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CC게시판
이들 1
지은이 : 전민희
출판사 : 제우미디어
출판년도 : 2001년 7월 27일
저자소개 : 1975년 서울에서 태어나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연구원을 거쳐 1999년 출간한 장편 판타지소설 400만회 조회수.
연사와 문학, 신학 등을 비롯하여 최근 철학의 신조류까지 섭렵한 지식광.
룬의 아이들
겨울의 검
1장. Bleeding
1.늦여름의 늪
" 에메라 호수에는 아이들을 잡아가는 망령이 있어요. "
들판의 끝에는 죽은 호수가 있었다. 썩은 수초가 마녀의 머릿단 처럼 뒤엉킨 그곳은 한낮의 태양 빛
조차 거의 닿지 않는 그늘진 늪이었다. 그곳까지만 가지 않으면 아이든지 돌아다녀도 좋다고 유모는 말
해 주었다.
" 그러니까 에메라 호수 쪽은 근방에도 가면 안돼요. 아무리 밝은 낮에도 안 되지요!. 거기엔 망령이
빨간 눈을 번쩍거리면서 잡아먹을 아이들이 없나 늘 노려본 있단 말이에요. 아이 참, 듣고 계신 거예요,
도련님? 밤만 되면 저택에서도 보인답니다. 제가 도련님처럼 꼬마였을 때부터 폭풍이 몰아치는 날이면
늘 보았어요."
진네만 가문의 어린 도련님 보리스는 유모의 말을 반신반의했지만 일단 믿는 쪽으로 하고 있었다. 사
실 폭풍이 몰아치는 밤마다 에메라호수의 망령을 보려고 저택 밖까지 나가 어둠 속을 뚫어져라 바라보
곤 했지만 한 번도 유모가 말한 빨간 눈을 본 일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유모뿐 아니라
다른사람들도- 특히 늙은 여자일수록- 사실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아예 거짓말로 치부하기에는 좀 꺼림
칙했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가 없어도 흉흉한 일이 많은 저택이었다. 언제부턴가 그는 가능한 한 슬픈 일은 생
각하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악몽에 시달리다 온 몸이 땀을 흠뻑 젓어 깨어나는 날이면 늘 찾아오는 답
답함에 우울함이 싫었다. 물론 그는 아직 열두 살에 불과했고 두고두고 악몽에 나타날 법한 두려운 것
을 목격한 일도 없었다. 그러나 그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저택 위를 떠돌고 있는 어두운 구름을 모를 정
도로 어리지도, 어리석지도 않았다.
" 그런 건 네가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야. 꼬마 보리스. "
문득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형 예프넨의 손길을 느꼈을 때 올려다 본 하늘은 초상화 속 어머니의 드레
스처럼 푸르렀다. 그러나 그것을 올려다보는 소년의 눈동자는 흐린 하늘빛 같은 그레이 블루였다. 형은
하늘을 등진 채 하늘마냥 맑은 눈을 하고 짧은 연갈색 머리를 흩날리며 소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진한 풀빛이 사방으로 지평선을 이루는 이곳은 진네만 가문의 영지인 롱그르드에 속한 넓은 들판이였
다. 옷자란 풀들은 들판 너머 저택언저리까지 빼곡하게 메웠다. 대륙의 중앙, 조개반도를 휩싸고 도는
카투나 산맥 아래의 땅이 대부분 그렇듯 이곳도 스텝형 초원이 서쪽으로 어디까지나 뻗어 있었다.
풀대가 길게 자란 늦여름 들판에 누우니 머리까지 푹 파묻혔다. 풀벌레일까. 자꾸만 뭔가가 날아들어
코끝을 건드리고 있었다. 그러니 그것보다 형의 평소보다 환한 미소가 어쩐지 더 마음에 걸렸다. 뭐지.
이런 기분이 드는 것은. 그럴 필요는 전혀 없잖아. 정말로.
아니. 형은 늘 밝았었다. 수줍은 타는 소녀처럼 잘 웃지도 않는 동생의 손을 끌어 잡고 영지 곳곳을 돌
아다니며 재미있고 우습고 밝은 것만 보여주려 애썼다. 어쩌다 동생이 웃음이라도 터뜨릴라치면 몇 배
로 더 기뻐져서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는 형이었다.
훤칠하게 키도 크고 잘생긴 형. 근처 영지의 젊은이들 기운데 가징 빼어난 검술 솜씨를 가져서 아버지
의 자랑 거리도 되는 형이다. 그리고 꼬마 보리스가 유일하게 믿고 따를 수 있는 사람이기도 한 형, 예
프넨 진네만.
" 자. 약속한 대로 대련 연습이다!"
보리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발딱 일어났다. 어깨를 덮은 긴 머리카락이 형의 그것처럼 바람에 나풀거렸
다. 형은 동생의 머리를 흐트러뜨리는 것을 좋아했다. 손에 목검을 쥐어 주면서 어느새 보리스의 머리꼭
지를 까치집처럼 만들어 놓았다. 보리스는 어린아이처럼 불만을 터뜨리는 대신 약간 입술을 움직이며
씩 웃었다.
" 휘어이, 휘이! 우리 동생 머리에 알을 넣으면 안돼요!"
형은 있지도 않은 새들을 쫓는 시늉을 하고, 보리스는 일부러 속아 주려는 것처럼 훌쩍, 뒤를 돌아보았
다. 그 툼에 형이 든 목검이 보리스의 옆구리를 슬쩍 찌른다. 동생이 돌아볼 즈음이면 이미 멀찍이 물어
나 있었다. 건들건들, 장난스레 방어 자세를 잡고 있는 형의 얼굴은 여전히 미소였다.
보리스는 문득 이상한 것을 느꼈다.
형이 내민 목검을 치려고 쫓아가다가 발을 헛디뎌 무릎을 찧고. 다쳤나 싶어 다가온 형을 밀쳐 눌러
킬킬거리며 풀밭에 같이 구르면서도 내내 이상한 기분은 기시지 않았다.
그리 오랜 것은 아니었지만. 언제부턴가 보리스는 자신에게 이상스러운 직감 같은 것이 갖춰져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직감이란 사실 내킬 때 쉽게 발휘되는 성질의 능력은 아니었다. 그러나 가끔씩 그
것은 아주 강하고 예민해져서 볼 수 없는 미래에 대한 예지에 가깝게 변했다.
보리스는 검은 기초도 모르는 꼬마고 예프넨은 이미 몇 년이나 검을 배운 젊은이였으므로 본래부터 둘
은 대련할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다만 보리스가 목검 휘두르는 것을 좋아해서 반사 신경을 길러 준다
는 구실로 함께 들판에서 뒹굴며 놀아주는 것이다. 아버지는 예프넨이 동생과 놀기보다는 좀더 엄격하
게 검 수련을 하길 바랬지만 이 선량한 젊은이는 검술이 향상되는 것보다 동생이 한번 깔깔대며 웃는
걸 더 좋아했다.
그들의 아버지, 율켄 진네만은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한 보리스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었다. 예프넨이
동생을 지극히 사랑하는 것도 아직 그가 어리고 감정에 잘 휩쓸려서 그렇다고 생각할 따름이었다. 율켄
진네만이 생각하기에 동생이란 전혀 사랑할 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오히려 강도처럼 등뒤에서 다가와
목에 탈을 들이대지 않으면 다행이랄까.
예프넨은 맏아들이다. 율켄에게 유일하게 믿을 만한 사람이 있다면 바로 그였다. 단지 신뢰의 대상만이
아니라 전폭적인 기대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예프넨 역시 아버지인 자신의 말에 절대적으로
복종하고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만 모든 것을 이해하기에는 아직 예프넨도 어리다. 조금 더
자라면 아버지가 뭘 원하고 뭘 기대하는지 알게 되겠지.
딱!
경쾌한 타격음이 들판을 울리며 퍼져나갔다. 오랜만에 둘의 목검이 제대로 부딪친 모양이었다. 예프넨
은 놀란 시늉을 하며 두 발짝 물러났다. 동생이 좀더 적극적으로 치고 들어오기를 바라는 것이다.
보리스는 이번엔 발을 헛디디지도 않고 빠르게 형 앞으로 달려들었다. 형이 가르쳐 준 대로 움켜잡은
목검이 좀 흔들거리긴 했지만 그만하면 괜찮은 자세였다. 좌측으로 휘둘러 어깨를 치려 했다. 형은 맞아
줄 듯 하다가 슬쩍 비켰다.
보리스는 오기가 나서 더욱 바짝 다가들었다. 어느새 형이 말해줬던 사정 거리를 넘었다. 형의 목검이
똑바로 보리스의 목을 향해 찔러 들어왔다. 비킬 새도 없었다.
"아!"
예프넨은 깜짝 놀랐다. 그만큼 동생이 잘했기 때문일까, 순간적으로 몸에 익은 반격이 튀어나왔던 것이
다. 목검이라고는 했지만 끝은 제법 날카로웠다. 보리스의 목 가운데에 붉게 찔린 자국이 생기더니 곧
피가 방울져 맺혔다.
"이런!"
목검을 내던지 예프넨이 다가와 놀란 동생의 빰을 감쌌다. 한 손으로 등을 쓸어 다독이며 상처를 살펴
보니 다행히 심한 것을 아니었다. 그러나 맺혔던 피는 점차 굵어지더니 이윽고 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예프넨은 자기 소매로 핏방울을 훔치며 손수건을 꺼내 상처를 눌렀다. 그다지 많은 피가 나지는 않았
지만 동생의 맥박이 작은 새처럼 두근두근 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놀랐지? 미안하다, 정말 미안해. 형이 실수했어.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
물론 보리스도 놀랐었다. 순간적으로 느낀 목검의 속도는 몹시 빨랐고, 상대방이 누구인지 깜빡 잊어버
릴 정도였으니까. 정말로 어떤 사람이 자신을 치려 한다는, 뜻밖의 공포가 짧은 순간 스치고 지나갔었
다.
"......으응."
그때였다. 두 형제를 부르는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저택 방향에서 사람이 뛰어오고 있었다.
"예프넨 도련님! 보리스 도련님!"
저택에서 항상 보리스를 돌보는 하인이였다. 예프넨은 안 그래도 저택으로 돌아갈 작정이었는데 잘 되
었다고 생각하며 보리스의 손을 끌어 잡았다. 그러나 달려오는 하인의 태도가 이상했다. 그는 마치 다가
오지 말라는 것처럼 손을 내젓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하인은 이윽고 형제가 선 곳에 도착했다. 몹시 급하게 달려온 듯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그의 얼굴
이 파랬다.
"얼굴이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하인은 간신히 고개를 들고 두 형제를 향해 공포에 질린 표정을 보였다. 끔찍한 일이 벌어진 것이 틀
림없었다.
"도련님들, 저택에 잠시 들어가지 마세요! 큰일이 났습니다요!"
예프넨은 다그쳐 묻는 대신 하인이 마저 설명할 때까지 기다렸다. 그는 본래 하인들의 호들갑을 알기
때문에 크게 긴장한 얼굴은 아니었다. 그러나 보리스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오늘 아침부터 하루 종일
예민해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질 지도 모른다는 신호처럼.
"블라도 진네만... 그 어른이 돌아왔습니다요!"
예프넨의 얼굴이 순식간에 싸늘히 굳었다. 그는 먼저 동생이 놀랄까 싶어 손을 꽉 쥐어 주었다. 그러나
자신의 손조차 차가워져 있다는 것은 깨닫지 못했다.
"그래, 그렇구나......"
보리스는 하인의 말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머릿속을 애매하게 떠돌던 예감이 갑자기 기정 사실화된
충격이랄까.
그는 형의 시선도 느끼지 못한 채 천천히, 마치 남의 일을 말하듯 되풀이했다.
"블라도 삼촌이...돌아왔다고......?"
비를 품은 바람이 형제의 머리 위에서 서서히 날개를 퍼덕이고 있었다. 하나씩, 젖은 회색 깃털들이 떨
어져 내렸다.
골든 리트리버 종인 개가 문간에 엎드려 있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으르렁거렸다. 평소 순한 녀석이어
서 그 덩치에도 불구하고 꼬마 보리스 조차 편안히 기대 장난쳐도 좋은 녀석인데 지금만은 달랐다. 개
는 긴장하여 털을 곤두세우고 사납게 커컹 짖어댔다.
"허, 저 녀석이! 오랜만이라 사람을 몰라보는군. 멍청한 놈 같으니."
후리후리한 키에 팔이 유난히 긴 남자였다. 거므스름한 얼굴을 남방의 강한 태양 빛에 빛깔이었다. 주
름투성이 눈꼬리 안쪽의 노르스름한 홍채를 자진 눈동자는 악어 가죽에 박힌 장식 보석처럼 번쩍거렸
다.
사내는 발길질이라도 할 듯 구두를 딱딱거리며 다시 소리쳤다.
"처리 가라! 저리가!"
개는 여전히 맹렬하게 짖어댔지만 훈련이 잘 되어 있었기에 주인의 허락이 있기 전에 먼저 사람을 물
지는 않았다. 뚜벅뚜벅. 거실 안쪽으로부터 발걸음이 다가와 멈췄다.
악어 눈동자를 가진 사내가 입가에 주름을 만들며 씨익 미소지었다.
"오랜만입니다, 율켄 형님."
"쉿! 조용히 해라. 말로리."
율켄 진네만은 먼저 개를 조용히 시켰다. 그리고 몇 년만에 만나는 동생을 향해 냉랭한 시선을 보냈다.
흥... 그는 미소지었다. 그도 동생도 전보다 휠씬 늙어 있었다. 다른 사람보다 두배로 맹렬히 살아오기
라도 한 듯, 그렇게 일그러진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용케 살아 있구나, 블라도."
"어라, 불만이기라도 하신 겁니까?"
그것은 의미 없는 대화였다. 이제 두 형제는 전처럼 억지 예의를 지킬 필요조차 없었다. 형제를 낳았던
부모는 재작년에 나란히 죽어 없어졌다. 좀더 일찍 죽어 줬더라면 5년 전에 만났을 때 저놈을 죽여 없
앴을 텐데...... 그렇게 되씹던 율켄은 동생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는 생각에 문득 새삼스런 경계
심을 느꼈다.
"5년만인데, 자리 정도는 권해 달란 말입니다."
"앉거라."
둘은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걸어가 접는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않았다.
쿠르르......
천둥이 울렀지만 비는 아직 내리지 않았다. 율켄은 문득 예프넨이 집으로 돌아왔던가 생각했다. 하긴,
동생 녀석이 현관으로 걸어 들어왔을 때부터 하인들은 혼비백산했을 테고, 그 중 한둘 정도는 아들들을
찾아 뛰어나갔을 것이다. 누누이 일러두었다시피 율켄 자신에게 문제가 생길 경우 집안의 수장은 예프
넨이다. 하인들을 비롯해서 그가 거느린 병사들도 지금쯤은 예프넨을 찾아내어 보호하며 명령을 기다리
고 있을 것이다.
내 하나 뿐인 동생 블라도 진네만. 무슨 속셈으로 네가 이 먼 죽을 자리까지 찾아왔느냐.
"형님, 뭐 미실 거라고 줘요. 한나절 말을 달렸더니 목이 말라서 죽겠데."
율켄은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천천히 말했다.
"그래. 흑맥주라고 마실 테냐?"
"하하. 오래 외지에서 지내다 보니 입맛이 바뀌어 버려서. 난 그냥 진저에일이나 마실 테요."
진저에일 처럼 알코올이 거의 들지 않은 음료는 본래 블라도 가 즐기던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하녀에
게 손짓하여 마실 것을 가져오도록 하는 율켄도 동생의 속셈을 모르지 않았다. 언제고 블라도가 결국
돌아오리라는 걸 율켄이 생각하지 않았을 리 없었다. 그에 대비해서 블라도가 즐겨 미시는 종류의 음료
에 독약을 카서 준비해 두지 않았을리란 보장이 어디 있는가.
율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희끗희끗한 새치가 머리카락 곳곳에 섞인 형제는 문득 상대방이 자신과 비
슷한 표정을 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래, 피가 닿았음은 분명하겠지.
하지만 10년도 넘게 대립해 온 사이다. 서로에게 이제 타협의 여지 따위가 없음은 너무도 명백했다. 자
신에게 패배해서 5년 동안이나 집을 떠나 있었던 동생, 이제 무슨 카드를 들고 제 발로 다시 나타난 것
일까.
형제는 진저에일 잔을 하나씩 들어 입술을 대었다. 눈 색깔과 머리 길이를 빼면 섬뜩한 정도로 둘은
닮아 있었다.
" 찾아온 용건을 물어야 된는 건가?"
노란 논의 블라도는 율켄과 반대쪽 입꼬리를 올렸다.
"뭐, 수고도 덜어드릴 겸, 직접 말씀드리죠."
오래 침묵하지도 않았다. 블라도는 이어 입을 뗐다.
"칸 선제후 님을 아실 테지요? 형님도 수도 소식에 영 귀 닫고 지내는 분이 아닌 건아니까. 이번에 나
는 그 분 곁에서......"
흥, 하고 율켄은 코웃음을 쳤다.
"되잖은 소리나 하려거든 썩 나가서 다른 둥지나 찾아봐라."
블라도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웃지 않았다. 노란 눈빛을 번쩍이며 그는 사납게 대꾸했다.
" 이 둥지는 형 혼자 것이 아니잖우? 롱고르드는 부모님이 우리 형제들에게 똑같이 물려준 영지란 걸
형 혼자만 잊은 것 같수."
발끈하자마자 젋은 시절의 말투가 곧장 뛰어나오는 불라도를 율켄은 차갑게 노려보았다.
" 그 권리를 네가 어떻게 차버렸는지 잊었던 말이냐? 억울하게 죽은 예니치카가 땅 밑에 누워서 오늘
네 놈이 돌아오는 걸 지켜보고 있었을 거다."
블라도는 입술을 질근질근 비틀며 대꾸했다.
"그 기집애를 죽인 게 어째서 나란 말이우?"
순간 율켄은 울컥 목에서 뭔가 치미는 것을 느끼며 쾅, 하고 잔을 세차게 내려놓았다. 갈색 물방울들이
탁자에 흩뿌려졌다.
"네놈의 농간이 아니면 어째서 그 애가 어려서부터 얘기만 들어도 벌벌 떨던 에메라 호수에 혼자서 갔
겠느냐!"
"흥. 예니는 호수에서 돌아왔을 때만 해도 죽지 않았잖우! 미쳐 날 뛰는 그 애를 치료도 제대로 안 시
켜보고 죽이라고 한 건 결국 형이 아니었수?"
"어디서 더러운 궤변을 지껄이는 게냐!"
조가. 남아 있던 에일 방울들이 블라도의 얼굴에 끼얹어져 흘러내렸다. 블라도는 얼굴에 패인 주름을
따라 흘러내리는 물방울을 소매로 슥 닦았다. 그리고 일그러진 미소를 지으며 나지막이 말하기 시작했
다.
"흥...어디 좋아, 잘 해보쇼. 형의 의견 따위. 처음부터 들어볼 것도 아니었지. 어디 우리 집안 사람들이
목에 칼이라도 들어오기 전에 정치적 신념을 꺾는 일이 있었수? 하. 하. 우리 부모님도 제각기 다른 당
파에 뛰어들어간 아들들 고집 못 꺾었고, 예니도 신랑 될 사내 때라 불꽃모르파 명부에 결국 제 이름
써넣었더랬지. 재닌느 고무님은 달랐소? 지금도 3월 의원파에서 앞장 서 휘젓고 다니잖수? 하, 하. 하.
그래. 형님 아들들은 다를 것 같수? 그놈들도 조금 더 크면 형님이 신처럼 받드는 '카챠'를 버리고 전혀
엉뚱한, 예를 들면 진군파 같은 데 들어가겠다고 살칠 지도 모른다는 거야! 전혀 무리가 아니지!"
율켄의 눈동자가 이글거렸다. 흐린 날씨 탓에 점차 어두워지고 있는 거실에는 촛불도 하나 없었다.
"훗훗, 그렇게 되면 한 집안에 당파만 다섯 개야. 다섯 개! 아니, 부모님들은 죽었으니까 이젠 네 개가
되어야 하나?"
율켄은 더 대꾸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단지 나지막하게 말했다.
"나가라."
"나가드리지."
불라도는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여전히 비웃음을 입가에 문 채 형을 가리킨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렸
다.
"하지만 후회하게 될걸? 오늘 내가 형에게 마지막으로 화해를 청하려 왔었다는 걸 잊지 마시란 말요.
그래, 마지막 기화였지. 형이 그놈의 '윈터바텀 킷(Winterbottom Kit)'을 내놓기만 했다면 난 과거를 모
두 잊고 형을 그만 용서하려 했었수. 어때. 한 번 더 생각해 볼 테우?"
율켄은 씹어 뱉듯 중얼거렸다.
" 내 머리가 두 쪽 나기 전에 그게 네 놈 손에 들어갈 일은 결코 없을 거다."
" 흥, 좋은 지적이군. 잘 알았수다."
블라도는 예상했다는 듯 얼굴의 주름을 한층 드러내며 싱글싱글 웃었다. 이윽고 다시 입을 연 그는 한
결 어두워진 율켄의 얼굴을 감상이라도 하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칸 선제후님이 이번 선거에서 트라바체스의 통령이 되는 것은 장님이 봐도 뻔한 사실이우. 이제 그 분
을 따르지 않고서 감히 우리나라에서 발붙일 테가 있을 거라고 보우? 게다가 칸 선제후께서 가장 미워
하는 상대인 '카챠'의 사람인 형한테 다른 탈출구가 있을까? 선거만 끝났다 하면 결코 살아남지 못한다
는 것을 알아야지 동생이 아량을 베풀 때 얌전히 설득 상하는 편이 좋았을 텐데. 아니. 그건 역시 진네
만 가문 사람으로서 할 만한 일이 아니었나?:
"나라라지 않았나!"
블라도가 하는 말의 뜻을 율켄은 남김없이 알아듣고 있었다. 그리고 새삼스러운 사실도 아니었다. 동생
이 오랫동안 섬겨 온 칸 선제후는 벌써 열 다섯 선제후 가운데 절반 이상의 지지를 획득한 상태였다.
오직 반대하는 것을 블라도가 '카챠'라는 모욕적인 별명으로 부른 카츠야 선제후를 비롯한 세 명에 불과
했고 나머지들은 공식적인 지지를 표명하진 않았어도 대세에 따르는 분위기였다.
이미 진 선거다. 그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진네만 감누. 아니 트라바체스 공화국에서 조금이라도 이름 있다는 집안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생명 다음으로 중시하는 것이 정치적 신념 아닌가. 그리고 그 가운데 상당수는 신념 쪽을 생명보다 더
높이 치고 있다는 것도 주지의 사실이다. 진네만 가문은 그 점에서 적지 않은 명성마저 가지고 있었다.
형제까리 이토록 참혹하게 갈리게 된 것도 그 명성을 높이 산 여러 선제후들의 유혹이 심했던 탓 일지
도모르는 일이다.
그래. 언제부터인지는 모른다. 온 나라가 빵 조각도 제대로 못 먹는 주제에 신념이니 당파니 하는 것에
넋을 놓고 들썩거리게 된 것은. 아마도 트라바체스가 이처럼 불안정한 제후 선출식 공화정을 도입한 후
부터인가? 아니. 정식으로 하지만 이건 공화국도 아니다. 전 국민이 수백 개의 당파로 갈려 부자간에.
형제간에, 친구간에 화해조차 모르고 싸우도록 만든 악독한 변형 군주제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더라도. 결코 꺾을 수는 없었다. 트라바체스에서 한번 지지하는 섬기기로 한 선제후나 당파을 버린
다는 것은 어떤 행동으로도 씻기 힘든 불명예로 간주되었다. 그게 바로 공화국 건설 당시부터 서서히
갈려 온 수백 개의 당파가 여전히 조금도 합치지 못하고 투쟁과 암살로 얼룩진 채 볼썽 사납게 싸우고
있는 이유이기도 한 것이다. 그들은 지금도 갈라지기만 한다... 겨우 백 여명의 지지 세력을 가진 자들도
60명과 40명으로 갈릴 망정. 비슷한 규모의 다른 정파와 손잡아 2백이나 3백이 되는 일은 벌어지지 않
는다. 모두 상대가 숙이고 들어오기만을 바랄 뿐.
그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율켄 역시 아버지와 어머니의 정파를 따를 수 없었고. 동생과 합칠 수 없었
으며. 여동생의 결혼 상대자를 끌어들일 수 없었다. 그 윗대도 마찬가지 일의 반복이었다.
이런 식으로 정치 때문에 집안이 파탄 지경에 이르는 것을 트라바체스에서는 크게 드문 일이 아니다.
수많은 선제후들과 다음 선거에서 선제후가 되기를 원하는 의원들은 조금이라도 힘있는 집안 사람이라
면 그중 한명이라도 제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잦은 술책과 회유를 동원했다. 형과 누이가 갈리고 남편
과 아니가 갈리며 아버지와 딸이 등을 도렸다. 나라는 붕괴 직전이 되어도 누구도 서로를 용서하거나
용서를 빌지 않았다. 오직 자기 당파가 정권을 쥐는 것. 트라바체스에서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그것 하
나만이 지상 목표일 뿐!
인사도 없이 걸어나가던 동생은 마지막 순간까지 히죽거렸다.
"오늘 내말을 들었으면 진네만 집안이 둘째 아들에게 이러지는 일도 없었을 텐데 말이우. 어디, 내가
빼앗아 갈 때까지 모조리 꼭 끌어안고 잘 버텨 보슈."
쾅. 문이 닫혔다. 홀로 남은 율켄은 석상이 된 것처럼 꼼짝 않고 않아 있었다.
그도 오랫동안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 온 사내다. 트라바체스에서 어떤 식으로 한 정파가 다른
정파를 말살하고 제압하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동생이 화해를 청하러 왔다는 소리는 입에 발린
개소리고 실은 선전 포고를 하러 왔을 것이다. '윈터바텀 킷'을 찾으러 왔다고? 어림없는 소리! 율켄이
그걸 순순히 내줄 리가 없다는 것을 블라도가 더 잘 알고 있었다.
물론 당연히 혼자일 리 없었다. 저택 밖에는 이미 습결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을 테고. 방금 역
시 자신의 몸을 보호할 방책쯤은 마련해서 온 것이다. 비록 자신이 태어난 곳이지만 이제는 적진과 다
름없는 저택에 홀홀 단신 들어올 불라도가 아니었다.
녀석도 저 나이가 되도록 정치판에서 구를 대로 구르고. 피 맛도 볼대로 봤을 테니까.
" 튤크"
"예, 주인님."
거실 뒤의 커튼 속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항쟁이다."
"예, 준비하겠습니다."
커튼 뒤에 서 있던 사람의 자취가 스르르 지워졌다. 그 뒤에는 밖으로 곧장 통하는 비밀 통로가 만들
어져 있었다.
율켄은 쏟아진 에일 방울들과 나란히 놓인 두 개의 컵을 내려다 보다가 이윽고 일어섰다. 길쭉하게 솟
을 창을 말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말에 올라타는 동생 곁에 두 명의 종자가 역시 자신들의 말을 끌어
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이윽고 말에 올라타더니 박차를 가해 두 형제가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들판을 향해 달려갔다.
2. 눈의 갑옷. 겨울의 검
예프넨은 걸음을 서둘렀다. 하인이 맡겠다는 것을 마다하고 굳이 직접 동생을 번쩍 안아든 채 저택을
향해 내달렸다. 현관에 도착했을 때까지 비는 조금만 흩날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2층에 계십니다."
들판 너머로 블라도 삼촌이 탄 말이 사라지는 것을 보았었다. 동생은 자기보다 더 진장해 있었다. 하인
의 대답을 듣고 예프넨은 다시 물었다.
"튤크 집사가 내려왔나?"
"예, 아까 전에 벌써 연병장으로 나가셨습니다."
예프넨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다면 가볼 필요는 없겠지. 보리스. 방으로 가자."
흙 묻은 신발을 갈아 신을 틈도 없었다. 말끔하게 닦아 놓은 바닥과 잘 손질된 융단에 풀씨와 진흙이
뭉개졌다. 가로막는 문을 거칠게 열어제치며 방으로 달려들어간 예프넨은 침실 문만은 닫고 단단히 잠
갔다.
보리스가 가쁜 숨을 내쉬며 침대로 주저앉는 동안 예프넨은 당장 장롱을 열어제치더니 잘 접어놓은 옷
들을 마구 꺼내 바닥에 내던졌다. 강철 경첩이 붙은 작은 상자가 발견되자 주머니에서 열쇠를 뽑아 돌
렸다. 뚜껑이 열리고 나온 것은 손가락 두 개 두께만큼 굵고 시커먼 열쇠였다.
"보리스. 네 방에 가서 아버지가 주신 브리간딘(brigandine) 갑옷을 꺼내 입어라. 검과 부츠를 가져오는
것도 잊지 말고. 알지? 어떻게 해야 되는지."
동생의 어두운 눈동자가 바닥에 어지럽게 흩어진 옷가지들을 훝어진 옷가지들을 훑는 것을 느꼈지만
마땅히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보리스는 일어나 바로 곁에 붙어 있는 자기의 방으로 들어갔다.
보리스가 곧이어 뛰어들어온 유모의 도움을 받아 무장을 마칠 즈음 예프넨의 급한 손길도 할 일을 해
내고 있었다. 묵직한 장롱을 밀어내고 뒷벽에 난 위장된 나무판을 다음 그 너머에 장치된 철 금고에 붙
은 구멍을 손가락으로 더듬어 찾았다. 굵직한 열쇠를 꽂아 힘껏 돌리자 덜컹,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보리스가 돌아왔을 때. 난장판이 된 형의 침대 위에는 두 개의 신성한 물건이 놓여 있었다.
형제는 잠시 침묵했다. 보리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스노우가드 (snowguard)....."
은백색으로 번쩍이는 체인이 수천 개의 눈 결정을 모아 엮은 듯 눈부셨다. 그것은 가까이에서 들여다
보면 눈 둘 곳을 잃을 정도로 한층 황홀한 결정들이었다. 보리스는 한 걸음 다가가 그 위에 손을 얹었
다.
차갑다가...따뜻해진다. 그랬다. 거짓이 아니었다. 외부의 열을 흡수하여 내부에 이르기 전에 분쇄해버린
다는 신비로운 힘은 마법 갑옷 스노우가드의 수많은 능력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었다. 어떤 강
렬한 불꽃도 결코 뚫을 수 없다는 눈의 갑옷 스노우가드. 그것이 진네만 가문의 손에 들어온 것은 네
새대 전엔 예프넨과 보리스의 증조부가 이룬 업적이었다.
예프넨이 이어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윈터러 (Winterer)."
'겨울을 지새는 자'라는 이름 그대로, 추위와 얼음의 힘으로만 제련된다는 기이한 금속이 한 줄기 섬광
처럼 벼려진 채 침묵하고 있었다. 검이다. 날씬한 자태만큼이나 귀족적인 싸늘함을 지닌 하얀 검이다.
무늬 없는 백색 검집 위로 튀어나온 손잡이는 비교적 얇은 검신에 비해 두 손을 넓혀 쥘 수 있을 만큼
길었다. 한 손으로도 두 손으로도 쓸 수 있다고 해서 사생아라는 별칭을 가진 바스타드 소드( sword)였
다. 보리스가 어린 시절 단 한번 본 기억이로도 검집 안에 든 날 역시 차가운 백색 광택을 지니고 있었
다.
