어 반짝거렸다. 매끈한 곡선으로 드러난 귀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아직껏 두 귀가 드러날 정도로 그렇게 짧은 머리를 한 여자를 본 일이 없었
다.
비탈진 풀밭에 무릎을 세우고 앉은 그녀는 한쪽 팔을 올려 턱을 괴고 어두운 숲을 바라보
았다. 흰 발목이 치맛자락 아래로 스르르 미끄러져 내려오다 멎었다. 발목에는 자그마한 보
석의 원석들을 얇은 금줄로 이어 만든 발찌가 걸려 있었다.
소녀일까, 또는 처녀일까, 열 여섯에서 스물 하나까지도 잡아볼 수 있을 듯한 모호한 매력
을 가진 여자였다. 날카로운 창날처럼 갸름한 옆얼굴에 담긴 싸늘한 무표정 속에는 무언가
모를 상실감이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낯선 아름다움이었다. 같은 인간이 아닌 듯, 멀어서
더욱 동경하게 되는 미(美)였다.
문득 귓가에 밤새가 종종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물론 영상 안의 세계가 아니라
호숫가를 날아다니는 진짜 새의 소리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순간 여자의 곁으로 희고 우
아한 새 한 마리가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그녀가 내민 손가락 끝에 앉더니 무어라 말하는 듯 고개를 까딱거렸다. 여자가 입술을 열
어 들리지 않는 무언가를 말하는 동안 보리스는 그녀의 손을 보았다. 그것은 로즈니스처럼
곱게 자란 소녀가 지닐 법한 작고 고운 손이 아니었다. 단단한 마디 사이로 파르스름한 핏
줄마저 돋아난 강인한 손이었다.
이실더가 나지막이 속삭이듯 말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잘 지내고 있구나, 이솔렛."
<3권에서 계속>
부록
룬의 아이들의 세계에 대해서
<대륙의 국가들>
*아노마라드(Anomarad) 왕국
대륙 서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강력한 나라. 비교적 높지 않은 산세를 지닌 파노자레 산
맥(Panossare Mts.)이 좌우로 가로지르는 남부는 대륙에서 가장 살기 좋은 땅으로 알려져
있다. 한때 공화국이었던 역사를 가지고 있으나 현재는 왕정으로 돌아섰다. 동쪽 변경에 트
레비조(Ttebeezo), 잔(Jhan), 티아(Tia)의 세 식민령을 거느리고 있다.
수도는 켈티카(Keltica). 로젠버그 호수의 지류인 블루엣 강(Bluette River)이 도시를 통과
하고 있다.
*오를란느(Orlanne) 공국
아노마라드 북부에 위치한 북방성 기후의 작은 나라. 스스로 아노마라드 국왕의 신하로서
공작임을 자칭하며 예를 갖추고 있으나 내정은 독립되어 있다.
수도는 오를리(Orlie), 역시 로젠버그 호수의 지류와 연결되어 있다.
*렘므(Lemme) 왕국
대륙 동북쪽으로 뻗어나간 님 반도(Nym Peninsula)와 그 주위의 도서 지방을 중심으로 성
장한 해양국가. 전형적인 북방 해양성 기후를 가지고 있으며 아노마라드에 대적할 만한 국
력을 가진 유일한 나라이다. 님 반도 북부와 엘베 섬(Elbe Island) 일대에는 캄자크 족을 비
롯한 몇 개 부족의 고대 야만인들이 살고 있는데 몇 번의 내전을 겪은 결과 이들은 현재 토
벌되기보다는 오히려 렘므 인과 특이한 공생 관계를 이루며 해안 국경을 지켜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수도인 엘티보(Eltivo)는 로젠버그 호수에서 뻗어 나온 트레네 강(Trene River) 하류에 자
리잡고 있다.
*트라바체스(Travaches) 공화국
대륙 남쪽 중앙의 조개(Seashell) 반도를 대부분 차지하고 있으나 동쪽의 카투나 산맥
(Katuna Mountains, 남 드라켄즈 산맥의 일부)으로 해안이 둘러싸여 해운업은 발달하지 못
했다. 산맥의 영향으로 남부임에도 불구하고 스텝형 초원이 국토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공화정을 선포한 이래 귀족이라는 명칭은 쓰지 않지만 대신 영주, 의원, 선제후, 통령이라
는 새로운 계급이 존재하고 있다 가문간의 항쟁이라는 특이한 전통과 파벌전쟁으로 얼룩진
정치적 분란 탓에 내정이 몹시 어지럽다. 수도는 론(Ren).
*산스루리아(Sansruria) 왕국
아무도 접근하려 하지 않는 대륙 중앙의 '필멸의 땅(Mortal Land)' 너머 동쪽 해안에 자리
잡은 나라. 지리적인 요인 탓에 외국과의 왕래가 거의 없어서 특이한 신정일치의 왕정이 발
달했다. 왕족은 모두 산스루 신을 모시는 신관 또는 무녀이며, 전통적으로 여왕만이 즉위한
다. 렘므 왕국과는 어느 정도의 교류가 있으나 구체적인 모습은 아직까지도 베일에 가려져
있다.