이 두 가지 물건을 합쳐서 부르는 이름이 바로 윈터바텀 킷. 지금은 진네만 가문의 보물이 되어 있지
만 과거 수많은 신분 높은 가사와 방랑 전사들이 옳지 못한 피를 뿌리고라도 손에 넣으려 안간힘을 다
했던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검을 쥐는 자라면 누구나 풍문으로라도 전해 듣고 동경하게 되는 신비로운
무구, 명성 자자한 무구였다.
보리스의 증조부는 스노우가드를 손에 넣기 위해 들리는 말로 99명의 기사와 전사를 살해했다고 했다.
당시 스노우가드의 주인은 외국의 영주였다고 하니 그를 호위하는 군사가 그보다 많으면 많았지 적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 아들이 다시 검인 윈터러를 손에 넣기까지는 30여년이 걸렸다. 그 역시 아버지보다 적
게 죽이지는 않았다.
한번 손에 넣는다고 거기서 일이 끝날 리 없었다. 윈터바텀 킷이 한주인의 손에서 완성되었다는 이야
기는 검을 쥔 자들 사이에 한층 열렬한 동경을 불러일으켰다. 그 즈음부터 윈터바컴 킷을 손에 넣으면
최가의 검사가 될 수 있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조금 지나자 소문은 '원터바텀 킷을 손에 넣어야
만 최강의 검사'라는 식으로 바뀌어 버렸다.
일단 손에 넣은 보물을 광적인 도전자들로부터 지킬 수 있었던 비결은 한 가지,걸려 오는 무든 도전을
거절하는 것이었다. 윈터비텀 킷으로 무장하고 나와 정정당당히 겨루고 보물은 이긴 자의 전리품으로
하자는 요구들에 보리스의 할아버지는 코웃음도 치지 않았다. 물래 숨어든 도둑들은 대기하고 있던 사
병들에 의해 깨끗이 격퇴 당해 모두 목이 잘렸다.
당시만 해도 진네만 가문은 트라바체스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당당한 집안, 1대1 결투의 방법이
아니면 그 누구도 강압적으로 윈터바텀 킷을 빼앗아 갈 길은 없었다.
또한 달리 말하자면 아무리 좋대 봤자 일개 무구일 뿐이다. 정치적 목적을 위해 그물처럼 엮어진 집안
간의 유대를 중시하는 가문들은 검 한자루. 갑옷 한 벌 따위를 뺏자고 여럿이 죽고 죽이는 항쟁 따위를
벌일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다.
그렇게 몇십 년이 흐르자 소문이 서서히 사그라졌다.
보리스의 할아버지는 그토록 힘들여 얻는 무구인데도 한 번도 윈터바텀 킷을 몸에 걸치고 밖에 나서지
않았다. 탐욕스런 자들의 욕망이 불붙을 여지를 원칙적으로 봉쇄했던 것이다. 더 세월이 흐르자 '이미
다른 사람의 손으로 넘어갔다더라'는 의견이 지배적으로 되었다.
그러나 윈터바텀 킷은 여전히 진네만 저택에 이렇게 존재하고 있다. 전통대로, 두 명의 아들들 손에.
다시 말하지만 두 명의 아들이다. 보리스의 할아버지는 이 윈터바텀 킷을 놓고 아들들이 싸우지 않기
를 원해서 그들에게 하나씩 나누어주고 서로 협력하라고 유언했다. 한쪽이 늙어 죽은 후에야 그것을 다
시 한사람의 손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블라도는 형인 율켄에게 내 쫓겼고 당연히 소유권도 빼앗겼다. 이
제 그것을 되찾으려 하는 마음에 추호도 망설임이 있을 리 없었다.
율켄 역시 두 아들을 두었다. 그러나 그는 죽은 아버지와 생각이 달랐다. 윈터바텀 킷은 합해졌을 때 강
력한 힘을 발한다. 나누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지 않은가.
그것은 당연히 가문을 이을 큰아들의 것이었다. 열두 살인 보리스보다 예프넨은 여덟 살이나 많았다.
그 정도 나이 차이면 동생을 제압하여 감히 거역하지 못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율켄은 생각했다.
그러나 예프넨의 생각은 또 달랐다.
"보리스. 네게 이 검을 잠시 빌릴게."
겨울의 검 윈터러는 그 정체 모를 재질 탓인지 일반적인 바스타드소드에 비해 비교적 가벼웠지만. 역
시 열두 살 어린아이가 휘두르기에 벅찼다. 보리스는 가만히 형을 올려다보았다.
율켄이 윈터바텀 킷을 아들 예프넨에게 넘겨 준 것은 올해 초, 예프넨이 스무 살이 되던 때였다. 그러
나 예프넨은 그날 밤 자기 방으로 보리스를 불러 두 가지 물건을 보여주며 어느 쪽이 좋아 보이느냐고
물었다. 보리스는 별 생각 없이 무거운 갑옷보다는 검이 멋진 것 같다고 답했고, 그러자 예프넨은 네가
검을 휘두를 수 있는 나이가 되면 그걸 네게 주겠다고 말했다. 깜짝 놀라는 보리스에게 부드럽게 웃으
면서.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이.
보리스는 자신이 그 말을 믿었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그 후로도 형은 몇 번이나 기회가 닿을 때
면 '윈터러는 네 거다'고 말해 주었고 언제부터인가 그도 그렇다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 같았다.
그러나 오늘과 같은 날 형은 다시 한 번 그게 말하고 있었다. 문득, 보리스는 여전히 자신을 그 이름 높
은 검을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보리스는 항쟁이 무엇인지 모르는 나이가 아니었다. 트라바체스 공화국에서 가문간 항쟁으로 일어난
일은 재3자가 책임을 묻지 않은 것이 불문율처럼 되어 있었다. 오늘 밤 누가 살해당한다 해도 이 자리
에 있는 사람들 외에 울어 줄 사람은 없었다. 아직은 전력이 될 수 없는 어린아이는 자신, 그러니 형이
검을 쥐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그가 가장 사랑하는 가족인 형이.
보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형 거야."
"아냐. 이번 항쟁이 끝나면 반드시 돌려주겠다. 네가 허락하지 않는다면 빌려 가지도 않을 거야."
"돌려 줄 필요 없어. 형 거야."
"보리스."
예프넨은 윈터러의 칼집 쪽을 잡더니 보리스에게 내밀었다. 약간 망설이다가 손잡이를 잡자 형은 손을
놓았다. 휘청, 팔이 아래로 떨어지며 바닥에 부닿친 검이 요란한 소리를 울렀다.
"들어 봐."
힘껏 들어올리려 했지만 한 손으로 지탱하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두 손으로 잡자 간신히 허공을 향해
쳐들고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팔뚝이 부들부들 떨리고 검 끝이 불안정하게 작은 원들을 그렸다.
더 이상 못 견디겠다고 생각했을 때, 형의 손이 검집으로 감싸진 끝을 탁, 잡았다. 팔에서 힘이 빠지자
어깨가 축 늘어졌다.
"거봐, 너도 들 수 있잖아."
"이런 걸로는......"
그러나 예프넨은 동생이 더 말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허리를 굽히며 얼굴을 바싹 갖다 대더니 조
그맣게 속삭였다.
"더 잘 하게 될 거야. 멋지게 해내게 될걸. 너는 전사(warrior)니까, 이름 그대로 전사니까(Boris는 '전
사'라는 의미)."
형의 따뜻한 입김이 기분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때, 다시 한번 이상한 기분이 목덜미를 서늘하
게 감싸며 다가왔다.
자신은 실제로 검을 갖게 될 것이다. 저 윈터러를.
그것도 원치 않은 슬픈 결과로 인해.
괴괴한 침묵이 저택 전역에 감돌았다.
아버지가 거느린 2백여 명의 사병이 저택의 앞뒤를 삼엄하게 지켰다. 진네만 가문의 전**에는 천여
명도 넘었다는 사병이 지금은 저토록 줄어들어 있었다. 전**란 윈터러를 가져왔다는 보리스의 할아버
지 시절을 뜻했다.
보리스와 예프넨은 2층에서, 뒤뜰로 곧장 이어지는 계단이 붙은 곳에 서 있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싸움
의 전면에 나설 필요는 없었다. 병사들의 사기는 어차피 아버지의 존재로 결정되니까. 그러나 또한 어린
아이인 보리스라고 해서 싸움에서 아예 빠질 수는 없었다. 그 역시 진네만 가문 주인의 아들이었으므로.
일부러 그런 것처럼 약간 열려진 창문 밖 뜰로는 병사들의 뒷모습이 검은 말뚝처럼 일정한 거리를 두
고 박혀 있었다. 그들은 제2진이다. 1진은 저택에서 보이지 않는 곳까지 나가 있었다.
진네만 저택은 여러 번 고쳤음에도 불구하고 방어적인 항쟁을 하기에 용이한 환경은 되지 못했다. 아
니, 실은 저택까지 적이 들어오면 그 항쟁은 거의 졌다고 봐야 했다. 일단 저택에 들어온 적은 가재 도
구에서 진귀한 물건들이 이르기까지 손닿은 물건마다 남김 없이 부수고 약탈해 버린다. 싸움에 이기고
지고를 떠나 저택이 침탈 당한 집안은 거의 항쟁에서 진 것이나 다름없는 꼴이었다.
이러한 항쟁은 한 해에도 몇 번이나 일어났다. 이름 있는 가문이 항쟁에 연루되었을 때만 그것은 널리
아야깃거리가 되었고. 보통은 그냥 저들 집안끼리의 일로 묻혀 버렸다. 그러나 실제로 항쟁에서 진 가분
은 어린아이까지 모조리 몰살당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그것은 불화가 있는 가문들이 가장 자주 택하는 해결 방식이기도 했다. 진네만 가문처럼 가문 안에서
쫓겨난 형제나 자매가 항쟁을 걸어오는 경우도 아주 드물지는 않았다. 정견이 달라 집을 나가는 형제란
트라바체스에서 매우 흔한 것들 중 하나였다.
예프넨의 시선이 창문 틈에 박혀 있었다. 보리스는 계단 쪽을 돌아보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계단 아래에는 십여 명 이상의 병사가 지키고 있을 것이다. 적어도 진네만 가문의 젊은 두 형제보다 먼
저 죽기 위해서.
" 보리스. 저길 봐."
불쑥 들려온 형의 목소리에 보리스는 재빨리 창문턱으로 다가들었다. 붉게 흐린 하늘과 보랏빛 기류가
뒤엉켜 번져 나가가는 들판머리에 새로운 광채가 곹 가세했다. 횃불이었다.
"시작이다."
늑골 아래가 쿡 찔러지는 듯한 충격이 올라왔다. 보리스는 잠깐 숨을 멈췄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소리가 번지기까지는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우우, 또는 와이... 라고 외치는 듯한 뭉개진 목소리들이
점점 가까이 **왔다. 어두워서, 어두워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새 저택 주위는
온통 타오르는 횃불로 휩싸여 있었다.
얼마나 될까...수백?1천?
지독히 불리하다.
예프넨은 입술을 꼭 깨물며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한 말을 되새겨 보았다. '사태가 불리하거든 윈터바텀
킷을 가지고 저택을 빠져나가라. 미리 일러 둔 그 방향으로.'
이버지는 보리스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것일까? 하지만 예프넨에게는 보리스
가 우선이었다. 자기 혼자라면 어둠을 뚫고 달아날 자신은 있었다. 그러나 첫째는 아버지를 두고 가**
다는 사실, 둘째는 동생을 안전하게 데려가야 한다는 임무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아버지가 말한 대로 웬터바텀 킷을 삼촌에게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것도.
또래보다 유능한 점이 많다고는 해도 예프넨은 스무 살. 그만한 짐을 한꺼번에 짊어지는 것은 당연히
벅찼다. 그러나 그렇게 길러진 탓일까. 그는 자신의 짐이 부당하다고는 느끼지 않았다. 단지 자신에게
그만한 능력이 아직 없다는 것을 안타깝게 느낄 뿐이었다.
그 와중에 그는 이곳에서 피를 뿌리게 될 병사들의 운명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주인이 되었다면 당연히 돌보아야 했을 가문의 사병들이었다.
각 가문에 속한 사병이란 일시에 모아져 급작스레 형성되는 것이 아니었다. 대부분은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보살핌을 받아 왔으며 진네만 가문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며 커온 자들이 그들이었다. 그들의
존재 이유는 다름 아닌 항쟁, 바로 그 항쟁을 위해서 평상시 평민의 몇 배나 되는 대우를 받으며 비교
적 편안한 생활을 해온 자들인 것이다.
그러니...오늘은 끝나는 날이로구나.
횃불이 동생의 얼굴에까지 어른거렸다. 예프넨은 검을 꽉 쥔 채 일단은 저들을 하나라도 더 벨 일을
생각했다. 그들 가운데 삼촌이 어디 있는지 알아볼 수 없었다. 다행히 가장 먼저 삼촌을 벤다면 일은 좀
더 수월해지리라고 생각하며 그는 쓴 미소를 삼켰다.
그때, 보리스는 창문 곁에 걸린 한 장의 그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푸른 드레스를 입은 채 처연한 미소
를 짓고 있는 여인이었다. 그림 속의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말을 거는 수한 눈이었다.
"오늘, 진네만 가문의 주인은 바뀐다! 들었느냐! 오늘 가문의 주인은 바뀌었다!"
목소리 큰 자 여럿이 입을 맞춰 외치는 소리를 율켄 역시 듣고 있었다. 살아오며 여러 가지 경로로 겪
은 항쟁은 십여 번 이상이었다. 저런 수순에 대해서도 알만큼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이 자신을 향해 말해지는 기분은 상상보다 훨씬 썼다.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는 자는 죄를 묻지 않는다! 새 주인에게 봉사하여 다시 진네만 가문을 일으킬
자는 앞으로 나오너라!"
저런 회유에 마음 흔들질 자들이라면 이미 몇 년 전부터 기울어지는 것이 확연했던 진네만 가문을 예
전에 떠났을 거다...라고 중얼거린 율켄은 몸을 일으켰다. 저들의 헛소리를 끝까지 들어 줄 필요는 전혀
없었다. 피를 뿌릴 때가 왔다.
갈 테냐?
성큼, 한 걸음 나선 그의 입에서 벽력같은 고함이 터졌다.
"나서라, 감히 롱고르드의 땅을 침범한 자여! 진네만 가문의 미래를 서툰 입으로 논하는 자여. 빛 아래
로 나오라!"
횃불로 둘러싸인 앞마당이 저물 녘처럼 불그레했다. 율켄은 정면 2층 테라스에서 서서 아래를 나려다
보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온 적들의 석궁이 닿는다면 닿을 수도 있는 거리였다. 그러나 당당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병사들이 움츠러들기 때문에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수순이었다.
"율켄 진네만이다! 테라스 위다!"
병사들이 테라스로 횃불은 가져와 높이 들었다. 붉게 타오르는 얼굴로 아래를 내려다보며 율켄은 생각
했다. 1진은 어찌 되었을까? 괴멸 당한 것일까? 아니면 길이 엇갈렸나?
적이 만든 횃불의 따기 율켄의 시야에서 20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서 일렁이는 곡선을 이루고 있
었다. 눈속임이 섞였다 해도 5백은 훨씬 넘는 수였다. 율켄을 다시 한 번 외쳤다.
"불을 올려라!"
저택 전면에 포진한 병사들의 발아래 흰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하여 붉은 횃불의 띠와 대치하는 선을
이루었다. 흰 불꽃은 저택에 마법의 힘이 있음을 과시하는 것이고, 동시에 병사들의 사기와 체력을 끌어
올리는 마적 효과도 있었다. 집사 튤크가 해내는 일들이었다.
"소심한 자야, 나오지 못하는 것이냐? 너희의 오합지졸에 3백여 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젠네만 가문이
쓰러질까보냐!:
그 순간. 대답 대신 거대한 뱀이 시잇거리는 듯한 싸늘한 굉음이 저택과 벌판 전체에 올려 퍼졌다.
병사들, 저택 안의 사람들, 테라스에 선 율켄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이 부지불식간에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붉은 보랏빛 대기가 일그러지며 언뜻 흰 불빛 같은 것이 내비쳤다고 생각된 순간이었다.
자장 먼저 사태를 알아챈 것은 율켄 이었다.
" 나가라! 모두 저택 밖으로 나가라! 2진은 자리를 지켜라!"
우우우와아아......비명에 가까운 함성과 함께 저택의 모든 문이 안에 포진했던 병사들을 토해 놓기 시작
했다 그러나 율켄 자신은 밖으로 나가는 대신 몸을 돌려 성급하게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그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단 한가지밖에 없었다.
그러나 율켄과 거의 비슷한 순간에 사태의 위급함을 판단한 사람이 있었다. 예프넨은 동생을 와락 끌
어안고 계단으로 뛰어 내러가려는 순간, 달려오는 아버지와 마주쳤다. 아버지의 얼굴이 창백하게 일그러
져 있었다.
"예프넨! 어서......"
그때 율켄은 예프넨이 보리스를 껴안고 있는 것을 보았다. 다른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는 당장 예프넨
의 품에서 보리스를 빼앗았다. 두 아들이 모두 상황을 몰라 아연실색하는 것을 보면서 율켄은 사납게
소리쳤다.
"혼자 가러가! 보리스는 내 곁에 두겠다!"
"하지만......!"
율켄의 노성이 터져 나왔다.
"어린아이를 데리고 어떻게 제대로 도망을 치겠다는 거냐! 네가 지금 어떤 것을 지키고 있는지 모른단
말이냐! 어서 가라!"
예프넨은 감히 반대 의견을 말할 틈도 없었다. 아버지는 보리스를 옆구리에 끼다시피 한 채 어두운 복
도 넘어 사라져 버렸다. 그때, 다시 한번 저택의 벽이 울리는 것을 느껴졌다.
쿠르르르르......
입술을 깨물었지만 어쩌는 수가 없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복종해 온 아들이었다. 허리에 찬 윈터러를
꼭 쥔 채 그는 한 걸음에 세 단 씩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더러운 놈......"
율켄은 저택 안을 지키던 병사들을 이꿀로 저택 뒤쪽으로 빠져 나와 있었다. 그러나 하늘에서 튀어나
온 거대한 괴물의 머리가 저택 지붕을 덮치는 것을 바라보았다.
만년설의 산이 갑자기 솟은 듯. 새하얀 *** 주위로 성근 눈발이 날리는 듯했다. 보이는 거라고는 머
리와 목. 그리고 갈고리 같은 발톱이 줄줄이 세워진 한쪽 앞발뿐이었다. 나머지는 자줏빛으로 맥동하는
구름 속에 가려져 있었다. 써늘한 청록빛 눈동자가 잔인하게 번들거리며 목표물을 주시했다. 뱀처럼 생
긴 머리통은 언뜻 반투명했다. 몸 전체가 소화되지 못한 탓이리라.
병사들이 두려움에 떨며 웅성거리는 소리가 율켄의 귓가를 아프게 자극했다. 틀림없었다...... 트라바체
스 안에서 단 세명의 마법사만이 소환할 수 있다는 얼음 이계의 소화수 '크리갈'이다. 말로만 들었을 뿐
실제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은 처음이었다.
분명 칸 선제후를 섬기는 대마법사 종그날의 작품이리라. 그가 이곳까지 함께 왔을 줄이야. 그 정도로
동생의 위치가 높단 말인가, 아니면 더 큰 전략적 가치가 이곳에 주어져 있단 말인가.
흰 뱀처럼 생긴 머리가 드디어 입을 쩍 벌리더니 동쪽 지붕을 물어뜯었다. 우지끈, 서까래가 무너져 내
리고 기둥이 부러지는 소리가 이 곳까지 들렸다. 오랫동안 지키고 가꾸어 온 저택...... 그러나 사실 그것
은 문제조차 아니다.
부서진 집은 고치면 되지만 저 강대한 이계 소환수 '크리갈'은 이빨에서 맹독성의 액체를 쏟아내었다.
독액이 집을 적셔버리면 그 안에 있던 사람이 몰살당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후 정화 마법을 써도 회복
되는 데 며칠로는 어림도 없었다. 자연 상태로 둔다면 3년 이상은 들어갈 수조차 없는 폐가 되어버린다.
율켄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점이 바로 그것이었다. 전략적으로 저택에서 자신들을 내쭟는 것이
아무리 필요했다고 한들. 블라도에게도 역시 어린 시절의 추억이 깃들인 저택인 것이다. 그것을 저렇게
더럽히면서 일순의 망설임조차 없다는 말인가.
으득......
저절로 이가 갈렸다.
" 저놈을 용서하면 내, 진네만 가문 사람이 아니다."
창백한 얼굴로 씹어 뱉는 소리였다. 그의 곁에서 말을 잊는 표정으로 하늘을 오려다보던 보리스가 문
득 아버지를 돌아보았다.
화수 크리갈... 그 거대한 머리가 지붕을 씹어 부스는 것을 바라보는 보리스의 가슴이 이상할 정도로
싸늘했다. 2층에는 어머니의 방이 있었다. 형은 가끔 어머니가 그립4다고 말했지만 자신으로서는 기억조
차 없는 어머니였다. 늘 깔끔하게 청소되어 생전 어머니가 놓아둔 그대로의 모습으로 유지시키고 있는
그 방에 가끔 보리스를 데리고 들어간 형은 어머니의 냄새가 나는 것 같다고 말하곤 했었다.
하지만 보리스로서는 아무 냄새도 맡을 수 없었다. 기억나는 어머니는 초상화 속의 푸른 드레스와 창
백한 얼굴일 뿐, 그리고 방에서는 하녀들이 꽂아 놓은 말린 갈대나 들꽃의 냄새가 났을 뿐이다.
하지만 형이 저걸 본다면 슬퍼하겠구나......
형과 떨어졌을 때부터 지금까지, 불안한 마음이 한시도 가시지 않았었다. 왜 아버지는 형과 자신을 떼
어놓았을까. 어린아이를 데리고 도망치는 건 무리라고 했지. 역시 형의 짐이 될 필요는 없는데.
아버지는 별 역할도 할 수 없는 어린 아들보다는 대를 이어갈 큰아들. 그리고 가문의 보물이 중요한
거다. 어쩌면 당연할 지도 모르지. 자신은 아직 진네만 가문에 중요한 사람이 아니니까.
그렇지만 그의 불안함은 이상하게도 자신이 아닌 형에게 닿아 있었다. 오늘 내내 형에게 무슨 일이 벌
어질 것만 같은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율켄은 보리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곁에 다가선 집사, 아니 마법사 튤크에게 명령했다.
"1진과 2진의 상태를 점검해 봐라. 얼마나 남아 있는지."
튤크는 말없이 긴소매를 한 번 휘둘러 허공에 영상을 열었다. 영상으로 드러나 저택 전면의 들판에는
흰 불길과 붉은 불꽃이 엇갈려 타올랐고 남은 병사 몇이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전세가 불리한 것은 누
가 보아도 자명했다. 전면전을 할 만한 병사는 남아 있지 않았다. 보리스는 섬뜩한 기분으로 그것을 바
라보고 있었다.
율켄은 잠시 침묵했다가 곧 입을 열었다.
"저택 양쪽으로 친다. 남은 병사들은 둘로 나눠라. 모두 풀이 길게 자란 쪽으로 다가가 몸을 숨기고 명
령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라고 해라."
보리스는 깜짝 놀랐다.
"아버지, 저 괴물이 있는데 어떻게......"
율켄이 낼앨하게 내뱉었다.
" 저놈의 몸은 절반이 이계에 남아 있으니 이 세계에서 살아 있는 자에게는 힘을 발휘할 수 없어."
그러더니 율켄은 성큼 걸어가 보리스에게 들리지 않도록 튤크에게 몇 마디 속삭였다. 튤크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두어 마디 답했다. 이윽고 마법사는 미리 약속해 둔 마법의 휘파람을 불어 어둠 속에서
병사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짧은 시간밖에 걸맂 않았다. 보리스는 율켄의 손에 이끌려 저택의 동쪽으로 돌아갈 병사들과 함께 풀
숲 아래에 엎드려 있었다. 반대쪽 병사들을 이끌고 있는 튤크가 마법으로 신호를 보낼 것이었다.
"보리스, 넌 천천히 따라오다가 뒤로 빠져서......"
아버지는 입을 떼더니 잠시 머뭇거렸다. 뭔가 숨기는 거라도 있는 듯한 사람의 태도였다.
"우리가 사움을 시작하거든 곧장 들판 뒤로 돌아 달려가라. 도망치는 거다, 알았지?"
보리스는 눈을 크게 떴다가 다시 마음을 가라앉혔다. 자신이 싸움에 도움이 될 리 없었다. 그렇다면 역
시 형과 떼어놓은 것은 형을 번거롭게 하지말고 조용히 잡혀 죽으라는 것일까?
"어느...쪽으로요?"
"에메라 호수 쪽."
"거긴......"
이번에는 보리스도 놀란 가슴을 쉽게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그것에는 붉은 눈의 유령이 살고 있지 않
은가!
보리스의 마음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아버지는 싸늘하게 말을 이었다.
"유령 따위는 없어. 늙은 여자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서야 어떻게 진네만 기문의 사내랄 수 있겠느
냐? 오히려 덕택에 그 쪽으로 달아났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호수가 보이는 근처에 숨어 있
으면 아버지가 싸움을 끝내고 데리러 가마. 그렇지, 검은 둥치를 가진 나무가 세 그루 서 있는 곳에서
기다려라. 알겠느냐?"
보리스는 제대로 대답할 틈이 없었다. 튤크가 율켄의 귓가로 마법의 속삭임을 보내 왔던 것이다. 가벼
운 째깍거림 같은 소리. 신호였다. 율켄은 손을 올렸다.
"가라!"
벌떡 일어난 율켄은 아들을 더 이상 돌아** 않은 채 들판을 달려가기 시작했다.
"아버지!"
마지막이었을까......아버지의 그림자는 완전히 어둠 속으로 묻혀버렸다.
이계의 생물체가 굽어보는 가운데 같은 성을 가진 형제의 병사들이 서로 뒤엉켰다. 흰 불꽃, 붉은 불꽃
이 어우러져 타올랐다.
불라도 진네만은 칸 선제후가 하사한 흑날의 세이버(saber) '하그룬'을 뽑아들고 연신 **드는 병사들
을 요리했다. 등뒤는 호위병들이 든든히 지켜주고 있다. 오직 앞만 잘 보면 되었다.
어깻죽지를 꿰뚫었던 검이 곧장 다른 자의 이마를 찢고, 목을 찔렀다. 다시 한 바퀴 휘두르자 상대의
손목이 잘려 나갔다. 그는 저택을 떠나가 전 자신의 솜씨가 형만 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
금도 그렇다는 보장은 전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먼발치에서 형을 찾으려 했다. 잡작스레 눈앞에서 맞닥뜨리고 싶지는 않았다. 멀리서 싸우는 것을
보고. 기회를 보아 기습하리라 마음먹었다. 죄책감 같은 것은 없었다. 형이야말로 그때 **를 꾸며 자
신에게 모든 죄를 덮어씌우고 내 쯫은 처지 아닌가. 조금 늦긴 했어도 보답을 받기에 모자란 행동을 아
니다 싶었다.
어쨌든 형은 자신보다 늙었다. 얼마나 잘 휘둘러댈지 그 솜씨를 좀 보자꾸나!
"율켄 진네만이다! 율켄 진네만이 여기 있다!"
병사들에게 형을 발견하면 외치라고 말해 두었었다. 이윽고 저택 동쪽에서 웅성대는 소리가 이곳까지
퍼져왔다. 블라도의 주름진 입가에 비열한 미소가 흘렀다.
이제 흑날의 하그룬이 은백의 윈터러로 바뀔 날도 멀지 않았다.
율켄은 블라도와는 반대였다. 그는 기를 쓰고 동생을 찾아내려 했다. 마흔이 넘었는데도 그의 검은 아직
매서웠고, 많은 병사들은 압도해서 달아나게 하고도 남았다. 동생이 이 손에 걸린다면... 그 목에 찔러
꿰뚫기 전엔 결코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죄 많은 동생을 이 손으로 끝장내어 주리라.
그의 바램은 곧 현실로 다가왔다. 그것은 예상했던 것처럼 정정당당한 대결은 아니었다.
갑자기 그의 앞에 지금까지보다 많은 병사가 몰려든다 싶었다. 이를 악물고 상대의 머리며 손목을 후
려쳐 나갔다. 적은 줄어들었지만 계속해서 다시 가세해 왔다. 율켄은 갑자기 뭔가 이상하다는 기분을 느
꼈다.
답은 금방 왔다.
"오후에 뵙고 다시 뵙수. 형님"
옆구리에 뜨끈한 기운이 번져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그 다음이었다. 그만큼 동생의 목소리에
반색하는 기분이 컸던 것이다.
"너, 너 이놈 블라도 진네만!"
푸욱......
다시 한번 차고 날카로운 뭔가가 가슴 아래쪽으로 예리하게 쑤시고 들어왔다. 목구멍에서 뭔가가 솟구
쳤다.
귓가에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주인 어른!"
흥... 블라도는 비웃으며 돌아섰다. 집사 노릇을 하는 마법사인 튤크는 실력이 상당했지만 공격적인 마
법은 아무 것도 없었다. 놈쯤은 조금도 겁나지 않았다.
"같이 죽지!"
번쩍!
그 순간 허공에 번뜩인 것은 자연의 번개였다. 그러나 블라도는 놀라 잠시 멈칫했다. 눈앞에 마법사가
있는 순간이었으니까. 이 놈이 모르는 사이에 전격 계열 마법도 익혀 놓은 건가?
튤크는 하늘이 내려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블라도는 눈앞이 시커먼 안개로 가려지는 것들 느꼈다.
안 되지...그는 뒤로 펄쩍 물러나며 자신의 마법사를 마음속으로 불렀다.
바로 등 뒤에 있었다. 블라도가 데려온 카 선제후의 마법사가 팔을 벌려 날개 형상의 수인을 맺는 순
간 돌풍이 몰아쳐 안개를 날려 보냈다. 그러나 검을 고쳐 잡은 블라도는 낭패한 심정으로 방금 전까지
형이 서 있던 곳을 노려보았다. 둘 다 사라져 버린 것이다.
3. 쫓김
혼자 남겨진 보리스는 침착해지려고 애쓰면서 수풀을 헤치고 나아갔다. 그의 두려움은 두 가지였다. 하
나는 ** 않아도 소리로 느껴지는 저택의 참상, 또 하나는 점차 가까워지는 에메라 호수였다.
소리는 점차 멀어졌고, 침묵은 한층 다가왔다.
어느 시점에서 그는 멈추어 섰다. 그리고 망설이다가 다시 걸었다. 그러나 또다시 멈췄다. 뭔가가 그의
뒤꿈치를 잠아당겨 느리고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어둠이 앞뒤로 깔려 이제는 가릴 수없이 캄캄해졌다. 더 이상 못 견디겠다는 심정이 되지 그는 다시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방향을 바꾸어 호수를 우회하기 시작했다.
물소리가 들린다. 아니면 착각이었을 것이다. 호수로 흘러드는 시내가 있는지 아닌지 보리스는 몰랐다.
아니면 차라리 비가 내리려 한다고 믿을 참이었다. 더 다기기고 싶지 않았다.
주위는 고요했다. 놀랍게도 그의 눈은 달빛에만 의지해서 아버지가 말한 세 그루 나무를 찾아내었다.
그것은 호수에서 2, 30 여 걸움 정도 떨어져 있었다. 나무는 꽤 커서 충분히 등위를 가려줄 것 같았다.
그래서 소년은 식은 땀을 닦으며 그 자리에 주저 앉아있었다. 달빛을 등진 까닭에 그림자가 앞으로 늘
어졌다.
몸이 무거웠다. 간단한 무장이었지만 열두 살 소년에게는 충분히 부담스러웠다.
아버지는... 죽지만 않는다면 그를 찾으러 올 것이다. 깊은 애정을 보여 준 일은 없는 아버지지만 책임
감만은 무엇보다도 강했던 거이다. 그렇지만 만일 돌아가신다면? 그러면 그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누가
알고 찾아 줄까?
보리스는 고개를 젓다가 다시 얼굴이 창백해졌다. 사실 더 큰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돌아
가신다면 그가 돌아갈 진네만 가문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삼촌은 아주 어렸을 때도 보리스를 죽
이러 한 일이 있었다. 지금도 달라지기는커녕 한층 더 집요하게 아버지의 아들들을 없애려 할 것이다.
형은......
그때였다. 어두운 가운데 더 검은 그림자가 등뒤에서 벌떡 일어나는 것을 정면으로 본 그는 비명조차
막혀버린 채 얼어붙었다. 감히 뒤를 돌아볼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그저 눈을 부릅뜬 채 자기의 그림자
보다 몇 배나 큰 그림자가 주위를 뒤덮어 가는 것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쓰으으......쓰릅......씁.
거대한 곤충이 날개를 비비는 듯한 소리가 나다가 뚝 멎었다. 다음 순간, 보리스는 뭔지 모를 손아귀가
자신의 몸을 잡아채어 허공으로 번쩍 들어올리는 것을 느꼈다. 그제야 목이 트이며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아아아악!"
소년의 몸은 지상에서 세 걸음 정도 뛰어오른 위치에 멈췄다. 보리스는 뒤를 돌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앞은 볼 수 있었다. 바닥으로 떨구어진 시선이 거대한 그림자를 더듬었다.
처음에는 알아보기 힘든 덩어리라고 생각했는데 갑작스레 머리 위로 길쭉하게 날카로운 칼날 같은 것
이 솟아나는 것이 보였다. 하나가 아니었다. 둘, 셋, 넷......
그것이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짐승의 촉수, 또는 팔과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
간이 걸리지 않았다.
"......"
팔다리를 움직일 수 있는데도 꼼짝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다음 순간 무슨 일이 닥칠 지 알 수 없는 ,
아니 실은 단숨에 갈기갈기 찢겨진 대도 이상할 것이 없는 시점에서 소년은 얼어붙은 듯 굳어버린 듯
어떤 판단도 내리지 못했다. 그리고......
푸우우욱!
푸르스름한 빛이 번쩍, 하고 지나갔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머리 위로 역겨운 냄새나는 물이 흠뻑 쏟아
져 내렸다. 주르륵, 발 밑까지 타고 내렸다.
둥위를 움켜쥐었던 손아귀가 약해지는 것과 동시에 허공에 쳐드렀던 보리스의 몸은 바닥으로 떨어졌
다. 조금쯤 중심을 잡지 않았더라면 발목이라도 접질렸을 것이다. 그러나 형과 오랫동안 언덕 위에서 구
르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여러 가지 자세를 익혀 온 보리스는 재빨리 무릎을 굽히며 한 바퀴 바닥을
굴렀다. 그리고 급히 일어나 고개를 들고 뒤로 돌아보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마치 물 빠진 가죽 주머니처럼 널브러진 기묘한 시체였다. 그 주위에는
지금 그의 온 몸을 끈적하게 적시고 있는 눅진거리는 액체가 잔뜩 흘러 있었다.
그 뒤에 푸르스름한 빛을 내는 검을 든 사람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열과 어둠 소에서만 초승달처럼
푸른 광채를 내는 검. 그것은 윈터러......
"보리스! 너 어째서 여기에 있는 거야!"
얼굴에 물처럼 흐르는 땀을 손등에 씻어낸 예프넨은 울화가 치민다는 듯 소리질렀고, 곧이어 동생을
와락 끌어당겨 껴안았다. 이만큼이나 땀이 흐른 것은 더위나 싸움의 피로 때문이 아니라 오직 긴장 때
문이었다. 예프넨은 또래들에 비해 실력이 출중했지만 아직 경험 많은 전사는 아니었다. 동생을 닮은 소
년을 움켜진 괴물에게 달려드는 짧은 순간 동안, 그렇게 많은 땀이 흘렀던 것이다.
몸을 뗀 형제는 이제 둘의 몸으로 번진 기분 나쁜 액체를 보며 다시 한 번 몸서리쳤다. 보리스가 입을
열었다.
"아 아버지가 여.여기......"
"아버지가 이리로 가라고 했다고?"
예프넨은 순간적으로 알아들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보리스를 이리로 보낸
것은 자신이 여기로 온 것과 같은 이유 때문일 것이다. 즉, 아무리 삼촌이라고 해도 에메라 호수로 그들
이 달아났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할 거란 사실 말이다. 에메라 호수는 오래 전부터 불길한 곳이었지만
실질적으로 고모가 죽은 뒤로는 아예 입밖에 조차 내서는 안될 금기의 장소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이곳에는 소문만이 아니라 진짜로 괴물이 있었다. 그것만은 예프넨 또한 분명히 알고 있었다.
방금 봤대서가 아니라. 그는 이미 오래 전에 호수 근처를 홀로 배회하며 고모를 죽였다는 그 괴물의 정
체를 직접 보려 시도한 일이 있었다. 그리고 방금 죽인 것과 같은 괴물이 한 마리가 아니라는 사실도
알아냈었다.
그리고 그것뿐이 아니라는 사실도...알고 있었다.
"그런데 형은 왜...여기에 있어?:
보리스는 아버지가 형에게 마지막으로 외쳤던 말을 떠올리며 물었다. 분명 먼저 멀리 달아나라고 하지
않았던가?
예프넨은 동생의 청색 머리카락에 묻은 액체를 닦아주면서 잠시 말을 지체했다. 그래서 보리스가 들은
대답은 작고 간결했다.
" 아버지를 기다리는 거야."
"뭐라고?"
예프넨은 보리스가 알아듣지 못했다고 생각한 듯, 이번에는 보다 크고 분명하게 말했다.
"아버지를 기다려. 난 아버지와는 생각이 달라. 내게는 보물보다 아버지와 너, 그리고 우리 가문에 속한
사람들이 더 중요해."
"그렇지만 아버지는 윈터바텀 킷을 지키는 것이 형의 임무라고 해지 않았어? 그건 할아버지께서......"
"그래, 할아버지께서 목숨을 걸고 얻었고. 또한 명예를 버려가며 지녀낸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머릿 속에는 복잡한 감정이 오갔지만 그는 어린 동생에게 일부러 간단명료하고도 단호하게 말했다.
"보물은 이런 때 쓰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니라면 애써 지킬 필요가 없는 것이잖은가. 긴 세월을 두고 볼 때 진네만 가문의 이름이 윈터바텀
킷의 명성 보다 오래가지 못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는 보물의 주인 가운데 한 명이 되는 것보다
자신이 속한 가문의 일원으로서 행동하는 것이 중요했다. 진네만 가문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보물의 이
름이 꺽어지더라도 그만 아닌가?
어차피, 보물보다 오래 살아가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말이지.
"그럼 아버지 계신 곳으로 돌아갈 거야?"
보리스의 질문에 예프넨 은 고래를 저었다.
" 아니. 지금은 아니."
"그러면?"
예프넨은 자신의 복잡한 심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지 몰랐다. 그래서 어스름 속에 잠긴 호수를 곁눈
질하며 동생을 바닥에 앉혔다. 그리고 첫 마디를 뗐다.
" 싸움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해."
보리스는 동그란 눈동자를 치뜨더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아버지께서 그동안 돌아가실 지도 모르는데?"
"아버진 안 돌아가셔."
밤바람은 젖은 몸에는 다소 싸늘했다. 두 형제는 몸에 붙은 액체가 점차 말라붙어 가는 것을 불쾌한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보리스. 지금 우리 집안이 상대하고 있는 것은 단지 탐욕스런 삼촌 한 사람이 아냐. 삼촌의 뒤에는 칸
선제후가 있지. 그가 블라도 삼촌에게 천여 명에 달하는 군대를 빌려준 것이 단지 오랜 충성의 대가라
고만 보기는 좀 어려워. 진네만 가문은 기울긴 했어도 아직 몇 백 명 정도의 병사로 처치할 수 있는 집
안은 아니지. 그러면 결론은 뭘까? 뻔하지, 모종의 뒷거래가 있는 거야. 그리고 그 내용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지."
보리스는 형이 걸친 은백색 갑옷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스노우가드...윈터러?"
"그리고 진네만 가문 전체의 충성과 협력 정도겠지. 아버지를 없애는 것은 당연한 전제고."
"그런데?"
보리스는 들을수록 아버지가 위험에 처했다고 생각되었다. 그런데 어째서 형은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
일까?
예프넨은 가라앉은 눈동자로 동생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그리고 이 모든 사실을 나보다도 훨씬 잘 알고 계신 아버지다. 정면 대결이 승산없다는 것에 대해서
도, 누구보다 더 더. 나와 너를 이렇듯 빠져나가게 하신 것만 봐도 모든 것을 짐작하고도 남는 것이지.
아버지께서 승산없는 싸움에 목숨을 바치실 분으로 보이니? 결코 아냐. 아버진 너를 여기로 보냈어. 그
러니 아버지도 이리로 오셔,"
아버지는 충성으로 바치는 사병들을 모조리 희생시켜서라도 실리를 택하실 분이다... 그건 틀림없었다.
그러나 보리스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하지만 형은 내가 여기 와 있을 줄은 몰랐잖아?:
예프넨이 가장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아버지와 자신의 머릿 속에 똑같이 삼촌의 군대로부터 안
전한 곳은 여기뿐이라는 생각이 떠올랐음은 분명했다. 그걸 짐작했기에 자신은 여기에서 아버지를 기다
리려 했던 거다.
그러나 삼촌이 없다 해도 호수는 사실 얼마나 위험한 곳인가? 어린 아이를 혼자 보낸 것은 도저히 이
해하기 힘들었다. 아버지는 이곳으로 도망쳐 왔을 때 보리스가 기다리고 있어도 그만, 불운하여 위험을
만났다 해도 그것으로 그만, 정말 그런 것이었을까?
예프넨은 이윽고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왜 내가 몰랐겠니. 네가 위험하면 내가 그걸 느낄 수 있다고 전에 말했잖아."
분명 형은 처음 나타나서 ' 너 어째서 여기 있는 거야!' 라고 외쳤었다. 그러나 보리스는 뭔가를 알기라
도 하는 것처럼 더 캐묻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존재 가치를 알고 받아들이는 것처럼.
이야기를 하다 보니 충격도 어느 정도 가라앉고 숨고 고르게 되었다. 눈이 어둠에 점차 익숙해져 느낒
못했지만 그들은 바로 곁에 지나치는 사람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조용히. 어둠게 있었다.
달빛이 높이 솟아 거대한 알이 깨져 흩어진 듯한 괴물의 시체를 비추자 보리스는 한 번 부르르 떨며
물었다.
"저건 뭐였지...형, 저건 뭐였어? 저게 에메라 호수의 망령이야? 그걸 형이 해치운 거야?
"아니."
"그럼, 또 뭔가 있는 거야?"
"그래."
검 끝을 바닥으로 향하게 짚고 있던 예프넨은 보리스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약간 떨었다. 실력과 운
이 언제나 동시에 겹쳐 주리라는 보장은 없는 것이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는 동생을 지키겠지만......
마른 입술을 핥으며, 그는 아버지가 어서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래야만, 아버지가 와야만 이곳에서 어
서 떠나 다른 곳으로 갈 수 있을 테니까.
붉은 눈의 망령을 ** 않아도 될 테니까.
"놓쳤나!"
저택을 둘러싼 혼란은 수습되고 있는 중이였다. 율켄의 진네만 가문에는 좋지 않은 방향으로. 지휘관을
잃은 가문의 사병들은 침입자의 군대에 자꾸만 쓰러져 갔고. 이제 남은 숫자는 백여 명도 채 되지 않았
다. 그 가운데 완강하게 저항하는 것은 절반 정도에 불과했다.
"찾지 못했단 말이냐!"
블라도 진네만은 형을 눈앞에서 놓치자마자 곧장 마법사 종그날을 불러 미리 영지의 경계에 대기시켜
두었던 소규모 척후병들에게 신호를 보내도록 지시했다. 칸 선제후의 마법사인 종그날은 비록 자기 주
인의 멍에 따라 이 항쟁에 참가했지만 실제로는 블라도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특별히 싫어하지
도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자신이 그의 지시를 받을 입장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칸 선제후의 마법사들을
총괄하는 대마법사의 위치에 있는 자신인 것이다,
그러나 주인의 명을 따르지 않을 수는 없었다. 현재는 블라도의 명령에 따르는 것이 그것을 뜻했다. 척
후들은 신속하게 움직여 계획된 대로 외부 영지로 빠져나가는 길들을 차단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충분한 시간이 흘렀는데도 율켄 진네만과 마법사 튤크의 모습을 발견했다는 자가 아무도 없는
것이다. 기껏해야 순간이동이었을 테네 멀리 갈 수는 있었을 리가 없었다. 허공을 뿌려 두면 저절로 마
법이 깃들인 물체를 감지해내는 ' 힌텐의 가루'를 몇 주머니나 가지고 있는 척후들이니 투명화 따위의
마법으로 몸을 숨겼다 해도 웬만해서는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블라도도 화가 났지만 종그날도 기분이 나빴다. 그렇지 않아도 한 수 지위가 낮은 인간에게 지휘를 받
고 있는데 심지어 그 자에게 쓸모 없다는 평가를 듣게 되어서야 더더욱 체면 구겨지는 꼴일 것이다.
블라도가 척후들의 보고를 듣고 일그러진 얼굴로 종그날을 돌아보자 그는 속으로 뭔가가 치미는 기분
을 느끼며 차갑게 말했다.
"내게 맡겨. '퀴레의 여든 개의 눈동자'를 써줄테니까."
종그날은 ' 너 따위의 일에 이토록 강력한 마법을 써 주니 감지덕지한 줄 알아라' 는 듯한 어조로 말했
고 블라도도 알아들었다. 그러나 블라도는 발끈하기보다는 씨익 웃으며 고개를 까딱해 보였다.
"부턱드리죠."
쉽고 단순한 마법들은 연원도 오랜 까닭에 간단한 기능 위주의 이름들이 붙어 있지만 개량된 강력한
마법들에는 창시자의 이름이 붙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 가운데서도 다그네스 퀴레는 시야를 넓혀 먼
곳, 또는 가려진 곳을 꿰뚫어보는 마법에 일생을 바친 자였다. '야든개의 눈동자'는 그의 마법 가운데 두
번째로 강력한 것이다. 그것을 직경 10킬로미터에 달하는 범위 안에서 짚더미 속에 떨어진 바늘 한 개
조차 찾아낼 수 있는, 실로 두려울 정도의 정확도를 자랑하는 마법이었다.
종그날이 마법을 준비하는 동안 블라도를 비롯한 칸 선제후의 군대는 진네만 가문의 잔병들을 끝장났
다. 죽거나 달아나거나 숨어버려 더 이상 눈에 뜨지 않는 자들을 제하고 한 명도 남지 않을 때까지.
달빛 먹인 석필로 그리는 마력의 원과 룬들이 모두 완성되었다. 그건 범위가 무척 넓었다. 무려 반경 2
미터에 달하는 원이었고 그 안에 수십 개의 겹쳐진 원과 룬, 주문들이 빼곡이 들어차 있었다.
종그날은 원 중심에 그려진 삼각형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천천히 수인을 맺어 나가기 시작했다. 방
해하지 않기 위해 비켜난 병사들이었지만 대마법사가 이 정도로 준비된 마법을 쓰는 것을 보는 건 처음
이지라 호기심 어린 눈동자가 모두 쏠려 있었다.
하나, 허공에 수평으로 원을 그린 손가락이 지면을 찍는다.
둘, 입으로 세 가지의 짧은 단어를 외우며 손바닥을 마주 댄다.
셋, 겹쳐진 손을 천천히 올리며 뗀다.
한 가지 수인이 맺어질 때마다 석필로 그려진 룬이 불꽃을 내기 시작했다. 타닥, 타닥, 힘있는 필체로
그려진 룬이 타오르며 마력의 원안이 온통 불빛으로 밝혀졌다. 종그날의 감겨진 눈꺼풀에 노르스름한
빛이 어렸다. 마지막 수인, 종그날의 감겨진 눈꺼플에 노르스름한 빛이 어렸다. 마지막 수인, 종그날의
두 손이 눈을 가렸다가 앞으로 펼쳐지자 순간적으로 광채의 고리가 형성되며 원형으로 팍 퍼져 나갔다.
그것은 원을 넘고 병사들이 선 곳을 너머 저 보이지 않는 곳까지 단숨에 뻗어나갔고, 사라져 버렸다.
번쩍이는 빛이 한순간 밀려온다고 생각했다. 빨랐다. 모언가 느끼려는 순간 사라져버렸고, 그래서 예프
넨과 보리스로서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가 벌어진 일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눈앞의 허공이 물처럼 흔들리더니 갑자기 사
람의 모습을 토해 놓았다. 마치 거울에서 걸어나오기라도 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두 사람이었다. 예프넨
이 먼저 외쳤다.
"아버지!"
그리고 조금 달라진 어조로 다시 외쳤다.
"어떻게...된 겁니까!"
율켄은 간신히 의식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몸은 이미 만신창이였다. 튤크가 몇 번에 걸쳐 회복 마법을
사용했지만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블라도가 그를 찌른 흑날의 검 하그룬은 상처의 회복에 저지하는
강력한 마법 독을 **고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크게 날카롭지 않은 검인 하그룬을 명검 대열에 끼게
함드는 원인이기도 했다.
튤크는 가문의 마법사이자 평소에는 집사였지만 아들들과 그리 많은 대화를 한 일이 없는 약간 음험한
인물이었다. 그는 오직 주인인 율켄하고만 모든 일을 상의했다. 그는 가문의 장남인 예프넨에게 짧게 목
례로 예를 표한 뒤 낮게 말했다.
"상처를 입으셨습니다."
"회복 마법을 쓰지 않으신 건가요?"
예프넨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튤크는 공격계열 마법을 갖지 못한 만큼 회복 등의
보조계열 마법에는 단연 발군인 인물이었던 것이다. 튤크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소용없습니다."
그때 보리스가 천천히 아버지에게로 다가갔다. 튤크의 어깨에 늘어져 기댄 율켄은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은 채 두 아들의 얼굴을 번갈아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얼굴이 굳어졌다.
튤크가 대신 말했다.
"예프넨 님께서는 어째서 먼저 떠나지 않으셨습니까."
"......"
예프넨은 입술을 깨물 뿐 대답하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설명해 보았자 통할 리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도 잘 아는 탓이었다. 그는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며 보리스를 흘끗 쳐다봤다.
튤크는 율켄의 얼굴을 내려다보더니 그가 하고픈 질문을 대신하듯 다시 말했다.
"이곳에 있는 동안 이상한 일은 없었습니까?"
"이상한 괴물에게 습격 당했어요. 하지만 형이 죽였어요. 저 윈터러로."
대답한 것은 보리스였다. 그는 형이 책망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급히 형이 잘한 일을 말하려 했다.
"형이 아니었으면 저는 살아남지 못했을 거예요."
튤크는 형제의 뒤쪽에 아직도 남아 있는 가죽 주머니 조간 같은 시체와 점액을 쳐다보며 말했다.
"저것입니까?"
튤크는 괴물의 존재를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다시 물었다.
"그것말고 다른 일은 없었습니까? 어떤 마법이라든가."
그때 예프넨이 말했다.
"방금 전에 밝은 빛이 저택 쪽에서 몰려오는 것 같더니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예프넨은 자신이 한 이야기가 어느 정도의 중요성을 가지는지 몰랐다. 그러나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튤크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지는 것을 보고는 당황해서 급히 물었다.
"그게 뭡니까? 뭔가 끔찍한 것인가요?"
무의식중에 예프넨은 보리스의 손을 끌어당겨 잡고 있었다. 튤크는 율켄의 얼굴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아들들이 아닌 아버지에게 말했다.
" 짐작컨대 '퀴레의 눈동자'가운데 어떤 것이 발동된 것 같습니다. 종그날이라면 충분히 '여든 개의 눈
동자' 까지는 쓸 수 있을 것입니다. 도련님들이 번쩍이는 빛을 보셨다고 했으니 도련님들의 위치는 이미
발각 당했습니다. 다만 주인님과 저는 이동 중이었으므로 어떤 위치가 스캔되었는지는 불확실합니다."
이번에는 보리스조차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예프넨이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때 튤크는 율켄의 몸을 바닥에 내려놓더니 다시 한 차례의 회복 마법을 썼다. 그는 단시 두 개의 룬
을 입 속에 외웠을 뿐이며 그 외에 어떤 복잡한 과정도 필요로 하지 않았다.
튤크의 대답이 들려왔을 때 보리스는 차가워진 대기 속에 있는 옅은 물방울들을 보기라도 하려는 것처
럼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행운을 기도해야겠지요."
예프넨은 그 말의 의미를 알았다. 즉, 희망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
4. 다시 한 번 잃어버린
역시 형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일그러뜨린 입가는 어느새 미소로 변했다. 블라도는 자신이 형을 잘 안다고 생각했지
만 동시에 예상할 수 없었던 점도 많았다는 것을 인정했다.
뜻밖이랄지, 형은 오랫동안 기울어 가는 진네만 집안을 굳건히 지킬 정도로 강했다. 집안이 기우는 것
은 처음 뜻을 주었던 상위 가문, 즉 카츠야 선제후가 몰락해 감으로써 저절로 초래된 것일 뿐 형 율켄
의 잘못은 아니었다. 한 번 기울기 시작한 집안은 섬기던 상위 가문이 다시 부흥하지 않는 한 결코 돌
이킬 수 없는 길을 가는 것이다.
강하다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망해 가는 사위 가문을 바꾸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섬기던 자
를 배신하고 다른 가문에 가 붙는 것이 어느 정도로 천한 일인가 하는 것은 현재 자신의 처지만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한때 섬기던 다른 선제후를 배신하고 들어온 탓에 지금처럼 칸 선제후의 심임을
얻기까지 얼마나 많은 모욕을 견디고 지저분한 거래를 트지 않으면 안되었나. 그건 실로 돌이켜 생각해
볼 때 차라리 섬기던 가문과 함께 조용히 몰락해 가는 것이 낫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세월
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진네만 가문처럼... 머리와 함께 서서히 기울어 가는 집안을 바라보는 동안 '한 번 뜻을
준 상대'를 바꾸어 되살아나고 싶은 충동은 그 얼마나 강한 것인가. 영혼을 팔아서라도. 그 길을 되짚어
돌릴 수만 있다면.
그러나 형은 견디었다. 변치 않고. 그러니 형을 얕보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에메라 호수변이라......"
수백의 병사와 함께 말을 달리던 블라도의 입안에서 나지막이 맴돌다가 떨어진 단어는 오래 잊고 있었
던 섬뜩한 어감을 다시금 상기시켰다. 오싹한 오한이 잠시 입술을 질리게 했다가 이윽고 사그라졌다.
이제 가고 있는 그곳에 진네만 가문이 살아온 롱고르드 지방 안에서 오랫동안 공포의 대상이 되어 온
장소였다. 그리고 형제에게는 또한 금기의 장소였다. 그 예프고 상냥하던 예니치카가 눈이 불게 변해서
짐승처럼 옷을 찢어**며 미쳐 날뛰던 모습이 새삼스레 눈앞에 선해진다.
부르르......
블라도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누이는 젊은 모습으로 죽어 이제 더 자라지 않는데...나이 들어 늙
어 가는 자신은 이제 살금살금 다가가 누이의 눈을 가리던, 저 못생기고 약해 빠진데다 치기만 가득하
던 작은 오빠가 아닌데.
어려서부터 작은 일로도 자주 반목하던 형제가 유일하게 함께 아꼈던 어린 예니치카였다. 갈대꽃과 새
의 깃털을 사랑하던 금빛 눈동자의 어린아이, 찾아 헤매는 두 오빠를 피해 장롱 속에 숨었다가 잠들어
버렸던 개구쟁이 누이동생... 그리고 초록빛 사과처럼 풋풋하게 자랐던 처녀.
그리고 바로 그 점에서 형제는 서로 용서할 수가 없었다. 작은 오빠의 꾐에 빠져 에메라 호수에서 약
혼자를 찾아 헤맸고. 큰오빠의 손에 결국 죽었다. 피어 **도 못한 꽃이, 그렇게 좋아하던 아기도 낳아
** 못하고서.
'그건 당신 탓이다.'
누이동생이 돌아온다면 과연 누구를 더 탓할 것인가.
"거의 다 왔습니다1"
블라도는 손을 들어 병사들을 멈추게 했다. 그리고 달려온 방향을 등진 채 반원형으로 진을 쳤다. 검과
창을 든 병사들이 수풀 속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활을 든 병사들은 화살을 팽팽하게 메긴 채 눈을 빛내
며 대기한다......
형을 죽일 테다. 누구를 위해서였든. 어느새 그가 지금껏 수모를 견디며 살아온 그가 되어버린. 그 형
을, 죽일 것이다.
"이쪽입니다! 발자국이 있습니다!"
에메라 호수는 오래 전부터 늪이 되어버린 까닭에 주위는 온통 진창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발자국이
남지 않을 리 없지만 형이 이곳에 있다면 튤크도 있을 테고, 그가 설마 발자국이 남게 내버려 두었을리
없다고 생각했다. 블라도는 마음속으로 이곳에는 두 조카밖에 없는 것 같다고 단정했다.
"원을 좁혀서 수색해라!"
예프넨과 보리스는 아내도 자식도 없는 블라도의 단 둘뿐인 조카들이었다. 블라도는 만일 둘 중에 하
나라도 계집애였다면, 그리고 조금이라도 예니치카를 닮았더라면...혹시 마음이 흔들렸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조카들은 예니를 닮지 않았다. 두 소년에게는 예니가 가졌던 금빛이라고는 없었다. 머
리털도. 눈동자도.
그 애들에게는 아무런 애정도 동정심도 없다... 블라도의 누런 눈동자를 둘러싼 잘다진 주름들이 감정
의 동요를 드러내듯 꿈틀거렸다. 그 애들이 질러대는 비명에 귀를 막고 달아나도록 해주지... 그 애들을
죽여서 형이 내 앞에 뛰쳐나오도록 하고 말 테다!
호수 남쪽은 기 진창이 이어져 있어 가까이 다가가기 힘든 까닭에 병사들은 동, 북. 서로만 포위를 좁
혀 들어갔다.
이윽고 에메라 호수가 가까이 보이기 시작했다. 죽은 나무들이 검게, 또는 희게 얽혀 이미 사라진 생명
을 가장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많은 것들이 죽어가고 죽어갈 호수에는 유백색의 동물성 기름이 떠서
번들거리고......
그것은 기억 속의 호수였다. 이제 다가갈 곳을 정확히 보기 위해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이곳을 완벽
히 봐 두기 위해서 블라도는 마법사에게 빛을 요구했다.
파앗!
대낮 같은 광채같은 광채가 호수가 뱉어낸 불덩이처럼 솟았다. 사방 20미터 안팎으로 풀숲을 나는 날
벌레들조차 볼 수 있을 정도였다. 블라도 뿐 아니라 수백 개의 달하는 눈동자가 거기에서 움직이는 무
엇인가를 찾아내려고 달려들었다.
"가장 먼저 찾아내어 외치는 자에게 1천 엘소의 상금을 내리겠다!"
외침이 들려오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만 그것은 블라도가 기대한 것과는 약간 다른 소
리였다. 그리고 한 명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곡 다시 한번의 비명들이 허공을 찢고 갈랐다.
"자, 지금입니다. 기십시오."
튤크의 목소리가 떨리지도 격앙되지도 않았다. 늦었으니 이제 그만 침대로 들어가 자라고 하는 것처럼
건조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을 뿐이었다.
예프넨은 턱을 약간 떨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끝끝내 그에게 익숙해질 수는 없었다. 이제는 더 노력해
볼 시간도 없으리라. 바로 다음 순간, 그들에게 절대절명의 의미라 할 만한 빛이 주위를 휘황하게 비췄
다.
"행운을."
"난 가지 않아요."
그제야 튤크의 무표정한 얼굴에 약간의 변화가 일었다. 그는 반박하지도 않고 고개를 가로 저었다.
"가십시오. 아버님의 뜻을 아신다면."
"아버지에게 아버지의 뜻이 있다면 내게는 내 뜻이 있습니다. 내게는 한낱 무구 따위보다 아버지의 존
재가 더욱 소중하다는 거죠."
율켄의 고개가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시선은 이미 아들을 향해 있었다. 그들은 서로를 쏘
아보았다.
"......"
말하지 않는 아버지를 향해 예프넨은 말했다.
"뭐라 하신다 해도 제 뜻은 변치 않습니다."
튤크는 여전히 주인의 눈빛만으로도 하고 싶은 말을 알아챘다.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희망 없는 것에 '뜻'을 거지 마십시오."
"아버지는 희망 없는 곳에 뜻을 거지 않으셨던가요? 바로 카츠야 선제후 말입니다."
예프넨은 마치 튤크가 통역하는 사람에 불과한 양 아버지를 똑바로 보며 말을 이었다.
"진네만 가문은 희망 없다고 해서 한번 결정한 '뜻'을 꺾는 자식을 낳는 곳이 아니잖습니까. 훌륭한 무
구란. 최악의 순간에 함께 하기 위해 그토록 귀하게 지켜지는 것 아니던가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보리스는 아버지의 불길 같은 눈을, 그리고 형의 단호한 눈동자를 보았다. 자신은
거기에 끼여들 수 없는 어린아이였다. 그러나 어렴풋하게 둘의 대립을 이해했다.
예프넨은 아버지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다시 입을 열어 보리스를 불렀다.
"보리스,"
보리스는 한 걸음 다가갔다. 형의 손이 다가와 손목을 쥐었다.
"너도...알 수 있겠지?"
"난......"
보리스는 자신의 뜻을 듣지 않는 진네만 가문의 자식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리고 형이 아버지를 생
각하는 만큼이나 자신 역시 형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형과 아버지가 없는 세
상에서 혼자 살아남을 생각 따위는 없다는 것, 역시도.
그러나 한 마디도 말이 되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무거운 분위기에 짓눌린 듯 입술을 굳게 닫혀
있었다.
"우린 적어도 함께 죽는 것을 선택할 수 있어. 그것을 명예로 생각하자. 보리스."
보리스는 그 말이 형이 평소 해오던 말과 다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과 같은 상황이 아니라
면 결코 이런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아는 예프넨은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죽자고 말하는 사
람이 아니었다. 지금 그는 동생을 살릴 방법을 도저히 찾아내지 못한 것이다.
예프넨은 더 말하지 못한 채 잠시 동생을 내려다 봤다. 그리고 안심시키려는 것처럼 억지로 미소를 지
어 보였다.