수도는 그들이 신봉하는 신의 이름을 딴 산스루(Sansru).
*루그두넨스 연방(Rugdurnense Union)
대륙 동남부의 메리골드 반도(Marigold Peninsula)와 사파이어 만(Sapphire Gulf), 아쿠아
코럴 제도(Aqua Coral Islands)에 흩어져 있는 도시국가들의 연방체.
처음에는 루그란과 두르넨사의 두 도시국가가 합치며 루그두넨스라는 이름이 되었지만 오
랜 변천을 겪은 결과 현재는 다섯 국가로 이루어진 연방이 되었다. 그러나 연방이 성립될
당시 작은 도시에 불과했던 나라들이 점차 영토형 국가로 성장함에 따라 연방의 결속력은
매우 느슨해졌다. 연방의 존립이 불투명해질 정도로 심한 대립이 있었던 십여 년 전에 연방
수도가 폐지되었으며 현재는 각 소속국가의 수도(즉, 최초의 도시국가가 생겨났던 곳)에서
돌아가며 1년씩 수도 역할을 맡고 있다.
-레코르다블(Lekordable) : 메리골드 반도의 북쪽 대부분을 차지하는 나라. 연방 내에서 가
장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지만 북쪽으로 '필멸의 땅' 과 접경하고 있어 국토의 절반 가량이
쓸모 없는 황무지와 사막에 불과하다.
유목민적 생활 전통 때문에 용병이라는 직업이 기형적일 정도로 발달하여 대륙 전체에서
가장 강력한 용병단들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용병단들 가운데 일부는 정권조차 좌지우지할
정도로 강력한 세력을 떨치고 있다. 내부에는 연원을 알 수 없는 소수민족들이 그들만의 종
교과 풍습을 유지하며 일부 분포해 있으나 대부분은 탄압의 대상이다.
-두르렌사(Durnensa) : 메리골드 반도와 조개 반도 사이에 위치한 사파이어 만을 끼고 서쪽
으로 발달한 상업 국가. 본래 상인 연합체에서 출발한 국가로 두르넨사 상인들은 현재도 대
륙 전체에 각자가 개척한 점조직 상업망을 공유하며 서로 협력하고 있다. 연방 내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이기도 하다. 남부 해적들의 근원지인 조개 반도를 끼고 있어서 일찍이 해적들
과 손을 잡고 서로 공생하는 관계가 되었다. 이들 해적들은 일반적으로 국적이 없는 자유민
이면서도 종종 두르넨사의 의뢰를 받고 타 국가의 선박들을 공격하곤 하는데, 항의가 들어
와도 해적에게 국적이 없는 것을 내세워 교묘하게 회피하기 때문에 책임지지 않는 해적 국
가로 악명이 높다.
-팔슈(Palshu) : 사파이어 만의 동쪽에 위치한 작은 나라. 두르넨사의 방계 왕가가 세운 곳
으로 현재도 두르넨사를 주인의 나라로 섬기고 있다. 매년 두르텐사에 공물을 바치는 대신
두르넨사에 속한 해적들의 비호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루그란(Rugran) : 메리골드 반도의 허리에 위치한 작은 나라. 연방 내 국가들 가운데 가장
먼저 출현한 나라로 오랜 역사와 예술적 전통을 지니고 있어 연방의 문화적인 종주국 역할
을 하고 있다. 15세에서 19세까지 모든 젊은이가 출전하여 기량을 겨룰 수 있는 전 대륙적
검술 대회인 '실버스컬(Silver Skull)'이 처음 시작된 곳이기도 하며 루그란 국왕은 현재도
연방 차원에서도 많은 행사를 주관한다. 그러나 국력은 점차 쇠퇴 일로에 있어서 조만간 활
로를 모색하지 않으면 두르넨사나 하이아칸 등에 밀려 2류 국가가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고 있다.
-하이아칸(Haiacan) : 메리골드 반도의 남쪽과 아쿠아 코럴 제도 전체를 영유하고 있는 나
라. 농사를 지을 평야는 많지 않으나 아름다운 산과 호수, 섬과 해안이 곳곳에 펼쳐져 있는
까닭에 여행객들이 많이 몰려들며, 특히 각 국 귀족들의 별장을 정책적으로 유치한 결과 크
게 융성하고 있다. 가장 늦게 연방에 합류했으나 현재는 두르넨사와 어깨를 겨룰 정도로 부
유한 나라가 되었다. 내부에서 연방 잔존 여부에 대해 가장 격렬하게 찬반양론이 제기되고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대륙의 지리>
*필멸의 땅(Mortal Land)
대륙 중앙의 거대한 황무지. 렘므, 산스루리아, 레코르다블 등과 모두 국경이 닿아 있을 정
도로 영역이 광대하지만, 어느 나라도 감히 침범하여 영토를 넓히려 하지 않는 곳이다. 까마
득한 옛날에는 이곳에 고대의 마법 왕국 '가나폴리(Ganapoly)'가 세워져 있었다고 전해지며,
그 나라가 원인이 정확치 않은 마법 전쟁으로 멸망한 뒤 이 땅은 산 자를 품지 않는 곳, 즉
'필멸의 땅' 이 되었다.