보리스는 문득 형의 눈동자가 푸르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참으로 익숙한 빛깔이었다. 항상 보아 와
사?
아니야... 그제야 형과 들판에서 구르며 웃을 때부터 내내 느꼈던 그 이상한 직감의 정체를 알 수 있었
다. 형의 미소 때문이었다. 어쩐지 평소와는 다르게 느껴졌던 그 미소. 그것은......
초상화 속의 어머니를 닮아 있었다.
"이제...갑시다."
예프넨은 피가 끓는 기분으로 중얼거리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튤크는 대답 없이 아버지가 일어나는
것을 도왔다. 끝까지 말이 없을 줄 알았는데 뜻밖으로 목소리가 들렸다.
"두 분은 맨 뒤로 오십시오. 제가 죽는 것을 볼 때까지 앞으로 나서 마십시오."
예프넨은 문득 말문이 막혔다.
"......"
7sis이던가...처음 진네만 자문의 집사가 되었을 때부터 튤크는 마지 그림자 같은 존재였다. 실체가 지
나간 자리에 대산 남아 있는 그림자. 정확히는 아버지의 그림자 이상의 그 무엇도 아니었다. 아버지의
뜻이 이행되도록 돕거나, 대신 이행하는 사람.
그림자에게 어떤 감정을 느낄 수 있을 리 없다. 그도 그랬다. 그가 아버지를 위해서. 그리고 자신과 동
생을 위해서 죽겠다고 하는 시점에서조차 어떤 친근감도 느낄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심정.
"저기다!"
그런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잠시 후 그것을 수십 명이 한꺼번에 내지르는 lq명에 무뎌 버
렸다. 상황을 알아볼 겨를도 없이 그들은 늪을 향해 다가갔다.
슈슈슈...콰쾅!
번쩍거리는 불빛과 더불어 천지를 뒤흔드는 폭발음이 계속되었다. 예프넨은 문득 이상한 것을 느꼈다.
저렇게 강력하고 공격적인 마법은 이미 다쳐서 기력이 없는 아버지를 비롯한 네 사람을 상대로 쓸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도 삼촌도 이미 이곳에서 맞닥뜨릴 다른 상대에 대한 준비하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제 곧 보게 될 테지.
눈이 벌겋게 된 블라도는 병사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섰다. 아니, 실은 헤칠 필요도 없었다. 병사들은
이미 명령 따위는 귀에 들리지도 않는 듯 정신 없이 우왕좌왕하며 달아나려 애쓰고 있었다.
바로 눈앞에 늪을 두고도 블라도가 침착할 수 있는 이유는 한 가지였다. 그는 무엇이 나타날지 알고
있는 것이다.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놈의 얼굴을 똑바로 볼 마음은 있었다.
천사 같은 예니를 앗아간, 저 망령의 붉은 눈을.
늪가에 도착한 튤크는 팔에 안긴 율켄의 얼굴을 내려다 보았다. 그리고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준
비되었느냐고 묻는 것처럼.
율켄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상처가 깊어 입을 열기도 힘들었지만 어떤 말을 하고자했다면 억지로
목살 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말없이 튤크의 부축을 받아 몸을 일으키고, 검을 잡았다.
"그래...드디어......"
에메라 호수는 거대한 지옥처럼 영원히 가라앉는 무엇이었다. 눅눅하게 젓은 관목의 울타리, 서서히 썩
어 가는 나무들로 가려졌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는 속내로 그는 한 발짝씩 다가갔다. 삶의 종말이 내는
고약한 악취가 물씬했다. 시체들, 썩은 시체들의 늪.
처음에는 작은 목소리였다. 그는 이름을 불렀다.
"예니......"
시체가 썩으면 어디에 버리나. 그 발톱은 인간의 정신과 육체를 동시에 할퀴어 간다. 한 번 낙인이 찍
히면 그걸로 끝인 것이다. 망령에 사로잡힌 혼, 다시는 위로 받지 못할 곳으로......
예니의 시체를 일부러 늪까지 가져와 버릴 때, 그 자리에는 율켄도 블라도도 와 ** 않았었다.
동시에 맞은편에서 더 낮지만 분명한 목소리가 외쳤다.
"예니!"
형제는 사실 서로를 직접 상대하고 싶지 않은 것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와서 용서받으려 하기엔
누이의 선한 혼도 악령으로 변할 정도로 썩었을 거다. 누이는 용서하지 않아. 결코, 결코, 이제 해묵은
빚은 형제끼리 청산할 때지!
율켄은 몸 안에서 서서히 솟아오르는 정체 모를 기운에 의지하여 감을 움켜쥐고 늪을 둘러싼 검은 숲
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러는 동안에도 병사들의 비명은 그치지 않고 있었다. 단 한 번 들려온 블라도의
목소리는 다시 없었다.
"으, 으, 으아아아악!"
"살려 줘...제발......!"
오랜만에 본 에메라 호수, 아니 늪은 바닥으로부터 서서히 맥질해 올라오는 더러운 동물성 쓰레기들로
인해 반쯤 메워지다시피 한 상태였다. 그 정체는 바로 오랫동안 죽어간 시체들이었다. 그것은 누군가는
알고 누군가는 영원히 모르는 롱고르드 지방의 비밀이었다. 호수는 다시 한 번 싸늘한 살갗을 퇴비가
될 때까지 썩히는 임무를 맡는다. 그 세월이 한 해, 열 해, 스므해가 지나면서......
이 호수가 한때 녹옥빛 맑은 물 때문에 '에메랄드'라고 불렸다는 사실을 그 누가 믿을 것인가.
"호수를 썩게 한 건 억울하게 죽은 자들의 원한이지."
그리고 드디어 형제는 서로를 방어할 수 있는 위치에서 마주보았다. 그건 두 번째 들려 온 블라도의
목소리였다.
"자, 저 시체들 속에 예니의 금발도 있는가 한 번 찾아볼까?"
튜르는 보호구의 마법을 시전하여 주인의 몸을 보호했다. 반투명한 막에 둘러싸인 형과, 그가 입은 깊
은 상처를 본 블라도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자, 협력해서 먼저 저 억울한 시체들부터 없애버릴까?"
블라도의 뒤에는 종그날이 있었다. 그는 양손에 불꽃을 불러드려 다가드는 시체와 늪의 괴물들을 지져
버리고 있었다. 보리스를 처음 공격한 놈과 같은 종류의 그 괴물들은 불꽃이 닿을 때마다 퍽, 퍽. 소리
를 내며 더러운 액체를 내뿜었다.
"아니면, 저 붉은 눈의 악마가 나타날 때까지 묵은 원한의 깊이라도 재어 볼 건가?"
블라도는 흑날의 하그룬을 반 바퀴 돌리더니 금방이라도 찔러 넣을 듯 자세를 보였다. 여유 만만한 태
도였다.
이제 병사들은 거의 다 달아나고 없었다. 늪에서 상체만 내민 시체들이 흔적뿐인 눈으로 형제를 지켜
보았다. 율켄의 검이 약간 떨리다가 고요해졌다.
예프넨은 늪을 가득 메운 녹색 진흙과 썩은 시체더미를 보며 발열에 가까운 오한을 느꼈다. 그의 존재
쯤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혼비백산하여 달아나고 있는 병사들도 보았는가. 늪을 사이에 둔 채 아버지를
노려보고 있는 삼촌이 검을 뽑아든 것도 알았다.
긴장감은 터질 듯했다 아직 나타나지 않은 한 가지 때문에. 그래, 언제지, 놈이 나타나는 것은? 시체를
먹고 강해지는 붉은 눈의 악령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언제지?
형과 등을 대고 선 보리스는 자신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단 한 가지 할 수 있
는 것이 있다면 형의 등뒤에서 서 있다가 첫 번째 들어오는 공격을 형 대신 맞는 정도일 것이다. 그는
진심으로 그 임무에 정신을 집중했다. 그도 아버지도 마찬가지로 이 집안에서 마지막으로 살아남아야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흘끗 돌아본 형은 윈터러의 손잡이를 손목에 부르르 떨릴 정도로 꽉 쥐고 있었다. 그리고 예프넨이 아
직 깨닫지 못한 사이, 보리스는 예프넨의 몸을 감싼 스노우가드의 은백광이 서서히 밝아지는 것을 느꼈
다. 뭔가 다가온 건가?
바람이 시잇거리며 울었다. 마치 거대한 뱀이 수풀에 배를 깔로 지나는 듯한 소리였다. 동생의 목소리
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형, 스노우가드가......"
이제 스노우가드의 공채는 시야를 일부 가릴 정도로 광기 어린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예프넨의 검이
하얗게 번쩍였다.
예프넨은 보다 구체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였다. 갑옷이 죽은 냄새를 맡은 거다. 다가오는 자를 스노우가
드가 먼저 느끼고 있는 거다.
그그그그그그그......
들린다. 아니, 아니...그래, 들린다. 그렇게 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어둠 너머에서, 무언가가 다가온다.
그것은 붉은 눈을 가졌고, 검은 불꽃으로 감싸진 채......
보리스는 귀가 아닌 자신의 정신 속으로 파고드는 섬뜩한 목소리를 똑똑히 들으며 그 자리에 목 박혀
있었다.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목소리와 함께 다른 것 역시 다가오고 있는데도.
예쁜 아이구나. 흐, 흐, 흐.
2장. parting
1. 첫 저녁 식사
보리스는 풀밭에서 눈을 떴다.
밝은 햇빛이 얼굴에 따뜻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그는 검 하나를 지녔을 뿐 빈 몸이었다. 주위에는 아무
도 없었다.
그는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고 이곳이 전혀 익숙하지 않은 곳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여긴 어딜까? 그는
곧 전날 밤의 일을 기억해 냈다.
형과 등을 대고 서 있었던 것까지는 기억났다. 가쁜 숨소리도 턱까지 뜨겁던 것도 생각해 낼 수 있었
다. 그러나 그 다음은?
큰 충격이 머릿속을 휘저어 버린 것처럼 이후는 혼돈 뿐이었다. 보리스가 기억의 부재가 혼란스러운
나머지 그때 자신이 기절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뭔가... 보았던 것도 같은데......
"보리스! 깨어났구나?"
그는 뒤통수를 한 대 얻어 맞은 듯한 기분이 되어 몸을 홱 돌렸다. 그리고 물 담긴 나무 바가지를 든
채 걸어오고 있는 예프넨을 보았다. 그의 입술에서 믿을 수 없다는 듯 말이 떨어졌다.
"......형?"
예프넨은 얼떨떨해하고 있는 동생에게 바가지를 건네주며 빙긋 웃었다.
"그래,임 마 너한테 나 말고 형이 따로 또 있기라도 했냐?"
보리스는 물을 마실 생각도 하지 않고 멍하니 예프넨의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 왜인지 몰랐다. 갑자기
그의 눈에서 눈물이 두 줄기 주룩 흘러내렸다. 예프넨은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왜 그래? 어디 아파?"
예프넨이 다가와 이마를 짚는 순간 보리스가 바가지를 떨어뜨리고 형을 와락 껴안았다. 쏟아진 물이
둘의 바짓가랑이를 적셨다.
예프넨이 뭔가 묻기도 전에 보리스가 먼저 말했다.
"아냐, 형... 나,난. 그냥, 그냥 반가워서 그래......"
실은 보리스도 그 이유를 몰랐다. 어젯밤의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장면들만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이상한 일이었다. 다른 기억은 멀쩡한데 그 부분만이 생각나지 않다니.
예프넨은 별 말 없이 보리스의 어깨를 다독거려 주고는 몸을 땠다. 그리고 무릎을 꿇어 동생과 눈높이
를 맞추더니 뺨을 쓰다듬었다.
"자식, 너 뭔가에 많이 놀랐구나."
마음이 진정되고 나자 둘은 쏘다진 물 대신 바가지를 집어들고 직접 샘으로 향했다. 그리 먼 곳은 아
니었다. 주위는 마치 고향 롱고르드의 그곳이 그랬듯 사방이 들판이었다.
샘은 작았다. 동근 돌로 빙 둘러져 있고 아마 예프넨이 끊어낸 듯한 바가지의 끈이 한쪽 말뚝에 남아
있었다. 두 형제는 물을 실컷 마신 후 바가지를 다시 처음처럼 매어 두었다.
"형, 그런데 여기가 어디지?"
"귀렘 가문 영지의 일부인 하타 고원이야, 롱고르드는 여기서 남쪽이지. 너도 이곳의 이름을 들어**
않았니?"
예프넨은 뭐가 잘못이라도 저지른 사람처럼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보리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
다.
"어떻게 하룻밤도안 그렇게 멀리 올 수 있는 거지?"
예프넨이 팔을 저어 샘 뒤쪽을 가르켰다. 거기에는 낯선 말 한 마리가 매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밤새 저 말을 타고 왔다고 생각하자 다시 한 번 머릿속이 혼란해졌다. 흔들리는 말 위에서 계속 깨어
나지도 않아고 기절해 있었다는 건가?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정신을 잃을 수가 있는거지?
그 다음으로 물어야 할 질문은 당연한 것이었다. 보리스가 형의 태독 너무도 밝고, 또 주위가 평화로운
것에 이끌려 나쁜 대답이 나올 것은 기대도 하지 않은 채 물었다.
"아버지는 어디 계셔?"
"아......"
예프넨은 입을 벌렸지만 그리 빨리 밥하지는 못했다. 보리스가 무슨 일이 있나 싶어 눈이 동그래지자
예프넨은 급히 말을 이었다.
"아. 그러니까..여가가 아닌 다른 데로 가셨어. 튤크 집사하고... 그런데 어딘지 정확히 모르겠어. 워낙
엉망진창이어서 흩어져...달렸거든."
"그럼 어떻게 아버질 찾아?"
예프넨은 빠른 목소리로 대꾸했다.
"튤크 집사가 우리한테 마법으로 연락을 줄 거야."
보리스가 그렇구나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그럼 그 동안은 우리끼리 있어야 되겠네? 그럼 우린 집으로 돌아가도 되는 거야? 저어, 그럼 블라도
삼촌은?:
"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조금 무리지만....."
예프넨이 말을 흐리자 보리스도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삼촌의 무서움은 보리스가 다섯 갈이
었을 때 이미 충분히 경험한 바 있었다. 그때 삼촌은 혼자 아버지를 찾아와서 마당에서 놀고 있던 보리
스를 붙잡아 옆구리에 낀 채 우물에 빠뜨리려는 시늉을 하며 싱글싱글 웃었다.
아버지가 어떻게 삼촌을 쫓아낼 수 있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처음ㅇ네 삼촌이 장난으로 겁을
주는 줄 알고 까륵거리며 웃었었다. 그러나 점점 시커먼 우울이 무섭게 느껴질 즈음이 된 후에도 삼촌
은 그 '장난'을 멈추지 않았고 아버지가 그 앞에서 삼촌과 뭔가 어려운 대화를 하셨던 것은 기억하고 있
었다.
"우리 고모할머님한테 갈까?"
예프넨이 불쑥 제안하자 보리스는 의아해서 눈을 깜빡였다. 고모할머니라면 한 사람 뿐인데 보리스는
아직까지 만나는 일이 한번도 없었다. 아버지의 고모지만 아주 멀고 낯선 존재였다. 아마도 아버지와는
속한 정파가 다르다고 들었다. 서시조차도 오가지 않는 사이인데 형은 고모할머니를 잘 아는 걸까?
"쟈닌느...고모할머니?"
"그럼. 3월의원파의 스무렌 의원이 시장으로 있는 엘머 시에 계실거야. 좀 걸리긴 하겠지만 늦어도 한
달 안에 갈 수 있어."
"그렇지만 고모할머니께서 우릴 환영해 주실까?"
예프넨은 고개를 움직여 머리카락이 양쪽 어깨에 번갈아 닿도록 하더니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실 그건 확신할 수 없는 무제야. 하지만 아버지께서...우릴 찾으시기 전에 딱히 갈 곳도 없거든. 고모
할머니가 속한 3월의원파는 아버지와 완전히 대립하고 있는 곳은 아니라서...아, 전혀 대안이 없는 것도
아니긴 하지."
"뭔데?"
예프넨 형은 세상에서 가장 곤란한 이야기를 하려는 사람처럼 어깨를 늘어뜨리더니 대답했다.
"카츠야 선제후."
"아아."
보리스도 말이 없었다. 어려서 잘 모르긴 했지만 아버지가 섬기고 있는 아주 높은 분이라는 것만을 알
고 있었다. 예프넨은 아버지를 따라 아주 높은 분이라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 예프넨은 아버지를 따라
몇 번 간 일이 있으니 알고 있지만 보리스로서는 본 일도 없는 데다 무척 어렵게까지 느껴지는 대상인
것이 확실했다. 게다가 뭔가 좋지 않은 일이 많다고 들었으니 이런 입장인 형제가 가 봤자 그다지 좋은
대접을 기대하긴 어려울 성 싶었다.
"형... 우리 그냥 아무 데도 가지 않으면 안돼?"
예프넨은 동생이 이렇게 말할 줄은 몰랐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는 약간 더듬거리다가 말했다.
"왜?. 그들이 환영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래?"
"그것도 그렇지만...낯선 사람들한테 받아들여 달라고 애걸하는 것보다 그냥 우리끼리 평민들처럼 잠시
살 수도 있잖아. 그리고, 그리고 아버지가 곹 연락해 오실 거 아냐? 그러니까 잠깐일 뿐일 테고, 또......"
예프넨은 우울한 것도 같고 답답한 것도 같은 표정으로 동생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답을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싶은 듯한 얼굴이었다.
"보리스. 그런 생활은...너나 나는 저택에서 죽 하인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살아왔기 때문에 평민들처럼
사는 것은 많이 힘들 거야. 난 가진 돈이 그리 만지 않아. 넌 아직 어려서 잘 모를 거야. 돈이 없는 평
민들의 생활은 무척 고달프거든. 일단 삼촌이 이겨서 저택을 차지한 이상 얼마간은 다른 이로 바빠서
우릴 쫓아오지는 못하겠지만 우리가 윈터바텀 킷을 갖고 있는 이상 그리 오래 내버려두지는 않겠지. 그
말고 다른 위험도 얼마든지 있어."
보리스는 형의 말을 듣고 있었지만 여전히 그 상황을 심각하게 느끼지 못했다. 그에게는 든든한 형이
있었다. 뭐가 겁날 게 있단 말인가. 더구나 곧 아버지가 그들을 찾을 텐데.
"난 괜찮아. 잠깐 뿐인데 그거도 목 견딘다면 아버지가 진네만 이름을 가질 자격도 없다고 꾸짖으실 거
야."
그렇게 말하며 보리스가 해맑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는 형을 안심시키고 싶었다. 걱정거리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예프넨은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어차피 어디로 가든 마찬가지일 지도 모르지. 우선 가장 가까운 마을부터 찾아보는 것이 좋겠다. 그런
다음에 어느 쪽으로 갈지 천천히 생각해 보자."
마을을 찾아냈을 때는 이미 저녁 무렵이었다.
오는 동안 두 형제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전 재산을 점검했다. 당연히 예프넨이 지니고 있는 두 가지
무구, 위너바텀 킷은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오직 지켜야 하는 것들이니까. 그 다음으로 예프넨은
허리에서 자궂 주머니를 끌러 집에서 탈출하기 전에 준비해 둔 금화들을 보여 주었다. 아노마라드에서
T는 큼직한 1백 엘소 금화가 열 개 가량, 그 절반 가치를 지니는 1백 고블룬 금화가 30개쯤 되었다. 그
정도면 넉넉히 써도 한달 이상 살아가는 데 큰 지장은 없을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돈이 될 많나 물건들이 있었다. 남자들이다 보니 그다지 값나가는 장신구는 가진 것이 없
었다. 예프넨은 사파이어가 아로새겨진 손바닥만한 덮게 거울을 가지고 있었는데 어머니의 유품이었다.
보리스는 아무 것도 없었다. 주머니에서 나온 거라고는 저녁을 못 먹어서 대신 넣어 둔 말라비틀어진
빵이 고작이었다. 그거라도 형제는 유쾌하게 나눠 씹으며 마을을 도착했다.
그들은 자리를 잘 몰라서 마을의 이름이 뭔지는 몰랐다. 사실 별로 중요하게 생각되지도 않았다. 보리
스가 뭔가 새로운 모험이라도 시작하려는 것처럼 약간 들떠 있기까지 했다.
마을은 작지 않았다. 그들은 들판을 가로질러 왔지만 입구에는 멀리서부터 이어져 온 듯한 길이 뚫려
있었다. 그들은 경비병에게 신분이나 가문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껏 번화한 거리라고는 롱고르드 지방에서 장이 서는 카즈난 시에 나갔을 때 본 것이 전부였다. 그
곳보다 결코 못하지 않은 북적거림이 곳곳에 가득했다. 사람 사는 곳이었다.
보리스가 촌뜨기처럼 두리번거리지 않으려 애썼지만 실상은 계속해서 그런 실수를 저지르고 있었다.
"저. 이 근처에 여관이 어디 있습니까?"
행상 아주머니에게 물어서 찾아간 여관은 다락이 높게 솟은 2층 건물이었다. 여러 마리의 말이나 마차
를 타고 온 여행객들이 입구를 메우고 있어서 그들을 피해 들어가는 것부터 애를 먹었다. 말 한 마리를
함께 탄 그들은 그야말로 단출한 손님이었다.
"어서 오십쇼!"
커다란 목소리 때문에 보리스는 깜짝 놀랐지만 그건 그들에게 지른 소리가 아니라 뒤따라 들어오고 있
던 네댓 명의 모험가들을 환영하는 목소리였다. 요란한 발소리와 함께 곧장 형제를 앞질러 카운터로 다
가간 그들은 저들끼리 쉴새 없이 뭔가 지껄이며 방 두 개를 주문했다.
"형, 방은 하루 빌리는 데 비싼거야?:
우스운 일이었지만 그건 예프넨도 몰랐다. 여행을 한 일은 있었지만 들었던 여관은 항상 이보다 훨씬
좋은 곳들이었고. 시중드는 하인들과 함께였으므로 한 번도 직접 카운터에서 계산한 일이 없었던 것이
다. 진네만 가문은 전통적으로 무인의 가문인 까닭에 돈을 직접 만지는 것을 약간 천시해었다.
"방을...하나 주십시오."
커운터의 여급은 방 가격을 말하지도 않고 벽에 죽 붙은 고리에서 열쇠를 하나 떼어 내놓았다. 예프넨
은 금화밖에 없었기 때문에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정말로 돈이 오가는 일에 대해서는 서툴렀다.
여금이 묘한 눈길로 예프넨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예프넨은 그것이 왜 빨리 돈을 주지 않느
냐는 뜻이라고 판단했다.
"얼마죠?"
여급은 입술 끝을 실룩이며 애매한 미소를 보이더니 '10엘소' 라고 말했다. 예프넨은 50엘소의 가치를
가지는 고블룬 금화를 한 개 내었다.
"어머, 젊은 분이 큰돈을 가지고 다니시네요."
여급이 거슬러 준 은화들을 집어 주머니에 넣고 돌아서려니 여급이 피식피식 웃으며 뒤통수에 대고 말
을 걸었다.
"** 식사는 안하나요? 내일 아침은?"
다시 은화 몇 개를 꺼내 주고 계산을 했다. 또 돌아서려는데 여급이 이제는 완연히 비웃는 듯한 어조
로 다시 한 번 말했다.
"메뉴 정도는 고르지 그래요?"
집에서 준비해 주는 음식만 먹었던 그들이었다. 이런 곳에서 뭘 주문해야 하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예
프넨은 얼굴을 붉히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대꾸했다.
"그냥 적당한 것으로 주면 좋겠소.
"아아. 난 귀한 집 아드님들이라 아무 음식이나 입에 못 댈 줄 알았죠."
카운터 주위를 오가던 급사들마저 킬킬거리가 시작했다. 사실 별로 우스운 상황은 아니였다. 그들은 일
부러 노골적으로 비웃기 위해 웃는 것 같았다.
예프넨은 약간 화가 났지만 꾹 참고 테이블로 걸어가 앉았다. 보리스는 형의 얼굴을 쳐다보고 상황을
깨달았지만 일단은 잠자코 있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음식은 금방 나왔다. 그러나 곧 더 심각한 상황이 벌어졌다.
" 이 정도 음식쯤이야 충분히 드시겠지. 안 그래요?"
음식을 가져온 예프넨과 비슷한 또래의 급사는 비아냥대는 듯한 말투로 지껄이더니 두 형제의 앞에 널
찍한 그릇 두 개를 내려놨다. 보리스는 그릇 안을 살펴보았다.
처음에는 죽이나 수프처럼 보였다. 그러나 곧 그 안에서 뭔가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 보리스는 기겁하
여 의자를 뒤로 물렸다. 드르륵, 소리가 나는 순간 등뒤에서 몇 명이 거침없이 웃어젖히는 소리가 들렸
다.
예프넨은 가만히 그릇 속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열 마리, 스무 마리... ** 손가락 한 마디 만한 허연
벌레들이 묽은 죽과 뒤엉켜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뱃속의 것을 다 토해 내고 싶을 정도로 역겨운 광
경이었다.
"어이, 숟가락 들라고! 여기 여관 특실을 내줬는데 식용이 좀 없다해도 맛은 봐야지?"
"별로 배고프지 않은 모양이군? 그렇지만 요즘 같이 어려운 시절에 음식을 남기면 쓰나."
"어린 도련님은 요리를 먹을 줄 모르는 모양인데 이 몸이 한 숟갈 떠 먹여 줄까나?"
보리스가 고개를 들어보니 여관 곳곳에 서서 잡담이나 주고 받던 잡패들이 한꺼번에 지껄이기 시작하
는 것이 보였다. 그는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이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렇게 괴롭히는 건가? 묵은
원한이라도 있단 말인가? 그들 중에 안면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은데......
예프넨이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는 윈터러에 손을 대지 않았다. 그리고 푸른 눈을 들어 비웃는 자들을 쏘아보았다. 예프넨의 눈길을
받은 자들 가운데 몇은 그의 눈빛에 깃들인 분노에 약간 흠칫하긴 했지만 대다수는 대수롭지 않은 듯한
표정이었다.
마침내 예프넨이 입을 열어 말했다.
"누군가, 이 음식을 먹는 법을 좀 가르쳐 주지 않겠소?"
얼른 대답이 나오지 않자 그는 이어 말했다.
"직접 한 입 먹는 것으로 말이오."
약간 잠잠해진 가운데 한 명이 킬킬러리며 말했다.
"남은 음식을 얻어먹을 정도로 배고프지 않은데 어쩌지?"
그 순간 그자는 자신이 무엇을 보았는지 눈을 의심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근 예프넨의 손에 붙잡혀
테이블 앞으로 끌려와 있었고. 곧장 턱이 테이블에 처박아졌다.
"큭...뭐야!"
예프넨은 여전히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을 이 식탁의 손님으로 초청하고자 합니다. 사양치 말고 드시지요."
"으으......"
예프넨은 그 자의 목 뒤를 바짝 눌러 턱을 테이블에 떼지 못하게 한 채 숟가락을 잡았다. 둘러섰던 사
람들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예프넨은 숟가락을 벌레가 들끓는 그릇 속에 푹 집어넣었다.
"아으...안돼......"
그 자는 호리호리한 몸매의 아름다운 얼굴을 한 이 청년의 손아귀에서 이처럼 강한 힘이 나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한 손으로 목을 눌렀을 뿐인데 도저히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예프넨은 드디
어 한 숟가락을 그릇에서 떠서 그의 입가로 가져갔다. 숟가락 속에는 벌레가 세 마리나 들어있었다.
"요, 용서해 줘! 내가 잘못했어! 잘못했다니까!"
비굴하게 외치는 그 자의 입술 근처까지 숟가락이 들이대어졌다. 땀을 질질 흘리며 입술을 악물었지만
고개조차 제대로 저어지지 않았다. 바로 코앞에 벌레들이 굼실거리는 것이 보였다.
"형!"
보리스가 외친 것과 거의 같은 순간, 예프넨은 숟가락을 멈췄다. 여관의 홀을 메운 손님들이 어느새 모
조리 침묵하고 있었다. 오직 예프넨의 목소리만이 들렸다.
" 그 입에 벌레를 처넣을 정도로 내가 강심장이 아니란 것에 감사하시오."
숟가락은 몰려지고, 그릇 속에 내려놓아졌다. 동시에 목을 누르던 손이 풀렸다. 보리스가 외치지 않았
어도 예프넨은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리고 일부러 강한 채 그것을 숨기지도 않았다.
예프넨의 손에서 놓여난 자는 비척거리면서도 급히 뒤로 물러났다. 화가 난 얼굴로 목을 매만지던 그
는 주위의 몇 명과 빠른 눈짓을 나눴다. 고개를 끄덕인 자들이 있었고, 순식간에 사태는 급변했다.
"덮져!"
동시에 예닐곱 명이나 되는 사내들이 테이블을 타넘어 달려들었다. 뜻밖에 상황 전개에 당황한 예프넨
은 재빨리 동생을 막아섰지만 이미 한 박자를 놓치고 있었다. 칼을 뽑았더라면 여러 사람을 죽이지 않
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예프넨은 의자를 들어 첫 번째로 다가드는 놈을 후려친 다음 그 의자를 내던져 또 한 명을 쓰러뜨렸
다. 그러나 그 다음은 역부족이었다. 등뒤에서 세 개나 되는 몽둥이가 한꺼번에 날아들었고 그 가운데
하나가 예프넨의 허리를 정통으로 가격했다.
"......"
비명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 순간 보리스가 달려들어 형을 껴안았고 달렫르었던 사내들은 두 형제
를 바닥에 쓰려뜨린 채 마구 걷어차고 짓밟았다.
"뭐에 감사하라고? 어디서 감히 헛소릴!"
"체, 개뿔도 안 되는 것이 그런 잡소릴 늘어놨냐?"
"이런 ** 같은 놈은 아주 얼굴을 짓이겨 놔야 정신을 차리지!"
예프넨은 자기 몸으로 보리스를 덮어 누른 채 대부분의 발길질을 혼자서 맞았었다. 스노우가드로 보호
되는 곳은 괜찮았지만 다른 곳은 옷이 찢겨져 나가고 드러난 살갗은 거친 부츠에 긁히고 채여 곳곳에서
피가 흘렀다.
예프넨이 용서해 주었던 사내가 가장 날뛰었다. 그는 발길질로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갑가지 흉물스러
운 미소를 지으며 소리쳤다.
"꼴 좋다! 누굴 초청하고 뭘 어쨌다고...... 그래, 이 자식들한테 훌륭한 만찬을 직접 먹여 드리는 친절이
나 베풀어 드릴까!"
그 자가 팔을 뻗어 예프넨의 멱살을 움켜쥐자 주위의 패거리들이 달려들어 쓰러진 그의 몸을 일으켜
세우고 팔을 위에 꺾어 잡았다. 다른 자는 보리스를 거칠게 붙잡아 한 손으로 옆구리에 끼더니 테이블
로 성큼 다가갔다. 다른 자가 숟가락을 다시 쥐었다. 그걸 본 보리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 한 숟갈 가득히... 관대하게 퍼 줘야지."
숟가락은 그릇 속에 들어갔고. 다시 나왔을 때는 그 위에 일곱 마리나 되는 벌레들이 꿈틀대는 것이
보였다. 역겨운 누런 죽은 벌레들이 몸을 뒤챌 때마다 숟가락 사이로 뚝뚝 흘러 떨어지고 있었다.