언데드(Undead)나 새도우(Shadow)로 변한 고대의 인간들을 비롯하여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들이 아직까지도 이 땅에서 떠돌고 있으며 옛 가나폴리의 보물을 노리고 들어오는 자들
을 용서 없이 살해한다. 그 안에 감춰진 비밀들은 아직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또한 이
땅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인해 매년 조금씩 넓어지고 있다고 한다.
*드라켄즈 산맥(Drakens Mts.)
대륙 중앙을 종단하는 거대한 산맥을 널리 톤칭하는 이름. 산맥의 규모가 워낙 크고 지형
도 다양해서 각 지방에서는 그들의 땅으로 뻗은 드라켄즈의 이름을 각각 다르게 부르고 있
을 정도이다.
님 반도 일대의 만년설 지역을 비롯하여 북부로 갈수록 높고 험준해지며(최대 해발 8천 미
터) 남부로 내려오면 비교적 낮고 완만해진다(평균 1천 미터). 이 산맥의 존재는 메마른 필
멸의 땅과 기름진 아노마라드의 국토를 갈라 주는 방파제와 같은 역할도 하고 있다.
* 로젠버그 호수(Rosenberg Lake)
아노마라드 북쪽에 자리잡은 대륙 최대의 규모의 호수. 블루엣 강과 트레네 강을 비롯한
여러 강의 발원지이다. 안쪽에는 실버리프(Silver Leaf)와 폴른스타(Fallen Star)를 비롯한
몇 개의 큰 섬들이 존재하여 호수와 강을 이용한 수운의 요지를 이루고 있다.
이 호수 일대는 아노마라드와 오를란느, 렘므를 잇는 상권의 중심지이며 드라켄즈 산맥을
뚫고 이어지는 고갯길을 이용하여 만들어진 로젠버그 관문은 아노마라드와 렘므를 잇는 가
장 큰 관문으로 알려져 있다.
* 달의 섬(Moon Island)
대륙의 동북쪽 바다를 오랫동안 헤치고 가야만 닿을 수 있는 섬, 대륙에서는 이 섬의 존재
를 아는 사람조차 드물며, 렘므의 뱃사람들 사이에서 풍문으로 전해지는 전설의 섬일 뿐이
다. 그곳에 살고 있는 자들의 근원과 문화에 대한 것 역시 비밀에 싸여 있다.
* 썰물섬(Ebb Isle)
달의 섬으로 가는 항로에 있는 조그마한 섬. 이 섬을 거치지 않고는 달의 섬까지 이어지는
기나긴 항해를 어떤 배도 견딜 수 없다. 역시 대륙에서는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은 섬이다.
<기타>
* 마법/검술 학원 네냐플(Nenyaffle)
남부 아노마라드의 파노자레 산맥 서쪽에 위치해 있으며 마법과 검술을 교육하는 학원. 본
래의 명칭은 네냐-야플리아(Nenya-Yaffleria)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네냐플이라고 부른
다.
오랜 역사와 전통에 걸맞게 높은 수준의 교육으로 유명하며, 대대로 대륙 최고로 일컬어지
는 마법사들이 학장직을 맡아 왔다. 마법, 연금술, 고문학, 수학, 음률, 검술 등에 걸쳐 아홉
명의 마스터들이 있으며 이들 모두는 각 분야에서 대단한 명성을 지닌 훌륭한 선생들이다.
전통적으로 평민과 귀족을 구별하지 않고 받아들이지만 입학시험이 몹시 까다로우며, 매
학기마다 승급 시험 낙제생들을 곧장 퇴학시켜 버릴 정도로 엄격한 학제로 인해 상당한 악
명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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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냐플 천재천하2009.10.23이거 이렇게 올리고 다니면 신상에 해롭습니다. 삭제하는게 좋아요 -
네냐플 바르시믈레2009.09.21제가 괜히하는말이아니고요. 제가 이런것하고 본질적으로 비슷한데에 종사한적이있어서 아는데요, 이런거 들키면 잘못하면 여러가지로 골치아픕니다. 요새 저작권법강화되고,해서 진짜 이런거들켜봐야 좋을거 하등없습니다. -
네냐플 악마。데모닉2009.09.20룬의 아이들 책에도 적혀있다 시피 룬의 아이들 내용을 일부라도 허락없이 이렇게 올리면 저작권침해법에 해당됩니다. 처벌 받으시기 전에 자삭해주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