숟가락이 보리스의 입가로 다가왔다. ** 듯 몸을 비틀며 고개를 저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입을 열었
다가는 곧장 저 벌레들이 입안으로 들어올 것만 같았다.
사내들의 팔을 뿌리치려 애쓰던 예프넨이 외쳤다.
"동생은 매버려 둬! 어린아이에게 그게 무슨 짓인가!"
팡르 잡아TEjs 사내가 떠보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그럼 네가 대신 먹을 테냐?"
갑자기 재미있는 문제라도 냈다는 듯 사내들은 예프넨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젊은이의 잘생긴 이마가
고민으로 잠시 찌푸려지고 이윽고 입술을 깨물며 동생을 바라보는 것도 보았다. 그들은 정말로 예프넨
이 동생 대신 저 벌레들을 삼키겠다고 말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고민을 시켜 놓고 즐기는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비열한 자들은 이해할 수 없는 고뇌가 예프넨의 머릿속에서는 빠르게 맴돌고 있어TEk. 그는
지금 단 하나 가지고 있는 희망이 무엇인데,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조금 밖에 없을 텐데.
이윽고 예프넨은 단호하게 내뱉었다.
"그래. 내게 가져와라."
"뭐...뭐?"
잠시 침묵이 흘렀고 그들은 주위의 동료들을 둘러보며 자신이 잘못 듣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서로의 얼굴에는 "'뭐 저런 놈이 다있지?' 하는 감정이 드러나 있었고 그것은 자신 역시 마찬가지였다.
잠시 후 한 사람이 말했다.
"쳇, 그만 두지. 난 저런 놈은 질색이다."
"기분이 나빠졌다. **, 이건 장난이 아니잖아."
다들 비슷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한 사내만은 달랐다. 바로 예프넨에게 용서받은 그 남자였다. 이름은
귀트라고 했다.
"저런 건방진 놈들을 그냥 두자고? 그런 어설픈 꼴로는 웃음거리밖에 안 된다는 걸 모르냐! 한번 했으
면 끝장을 봐야 되는 거다.!"
귀트는 다가가 동료로부터 숟가락을 빼앗더니 담긴 것을 쏟아 버리고는 새로 한 숟가락 듬뿍 떴다. 그
리고 직접 예프넨 앞으로 다가가 기분 나쁜 눈초리로 젊은이를 쏘아보았다.
본래 낯선 자들에게 텃세를 부리는 것이 이들 무리의 버릇이자 소일거리였지만 예프넨과 같은 여행자
들은 특히 불쾌한 존재이기도 했다. 옛 귀족 출신이나 되는 듯이 반반한 얼굴에 예의바른 말투. 괜찮아
보이는 무과와 어느 정도는 갖고 있는 돈.
그런 자들은 자기들의 저택이나 영지에 처박혀 조용히 지내면 되는 거다. 뭣 때문에 자기들처럼 지저
분한 놈들이 뒹구는 여관 따위에 오는 거냐.
특히 가장 싫은 것은 바로 예프넨의 침착한 눈동자였다. 너희들의 속성쯤이야 익히 알고 있다는 듯, 너
희 같은 종자들은 그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겠지...라고 하는 듯한, 그 당황하지 않는 표정이 싫었다. 그
런 놈일수록 놀라고 절망하여 주저앉는 꼴을 반드시 보고 싶은 것이 퀴트와 같은 자들의 공통된 심정이
기도 했다.
"자. 입 벌려."
"......"
" 뭐야, 이제 와서 싫다는 거냐?"
"......"
"그럼 동생에게 먹일 박에."
그가 과장된 몸짓으로 몸을 돌리는 순간 예프넨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그러나 귀트는 기대와는 달
리 여전히 흔들림 없는 목소리였다.
"그만둬."
**...재수 없는 놈.
그는 다짜고짜 왼손을 내밀어 예프넨의 턱을 움켜쥐더니 억지로 입을 벌리게 했다. 그리고 숟가락을
푹 쑤셔 박아 버렸다.
"흐읍......"
귀트 자신조차 잠시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렸던 것이다. 그러나 숟가락을 빼내며 슬쩍 예프넨의 얼굴을
보았을 때 기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본 그는 경악하여 말을 잊었다.
예프넨은 천천히 턱을 움직여 입안에 든 것을 씹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가벼운 비웃음까지 띤 채
로 그것을 삼켜버렸다. 깨끗이. 감켜버렸다.
"저, 저런......저런......"
예프넨의 팔을 잡았던 자들은 어느 새 놀라 팔을 놓고 있었다. 어쩌면 예프넨은 좀 전부터 그들을 뿌
리치고 입안의 것을 뱉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리고 천천히 팔을 빼
며 한 걸음 귀트에게 다가갔다.
귀트는 예프넨의 손이 허리에 찬 칼의 손잡이로 가 올려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싸늘한 목소리가 들
려오는 것도 느꼈다.
"네게 정신으로 결투를 신청한다. 나는 예프넨 진네만, 롱고르드의 영주 율켄 진네만의 맏아들이자 영
지의 후계자다. 네 신분을 밝혀라."
그 누구도 다시 예프넨의 몸에 손댈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제야 예프넨의 허리에 찬
검을 불안한 눈으로 살폈고. 그것이 예사 검이 아니라는 사실도 눈치챘다. 칼집은 무늬 없이 간소했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백색의 광채가 감돌고 있었다.
게다가 영주의 아들이라고? 그렇다면 이겨도 큰일. 져도 큰일이 아닌가!
귀트는 더듬거리며 대답을 하지 못하고 몇 걸음 물러섰다. 그러나 홀에 낮은 사람들의 눈이 모조리 그
에게 돌려져 있었다. 여행자인 예프넨과는 달리 그는 이 마을에서 깡패 노릇을 하며 살아가는 입장이었
다. 여기서 자칫 굴복했다가는 다시는 얼굴을 들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조직은 물론, 마을 사람들에게까
지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나는...귀트...필로네다."
예프넨은 이제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 그는 보리스를 붙잡고 있는 사내에게 잠시 눈길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그가 주춤거리며 동생을 내려놓게 만들었다. 그리고 손짓으로 보리스를 불러 옆에 자리하게
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말투로 예프넨이 다시 입을 열어 말했다.
"난 물론 너를 죽일 것이다."
귀트의 얼굴은 점차 희게 변해갔다. 예프넨은 말을 이었다.
"네가 살아남으려면 한 가지 방법이 있다 결투하여 내가 너를 죽이기 전에 네게 졌음을 말하고 바닥에
엎드려라. 그러면 너를 죽이지 않겠다. 그 대신."
예프넨은 왼손으로 식탁 위에 아직도 놓여있는 그릇을 가리켰다.
" 저 그릇에 남은 것을 네놈에게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먹일 것을 가문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
겠다"
이제는 피할 길이 없었다. 귀트는 숨을 거칠게 쉬면서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쓰더니 사나운 눈으로 동
료들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동료들은 모두 그의 눈을 피했다.
예프넨은 고개를 돌리더니 카운터의 건방진 여급을 향해 말했다.
"뒤뜰에서 결투를 할 수 있나?"
처음 여관에 들어와 방을 달라고 하고 돈을 계산할 때까지 예프넨은 모든 일에 익숙하지 않은 초보 여
행자였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검과 결투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늘 배워오고 겪어온. 그레에 가장 ld
익숙한 삶인 것이다. 가문의 이름을 말한 이상 추호의 망설임도. 머뭇거림도 필요 없었다.
여급도 이번에는 감히 농담을 걸지 못한 채 단지 고개를 끄덕거리기만 했다. 예프넨은 홀을 휘둘러보
고는 가장 이들과 관계가 없어 보이는 한 상인 일행에게 다가가 정중하게 입회인이 되어 줄 것을 청했
다. 이미 예프넨의 기세에 눌린 그들은 거절할 리는 없었다. 트라바체스의 관습으로는 각 측에서 입회인
둘이 결투를 하여 사람을 죽이는 것은 전혀 죄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보리스와 함께 뒤뜰로 나갔다. 호기심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우르르 따라나왔다. 귀트 일행
이 밖으로 나온 것은 그보다 한참 뒤였다. 그러나 감히 도망치지는 못했다.
1.윈터러
예프넨과 마주 선 귀트는 아직도 불안감을 완전히 누르지 못한 채였다. 쉴 새 없이 들썩거리는 어깨가
그것을 반증했다.
그의 손에도 검은 들려 있었지만 그다지 익숙한 듯 보이지는 않았다. 그의 반해 예프넨은 완전히 숙달
된 자세로 검 손잡이에 손을 얹고 섰다.
보리스는 형이 이웃 여지의 아들들과 검격을 겨루는 것을 본 일이 몇 번 있었다. 그때는 대부분 서로
죽고 죽이는 결투는 아니었다. 검술 시합과 비슷한 것이었고, 한 쪽에서 상처를 입으면 그것으로 대결은
끝났가.
물론 형이 누군가와 결투를 한 일이 있다는 사실을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결투하는 순간의 형을
본 일은 없었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서서 바라본 형의 푸르고 차가운 눈동자는 평소의 따뜻한 눈빛과
는 판이하게 달랐다. 과연 같은 사람인가 의심될 정도로.
그리고 예프넨이 입을 열어 짧게 말했다.
"검을 뽑아라."
귀트가 검을 뽑는 것과 거의 동시에 예프넨도 검 손잡이를 쥔 손을 빠르게 움직였다. 윈터러의 날이
뽑혀 나오는 순가, 입회인들을 비롯한 구경꾼들의 눈은 모조리 충격을 받은 듯 보였다. 그들 가운데 몇
은 곁의 사람들에게 급히 속삭였다.
"저 백색 날을 봐...저건 보통 검이 아냐."
"저건 도대체 뭐지? 저 검에 대해서 들어본 사람 있어?"
서녘 태양의 광채가 붉게 깔린 뒤뜰이었다. 둘러선 사람들의 얼굴도 술 취한 듯 불그레했다. 그 가운데
희게 솟아난 윈터러의 공채는 보는 사람의 가슴속에 얼음 한 조간 찔러 넣을 듯 싸늘한 충격을 주었다.
한 사람이 다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세상에는 겨울의 검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던데......"
그때 두 결투자는 뜰 가운데로 훌쩍 뛰어들어왔다. 이어 검과 검이 서로를 노렸다. 이윽고 석양을 빨아
들인 윈터러가 붉게 타기 시작했다.
먼저 공격을 감행한 것은 귀트였다, 그는 초보 검사답게 선제 공격이 제일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
다. 그러나 자신의 검이 윈터러와 스치는 순가. 그는 이 결투가 완전히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래 힘을 줄 수도 없었다. 날씬한 젊은이인 예프넨의 팔 힘은 동네에서 주먹으로 먹고 살던 자신보다
훨씬 강했고. 윈터러는 마술적인 아름다움과 함께 악마 같은 날카로움을 지니고 있었다. 귀트는 검 끝일
부가 싸악 갈라져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그는 혼비백산하여 뒤로 물러서기에 급급했다.
이번에는 예프넨의 차례였다. 그는 단 두 걸음만에 적의 사정 거리로 급습하여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검을 대각으로 후려쳤다. 칼날이 서로 비껴 미끄러졌다. 그 순간 귀트의 검이 금속성의 마찰음과 함께
부르르 떨리더니 잠시 후 쩡, 하는 소리를 냈다. 사람들은 그 소리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건 윈터러를 써본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소리였으니까.
귀트가 이마에 핏줄을 세우더니 평소의 최고 실력을 내어 윈터러를 두 차례 막아 밀쳤다. 그리고 그것
이 끝이었다.
츠르르...챙그랑!
"저, 저런......"
그건 귀트만이 낸 소리가 아니었다.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저도 모르게 충격으로 탄성을 질렀다. 귀트
의 검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바닥에 우수수 떨어지는 것이 보리스의 눈에도 보였다.
결코 두 조각이나 세조각으로 부서진 것이 아니었다. 쇠로 만든 검으로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저 백색의 검은 도대체 무엇이기에?
"이......"
귀트는 상황을 깨달았다. 망설임도 없이 예프넨의 윈터러가 곧장 앞으로 찔러져 오는 것을 본 그는 무
작정 바닥에 납작 엎으려 머리를 흙바닥에 박았다. 그리고 손을 앞으로 내밀어 싹싹 비볐다.
"제, 제발 죽이지 말아 주...십시오. 제발......"
이젠 체면이고 뭐고 가릴 상황이 아니었다. 예프넨은 귀트의 뒷목을 똑바로 겨누며 검을 멈췄다.
"승복하는 건가?"
"예, 예, 물론입죠, 그렇고 말고요."
그러자 예프넨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 나와 한 약속도 기억하고 있겠지?"
"그건......"
끔찍한 일이었다. 그러나 죽는 것보다는 나았다. 귀트는 잠시 후 덜덜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어나라."
해가 서서히 졌다. 여관에서 램프를 내어 밝히는 가운데 예프넨은 윈터러를 겨눈 채로 귀트를 여관 안
으로 들어가게 했다.
뒤따라 들어간 보리스는 형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지는 않았지만 그는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형
이 정말로 저 자에게 저걸 다 먹게 할까? 평소의 형이라면 절대로...하지만 아까 형 역시 저걸 씹어 삼
키지 않았던가.
사람들의 눈이 윈터러에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예프넨에게 들리지 않게 저들끼리 말을 주고 받았
다. 실내에 들어오자 윈터러는 다시 씻긴 듯 싸늘한 흰빛을 내었다.
귀트가 테이블 앞에 앉고, 예프넨은 선 채로 등위에서 검을 겨누었다. 그리고 단지 짧게 말했다.
"먹어라."
귀트는 숟가락을 들었다. 손이 가늘게 떨렸다. 그동안 그릇 속에서는 여러 마리의 벌레들이 kqR으로
기어 나오고 있었다. 전체적인 앵은 줄었는지 모르지만 그 광경은 더더욱 역겨운 심정을 부추겼다. 그는
먹기도 전에 벌써 끅끅거리며 구역질을 했다.
예프넨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들렸다.
"두 번 말하지 않는다."
"형......"
보리스의 목소리가 떨렸지만 예프넨은 시선을 주지 않았다.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늘 보리스
에게 밝게 웃어주던 그 형이 아니었다.
점차 사람들이 눈길을 돌렸다. 어떤 결과가 오든 보고 싶지 않은 까닭이었다. 그러나 무슨 이유인지 아
예 나가버리는 사람은 없었다.
귀트는 떨리는 손으로 숟가락을 그릇에 집어넣었다. 점점 그의 어깨까지 떨리는 것이 뒤에 앉은 사람
들에게도 잘 보였다. 그는 숟가락을 입으로 가져갔다.
예프넨은 마지막까지 눈을 돌리지 않았다. 귀트가 그릇에 든 것을 몇 숟갈 먹고, 토하고. 다시 먹고. 또
토하고 하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완전히 녹초가 된 귀트가 드디어 숟가락을 놓고 ** 듯이 토해
내고 구역질을 하다가 기절해 버리는 것까지 본 다음, 그는 보리스르 데리고 자리를 떴다.
"형."
"왜?"
예프넨은 막 촛불 심지를 살펴보고 침대 와 읹은 참이었다. 문득 바라보니 보리스는 침대 위에 쪼그리
고 앉아 불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예프넨은 표정을 부드럽게 했다.
"뭔가 걱정되니?"
"......"
예프넨은 부츠를 벗어 한쪽 모서리에 세워 놓은 다음 침대 위로 올라가 보리스의 등을 쓰다듬었다. 동
생은 가늘게 떨고 있었다.
"자아. 형한테 예기해 봐."
보리스의 푸른 잿빛 눈동자가 형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눈은 형의 평화로운 표정을 보며 마치 뜻밖이
라는 듯 흔들렸다. 예프넨은 보리스의 생각을 알아차렸다.
"보리스.너......"
"형이 괜찮아서 다행이야."
보리스의 목소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 말은 진심이었다.
"형이 그 남자를 이긴 것도 물론 다행이야. 하지만 난...그때 형이 뭔가 달라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아, 형이 잘못했다는 건 아냐...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도 알아. 아버지가 계셨더라면 분명
히 형에게 잘했다고 하셨을 거야. 하지만, 하지만......"
"아니야."
예프넨이 갑자기 말했다.
"아니야, 보리스. 네가 제대로 본 거야. 너만큼 그걸 잘 알아낼 수 있는 사람도 없겠지."
예프넨은 희미한 미소를 짓더니 보리스로부터 약간 떨쳐 벽에 기대어 앉았다. 그리고 자신을 쳐다보는
보리스를 외면한 채 열린 덧창너머를 잠시 바라보았다.
"보리스. 난 말이지......"
예프넨은 다시 말을 끊더니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보리스는 형을 따라 창 밖을 쳐다보았다. 별이 총
총히 박혀 반짝거렸다.
"나와 너는 언제고 아버지의 뜻에 맞는 아들들이 아니었지, 안 그래?"
보리스도 기억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형제의 우애를 탓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그보다 좀더 강인하고
냉정하여 애정 따위에 휩쓸리지 않는 사람이 되기를 바랬었다. 아버지는 오랫동안 삼촌과 대립하며 철
저히 그를 증오했던 사람이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것이 전혀 무리가 아닐 정도로.
촛불이 깜빡거리고, 예프넨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난 말이다, 아버지의 말도 옳았다고 이제 외서야. 이리도 늦어버린 뒤에야 생각하게 된다. 아버지를 대
신해서 이제 나라도 네가 말하지 않으면 안 되겠지. 동정심 같은 걸로 마음 약해지지 말라고. 어떤 고통
이나 아픔을 겪어도 능히 이겨낼 수 있도록. 그렇게 되라고 말아야."
형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내가 오랫동안 너를 보살필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네가 지금처럼 따뜻한 가슴으로, 여린 눈동
자로.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언제고 지켜 줄 텐데."
왜 형은 곧 떠날 사람처럼 저렇게 말하는 것일까?
"그렇지만 난 언제까지나 네 곁에 있을 수는 없는 거지. 아니, 있을 수 있다 해도 그래서는 안 되는 거
지. 네게는 너만의 길이 있을 텐데. 그걸 스스로 찾아나갈 수 있도록 너는 충분히 강해져야 하는 거야.
충분히...단단해져야 하는 거야."
어머니를 닮은 푸른 눈동자가 문득 물기를 머금은 듯 보였다. 예프넨은 마치 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애써 하는 사람처럼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을 주었다.
"보리스. 바위가 될 수없다면 조개가 되는 거다. 네 속이 여려도 아무도 알아볼 수 없도록. 그걸 아무도
열어볼 수 없도록 꽉 닫아버려. 하지만 아무도 ** 않는 깊은 골방에서는 눈물 흘려도 좋으니까. 거기
서만은 누구도 탓하지 않으니까."
보리스는 영문을 몰랐다. 형이 갑자기 왜 그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동생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는 이
야기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이 이야기는 갑작스러웠다. 평소처럼 자연스러운 이야
기가 아니었다.
어린아이를 갑자기 어른으로 성장시키려는 것처럼.
그래야만 하는 어떤 이유가 생긴 것처럼.
"널 작고 선량한 소년으로 내버려두는 세상이 아니라는 걸....네가 빨리 깨달았으면 좋겠다."
빨리, 빨리...예프넨의 목소리에는 안타까움이 깃들여 있었다. 동지가 없어져 버린 어린 새가 한**삐
날 수 있기를 바라는 듯한. 그런 불가능한 일을 바라는 듯한.
"그래서 형은 그런 사람이 되기로 한거야?"
한참만에 보리스가 묻자 예프넨은 말을 삼킨 채 잠시 시선을 다른 곳에 주었다가. 이윽고 대꾸했다.
"그래."
"그렇구나......"
보리스는 가문이 몰락한 지금 자신이 약해질까 봐 형이 암시를 주고 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서
형을 안심시키려는 것처럼 고개를 크게 끄덕여 보였다. 오늘의 일은 분명 그들이 롱고르드의 저택에서
만 살았더라면 겪었을 리 없는 사건이었다. 형이 다른 면모를 보였다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지금
이곳을 모두가 보호해 주는 글들의 영지가 아니니까. 사방에는 낯선 사람 아니면 적뿐이었다.
잘 준비를 하고 옷을 벗으려니까 형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잡옷은 벗지 마라. 보리스."
"왜?"
예프넨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쩌면 우리를 노리고 찾아올 자들이 있을 지도 모르니까. 자, 형이 보초를 설 테니까 너는 자도 좋아.
내가 이따가 새벽녘에 깨워 줄게."
훅, 예프넨이 촛불을 불어 껐다.
보리스는 처음에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차츰 잠이 달아나자 꿈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
었다.
윈터러를 바닥에 세우고 앉은 형이 보였다. 그는 침대에 몸을 기댄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처음엔
무슨 소리 때문에 깼나 했다. 그러나 곧 형이 소리를 죽여 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소리는 거의 나지 않았다. 보리스가 깨어난 것도 어쩌면 그 소리 때문이 아닐지도 몰랐다. 아니
다... 보리스는 캄캄한 어둠 속에 흐르는 정적만으로도 예프넨이 어떤 중대한 일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방안을 흐르는 침묵은 소년의 귀를 먹먹하게 했고 가슴을 터질 듯 짓눌렀다.
마치 이 슬픈 침묵 그 자체가 그를 깨운 것만 같았다.
말을 걸었어야 했을까. 그러나 보리스는 입을 열 수 없었다. 이제 소리가 나지 않는데도 한층 아픈 침
묵이 생생하게 그의 뇌리에 파고 들었다.
보리스의 관자놀이는 타고 눈물이 줄줄 흘렀다. 이유도 모른 채. 그렇게 소리 없이 눈물이 흘렀다.
왜일까.
아아, 왜일까.
다음날 낮. 그들은 마을을 떠나 다시 들판을 걸었다.
한 필뿐인 말은 주로 보리스가 탔고 예프넨은 고삐를 쥐고 걸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해 주었다.
그 이야기들은 저택에서 지낼 때 해주곤 하던 재미있는 옛날 이야기나 이웃 영지의 우스운 사건 같은
것은 아니었다. 못 보던 나무나 꽃을 보면 보리스는 예전처럼 어김없이 형에게 물었지만 이제 형은 간
단히 이름만 말해 줄 뿐이었다. 전처럼 거기에 얽힌 아름다운 전설이나 우와 같은 것은 예프넨의 입에
서 나오지 않았다.
"형, 형은 예전에 많이 알던 얘기들은 다 잊어버렸어?"
그렇게 보리스가 묻자 예프넨은 입술만 움직여 웃더니 대답했다.
"그런가봐."
그게 진심으로 웃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은 보리스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저녁때까지 걸어도 새로운 마을은 나타나지 안았다. 마을을 떠나기 전에 충분히 물어 둔 터였지만 역
시 길을 잘못 둔 모양이었다.
"오늘밤은 아무래도 야영을 해야겠구나."
더 어두어지기 전에 형제는 적당한 장소를 물색했다. 자리를 잡고 마른풀과 나뭇가지 따위를 모아 화
불을 지폈다. 예프넨은 예전에 이웃 영지의 젊은이들과 며칠씩 걸리는 사냥을 여러 번 떠났던 탓인지
이런 일에는 익숙해 보였다. 말은 야트막한 관목을 묶었다. 적당한 나무가 없었던 탓이었다.
불을 보고 있자나 저택을 둘러쌌던 횃불이 생각났다. 나무 그림자들이 불꽃의 움직임에 때라 이리저리
일렁거렸다.
처음엔 금방 깨닫지 못했다. 잠시 후 예프넨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보리스. 검을 잡아."
긴장이 확 끼쳐오는 순간 온 몸의 털이 곤두섰다. 예프넨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불 속에 나뭇가
지를 하나 던져 넣었다. 그리고 원터러를 잡은 채 일어나 섰다.
" 그 정도 수로도 숨을 필요가 있나."
이후 보리스가 예프넨을 기억할 때마다 떠오르는 모습이 세 가지 있었다. 하나는 에메라 호수 앞에서
함께 죽자고 말하던 형의 푸른 눈동자, 또 하나는 바로 윈터러를 잡은 채 모닥불을 바라보고 선 형의
어두운 뒷모습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건방 떠는 어린놈이......"
보리스는 짤막한 검을 꼭 쥔 채 꼼짝고 하지 않았다. 예프넨은 윈터러를 천천히 뽑았다. 모답불뿐인 어
둠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 고상한 칼날이 암흑 가운데 갈라진 틈새처럼 번뜩였다.
"포위해!"
곧 보리스도 볼 수 있었다. 모닥불 앞의 두 형제를 둘러싼 자들은 대략 보아도 20여명은 넘어 보였다.
거기다 모두 칼 따위의 무기를 꼬나들고 있었다. 예프넨은 그 가운데 아는 얼굴을 발견하고는 냉랭하게
말했다.
"호위하는 부하들이 많군 그래, 귀트."
그건 도발성 발언이었다. 귀트가 얼굴을 찌푸리는 가운데 다른 자들이 불쾌한 듯 입을 열었다.
"누가 저 놈을 돕겠다고 이곳까지 온 줄 알아?"
"흥, 아직도 상황을 잘 모르는군."
적들이 빙 둘러서서 진을 갖추기 시작했다. 매어져 있던 말을 끌어들어 쫓아버리는 소리가 저만치에서
들렸다. 그림자들이 사방에 어슬렁거렸다. 예프넨은 재빨리 눈을 돌리며 그 가운데 지휘자일 법한 자를
찾았다.
"뭘 원하지?"
보리스는 일어섰다. 그리고 모닥불을 사이에 둔 채 형과 등을 맞대고 섰다. 목검말고는 휘둘러 본 일이
없었지만 지금으로서는 검을 다를 줄 모르는 어린아이로 보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세는 비
교적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적은 압도적이었다.
지휘자인 듯한 자가 모닥불 쪽으로 한 발짝 나서며 말했다.
"네 검. 그게 바로 윈터러 라는 검이지?"
예상 대로다... 예프넨은 입술을 깨물며 검을 단단히 쥐었다. 결투를 위해 이름을 밝힌 것이 실수라면
실수였다. 그러나 이름도 밝히지 않고 상대를 죽일 수 있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 예프넨이었다. 위험
하다 해도 명예를 위해 결투하기로 한 이상 거치지 않을 수 없는 수순이었다.
"얌전히 내 놓으면 둘 다 조용히 보내주겠다."
지휘자로 보이는 자는 검은 구레나룻을 기른 키 큰 남자였다. 우렁우렁한 목소리의 소유자였고. 드러낸
가슴팍에는 두 갈래의 칼자국이 남아 있었다. 저 정도의 인원을 꿀로 올 정도면 상당한 실력자일 것이
었다.
그자가 다시 입을 열어 말했다.
"어린 동생은 아직 죽기엔 이른 것 같군. 안 그런가?"
스무 명이나 되는 적을 처치할 실력은 없었다. 그러나 자신이 죽기 전에 검을 내줄 생각도 없었다. 그
러나 보리스는?
그때 보리스가 입을 열어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12년은 사리를 알기에 그리 적은 나이라 할 수는 없어."
"허, 하고 싶은 말이 뭐냐. 꼬마야?"
언뜻 검을 내놓겠다는 말이 아닌가 생각한 검은 구레나룻을 향해 보리스는 단호한 목소리로 답했다.
"죽어야 할 때 정도는 알 수 있다는 뜻이다."
더 말이 필요 없었다. 첫 번째 적이 검을 높이 쳐든 채 측면에서 튀어나왔다. 예프넨이 쥔 윈터러가 가
로로 번뜩이고. 어둠 속에서 핏방울이 튀었다.
"조심해!"
좌측에서 내밀어진 두 번째 검을 윈터러의 가드로 쳐내는 순간 예프넨의 손등이 찢겨나갔다. 짧고 흰
검이 정면 대각선으로 베어 들어오는 것을 보고 검을 바짝 당겼다가 밀쳤다. 동시에 뻗어나간 윈터러의
공격에 상대방의 이마가 뚫렸다. 뜨거운 액체가 칼날을 타고 흘렀다.
보리스가 어둠 속을 똑바로 보려 애썼다. 가장 먼저 다가온 것은 무기가 아닌 밧줄과 같은 것이었다.
흠칫 물러서려다가 불타는 나뭇가지를 밟고는 무작정 검을 비스듬히 휘둘렀다. 훅, 하는 소리와 함께 밧
줄이 끊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극도의 긴장 상태에서 너무 이를 악문 나머지 입술에서 피가 흐르는
데도 깨닫지 못했다.
누군가 예프넨의 머리를 향해 모닝스타를 휘두르자 윈터러의 날이 사살을 휘감아 버렸다 두 손으로 검
을 곽 쥐는 순간 다시 한 번 쩡, 하는 소리가 울렸다.
사슬이 투둑 끊겨 나가며 쇳덩어리가 모닥불 속으로 떨어져 글렀다. 타던 나뭇가지들이 부서지고 불티
가 확 일어나 사방으로 날려쌌다.
"흥...과연 저게 바로 소문으로만 듣던 윈터러의 '프로즌 브레이크' 로구나."
프로즌 브레이크란 윈터러의 특수한 능력들 가운데 비러 '극저온 폭발'을 칭하는 별명이었다. 맞닿은
물질의 온도를 순간적으로 극저온으로 끌어내려 분자구조를 파괴해 버리는 이 강력한 힘은 본래 스노우
가드와 함께 사용될 때에만 본령을 발휘했다. 무기를 부수기 위해 만드는 소드 브레이커 따위의 능력과
는 비교도 되지 않는 마력적인 힘이다.
"흥, 솜씨 좋구나! 하지만 동생의 배때기에 구멍을 뚫려도 그럴 수 있을까?"
동시에 세 명의 적이 보리스를 둘러싸고 접근했다. 모닥불 탓에 형제의 움직임은 적들에게 완전히 노
출되었다. 대신 적들은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시야를 확보할 수 있었다. 예프넨도 그 점을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가 혼자 적들 속으로 뛰어든다면 보리스는 꼼짝없이 붙들려 당할 것이다. 그것이 그가
이 포위를 뚫고 전장을 바꿀 수 없는 이유였다.
설상가상으로 빛에 익숙해져버린 형제의 눈은 자꾸만 어둠 속에서 적의 움직임을 놓쳤다. 둘의 사이를
바로 찌르고 들어온 검을 뒤늦게 발견한 예프넨이 미처 방어하기도 전이었다. 보리스를 노리는 척하던
적은 예프넨의 옆구리를 힘껏 찔렀다.
그극......
기묘한 소리가 울러 퍼졌다. 검은 스노우가드의 표면에 닿아 미끄러지며 약한 마찰열을 냈고 그 순간
이해할 수 없는 진동이 발생하여 검을 쥔 손에까지 몰려왔다. 찔렀던 적은 놀라 검을 떨어뜨릴 뻔했다.
충격으로 어깨까지 저릴 지경이었다. 검은 구레나룻을 가진 자의 눈빛이 변했다. 그는 주위에 들리지 않
게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설마, 윈터바텀 킷이 모두 저 놈의 수중에 있는 건가?"
진네만 가문에 일어난 일은 아직 그리 멀리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따라서 그로서는 그 가문의 아들들
이 왜 이 먼 곳까지 와서 여행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귀 기울이
고 탐내 오던 보물에 대한 소유욕만은 강해서 상대가 누구든 조금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어디, 그렇다면 이 검도 받을 수 있을까?"
드디어 그 자와 예프넨이 정면으로 맞붙었다. 한 번, 두 번 부딪쳐는 동안 둘 다 상대의 실력이 여간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그러나 예프넨은 젊은이였고 그 자는 오랫동안 칼을 휘두르는 것으로
먹고 살아 온 노련한 자였다. 그는 슬슬 물러나는 체하며 예프넨을 앞으로 끌어내기 시작했다.
한 걸음 옮기기 시작한 이상 쉽게 뒤로 물러서기는 어려웠다. 자칫 박자를 놓쳤다가는 완전히 수세에
몰리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적은 윈터러의 힘을 알기 때문인지 일부러 검을 오래 맞대지 않고 조심스
럽게 빈틈만을 노렸다.
반 발짝 움직일 때마다 예프넨은 기도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지금 실력으로는 결코 일방적으로
제압할 수 없는 상대였다. 약간만 실수를 했다가는 모든 것이 끝장이었다.
츠르르...챙!
검이 한 차례 얽혀 미끄러지고 상대는 프로즌 브레이크를 피하기 위해 재빨리 검을 뗐다. 예프넨은 그
틈을 노려 재빨리 공격을 감행했다.
"하아!"
거의 되었다 싶은 순간이었다. 윈터러의 날이 상대의 목을 뚫고 들어가기 직전, 갑자기 이상한 일이 일
어났다.
"......"
상대의 몸이 축 늘어지더니 바닥에 엎어져 버렸다. 검 날은 아직 닿지도 않았는데 비명 한번 지르지
못한 채 그대로 쓰러졌다.
3. 쓰디쓴 가르침
다른 놈들이 놀라 웅성대려는데 곧 이어 같은 일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몇 명이 그 자리에 무너지듯이
주저 앉았고. 도망치려던 자들도 하나씩 엎어지기 시작했다. 예프넨은 재빨리 물러서며 보리스를 가지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검을 세운 채 정체 모를 적을 노렸다.
"잘 싸우더군, 젊은이."
20여명에 달했던 적들이 거의 다 쓰러지거나 달아나고 나자 어둠속에서 네 명의 낮선 사람들이 나타났
다. 그들 가운데 한 명의 손에 작지만 정교한 석궁이 들려 있었다. 여전히 새 볼트가 메겨진 채였는데
모양이 좀 특이했다. 볼트 끝의 촉이 약간 뭉툭하고 그 끝에 다시 바늘처럼 뽀족한 침이 튀어나와 있었
다.
예프넨은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은 채 물었다.
"당신들은 누굽니까?"
처음 말했던 사람이 허허거리며 웃었다. 그런데 가만히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니 조금 이상한 점
이 있었다. 마치 여자의 목소리 같달까?
"명색이야 어찌됐든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는데 좀더 친절한 대답을 기대할 수는 없는 건가?"
여자 목소리를 가진 그 자는 중키에 호리호리한 몸매를 가지고 있었지만 겉으로 드러난 팔을 튼튼한
근육이 엉겨 있어 오랫동안 검을 위 두른 노련한 검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예프넨은 여전히 자세를 푸지 않은 채 대꾸했다.
"그것이 무상의 도움이었다면, 감사드리겠습니다."
"허, 허허. 허허허허......."
이윽고 그들은 모닥불 근처로 다가와 모습을 드러냈다. 여자 목소리를 가진 검사가 아마도 리더인 듯
했는데 상체만 보호하는 검은 가죽 갑옷에 큼직한 가죽 부츠를 신고 있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파이프를
꺼내더니 예프넨의 대답도 듣지 않고 모닥불로 다가가 불을 붙였다. 한 모금 빨아 뱉으며 그는 다시 말
했다.
"무상이고 뭐고, 우리에게 치를 만한 뭔가를 갖고 있기나 한가? 우리 웬만한 것은 필요 없는데."
보리스는 주위에 흩어진 시체들을 보며 기분이 이상했다. 방금 전까지 살아서 그들을 위협하던 자들인
데 비명 한 마디 지르지 못한 채 순식간에 시체로 변했다. 도대체 이 자들은 얼마만큼의 실력을 가지고
있기에?
"보아하니 여행을 즐기는 자들도 아닌 것 같은데. 우리한테 줄게 있기나 하겠소, 니카? 그냥 불이나 얻
어 쬐면 족할 것 같은데."
석궁을 들었던 자가 그렇게 말하더니 서슴없이 모닥불가로 다가와 앉았다. 각반을 쳐서 입은 푸르스름
한 가죽 바지가 불가에 오니 오묘한 색깔로 번쩍거렸다.
예프넨은 잠시 사이에 두었다가 약간 태도를 바꾸어 말했다.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은 강한 여행자들인 것 같군요."
네 사람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더니 분분히 자기 소개들을 했다.
"난 윌스 캄브라고 하네."
"조아킴이라고 브르게. 섬은 없어."
"난 로마바크 율, 뭐. 보면 알겠지만 '볼트의 로마바크' 란 별명을 갖고 있어"
석궁을 든 자가 한 소개였다. 마지막으로 여자 목소리를 가진 리더가 입을 열었다.
"야니카 고스, 보통은 야니라든가. 니카라고 불러, 착각할까봐 말해 두겠는데 이렇게 보여도 여자란 말
이지."
"별로 중요한 사실이 아니잖아?"
조아킴이라던 남자가 히죽히죽 웃으며 모닥불가로 다가와 앉았다. 이렇게 되자 예프넨과 보리스만 서
있는 모양이 되었다. 그러나 예프넨은 일부러 그들과 약간 거리를 두며 떨러져 서더니 보리스를 껴안은
듯한 모양새로 자리에 앉았다. 로마바크가 불쑥 말했다.
"아직도 우리가 안심이 안 되는 모양이지? 흥, 흔히 있는 일이니까. 같이 있는 것이 불편하다면 우린
가겠네."
예프넨은 약간 당황해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네 명의 여행자는 이윽고 나무 컵이며 물주머니, 말린 과일 따위를 꺼내고 저들끼리 나누어 먹으며 건
성으로 예프넨에게도 권했다. 그가 사양하자 야니카가 보리스를 보더니 말했다.
"동생인가**?"
"그렇습니다."
"이런 황야를 돌아다니기엔 아직 어린데."
그러면서 야니카는 배낭에서 아직 싱싱해 보이는 사과를 하나 꺼내더니 솜씨 있게 휙 던졌다. 보리스
가 사과를 받아내자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아기는 아니군. 독은 들지 않았으니까 안심하고 먹으라고."
보리스는 형을 쳐다보았고. 예프넨은 약간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리스가 사과를 깨물어 먹기
시작하자 야니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보다시피 우린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돈이 될 만한 일을 맡아 하는 사람들이야. 가끔 무료해지면 '필
멸의 땅' 으로도 가지. 변경만 돌아다녀도 꽤 짭잘한 수입을 챙길 수 있거든."
예프넨은 자신이 잘못 들었나 생각하면서 되물었다.
"필멸의 땅이라고요?"
야니카는 웃을까 말까 하는 표정이 되어 예프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그냥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필멸의 땅. 당신이 아는 그 이름이 맞아?"
보리스는 눈이 둥그래졌고 예프넨은 말문이 막혔다. 필멸의 땅, 산 자가 그곳에 들어가 무사히 나올 수
도 있단 말인가?
천천히 듣거나 읽은 것들을 떠올려 보았다. 필멸의 땅, 모탈렌드는 까마득한 옛날 벌어졌던 전 대륙적
규모의 마법 전쟁에 의해 풀씨 조차 남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초토화되어버렸다고 했다. 현재 대륙의 3
분의 1가량을 뒤덮을 정도로 넓은 영역인데도 어느 나라도 감히 차지하려 하지 않는 땅이 그곳이다. 수
많은 영역인데도 어느 나라도 감히 차지하려 하지 않는 땅이 그곳이다. 수많은 고대의 인간들이 언데드
(undead)로 변해 거닐며 산 자의 생명력을 빼앗지 못해 발광한다는 그 거대한 황무지는 지금도 계속해
서 넓어지고 있다는 흉흉한 소문이 감도는 곳이기도 했다.
"뭔가 끔찍한 상상을 하는 듯한 얼굴이군."
로마바크가 히죽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는 석궁의 볼트를 조사하는 중이었다. 하나씩 들어올려 끝이 상
하지나 않았나 살피는 것처럼 모닥불에 비추어 보았다.
예프넨이 말했다.
"예, 솔직히... 그곳에 가서 살아 나올 수 있다는 이야기가 믿어지지 않는군요."
"우리가 거짓말이라도 하는 걸로 들린단 거군."
"아, 아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
로마바크는 들여다보던볼트를 내려놓고 그 가운데 하나를 다시 집더니 예프넨에게 다가왔다. 그가 볼
트를 예프넨의 코앞에 내밀자 보리스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자, 보야? 요기 이상한 점이있는 것 같지 않아?"
청음 예프넨이 이상하게 생각한 그대로 였다. 이중 촉을 가진 볼트였다. 로마바크는 예프넨의 손에 그
것을 건넸다. 볼트는 보기보다 묵직했다.
"그 끝을 잘 봐. 거기. 바늘 끝에 뭔가 묻어 있지?"
그의 말대로 미세한 액체의 흔적이 남은 것이 보였다. 예프넨은 뭔가 불안한 기분을 느꼈다. 로마바크
가 머리를 들이민 채 보리스의 동그란 눈동자를 보며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극독이야. 조심해 손에 닿는 순간 그대로 타 들어가니까. 유령조차 죽일 수 있는 독이야."
예프넨이 흠칫, 하는 순간 보리스는 더 놀랐다. 둘의 표정을 보고 로마바크는 한층 유쾌한 것처럼 웃었
다.
"크크큭... 그거라면 한 번 죽은 놈도 또 다시 죽일 수 있다고, 우린들 왜 필멸의 땅이 두렵지 않겠나.
하지만 그 땅에서 쓰러진 건 산 놈들 뿐, 처음부터 죽어 있던 보물이란 놈들은 모조리 그대로야. 그곳이
바로 전설 속의 마법 왕국 가나폴 리가 있던 곳이라는 거, 처음 듣는 이야기는 아니지? 무슨 ** 짓거
리를 했는지, 하여간 끔찍하고 철저하게 망해버린 그 가나폴리는 사실 황금으로 도로를 포장하고 보석
의 원석을 화분에 깔 정도로 무시무시한 부를 가진 왕국이었단 말이지. 흠,흠, 과연 헛소문은 아니더란
말이야."
로마바크는 자신이 말하면서도 침을 꿀꺽 삼켰다. 생각만으로도 몸이 다는 모양이었다.
"그만 해, 로마바크, 그래 봤자 진짜 가나폴 리가 시작되는 곳까진 가**도 못한 처지잖아. 기껏해야
유령들이 차고 이었다. 금붙이에나 만족해야 될 실력이니까 말이지."
야니카가 핀잔을 주자 로마바크는 예프넨의 손에서 볼트를 다시 건네 받더니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그가 볼트를 가져갈 때까지 예프넨은 자신이 몹시 긴장해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다. 방금 적
들을 소리 없이 죽여버린 것이 이 무기라는 것은 의심할 바가 없었다.
야니카가 옷 안쪽을 뒤지더니 손바닥에 뭔가를 얹어서 그들 형제의 눈앞에 내밀었다. 보리스가 얼결에
받아들고 보니 그것은 두툼한 황금 팔찌였다.
발갛게 타오르는 모닥불 빛 속에서 팔찌의 테두리를 장식한 무늬가 어른거리며 떠올랐다. 수십 명을
될 듯한 춤추는 무희들이 바늘로 그린 듯 미세한 선으로 새겨졌고 곳곳에 깨알같은 보석들이 박혀 반짝
거렸다. 좀더 밝은 곳에서 본다면 무희의 옷차림과 장신구까지 알아볼 수 있을 듯 정밀한 조각이었다.
세공의 수준은 감히 짐작할 수 없을 정도였다.
"내 보물이지."
그녀가 그렇게 말하자 보리스는 얼른 되돌려 주었다. 야니카가 소리내어 웃었다.
"착한 아이로구나."
보리스의 머릿속에도 언뜻 황금 도시의 상상이 스치고 지나갔다. 백열의 태양 아래 녹아 내릴 듯 아른
거리고 모래 먼지와 곳곳에 속은 금빛 기둥들. 루비가 아로새겨진 사원의 첨탑과 같은 것들......그것은
일종의 직감이었을까?
"자, 자 이러고 있을 때는 아니지. 시체에 둘러싸여 잠을 잘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게다가 다른 놈들이
또 쫓아올지도 모르잖아."
야니카가 황금 팔찌를 집어넣고 일어서자 로마바크를 비롯한 다른 일행들도 따라 일어섰다. 야니카가
예프넨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어떻게 생각할 지 모르겠지만. 우리와 잠시 동행 할 텐가? 우린 사바논 마을로 가는 중이야. 밤길도
잘 아니까 마을까지 데려다 줄 수는 있겠지. 어때?"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형제도 짐을 챙겨 일어났다.
사바논 마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새벽이었다.
야니카 일행은 이곳에 여러 번 와본 듯 익숙한 솜씨로 여관을 찾았다. 여관 주인도 이들을 아는 눈치
였다. 예프넨도 이번에는 비교적 나은 태도로 방을 잡았고. 밤새 걸어온 탓에 지친 터라 그들은 간단한
인사도 나누고 각자의 방으로 갈라져 들어갔다.
예프넨도 이번에는 보초를 설 만한 체력이 부족했다. 문단속을 단단히 하긴 했지만 그리 많은 걱정은
하지 않았다. 어찌 됐든 그들의 행선지를 알고 뒤쫓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어차피 처음부
터 딱히 목적지가 있었던 것도 아니잖은가.
눕자마자 긴장했던 것이 풀림과 동시에 피로가 확 몰려왔다. 두 형제는 정신 없이 곯아 떨어졌다.
요란한 소리르 들은 것 같았다.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외치는 것도 같았고, 그 가운데 한 목소리는 형
예프넨의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잠시 후 지독한 잠이 다시금 쏟아졌고.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상채에서 보리스는 다시 잠들어 버렸다.
"보리스...일어나."
아마 그 목소리는 한참 동안 올렸던 모양이었다. 보리스가 눈을 떴을 때 주위는 어두웠고. 바닥은 차고
딱딱했다. 자세가 불편하다 했다. 깨닫고 보니 팔이 뒤로 돌려 묶여 있었다.
"깼구나."
눈가로 따뜻한 입김이 끼쳐왔다.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 예프넨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데도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형의 목소리가 평소와는 달리 탁하게 갈라져 있었던 탓이었다.
약한 빛이 새어들어 왔다. 적어도 밤은 아니었다.
"몸을 일으킬 수 있겠어?"
"아......"
그건 생각보다 몹시 힘든 일이었다. 무릎이 꿇려진 채 쓰러져 있어서 힘주어 자세를 바로잡는 것이 곤
란했다. 한참 악전고투 끝에 보리스는 바로 일어나 앉았다. 어둠에 눈이 좀 익숙해지고 나니 형의 못브
도 정확히 보였다.
"여기가 어디야?"
"글세."
단순한 대답이었지만 의미는 간단하지 않았다. 이곳은 그들이 잠들었던 곳이 아니고, 스스로의 의지로
온곳도 아니었다. 보리스는 다시 한 번 물었다.
"형이 날 여기로 데려왔어?"
"아니."
하긴, 그럴 리가 없다. 형이 무엇 때문에 자신의 팔을 묶어 놓는단 말인가.
"그렇다면......"
보리스가 뭔가 불길한 예상을 입밖에 내어 말하기 전에 예프넨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길 빠져나가야겠다."
그러나 예프넨의 팔 역시 묶여 있었기 때문에 일은 간단하지 않았다. 그것은 서로 등을 맞대고 돌아앉
아 손을 조금씩 움직이는 것으로 상대의 손목을 묶은 밧줄을 풀었다. 예프넨이 먼저 보리스의 손을 풀
었고. 손이 풀린 보리스가 형을 풀어 주었다. 손을 털고 일어나서 보니 예프넨의 손목이 밧줄에 긁히다
못해 피가 맺혀 있었다. 밧줄에 묶인 채 보리스의 손을 풀어주느라고 그런 것이 분명했다.
"이제, 윈터러를 찾으러 가야지."
보리스는 윈터러가 없어졌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러
나 곧 깨달았다. 누군가가 그들을 납치해 이런 곳에 감금해 놓는다면 이유는 하나 뿐인 것이다.
그러나 누가? 누가 그들을 이곳까지 따라왔을까?
보리스의 의문을 풀어 줄 새도 없이 예프넨은 그들이 갇힌 장소의 곳곳을 조사했다. 그리고 곧 허술하
게 빗장이 질러진 문짝을 발견했다. 그들을 여기 가둔 자들은 이들을 상당히 과소 평가했음에 틀림없는
것 같았다. 예프넨은 문을 몇번 밀어보다가 물러섰다. 그리고 다시 앞으로 달려들며 힘껏 문을 걷어찼
다.
삐걱, 하는 거친 소리와 함께 문이 반쯤 벌러졌다. 빗장이 부서진 것이 아니라 벽에 문을 고정시킨 쇠
가 빠져 버렸다.
어이없이 문이 열려버린 것을 보고 예프넨은 당황한 사람처럼 입을 다물었다가 잠시 후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은 금방 그치지 않았다. 보리스가 문틈으로 낯선 바깥의 풍경을 살펴보고, 다시 고개를
돌려 형을 바라볼 때까지도 멈추지 않았다.
"푸후훗, 루훗, 루후후하하핫......"
"형?"
예프넨은 애써 웃음을 멈추었지만 아직도 표정만은 묘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보리스는 알 수 있었다.
형이 즐거워서 웃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정말로 아름답지 않니......정말로 아름답지 않아? 이런 상황들, 이런 꼴들, 후훗,푸후후훗......"
예프넨은 문을 밀치고 먼저 밖으로 나간 뒤 보리스가 빠져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낡은 헛간이 등
뒤에 솟아있고 눈앞에는 좁은 소로가 나 있었다. 아직 대낮이었다. 아마도 그들이 도착했던 그 마을 안
어디가일 것이다. 얼마나 넓은 곳인지도 모르는데, 찾아낼 수 있을까?
"보리스. 잘 기억 둬라. 지금 일."
"......?"
예프넨은 몸이 달아오르는 듯 아랫입술을 한 차례 빨며 가진 것 없는 빈손을 비볐다. 웃음이 그친 형
의 표정은 싸늘했다. 손목이 맺혔던 피가 이미 말라붙어 있었다.
"조금 있으면 기가 막힌 꼴들을 보게 될 테니까."
가슴속에서 뭔가가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 형이 평생 단 한 번도 해** 않은 어떤 일을 하려 한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 어쩌면... 이 정도 당했으니 보복하는 것도 당연하겠지. 하지만......
하지만....아니다.
"형도 말이지... 실은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아이나 다들 것 없는 처지지. 하지만 말이다. 내 나이
가 되었을 때 너는 그렇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버지가 계셨다면 네게 처음부터 보여 주셨을 태도를 이
제부터 내가 보여 줄 테니까, 잊지 마. 지금처럼. 당한 만큼은 되돌려 주는 거다. 아니, 그보다 처음부터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말이지."
잠깐 사이를 두고 예프넨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적이 될 법한 상대를 먼저 끝장내어 버리는 거다."
언젠가 아버지가 하셨던 말이다...라고 보리스는 생각하며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이렇게 이미 실수를 저질러버렸다면 말이야. 그걸 돌이키는 방법을 내가 알려줄게."
보리스는 그것이 평소 보아 오던 형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최근 일어난 일들이 형의
신경을 날카롭게 한 것인가? 아니면 그보다 더한 중대한 변화가 있는 것일까?
"준비해."
아마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었으니까.
예프넨은 그들이 갇혀 있던 헛간을 돌아 그 헛간이 딸려 있는 건물의 입구를 찾아냈다. 그리고 망설이
지도 않은 채 성큼성큼 들어갔다. 보리스도 따라 들어갔다.
그 건물 역시 아마도 창고인 것 같았다. 안에는 두 명의 중년 사내가 선 채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
고 테이블 하나에 다가않은 사내가 뭔가 장부에 써넣고 있는 중이었다. 주위에는 술통으로 생각되는 둥
근 통들이 천장까지 닿도록 쌓여 있었다. 그들이 들어온 것을 보고 눈길을 보내기는 했지만 근본적으로
는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들이었다.
예프넨은 세 사람을 둘러보며 딱딱한 목소리로 물었다.
"누가 책임지냐."
한 명이 다시 돌아보았다. 뭐 저런 어이없는 게 다 있나... 하고 생각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또 한 사람
은 피싯 웃는 것처럼 어깨를 움츠렀다.
예프넨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두 번 말하게 하는군. 누가 여기 주인이냐."
테이블에 앉았던 자가 고개를 들더니 퉁명스레 말했다.
"적어도 넌 아니니까 조용히 **라."
예프넨은 그를 흘끗 쳐다보다니 세 걸음만에 그 앞에 다가섰다. 그리고 손으로 장부를 탁, 소리나게 짚
었다. 쓰던 곳이 가려지자 사내는 발끈했다.
"**** 같은 애**야. 가랄 때 냉큼 꺼지지 못해!"
보리스가 봐도 그 반응은 조금 이상했다. 마치 그들 형제를 이미 알고 있지만 상대하지 않겠다는 태도
같지 않은가?
그러나 다음 순간 일어난 일에 비하면 방금 전 보리스의 의문쯤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예프넨은 장부
를 짚었던 손을 떼더니 그대로 상대방의 뺨을 냅다 갈겼다. 턱이 돌아갈 정도로 강한 힘이었다. 그리고
상대가 뭔가 더 항변하기도 전에 멱살을 움켜쥐어 강한 팔 힘으로 치켜올리더니 바닥에 힘껏 내동댕이
쳤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사내는 키만 컸지 몸은 비쩍 말라 기운도 별로 없었다. 오랜 검술로 단련된
예프넨의 강철같은 팔에 감히 당할 바가 아니었다. 다른 두 사내가 재빨리 물러서며 경계 태세를 취했
다. 그래 보았자 정식 검술과 체술 훈련으로 10년을 넘게 보낸 젊은 예프넨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을 터
였다.
예프넨은 쓰러진 사내는 개의치 않고 나머지 사내 가운데 한 명을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너희들과 시비 벌이기 싫다. 저 헛간으로 나와 이 아이를 데려온 자들이 어디로 갔는지만 말해라. 누
구든, 한 명만 말해라."
쓰러졌던 사내가 비틀비틀 일어섰다. 우습게도 방금 덜 마른 잉크를 짚은 손으로 맞은 탓에 얼굴에는
글자가 몇 개 그려져 있었다.
"그건 말이지 ...... ."
뭔가 말하려는 것처럼 하며 그는 슬금슬금 예프넨에게 다가갔다. 급습을 느낀 순간, 보리스는 앞 뒤 생
각할 겨를도 없이 그 자에게 달려 들어 와락 매달렸다. 목을 감싸쥐어 누르자 아무리 어린아이라지만
숨이 막혔다.
예프넨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단숨에 어깨를 움켜쥐어 올린 다음 빈손을 오므려 주먹을 쥐더니 배
와 가슴 사이를 두 차례 가격했다. 그리고 다시 어깨를 움켜잡았다가 무릎을 들어 그대로 걷어찼다. 밀
려난 몸이 술통이 쌓인 벽에 가 부딪치자 통에 담긴 술들이 출렁거리는 소리가 온 방에 펴졌다.
이번에는 예프넨도 다시 상대가 반격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두 번째 사내가 희생물이었다. 예프넨
의 손이 뻗어가 목덜미를 움켜쥐자마자 그대로 테이블에 머리를 세 차례나 쳐 박았다. 이마인지 코인지
모를 곳에서 피가 흘러 장부를 물들였다. 세 번째 사내가 단도를 꺼내들었지만 예프넨이 두 번째 사내
를 잡은 채 기가 막힌 몸놀림으로 차 버렸다. 예프넨이 눈짓하자 보리스가 달려가 단도를 집었다
"너희들과 장난하는 것, 재미없다"
예프넨은 보리스의 손에서 단도를 건네 받았다. 그리고 두 번째 사내의 ajl를 테이블에 처박은 채 힘껏
단도를 내리치러 했다. 헉, 하는 비명이 울림과 동시에 단도는 그 자의 목을 살짝 스치며 바로 옆에 가
박혔다.
"한 번 더 묻게 한다면 ...... ."
거기까지 말하며 예프넨은 단도를 다시 뽑아들었다. 그걸로도 이미 충분했다.
"마, 말하지! 그 치들... 헬머네 술집으로 갔다. 오늘밤에 떠날 거야. 본래 밤에 움직이기 좋아하는 자
들이라... 우리도 이따위 일에 상관하고 싶지 않았는데... 약점을 잡혀서...... ."
"우리 가둬 뒀다가 어쩔 참이었지?"
"조금 있으면 너희들을 사들인 자들이 올 참이었어... . 레코르다블에 있는 용병단인데 언제고 사람이
부족한 치들이라서, 사람을 사서 몸값을 다 갚을 때까지 놓아주지 않고 용병으로 쓰는 놈들이다."
"우리를 샀다고?"
예프넨이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레코르다블은 용맹단으로 유명한 동쪽의 사막 국가였다. 용
병단이라는 말을 듣고 보리스는 약간 얼어 있었다. 자신들을 얼마를 주고 살 수 있는지는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예프넨은 아까 술통에 부딪치며 쓰러진 남자를 쳐다보더니 물었다.
"헬머네 술집은 어디냐?"
"저... 그 문으로 나가서 왼쪽으로 걷다가 첫 번째 나오는 모퉁이를 돌아가서 좀더 걸으면 검은 개를
키우는 집이 나오는데... 그 집을 끼고 다시 왼쪽으로 꺾어져서 똑바로 큰집을 따라가면 나와. 간판이 있
으니 금방 찾는다."
그 자는 포기한 것인지 술술 대답해 주었다. 뺨에 찍힌 글자 자 국어 말할 때마다 실룩거려서 자못 우
스운 꼴이 되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예프넨은 선 채로 어쩔 줄 몰라하고 있는 마지막 사내에게 물었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 중에 특이한 것은 없었나?"
마치 세 사람이 책임을 나누어 갖도록 하려는 것처럼, 예프넨은 하나씩 돌아가며 질문을 던졌다. 그는
가장 겁이 많은 자였던 모양으로 별달리 당한 것도 없는 주제에 입술을 움찔거리며 대꾸했다.
"뭐, 뭔가 좋은 걸 손에 넣었다고 시시덕거렸어. 크, 큰돈을 받고 팔셈인 모양이던데."
"좋아."
예프넨은 단도를 손에 쥔 채 보리스에게 물러나라고 눈짓을 했다. 보리스가 문 밖으로 나가자 예프넨
은 뒷걸음으로 한달음에 문 앞까지 가더니 말했다.
"미안하지만, 잠시 이 안에서 있어 줘야겠다."
문을 닫고, 예프넨은 바깥쪽 빗장을 찾아내어 걸었다. 그도 물론 그런다고 그들이 오래 갇혀 있을 거라
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가자, 보리스."
보리스는 금방이라도 용병단이 나타나지나 않나 하는 눈동자로 불안하게 골목을 한 차례 바라보았다.
그리고 먼저 걷기 시작한 예프넨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서서히 황혼이 내리기 시작했다.
헬머네 술집이라는 곳은 손님이 그리 많은 곳이 아니었다. 예프넬은 아까처럼 단숨에 들어가는 대신
뒤뜰로 돌아갔다. 그늘져 어둑어둑한 뒤뜰에서 예프넨은 벽을 살펴 기어올라갈 수 있는 곳을 찾았다. 그
러더니 보리스를 불러 몇 가지를 귀띔하고는 그늘에 상자가 많이 쌓인 곳으로 기어 들어가 숨도록 했
다. 난간만을 붙잡고 간단히 2층으로 올라간 예프넨은 창문을 하나 열더니 가뿐하게 몸을 솟구쳐 안으
로 들어갔다.
다행하게도 빈방이었다. 예프넨은 방을 나가 바닥을 기어 1층으로 향하는 계단 언저리로 다가갔다. 그
리고 난간에 숨은 채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있었다.
윌스와 조아킴이 마주앉은 채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각자의 앞에는 술잔이 놓여 있었지만
그리 열심히 마시는 기색은 아니었다. 야니카와 로마바크는 보이지 않았다.
예프넨은 울컥 감정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지만 억누르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그는 철저한 응징을 보
여주어야 했다. 속이고 배신한 자들 때문이 아니라 보리스를 위해서였다.
사랑스러운 동생... 그 녀석이 지금처럼 착하고 순진하도록 내버려둘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이미 시간이 거의 없다.
그 생각을 하자 이마에서 식은 땀이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는 침착하게 기다리다가 계
산 위로 올라오는 급사를 보고는 재빨리 모퉁이로 몸을 숨겼다.
"하압!"
모퉁이를 도는 그 자를 곧장 그늘진 곳으로 끌어당겨 뒷목을 세게 내치쳤다. 급사가 기절하자 흰 앞지
마만을 빼앗고 쟁반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쓰러진 급사는 질질 끌어 방금 나온 반방에 집어넣고 문을
닫아버렸다.
그런 다음, 예프넨은 태연하게 앞치마를 두르고 빈 쟁반을 든 채 아래로 내려왔다. 굳이 얼굴을 숨기려
고는 하지 않았다. 잠깐 동안만 속아 주면 되었으니까. 주인의 눈에 띄지만 않으면 되었다.
윌스와 조아킴이 있는 테이블로 다가간 그는 정중하게 허리를 굽히면서 말했다.
"부르셨습니까?"
그들은 흘끔 고개를 돌려 급사는 앞치마만을 확인하고는 서로 얼굴을 마주보더니 말했다.
"네가 불렀나. 조아킴?"
"뭐야. 아까 술은 더 안하겠다면서?"
술이 약간 취한 그들은 서로의 말이 엇갈리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둘 다 부르지 않았다고 말
하려는 참일 텐데 이번에는 예프넨이 다시 말했다.
"저 밖에서 여자 손님 한 분이 두 분께 가보라고 하셔서요. 뭔가 전해주실 거라고 하시던데요."
그들은 다시 얼굴을 마주보았다.
"야니는 상인들을 만나러 간 것이 아니었나?"
"아냐, 맞아. 아까 분명 거기로 갔다가 곧장 마을 입구에서 합류하자고 말했다고. 아직 시간이 안 됐잖
아."
그렇게 말하면서 뭔가 의심쩍다고 생각한 조아킴은 고개를 들어 급사의 얼굴을 바라보려 했다. 테이블
에 손을 내려놓는 순간이었다.
쿡!
"으아아아악!"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홀 전체가 조아킴의 절박한 비며에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다. 그리고 놀라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테이블에 놓인 조아킴의 손등에 단도가 깊숙이 박혀 있었다. 얼마나 세게 박았는지 테이블까지 뚫고
들어갔다. 벌건 피가 손바닥 아래에서 흘러나와 무늬처럼 번져갔다.
예프넨은 혼란의 틈을 놓치지 않고 잽싸게 조아킴의 허리에서 롱소드를 뽑아들었다. 한 손은 여전히
조아킴의 손을 꿰뚫은 단도를 쥔 채였다. 오랫동안 강한 전사가 되도록 훈련은 받은 예프넨은 양손을
어느 정도 막힘 없이 썼다.
"누, 누구냐!"
윌수가 벌떡 일어나 검을 뽑아들었다. 그는 이미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있었다. 조아킴을 지키려는 것보
다는 자신의 안위가 우선인 것 같았다.
예프넨은 기둥을 등지고 섰다. 그리고 냉랭하게 말했다.
"술에 취했다고 벌써 잊었나."
"너, 너는!"
조아킴이 비참하게 부르짖었다. 예프넨의 왼손이 단도를 움켜쥐고 놓지 않은 까닭에 그는 어떤 행동도
취할 수가 없었다. 윌스는 눈이 재빠르게 예프넨의 주위를 훑었다. 인질이 될 수 있는 보리스를 찾는 모
양이었다.
예프넨이 차갑게 말했다.
"...어디 있지? 너희들이 가지진 않은 것 같군."
긴 대화가 필요 없었다. 그때 윌스가 짜르기로 밀고 들어왔다. 예프넨은 한 손만으로 조아킴의 칼을 휘
둘러 윌스의 공격을 능숙하게 막아냈다. 바스타드 소드인 윈터러를 쓰던 그의 손에 롱소드는 오히려 가
벼웠다. 그의 손에서 검은 춤추듯 놀려져 세 번의 연속된 공격을 막아냈다. 자리를 옮길 필요조차 없었
다.
그러면서도 예프넨은 은근히 어디선가 날아올지도 모를 로마바크의 석궁을 주의했다. 그 독이 든 석궁
의 위력은 이들을 만난 날 밤에 충분히 본 터였다. 확인되지 않은 야니카의 칼솜씨보다 그의 석궁이 더
두려웠다.
"어디 있지!"
이번에는 예프넨이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홀의 사람들을 압도하고도 남을 감정이 담긴 목소리였다.
"네놈이 알 거 없다!"
윌스의 공격을 한 차례 더 막아낸 예프넨이 내뱉듯 말했다.
"치졸한 도둑놈 주제에 이것까지 하나?"
그러면서 그는 조아킴이 낮은 의자를 한 차례 세게 걷어찼다. 비명이 홀을 뒤덮었다. 테이블에 박힌 손
의 상처가 찢어지는 고통이 대단했던 것이다.
이쯤 되자 사람들은 상관하기 싫다고 생각했는지 슬슬 홀을 빠져나갔다. 예프넨은 일을 빨리 끝내겠다
고 마음먹고 조아킴을 향해 말했다.
"말해라. 아니면 손목을 잘라버린다."
그런 협박은 예프넨으로서도 평생 처음 해보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오늘 평생 처음 해보는 일을 너
무도 많이 했다. 처음부터 모든 일이 그의 천성에 맞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했다. 오직 한 사람에
게 뭔가를 깨닫게 해 주고 싶어서였다.
"......"
조아킴은 오른손잡이였다. 오른손을 잃는다면 다 앓는 것이다. 예프넨의 태도로 보아 오재 지체할 것
같지도 않았다. 동료인 윌스는 이미 공격에 별로 열의가 없었다. 갑자기 나타난 적이 쉽게 제압할 수 있
는 상대도 아닌데다, 여차하면 조아킴을 버리고 야니카 등과 합류해서 달아나면 그만인 것이다. 손해는
없었다. 어차피 돈을 바라보고 모인 사이라 동료애 같은 것도 별로 없었다.
"말하기 싫은가?"
예프넨이 검을 빠르게 쳐들었다. 그 검은 조아킴의 것이고, 따라서 위력이 어떤지는 조아킴 자신이 가
장 잘 알고 있었다. 날도 잘 갈아두었었다. 남의 검보다 자신의 검이 몸에 박힌다는 사실이 더욱 끔찍하
게 느껴졌다.
"그 검...야니카가 갖고 있어."
윌스는 기분 나쁘다는 듯 다시 두 걸음 물러나 검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났다. 그러더니 소리쳤다.
"우릴 배신하는군! 야니카가 널 가만히 두지 않을 거다!"
조아킴은 부르르 떨더니 마주 소리질렀다.
"네놈이 먼저 나를 버리잖아! 가서 야니카에게 전해! 계약은 끝이라고 말이다!"
"야니카 고스가 네 멋대로 계약을 끝장내게 내버려둘까"?"
윌스는 뒷걸음으로 물러서서 입구까지 갔다. 그리고 나가기 직전에 다시 한 번 외쳤다.
"전부 목들 잘 보관하고 있으라고! 검은 장갑의 야니카가 네놈들의 목을 받으러 갈 거다!"
윌스는 문을 열더니 빠른 걸음으로 가 버렸다. 어쩐지 자신 역시 뭔가를 피해 달아나려는 듯한 걸음이
었다.
"저런 놈이야말로 최악인데...이렇게 될 줄 알았지. **, 그런 더러운 계략에 말려드는 것이 아니었어."
조아킴은 불쾌한 듯 중얼거리더니 현기증을 느끼는 듯 눈을 잠시 감았다가 떴다. 피가 많이 흘러서 이
제는 테이블 밑에까지 고였다. 그는 내뱉듯 말하기 시작했다.
"야니카는 흥정하러 갔지만 형식적인 행동일 뿐이고, 실제로는 자기가 차지할 생각일 거다. 로마바크도
검이 탐났겠지만 자기는 검이 아니라 석궁을 쓴 처지고, 해서 검을 팔아서 이익을 나누자고 우겨댔지.
그 자식, 야니카의 비위를 거슬려서......"
조아킴은 갑자기 자신의 처지를 생각해 냈는지 목소리가 처졌다.
"야니카는 무시무시한 여자다. 나도 그리 무사하진 못하겠지."
예프넨은 마음에 동정심이 일어나는 것을 억눌렀다. 아차피 이자 역시 윈터러를 빼앗는 데 한 몫 담당
한 놈일 뿐인 것이다.
"자정 언저리에 마을릐 북쪽 입구에서 야니카를 볼 수 있을 거다. 아마 그 때쯤엔 야니카가 거슬리게
구는 로마바크의 머리를 이미 날려버렸을 지도 모르지. 그 여자 성질이라면 그러고도 남으니까."
예프넨은 이 자들의 조악한 동료 관계에 역겨움을 느끼며 아미를 찌푸렸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침이
쓰게 느껴졌다.
"그렇다 해도 야니카 혼자는 아니야. 용병단이 와 있을 거다. 너희들을 못 붙잡았으니 야니카에게 따지
려 할 테고, 그 상황에서 너희들이 나카나면 야니카는 옳다구나 하고 너희들을 그들에게 넘겨버린 다음
튀어버릴 거야. 내가 해줄 수 있는 얘긴 이게 전부다."
예프넨은 단도를 움켜잡더니 힘껏 다시 뽑아냈다. 칼날에 핏방울이 엉겨 있었다. 이 단도는 그리 좋은
것이 아니어서 그가 그토록 힘을 다해 박지 않았다면 손바닥을 뚫고 테이블까지 들어가지 못했을 것이
다. 그만큼 조아킴의 상처도 너덜너덜했다.
조아킴은 아직 무기가 없는 탓인지 잠자코 있었다. 그때 머리 위에서 예프넨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윈터러를 찾지 못한다면 분명 이 행동을 후회하겠지만, 가시오. 다시는 만나지 맙시다."
조아킴은 손바닥을 감싸쥔 채 술집 밖으로 나갔다. 테이블과 바닥에 흐른 피를 보며 예프넨은 울컥 욕
지기가 치밀어 올랐지만 꾹 눌렀다. 어쩔 수 없는 수순이다. 이럴 수 밖에 없는 거다.
밖으로 나가며 그는 보리스를 불렀다.
"형......"
약속한 대로 보리스는 모두 보고 있었다. 뒤뜰에 쌓여 있던 상자를 타고 주방으로 넘어 들어가 구걸하
는 체 하면서 형이 하는 행동을 모두 보고 있었다.
그러나 보리스는 모든 것을 보고도 쉽게 믿어지지가 않았다. 사과를 던져 주던 야니카와 황금 팔지 하
나에 고대의 왕국을 이야기하던 그들..잠시 봤을 뿐인 그들을 신뢰해서가 아니다. 아무런 적대감도 없었
는데, 친하다고는 할 수 없어도 분명 우호적인 태도를 보여 주었고 이쪽에서도 그렇게 대했는데, 어째서
그런 짓을? 갑자기 윈터러가 탐이 났기 때문에?
아니야...그런 것은 아냐. 그들이 모닥불에 함께 둘러앉았을 때 조금이라도 윈터러에 신경 쓰는 기색이
있었다면 예프넨이 재빨리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이 결과는 뭔
가.
설마. 그들은 처음부터 모든 것을 계획하고 노렸던 거였나? 계획적으로 접근해서 그들 형제의 경계심
을 풀고, 교묘하게 속여 모든 것을 빼앗으려 했나?
왜...왜 그런 식으로 좋은 감정을 상해야 하는데?
그까짓 보물 따위가 다 뭔데?
형제는 어두운 길거리로 나왔다. 보리스는 윌스가 사라진 방향을 손으로 가리켜 준 뒤 침묵했다. 예프
넨이 한참 후 말했다.
"쓰지."
짧은 말이지만 의미는 모두 함축되어 있었다. 보리스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더욱, 더...쓰디쓸 거다. 점점 더, 모두 다......"
예프넨은 단도를 내버렸다. 솔직히 더 갖고 있을 용기가 없었다. 그도 본래는 마음 약한 젊은이 였다.
지금과 같은 행동을 할 수 있게 하는 지독한 동인만 아니라면, 그 누구의 강요였다 해도 스스로의 뜻으
로 이런 행동을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쓰디쓴 인생이겠지......
초조하고 답답하고 안타깝고 불안했다. 형이라는 자가 동생에게 해 줄수 있는 것이라고는 겨우 이것뿐
이라는 것이, 그리고 그것조차 오래 가지 못하리라는 것이.
예프넨은 피가 묻은 손을 내려다보고는 그 손을 보리스의 눈앞에 내밀었다.
"봐라."
보리스는 가라앉은 눈으로 그것을 보고 있었다.
"형도 할 수 잇는 일인 거야. 아버지뿐만 아니라...형도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거다."
"......"
" 너도 마찬가지야."
갑자기 한 쪽 가슴이 쿡 하고 아파 왔다. 보리스는 눈을 들어 형을 보았다. 그리고 형도 자신과 똑같은
표정을 하고 있은 것을 알았다.
"무언가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무슨 일이든 할 수 있게 되는 거지. 그러니까 너도, 너도 너 자신을...
소중하게 여겨라. 어떤 보물보다도, 윈터러나 그 밖에 무엇보다도 소중한 건 너 자신이니까. 형이 너를
위해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것처럼. 너도 너 자신을 위해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어야 하는 거다."
보리스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가슴속에 불안한 예감이 서서히, 느리지만 분명하게 몰아쳐 왔다.
"너 자신을 힘껏 지켜라...... 결코 죽지 않도록, 결코 버려지지 않도록... 결코 아프지 않도록, 다치지도
않도록......"
할 수 있는 한, 힘껏 살아남아라.
미치도록 힘겨운 아 세상 속에서, 그 누구보다도 오랫동안, 견디고, 끝까지 살아남아라.
4.용병단의 작은 소녀
자정에 그들은 마을 어귀에 있었다.
보리스는 자신의 어깨를 감싼 예프넨의 손이 차갑다고 느꼈다. 손뿐이 아니라 팔과 가슴과 옆구리조차
그의 몸보다 싸늘했다. 형제는 마을의 북쪽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농가의 야트막한 지붕 위
에 올라가 있었다. 아래에 사람이 있을 테니 기척을 내어서는 안 되었다.
보리스는 생각했다. 아마도 눅눅한 밤공기 탓일 것이다. 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오늘밤은 최근 유래
없이 서늘한 날씨였다. 이미 가을이라고 느낄 정도였다.
며칠 더 있으면 차 오를 달이 수면처럼 갠 밤하늘에 떨어진 목걸이추인 양 박혀 있었다. 주위에 점점
쏟아진 은빛 별들은 흩어진 목걸이를 이었던 구슬 끈.
이윽고 예프넨의 눈이 찾던 자를 포착했다.
"......"
이제부터야말로 어려웠다. 아직까지 솜씨를 ** 못했지만 야니카고스가 그날 저녁 보았던 것처럼 단
순히 소탈한 모험가가 아니라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이상 더욱, 더.
그들의 시야가 닿는 곳에서 야니카는 그렇게 나타났다. 봤던 것과 다를 것 없어 보이는 가뿐한 걸음걸
이로 입구까지 왔다. 그리고 경비병과 뭔가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돌려 누군가
에게 손짓했다. 어둠 속에서 예상을 어그러뜨리고 로마바크가 여전히 살아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일이 어렵겠구나.
당연하 직감이었다. 예프넨은 아직 정체를 알 수 없는 야니카보다 저 끔찍스런 독을 바른 로마바크의
석궁이 더 신경이 쓰였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윌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야니카와 로마바크는 나란히 입구 근처의 나무 밑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자못 친구한 태도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시시덕거렸다. 낮은 목소리라 내용은 들리지 않았지만 달이 비교적 밝아 충분히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예프넨은 그러고도 한참을 살피고 있었다. 야니카의 짐에서 아직 윈터러를 발견하지 못한 까닭이었다.
허리에 검이 매어져 있긴 했지만 예의 흰 칼집은 아니었다. 눈이 멀기라도 하기 전에는 못 알아볼리 없
는 예프넨이었다.
그때, 보리스가 형의 팔을 툭툭 쳤다.
"저기."
드디어 어둠 속에서 여러 사람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처음 나타난 자들만도 대략 열 명 이상은 되었다.
그러고도 계속해서 나타났다. 거인처럼 키가 큰 자, 자루 긴 낫처럼 생긴 싸이드를 든 자. 로브를 바닥
에 질질 끄는 자, 뿔 달린 높직한 투구를 쓴 자......
레코르다블에서 왔다는 용병단이 틀림없었다. 척박한 사막 국가인 레코르다블에는 통일된 규칙 없이
수십 명에서 수백 명까지 다양한 숫자로 구성되는 크고 작은 용병단들이 흔했다. 그 가운데 많은 숫자
를 모아 정예 조직을 갖게 되는 용병단도 있었고 그런 자들이 심지어 레코르다블의 권력까지 좌지우지
한 일도 있었지만. 역시 대부분의 용병단들은 쉽게 만들어 졌다가 금방 흩어지는 불확실한 조직에 불과
했다. 그들은 돈을 내는 자만 있다면 대륙 어디로든 갔다. 아마 꺼리는 곳이 있다면 저 악명 높은 필멸
의 땅. 모탈 랜드 정도랄까.
이름 높은 용병단 몇은 대륙 각 국가에서도 거액의 몸값을 내고 데려다 썼다. 효과는 아주 좋았다. 이
사막의 전사들은 해전을 제외하고는 어떤 전투에서도 강인한 생명력과 끈질긴 전투욕, 그리고 적에 대
해 필요이상의 잔인함까지 보여 주어 고용주들을 만족시켰던 것이다.
저들 역시 지금은 수십 명 정도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큰 세력을 가진 자들일지도 몰랐다. 조금도 방심
할 수는 없었다.
갑자기 야니카가 일어나더니 용병단을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그래, 볼일 있다고?"
어두워서 정확히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용병단의 규모는 대략 4,50은 되는 듯했다. 비록 스무 명가량의
적을 단숨에 해치웠던 야니카와 로마바크지만 이들은 동네 깡패들이 아닌 전쟁으로 단련된 전사들이었
다. 비위를 거술러 싸움이 벌어진다면 불리한 것은 역시 두 사람 쪽이었다.
용병단 쪽에서 한 남자가 천천히 걸어나왔다. 그는 야니카보다 머리 하나만큼이나 장대했다. 머리는 번
질거리는 대머리였는데 투구는 쓰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다가오더니 횃불을 두 개 올렸다. 그로서 예프넨과 보리스도 상대방을 잘 관찰할 수 있게
되었다. 두목으로 생각되는 자는 이상하게도 갑옷은 입지 않았다. 대신 몸 곳곳의 관절마다 보호대가 부
착되어 있었다. 어깨, 팔꿈치, 손목, 무릎, 발뒤꿈치 등등.
손에 쥔 것은 길쭉한 창이었다. 창이라면 비교적 장거릴에서 공격 할 수 있는 무기이고. 따라서 몸을
가볍게 움직이는 쪽에 좀더 초점을 두고 무장한 모양이었다. 야니카는 한 걸음 걸어나왔다.
"이거, ; 호아금 창날' 의 데라키 대장을 직접 뵙다니 무한한 영광인데."
그러더니 그녀는 약간 과장되게 허리를 굽히며 궁정식 절을 했다. 데라키 대장이라는 자는 답례도 하
지 않은 채 무뚝뚝하게 입을 뗐다.
"손해를 벌충해라."
야니카는 몸을 바로 세우더니 허리에 손을 넞고 목을 한 바퀴 돌렸다. 여자인데도 우드득, 하는 소리가
이곳까지 들렸다.
"손해? 무슨 손해?"
"너희가 팔기로 한 자들이 도망쳤다."
데라키 대장의 목소리는 음산하게 느껴질 정도로 저음이였다. 데라키 대장의 뒤로 두 명이 검을 찬
자가 다가오더니 검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상대를 위압하려는 태도인 모양이었다. 또한 그 뒤에는 수십
명의 한패들이 있었다.
그러나 야니카는 조금도 움츠러르지 않은 채 대수롭잖다는 듯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아, 그래? 하지만 그건 늦게 간 너희 잘못 아닌가? 아니면 놈들을 지키고 있던 자들이 어수룩해서 그
런 거이거나 말이지."
데라키 대장이 뭐라고 말하기 전에 그녀는 말을 맺듯 재빠르게 덧붙였다.
"어느 쪽이든, 우린 평소 하던 방식대로 인수를 마친 거잖아. 우리 할 일은 다했다고. 그 뒤에 일까지
우리가 책임져야 하나?"
그 말을 듣고 보니 야니카 일행이 이런 식으로 사람을 납치해서 용병단에 팔아먹은 것은 처음이 아닌
모양이었다. 지켜보던 예프넨은 싸늘한 눈빛으로 이마를 찌푸렸다.
그리고 데라키 대장이 다시 말했다.
"우리 손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것만이 분명한 사실이다. 손해는 너희가 벌충해라."
"억지 부리지......"
야니카가 뭐라 말하려는 순간 뒤어서 로마바크가 끼어들었다. 그는 아마 비굴한 웃음을 입가에 띠었으
리라 생각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지들 말고...그래, 데라키 대장님, 우리가 어떻게 손해를 메워주기를 바라는 거요? 일단 말이라도
들어 봅시다."
데라키 대장이 말했다.
"두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로 우리가 준 돈의 두 배를 내놓아라. 너희 때문에 바쁜 일정이 엉망이 되었
으니 배상을 해야 한다. 그게 싫다면."
"싫다면?"
벌써부터 야니카는 불쾌하다는 듯 불쑥 되물었다.
"너희가 대신 용병단에 들어와 일을 해서 값을 치러라."
"뭐야!"
야니카가 울화가 치말어 소리를 지르는데 로마바크가 재빨리 막았다. 지금 용병단의 비위를 건드릴 때
가 아닌 것이다. 황금 창날의 데라키 대장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성격의 사람인지는 두 사람 모두 충분
히 알고 있었다. 야나카가 자신의 실력을 믿어서인지 아니면 본래 성품 탓인지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것에 비해 로마바크는 자신의 처지를 잘 깨닫고 있었다. 그는 데라키 대장을 향해 애써 부드러운 목소
리로 말했다.
"손해가 있으시다니 물론 우리가 배상해 드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황금 창날과 우리 한두 해 거래
한 사이도 아니잖습니까? 하지만 아시다시피 야니카와 저는 용병단의 조직에 몸담을 만한 성질이 못됩
니다. 혼자 다녀버릇한 저희 같은 자들은 오히려 대장님의 일에 방해만 될 겁니다. 좋은 결과는 오지 않
을게 뻔하죠. 하지만 전적으로 저희 잘못은 아닌데 두 배나 되는 배상도 조금 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저희가 받는 돈을 그대로 돌려드리는 선에서 해결할 수는 없겠습니까?
데라키 대장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안 된다. 돈을 내던가. 일을 해라."
야니카가 어깨를 부르르 떨며 성큼 앞으로 나서려 하는 것을 로마바크가 다시 막았다. 그 역시 이맛살
을 찌푸리고 좋은 방법이 없나 궁리하는 중이었다. 그는 다시 제안했다.
"그럼, 본래 가격의 절반만큼 더 쳐 드리지요. 하룻밤도 되지 않는 사이에 1.5배입니다. 어디에 걸어도
그 이상의 수익은 힘들죠."
"로마바크!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왜 우리가 저들에게 그렇게 많은 돈을 줘야 해!"
"야니, 제발 좀......"
그러나 로마바크는 야니카를 말리는 데 실패했다. 야니카는 거칠게 로마바크의 어깨를 밀어젖히고 데
라키 대장 앞으로 나와 어깰를 폈다. 그리고 오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돈은 도로 주겠어. 그거나 갖고 **."
데라키 대장은 다시 말했다.
"두 배다."
"이런 사기꾼 같은 법이 어디 있어! 황금 창날이 많이 컸군 그래! 이야니카 고스가 우습게 보이나 본
데, 그런 식으로 해서 어디 후환이 없나 보자!"
한바탕 소리지른 야니카는 씩씩거리다가 다시 외쳤다.
"치졸한 지식들아. 너희 돈 여기 있다!"
품속에서 금화가 든 듯한 묵직한 주머니가 나와 바닥에 내던져졌다. 데라키 대장 곁의 한 부하가 다가
가 주머니를 집고 두 사람이 함께 금화를 세었다. 자세히 셀 필요도 없었다. 데라키 대장이 입을 열었는
데 목소리를 실로 굉음에 가까울 정도로 울렸다.
"너희 따위 건달 용병들이 있든 없든 조금이라도 신경 쓸 황금 창날이 아니다. 돈도 몸도 내놓지 않겠
다면 네놈들을 죽이겠다."
로마바크는 신변의 위협을 느끼자마자 재빨리 뒷걸음치며 석궁을 준비했다. 야니카는 펄쩍 뛰어 물러
나며 여전히 신랄한 한 마디를 던졌다.
"죽여 보시지! 그렇게 쉬울까나?"
순식간에 황금 창날의 용병들이 두 사람을 반원형으로 포위했다. 분분히 무기를 꺼내드는 소리가 사방
에서 울렸다. 로마바크는 야니카에게 다가가며 절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제발! 정말로 여기서 죽고 싶은거야?"
야니카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신랄하게 내뱉었다.
"그럼 이대로 노예나 된 것처럼 끌려갈 생각이냐?"
"그게 아니라고... 이봐, 꼭 끝까지 따라갈 필요는 없잖아, 안 그래?"
야니카는 로마바크가 암시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금방 알아챘다. 일단 따라가는 체 하다가 기회를
봐서 달아나자는 것이다. 두 사람 정도의 실력이라면 보초 몇 명 뚫고 달아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자
존심 때문에 얼굴이 가렵긴 하지만 이런 곳에서 개죽음 당하는 것에 비하랴.
" 잠깐, 데라키 대장! 하나 묻겠는데 설마 우리더라 죽을 때까지 당신들을 따라다니란 얘기는 아니겠
지?"
갑자기 태도를 바꿔 야니카는 묻자 데라키 대장이 여전히 무시무시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첫 임무에서 공을 세우면 풀어 주겠다."
사실은 이랬다. 총 백여 명도 넘는 용병단을 휘하에 거느린 데라키 대장이 굳이 두 사람을 데려가려
하는 것은 계약상의 문제 때문이었다. 트라바체스 공화국의 칼마세 의원이 그들 가운데 40명을 고용했
는데 숫자를 맞춰서 이동하는 도중 사고로 두 명이 희생되었다. 이곳까지 와서 다른 의뢰처에 보낸 부
하들을 부르기도 곤란해진 그는 현지에서 사람을 사서 숫자를 채울 계산을 했다.
예프넨과 보리스를 사게 된 것도 물론 그것 때문이었다. 보리스는 어린애에 불과해서 쓸모가 없는데도
일단 계약상의 숫자만 맞추면 억지 쓰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대륙 최고의 공격력을 가지고 있다는 레
코르다블의 무장 용병들인 것이다. 사소한 문제로 그들을 화나게 만들고 싶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
다.
"좋아!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가서 한바탕 하면 되다는 거지? 까짓거, 못할 것도 없지. 나중에 딴소린
말라고."
일촉**의 상황이 해소되려는 순간이었다. 그때 예프넨의 눈이 야니카의 등뒤에 불쑥 튀어나온 갈쭉
한 자루에 가 닿았다. 지금까지 겉옷 안쪽으로 꽂혀 있었던 탓에 제대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갓무속
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치미는 것을 느낀 그는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몸을 숨겼던 곳에서 벌떡 일어나
야트막한 지붕에서 뛰어내렸다.
"멈춰!" 모두 그 목소리를 들었다. 야니카가 가장 먼저 소리쳤다.
"뭐야, 달아난 게 아니었잖아!"
보리스는 엉겁결에 형을 따라 뛰어내려 트인 곳으로 나갔다. 예프넨은 조아킴에게서 빼앗은 칼로 야니
카를 가리키며 외쳤다.
"사기꾼 같은 여자! 내 검을 내놔라!"
그러나 야니카는 이들이 나타나 줘서 오히려 잘됐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녀는 데라키 대장을 쳐다봤
다.
"여기 당신들이 찾던 사람이 나타났잖아? 그럼 우린 그만 가도 되는 거겠지? 아참, 방금 돌려준 돈도
도로 내놓으라고."
예프넨은 겨눈 칼을 거두지 않은 채 분개한 목소리를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너희가 무슨 근거로 자유민을 사고 파는 거냐?"
여긴 노예제가 없는 나라라는 것을 잊었나!"
곁에서 로마바크가 키들거리며 거들었다.
"우습지도 않은 소리는 집어치워. 실력이 모자라 붙잡혀 팔렸으면 얌전히 말을 들을 것이지. 어디서 누
굴 가르치려 들어? 어린애 투정은 집에 가서 엄마한테나 해라."
보리스는 어머니의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아이였다. 평소에는 얌전하지만 실제로는 형 못지 않은
고집을 갖고 있는 그는 발끈해서 소리쳤다.
"너희는 우리가 자고 있을 때 비겁하게 행동했잖아! 그게 설마 자랑스러운 거야?"
로마바크는 코방귀를 뀌었다.
"자랑스럽다면 어쩔 테냐? 너희 같은 애송이들이 설사 정면으로 덤볐다 한들, 우리한테 한 칼 거리나
됐을 거 같냐? 집에서 막대기 몇 번 휘둘러 봤다고 건방지게 검을 갖고 다니는 게 아냐."
옆에서 야니카가 까르르 웃음소리를 냈다.
"그러니까 우리가 잘 맡아 줄게, 응? 너희한테는 너무 위험하거든 후후훗......"
"너희가 더 비겁한 건......"
보리스는 창고에 갇혔을 때 들었던 형의 웃음소리를 기억해 냈다. 그는 예프넨이 있는 능력과 무든 힘
을 다해서 그를 보호해 주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 형을 깔보는 자들의 목소리 따위도 싫었
다. 설혹 형이 정말로 애송이에 불과해서 저들에게 상대가 안되더라도, 형은 분명 최선을 다해 동생에게
부끄럽지 않게 행동하려 애썼으니까.....
그걸로 충분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비겁한 자들에게 당하지 않기 위해 미리 상대를 의심해서 경계하는
행동 따위는 지혜로운 것을 떠나서 형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형은 그건 사람이 아닌 것이다.
"우리가 너희를 믿는 마음을 이용하려 했다는 거야! 사실 너희는 처음부터 다 알고서 우리한테 접근한
거지? 그 자들을 해치워 준 것도 실은 속임수였지? 죽인 것도 아니었을 거야!"
말이 입에 붙는 대로 튀어나왔다. 사실 뒤의 말은 지금까지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일도 없었던 사실이
었다. 하지만 로마바크가 석궁을 이용해서 스무 명이나 되는 적들을 순식간에 죽였다는 것, 그게 정말이
라면 왜 여기서 그 능력을 발휘해서 저 용병들을 죽이지 않는 거지? 그땐 정말로 눈 깜짝할 사이였는
데?
"저 저 젓비린내 나는 애**가......"
로마바크는 눈에 띄게 당황한 얼굴이었다. 곁에서 야니카가 팔을 한 번 치자 뒤로 몰러나며 눈을 부라
렸다.
그때, 보리스는 누군가가 자신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고개를 돌리는 순간, 그 눈길은
빠르게 사람들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대신 데라키 대장의 눈 또한 자신에게 향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뒤에 수십 명의 용병들이 나무처
럼 빽빽하게 서 있었다.
멀리서 보던 것에 비해 바로 그들을 둘러싸고 선 용병들은 훨씬 더한 위압감을 주었다. 특히 가까이서
보니 데라키 대장의 얼굴은 실로 무시무시했다. 왼쪽 눈가로부터 관자놀이로 이어지는 움푹 패인 칼자
국을 따라가니 그 자리에 있어야 할 귀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넓게 째진 눈매에 박힌 부리부리
한 눈알은 약간만 움직여도 뒤까지 돌아볼 수 있을 듯했다.
그는 그런 눈으로 보리스를 보다가 곁에 선 예프넨을 흘끗 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그가 입을 열어 뜻밖의 말을 할 때까지는.
"서로 의견이 다르군 그래."
야니카가 문득 불길함을 느꼈는지 먼저 데라키 대장을 보며 외쳤다.
"무슨 소리야! 발리 일을 처리하라고! 우린 갈 길이 바쁘니까 말이지. 어서 돈이나 내놓아!"
데라키 대장은 돈을 주는 대신 천천히 팔짱을 꼈다. 그리고 말했다.
"다시 한 번 서로 공격해서 한쪽을 사로잡아 팔아라. 이긴 쪽에게 돈을 주고 진 쪽은 끌로 가겠다."
"뭐야!"
야니카가 분개해서 어쩔 줄 모르는 동안 예프넨이 오히려 상황을 빨리 파악했다. 속사정은 모르지만
저 험상궂은 용병 대장이 그들의 편을 들어준 것이다. 그것이 그리 오래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생각할 때 한**삐 받아들이는 것이 최선이었다.
예프넨은 단장 한 발 물러서며 그녀의 공격에 대비하는 자세를 취했다. 아무리 증오스럽다 해도 아직
싸울 의지가 없는 상대를 먼저 공격할 그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야니카를 이길 수 있을까?
"**, 시체로 만들어서 넘겼다고 날 원망하진 말라고!"
화난 목소리를 외친 야니카는 등뒤에서 윈터러를 뽑으려다가 생각을 바꾼 듯 허리에 꽂힌 칼을 잡아
뺐다. 그녀도 바보가 아닌 이상 여기서 좋은 검을 선보였다가는 그대로 데라키 대장의 손으로 굴러 들
어가게 된다는 점을 간과하지 않았다.
시작한다는 말도 없이 둘은 동시에 격돌했다.
"......"
보리스는 야니카의 검이 감히 눈으로 따라가기 힘들 정도의 속도를 내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첫 일격
을 예프넨이 힘겹게 막아내는 것도 보았다. 그러나 두 번째는 아니었다. 야니카의 검은 눈 깜짝r할 사이
에 예프넨의 오른쪽 어깻죽지를 찔렀고, 목과 턱에 걸쳐 스친 상처를 냈으며, 다시 한 번 오른 손목에
명중했다. 그리고 나서 노련하게 한 박자 뒤로 물러나며 눈을 번쩍인 그녀는 다시금 폭풍 같은 기세로
돌격해 왔다.
적지 않은 피가 흘러내렸지만 상처들은 치명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예기를 꺽기에는 충분한 공세였다.
예프넨은 저도 모르게 공격보다는 방어에 치중하고 있었고 그런 그를 마음대로 요리할 자신이 있다는
듯 야키카의 입가에는 가벼운 미소마저 떠올랐다.
보리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가 얼굴이 하얗게 되며 안절부절못했다. 그런 그가 다시 한 번의 시선을 느
낄 수 있었던 것은 실로 이상할 정도로 예민한 감각인 셈이었다. 그러나 보리스는 그것이 자신에게 주
어진 놀라운 재능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
그가 고개를 돌려 시선을 찾아내려는 순간, 형이 위기를 맞는 것이 보였다. 보리스는 저도 모르게 짧게
비명을 질렀다.
"아!"
야니카의 칼이 예프넨의 목을 노리고 베어져 들어오는 순가. 예프넨은 이미 방어선 침범을 허용해 버
렸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 거리에서 이미 검은 소용이 없었다. 팔조차도 늦다. 끝장인가?
그때. 무슨 생각이었는지 예프넨은 몸을 뒤로 젖히며 제자리에서 껑충 뛰어올랐다. 그런다고 피해지는
공격이 아니었다. 야니카의 칼은 목에서 어긋나 곧장 예프넨의 가슴을 푹 찔렀다.
"!"
그리고 야니카는 흠칫 놀라며 제자리에서 굳어졌다. 그때 예프넨은 가슴에 꽂힌 듯했던 칼에서 비스듬
히 미끄러지더니 야니카을 끌어당겨 껴안아 버렸다. 보리스도, 그리고 용병들도 놀랐다.
"이잇!"
야니카는 금방 빠져나가지 못했다. 그녀의 등뒤로 돌아간 예프넨의 손에는 본래 조아킴에게서 빼앗은
칼이 들려 있었다. 그러나 그는 칼을 놓아버리고 야니카의 등뒤에 있는 위커러의 손잡이를 잡았다. 마침
용병들에게 등을 보이고 선 까닭에 그들에게는 단지 칼 한 자루가 바닥에 떨어지는 것만 보였다. 그것
은 언뜻 보아 예프넨의 상처를 견디지 못하고 무기를 떨어뜨린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야니카는 알고 있었다.
"으으윽......"
칼집에서 뽑아내지 않은 윈터러가 갑자기 강력한 냉기를 내뿜어 그녀를 꼼짝할 수 없게 만들어버렸다.
야니카의 실수는 의심할 바 없이 한 가지였다. 바로 예프넨은 아직도 옷 안쪽에 입고 있는 스노우가드
의 존재를 몰랐다는 것.
잠시 떨어졌던 윈터바텀 킷은 다시 한 사람의 소유로 돌아가는 순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힘을 발휘했
다. 예프넨이 윈터러를 칼집 채로 뽑아내고 야니카를 밀치자 그녀는 마치 석궁으로 변한 것처럼 그 자
리에서 쓰러졌다.
예프넨은 호흡이 거칠었다. 보리스는 형에게서 눈도 떼지 않고 있다가 형이 야니카를 놓아버리자 당장
그에게 달려갔다.
그때였다.
"흐음."
데라키 대장이 가볍게 목젖을 울리는 순간, 흰 깃 달린 재빠른 화살과 같은 것이 두 형제의 눈앞을 번
쩍, 스치고 지나갔다. 반짝임이 남긴 착시의 잔상이 채 가시기도 전에 날카로운 비명이 울렸다.
"으,으윽!"
그것은 로마바크의 목소리였다. 그제야 돌아본 형제는 그가 이미 석궁에 볼트를 준비해서 쏘려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팔이 마비된 듯 덜덜 떨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그의 팔에 꽂힌
세 개의 작은 단도를 알아보는 데는 잠시의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다시 돌아보았을 때, 데라키 대장의 곁에는 방금 진**만 해도 없던 새로운 사람이 서 있었다.
데라키 대장이 그를 불렀다.
"나야."
이름을 불린 당사자는 대답 없이 고요한 눈동자를 내렸다가 보리스를 다시 한 번 쏘아보았다. 스스로
도 알 수 없는 직감으로 인해 보리스는 그때까지 자신을 주시하던 눈동자의 주인이 그 앞에 서 있음을
깨달았다.
그 손에 로마바크의 팔에 박힌 것과 똑같은 단도가 세 개 더 집혀 있는 것을 본 예프넨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저토록 정확한 솜씨를 가진 상대는, 겨우 열 살이나 되어 보일까 싶은 조그마한 소녀가 아닌
가?
길게 땋아 늘인 은빛 머리카락이 어둠 속에서 유난히 눈에 띄었다. 머리에는 긴 천을 둘둘 감아 만든
'터번' 이라고 하는 것을 썼는데 이는 레코르다블에서도 어떤 특정 종교를 가진 사람들만이 사용하는 머
리장식이었다. 먼지에 바랜 듯한 보라색 터번은 소녀의 선명한 보랏빛 눈동자와 묘하게 어울렸다.
"저 두 놈을 잡아라."
데라키 대장의 명령이 떨어지자 두 명이 앞으로 나와 꼼짝도 하지 못하는 야니카의 팔을 움켜쥐어 일
으켰고, 다른 세 명이 로마바크에게 다가갔다. 그는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덜덜 떨리는 팔로 석궁을 들
어 그들을 겨냥했다. 그리고 악의로 인해 비틀린 목소리로 외쳤다.
"이럴 수가 있는 거냐! 그동안 거래해오던 우리를 헌신짝처럼 내버리고 본 적도 없는 젖내나는 어린앧
르의 편을 들다니! 상황 파악을 잘하는 줄 알았더니만 완전히 맹물이잖아! 빌어먹을 모성애라도 발동된
거냐? 퉤. 더러운 놈들! 퉤,퉤!"
그때 예프넨이 호흡을 고르며 느리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후훅, 훅, 당신은 어머니라는 존재를 아주 시시한 걸로 생각하는 모양이지만...하아...당신 어머
니 앞에 가서도 자신이 이토록 최악의 인간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나? 너는 버러지만도 못
한 놈이니까..목숨 붙어 있는 동안 어머니는 만나지 않는 편이 좋을거다."
로마바크의 얼굴이 비참하게 일그러졌다. 이런 모욕을 받고 상대를 죽여버리지 못하는 것은 이번이 처
음이었다. 믿었던 야니카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하여간 쓸모가 없어졌다. 지금 저 용병들을 따라갔다가
는 언제 빠져나갈 수 있을 지 전혀 모를 판이었다.
그렇지만... **! 따라가지 않을 방법이 전혀 없잖은가!
그때 은빛 머리를 땋아 내린 소녀가 성큼 걸어 앞으로 나왔다. 보리스와 예프넨을 지나쳐 로마바크에
게 다가가던 용병들 근처까지 갔다. 그녀의 발걸음은 가벼우면서도 이상한 기품이 있어서 앳된 얼굴과
자그마한 키에도 불구하고 쉽게 가로막히 힘든 그 무엇이 있었다. 로마바크를 둘러쌌던 용병 가운데 한
사람이 그녀를 돌아보더니 말했다.
"나야트레이. 네가 나설 필요까진 없어."
소녀는 대꾸가 없었다. 입술은 처음과 마찬가지로 꼭 다물려져 있었다. 그녀는 로마바크를 한번 쏘아보
더니 갑자기 몸을 솟구쳐 두 걸음 앞을 찍고 빙글, 방향을 돌렸다. 순식간에 후방으로 돌아 흡사 자신이
던졌던 단도처럼 빠르게 접근하는 것을 본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 다음 동작은 결코 눈으로 볼 수가 없
었다.
언뜻 팔을 휘두르는 듯하더니 길게 땋은 머리채가 허공을 춤추듯 갈랐다. 그것은 타격 계열의 기술은
아니었다. 로마바크는 당황했을 뿐, 비명을 지르지도 쓰러지지도 않았다.
타닥.
어느새 자신이 뛰어든 방향의 반대쪽으로 빠져나가며 바닥을 내리딛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쪽 무릎을
꿇고 왼팔로 얼굴을 가리며 차지한 동장은 흠잡을 데가 없는 완벽 그 자체였다. 걷기 시작할 때부터 체
술을 익히지 않고는 결코 그 나이에 가능한 동작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보리스는 로마바크를 한 번 바라보고서야 상황을 깨달았다. 그의 손에 들려
있넌 석궁을 비롯해서. 심지어 팔에 꽂힌 세 개의 단도조차 뽑혀 사라지고 없었다 소녀는 맨손으로 무
기를 빼앗는 기술의 달인이었다. 그런 기술이 있다는 말만 들었을 뿐, 실제로 보는 것은 예프넨 조차 처
음이었다.
"깔끔해졌군, 잘했다, 나야."
나야트레이. 라는 이름을 가진 듯한 그 소녀는 일어서자 데라키 대장을 향해 가벼운 목례로 답했다. 데
라키 대장은 용병들을 손짓해 불렀다. 더 이상 예프넨과 보리스에게 상관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형
제 역시 그들과 더 이상 어떤 시비도 하고 싶지 않았다.
나야트레이가 데라키 대장에게 걸어가자 아까 말을 걸었던 용병이 그녀를 뒤따라가며 머리를 살짝 쓰
다듬어 주었다. 빨간 머리를 조금 길러 뒤로 **맨, 스믈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였다. 나야트레이라는
소녀는 그를 간단히 올려다보았지만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불쾌한 듯 보이지도 않았다. 지금껏 보인
침착하고 차가운 모습을 생각할 때 그리 쉽게 받아들이지 않을 듯한 일인데도.
용병단은 이윽고 마을 밖으로 사라져 갔다. 나야트레이는 보리스에게 다시 눈길을 주지는 않았다.
5. 긴 자장가
"아마 우리가 피곤한 나머지 방심하고 곯아떨어지게 하기 위해 일부러 밤새 걸어야 하는 먼 마을을 택
한 거겠지."
타고 오던 말도 잃어버리고 갈 곳도 없는 형제가 들판을 걷고 있었다. 트라바체스 남부는 이런 식으로
어떤 곡식이나 작물도 재배하지 않는 땅이 많았다. 잡풀이 무성하긴 해도 애써 가꾸면 버릴 땅은 아닐
텐데, 정치에 ** 이 나라의 국민들은 이미 정성스러운 농사 따위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곳곳에 버려
진 땅 일색이었다.
"역시 그럴까."
예프넨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보리스는 상당히 초췌한 모습이었다. 그들은 마음을 떠날 때 문을 지
키는 보초에게서 이곳에서 가까운 작은 마을이 상당히 여럿인데다 큰 성인 그와레도 있다는 아야기를
들었고, 지금 말하고 있는 것도 그 화제였다.
예프넨은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처음부터 상대를 등쳐먹을 마음으로 접근하는 자가 세상엔 너무 많지."
그러나 형제는 마을을 찾고 있지 않았다. 돈이 없었던 것이다.
어이없는 일이었지만 용병단의 데라키 대장은 약속했던 돈을 내놓지 않고 그대로 사라져 버린 것이었
다. 예프넨과 보리스도 윈터러를 다행히 되찾은 일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돈에 대한 것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게다가 본래 얼마간 갖고 있던 돈 역시 야니카와 로마바크가 윈터러를 빼앗을 때 모조리 털어
간 후였다.
"거기다가 생각해 보면 말야, 우리가 왜 그 많은 사람들에게 쫒기고 있는지 묻지도 않았다. 한 마디로
누가 옳고 그른지조차 따져** 않은 채 스물이나 되는 패거리들을 죽였단 말이야. 실은 죽이지 않았는
지도 모르긴 하지만. 어쨌든 우리가 그 사람들한테 잘못을 저질러서 공격받고 있는 건지도 모르는데 말
야."
예프넨은 고행에서 그랬던 것처럼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동시에 헝클어 뜨렸다.
"보리스가 형보다 더 똑똑하구나."
저녁 먹을 시간이 한참 지났지만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있었다. 마을에서 떠나기 전에 남은 은화를
털어 샀던 마지막 빵을 아침과 점심에 걸쳐 나누어 먹고 나니 이젠 정말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보리스는 살아오며 한 번도 이렇게 배를 곯아 본 일이 없었다. 그러나 배고픈 것보다 그는 형의 기분이
걱정되었다. 자긴 괜찮다고 하고 싶지만 형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은 뻔했다. 말할 것도 없는 최악의 상
황인데 형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좀 쉴까?"
어차피 짐작하고 있던 야영이었다. 제대로 된 짐조차 없는 그들은 커다란 나무 아래 풀이 비교적 고르
게 자란 곳을 골라 앉았다. 담요 한 장 없는 것은 물론, 말에 매어 놓았던 짐이 모조리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불을 피울 부싯돌이나 부싯깃조차 없었다.
둘은 잠시 앉아서 말없이 트인 들판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 어두워서 보이는 거라곤 달빛에 젖은
풀잎들의 끄트머리 뿐이데도 그렇게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보리스느 자신이 언제 잠들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첫 번째 기억은 끔찍한 악몽에 대한 것이었다. 잔인한 손마디가 소녀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전혀 숨을
쉬 수가 없었다.
벗어나려 몸부림 쳤지만 소용없었다. 보리스는 괴로워서 온 몸을 비틀며 다리를 버르적거렸다. 발 끝에
뭔가 차이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은 발치에 엉켰다가 곧 멀찍이 차내어졌다. 그때, 손이 풀렸다.
이직도 꿈과 현실이 구분하지 못한 그는 눈을 감은 채 목구멍이 아플 정도로 가뿐 숨을 몰아쉬고 있었
다. 쥐고 있던 손이 사라진 목덜미에 서늘한 바람이 느껴지고서야 그는 자신이 잠에서 깨어 있다는 사
실을 알았다.
보리스는 슬그머니 눈을 떴다.
캄캄했다. 아직 날이 새지 않았다. 그는 가장 먼저 주위를 두리번거렸고.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고 나
지 발 밑을 내려다보았다. 구겨 박힌 옷 뭉치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천천히 그것을 집어 당겼다. 예프
넨의 겉옷이었다.
아마도 그가 잠든 뒤에 덮어주었으리라는 짐작이 갔다. 눈으로 더듬어 가며 조금 떨어진 곳에 누워 있
는 형이 보였다. 그런데 어딘가 이상했다. 마치 누군가가 힘껏 밀치거나 해서 쓰러지 stkfka처럼 팔다리
가 아무렇게 내던져진 모습이었다.
평소 평은 잠버릇이 거친 사람이 아니였다. 보리스는 흠칫 자신의 목을 조르던 자가 먼저 형을 해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벌떡 일어났다. 다가가서 형을 살펴보다가 코 끝에 손이 대어 보니 약간 거칠
진했지만 다행히 숨을 쉬고 있었다.
흔들어 깨우려다가 먼저 손목을 잡았다. 그런데 손바닥이 이상할 정도로 몹시 따뜻했다. 이마에 손을
대어 보니 빰이나 이마도 따끈했다. 어린 마음에도 자신의 옷까지 벗어주고 이런 야외에서 잠드는 바람
에 열이 나는 건 아닐까 싶어 걱정스러웠다.
보리스는 자신에게 덮어 주었던 형의 겉옷을 가져왔다. 그리고 형의 몸에 덮어준 뒤 조금이라도 따뜻
해지라는 생각에 등을 맞대고 누웠다.
탈진했지 때문인지 잠은 금방 왔다.
다음날 어찌어찌 마을에 다다랐을 때, 예프넨은 보리스의 손을 잡고 망설임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그
리고 사람들에게 금붙이 따위를 사들이는 사람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
보리스는 형의 손에서 여전히 열이 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렇게 봐 선지 얼굴도 수척해진 듯 생
각되었다. 몇 번이고 아픈 건 아니냐고 물었지만 형은 말없이 고개를 가로 저을 뿐이었다. 나중에 동생
이 너무 집요하게 묻자 형은 억지 웃음까지 지어 보였다.
이윽고 사람들이 가르쳐 준 대로 큰길가에 입구가 나 있는 집으로 들어갔다. 휑할 정도로 별다른 물건
이 놓여 있지 않은 집이었다. 좌측에 창고로 올라가는 듯한 사다리가 하나 천장에 난 구명에 걸쳐져 있
을 뿐, 방 구분도 없었다.
저 안쪽으로 나무 상자 같은 것 앞에 의자를 놓고 앉은 한 사내가 끄떡끄떡 졸고 있었다.
"얼마 쳐주시겠습니까."
예프넨이 내민 것은 어머니의 유품인 덮개 달린 거울이었다. 망설이지도 않고 대뜸 꺼내는 것을 보고
보리스가 오히려 놀랐다. 그것은 형이 오랫동안 아끼던 하나 뿐인 유품이었다. 아버지는 아들들이 어머
니를 추억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아서 그런 것을 간직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졸고 있던 사내는 천천히 한쪽 눈을 뜨고 물건을 보다니 갑가지 퍼뜩 잠에서 깨어나며 예프넨의 얼굴
을 쳐다봤다. 그러더니 급히 눈을 비비며 나무 상자 한쪽에 수건 속에서 돋보기를 꺼냈다. 거울을 건데
받자마자 뚜껑에 붙은 사파이어를 유심히 관찰했다.
거울은 고풍스러운 물건이었다. 조개껍질처럼 생긴 상아빛 표면에는 간소한 무늬가 새겨져 있엇고 그
가운데 어두운 청색의 사파이어가 매끈하게 박혀 있었다. 뚜껑 안쪽에는 어머니의 이름 머릿글자가 새
겨져 있었다.
"괜찮은 물건인데. 3백 엘소 내지. 어때?"
예프넨은 충분히 그 이상 가치가 있는 물건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뭐가 반박하면 좋을지 적당한 말을
찾지 못했다. 한참만에 한 말이 이것이였다.
"그건 좀 적은 것...같습니다."
살아오며 한 번도 가격을 흥정하려 해본 일이 없는 예프넨이었다. 물건을 살 때 값을 깎으려 한 일도
없는데, 팔면서 돈을 더 쳐 달라고 하는 것이 어쩐지 굴욕적인 것 같아서 뺨이 다 발그레해졌다.
사내는 예프넨의 얼굴의 흘끗 쳐다보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퉁명스런 목소리를 쏟아 내는 말을 들으며
예프넨은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 지 몰랐다.
"젊은 사람이 새것과 쓰던 것의 차이나 알겠어? 쓰던 것 파는 건데 3백 엘소 이상 받으려 들면 도둑놈
이라고. 내가 그래도 시골 사람이라 잘 쳐주는 거야. 다른 데 가면 절대 2백 70엘소 이상은 안 줘."
"......"
예프넨이 대답을 못하자 그는 계속해서 지껄여댔다.
'게다가 이런 물건을 쓸 법한 귀부인들은 남이 쓰던 물건은 안 사. 기껏해야 술집 계집애들 손에 들어
가거나 아니면 보석만 뽑아서 다른 세공에 쓰는 게지. 또 이런 세공은 유행도 이미 지난 거라고 보석
가치만 치면 1백 엘소나 될까말까할텐데 그나마 세공값을 쳐주는 걸 다행으로 알라고,"
도저히 그앞 에서 다른 논리를 펼 수 있는 예프넨이 아니었다. 그는 보리스의 얼굴을 한 번 내려다보
더니 고개를 숙였다.
"그럼... 그 가격으로 해 주십시오."
"형 ...... ."
예전 같으면 3백 엘소 아니라 3천 엘소를 준다 해도 어머니의 유품을 남의 손에 넘길 에프텐이 아니었
다. 그러나 예프넨은 덮개 거울을 건네주었고 그것이 곱게 천으로 싸져서 사내의 소지품 자루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죽 지켜보고 있었다.
3백 엘소를 담을 주머니조차 없어서 주인 사내는 선심 쓰는 체 하며 무명 주머니를 하나 내주었다. 1
백 엘소 금화였다면 세 개 밖에 안되었을 텐데 주인이 내준 것은 모조리 은화였다. 그걸 주섬주섬 주워
담아서 밖으로 나왔다.
보리스는 형의 옆얼굴을 흘끔 쳐다보며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형은 단지 약간 씁쓸
한 얼굴이었을 뿐이지만 그 얼굴위에 숨겨진 감정을 알아** 못할 보리스가 아니었다. 그가 어떻게든
말을 꺼내보려고 하는데 갑자기 예프넨이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 이제 돈이 생겼으니 뭔가 먹을 수 있겠구나! 뭘 먹고 싶나? 뭐든지 사줄 테니까 얘기해 봐."
"...... "
겨우 3백 엘소 밖에 없는 것을 아는데, 그것도 그 돈이 무얼 팔아서 마련한 것인지 너무도 잘 아는데
보리스의 입에서 말이 쉽게 떨어질 리가 없었다. 배고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가슴
한구석이 허전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묻지 않으려 했던 질문을 하게 되어버린 것도 실은 그것 때문이었다.
"형... 아버지는 언제 연락을 주시는 거야?"
쾌활함을 가장하며 앞장서 걷던 예프넨의 걸음이 아주 잠깐, 미세하게 멈추었다. 그러나 그는 곧 동생
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야, 아무래도... 아버지의 부상을 치료하느라 오래 걸리는 것이 아닐까? 건강해지고 나서 우릴 만나
시려고 말이야."
마치 미리 준비해 뒀던 듯한 대답이었다. 보리스는 형의 눈을 올려다보려다가 급히 시선을 내리깔았
다.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형의 눈가에 가볍게 맺혀 빛나는 것은 눈물이겠지.
"그...래."
고개를 숙인 김에 아예 고개를 끄덕이는 체 하며 대꾸하고 말았다. 예프넨은 다시 몸을 돌려 앞으로
걸었다. 품안으로 넣어진 오른손은 은화가 든 무명 주머니를 꽉 쥐고 있었다.
그래서 그 날 밤은 여관이었다.
점심과 저녁을 제대로 먹어버렸더니 그 많던 은화도 벌써 눈에 띄게 줄어 있었다. 그냥 마른 빵 조각
에 물만 마셔도 괜찮은데, 라고 생각했지만 보리스는 동생에게 좋은 것을 주고 싶어하는 형을 생각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형제는 나란히 놓인 침대에 누워 잠들었다. 그러나 보리스는 또다시 새로운 악몽에 시달렸다. 이번에는
누군가의 손이 자신의 가슴을 움켜쥐고 흔들고 있었다. 숨이 가뻐지면서 기침이 연달아 나왔다. 목이 정
신 없이 휘둘리다가 뒤로 휙 꺾어지는 순간 그는 잠에서 깨어났다.
저도 모르게 곧장 비명이 뛰어나왔다.
"으아악!"
그의 가슴을 움켜쥔 것은 시커먼 그림자였다. 비명을 질렀던 공포도 잠시, 그는 더한 사실을 깨닫고 경
악하여 멍했다. 익숙한 실루엣이었다. 형이었다.
"혀,형...왜...... ."
그러나 말을 통하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예프넨은 동생의 몸을 침대 위로 내
던지듯 밀치더니 이번에는 주먹을 쥐고 힘껏 배를 내질렀다. 그건 평소에 예프넨이라면 어떤 일이 있어
도, 심지어 죽음의 강요한다 해도 결코 하지 못했을 행동이었다.
"음...... ."
보리스는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의 통증을 느꼈으나 더 이상 비명은 나오지 않았다. 그저 형의 손이 움
직이는 대로 나뭇개비처럼 이리저리 휩쓸리고 내던져질 뿐이었다. 아픔보다 심한 것은 정신적인 충격이
었다. 형이 왜, 도대체 왜?
반항하려 해도 열두 살 먹은 보리스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했다. 이는 결코 장난이나 몽유병 정도
가 아니었다. 예프넨은 정말로 동생을 죽여버리려는 것처럼 격렬하게 내던지고는 다시 움켜잡아 흔들고
쳤다. 만일 그 손에 단도라도 하나 쥐어져 있었더라면 보리스는 이미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형의 정신이 이상해지기라도 한 것인가?
"형 ...... 예프...넨...... ."
목소리는 모기소리처럼 가늘기만 했다. 그때 예프넨은 몸을 일으키더니 뭔가를 찾는 것처럼 잠시 동작
을 멈춘 상태였다. 그 순간, 공포에 질렀던 보리스는 원터러의 존재에 대해 생각해 냈다.
"아, 안돼!"
그것은 자신이 살고 싶어서라기보다는, 지독한 실수를 저지른 후 형이 느낄 충격을 막고자 하는 마음
이 더 강했기에 나온 행동이었다. 타박상투성이의 몸으로도 기적인 양 용수철처럼 튕겨 일어난 보리스
는 다짜고짜 두 팔을 벌려 형을 껴안았다.
물론 에프넨이 밀치려 한다면 얼마든지 저 방구석으로도 던져 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상하
게도 그 즈음 예프넨의 몸에 들끓던 살기는 갑작스레 사라졌다. 맥이 풀린 듯한 형의 몸을 놓는 순간,
두어 걸음 비척거리며 걷던 형은 자신의 침대에 풀썩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잠든 것이지도 모른다...... . 보리스는 일어나 조심조심 형에게 다가 갔다. 형의 상태는 어젯밤과 비슷했
다. 얼굴과 손발이 뜨거웠고, 입에서는 가쁜 숨이 뿜어져 나왔다.
보리스는 자신의 침대로 돌아왔다. 놀라고 흥분하고. 또한 온 몸이 쑤신 나머지 두근거리는 가슴도 진
정되지 않았다. 잠은 더더욱 이를 수가 없었다. 꿈에서도 상상해 ** 못했던 충격이었다. 도무지 사태
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도대체 무슨 비밀이 숨겨져 있는 건가.
새벽녘이 지나고서야 어렴풋이 잠들었던 보리스가 깨어났을 때 예프넨은 이미 일어나 나갈 준비를 모
두 마치고 침대 곁에 앉아 있었다. 깨어나지 않는 동생을 걱정스럽게 굽어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어떻게 된 거야. 몇 번이나 깨웠어. 나쁜 꿈이라도 꿨니?"
"......"
보리스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형의 얼굴을 보는 순간 사슴이 한 번 크게 뛰는 것을 느꼈다. 심
장이 몸밖으로 튀어나오지 않나 싶을 정도로 놀랐다.
자신의 표정이 이상해지지 않았나 싶어 순간적으로 당황한 보리스는 얼른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이내 신음 소리를 내며 쓰러지고 말았다.
"아윽......"
"왜 그래? 어디 아파?"
예프넨의 얼굴이 놀란 듯한 그것으로 바뀌는 것을 보며 보리스는 어젯밤 검은 실루엣으로만 보았던 형
의 마습을 다시 한 번 기억해 냈다. 그때 형은 무슨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그가 지금껏 보았던 어떤 얼
굴도. 그 순간 그에게 어울릴 것 같지 않았다.
"아, 아니야. 그...자다가 침대에서 떨어졌어"
순간적으로 생각해 낸 거짓말이었다. 말해놓고 보니 정말로 몸 곳곳에 든 멍을 설명할 길은 그것밖에
없는 것 같았다. 예프넨은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이 되었다.
"이런, 평소엔 안 그랬으면서. 역시 많이 피곤했던 거구나."
두 형제는 모두 잠버릇이 얌전한 편이었다. 예프넨은 보리스가 몸을 일으키도록 도와 주었다. 순간 목
과 어깨가 으스러질 듯 아팠지만 보리스는 내색하지 않고 꾹 참아냈다.
"우리 여기서 하루 더 지낼까? 네 표정이 많이 안 좋은데, 혹시 다른 데 어디 아픈 거 아냐?"
보리스는 가까스로 물을 수 있었다.
"형은...괜찮아?"
"나?"
예프넨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팔을 펴 보였다.
"내가 뭘. 어제도 그렇게 묻더니 아직도 내가 아파 보이니?"
그러나 예프넨의 얼굴은 어제보다 더 수척해 있었다. 정말로 열병을 앓는 사람처럼.
일어나 옷을 입고 늦은 아침을 먹으러 내려갈 때까지 보리스는 내내 지신이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힘
들게 가늠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말았다. 어쩐지 해서는 안될 것만 같았다.
여관에 하루 더 쉬기로 한 다음날 밤, 보리스는 침대에 누운 채로 형이 잠드는 기척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한참이나 그러고 있었는데도 형은 자는 것 같지가 않았다.
잠시 후에는 아예 침대에서 일어났다. 맨발로 방을 왔다갔다 거닐더니 천천히 심호흡을 하고, 어깨와
팔을 풀었다. 보리스는 알 수 없는 상상으로 오싹해졌다. 그러나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서 보리스는 형
이 잠들지 않으려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조금 더, 조금 더 버티려 했지만 결국 보리스는 잠들어 버렸다. 그리고 이번에는 오랜만에 제대로 아침
에 깨어났다.
"형, 설마 ** 않은 거야?"
약간 붉어진 눈으로 침대에 앉아 있는 예프넨을 보고 보리스가 놀란 목소리를 냈다. 예프넨은 약간 불
편하게 미소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냥 일찍 일어났을 뿐이야."
"피곤해 보여."
피곤한 정도가 아니었다. 예프넨은 단순히 잠을 ** 않은 것뿐 아니라 밤새 뭔가 고민하느라 해쓱해
진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 이제 오늘은 움직여 봐야지."
그들은 마을을 떠났다. 목적지는 암묵적으로 쟈닌느 고모할머님이 있는 곳이었지만 정말로 그들이 거
기까지 갈 수 있을지, 또는 가고자 하는지조차 불명확했다. 마치 어디론가 걷고 있는 것 자체가 목적인
것처럼 귿릉느 단지 가고 있을 따름이었다.
예프넨은 점차 자칫 걸음조차 비틀거릴 정도가 되어 있었다. 보리스 역시 오랫동안 고민했다. 입을 떼
었을때는 이미 점심 무렵이었다.
"형, 역시 아버지는 오시지 않는 거지?"
"응?"
그건 질문의 내용에 비해 무심하게까지 들리는 대꾸였다. 잠시 후. 보리스는 예프넨의 얼굴을 보며 그
가 자신의 말을 빨리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평소엔 그럴 형이 절대로 아닌데, 마치 다른 곳
에 정신을 팔고 있는 것처럼 멍해지고 무디어져 있어Te.
"아......"
그제야 말을 이해한 에프넨은 꿈속을 헤매는 사람처럼 허공을 향해 눈동자를 굴렸다. 대답이 나온 것
도 한참 만이었다.
"아니... 그렇지 않아......"
의무적으로까지 들리는 대답이랄까. 지금까지 동생을 납득시키려고. 또는 속이려고 진지하게 노력하던
대답과는 천지차이의 어감이었다. 보리스는 걸음을 멈췄다.
"형, 내게 솔직하게 얘기해 줘, 난 괜찮으니까. 아버지는 어떻게 되신 거야? 삼촌한테 붙잡히신 거야?"
그리고 예프넨도 걸음을 멈췄다. 그는 머리가 아픈 듯 잠시 두 손으로 양미간을 누르더니 그 자리에
천천히 주저 않았다. 그리고 고개를 무릎에 박은 채 머리를 감싸쥐었다.
"잠깐만......"
여름이 가고 하늘은 나날처럼 푸르렀다. 비가 왔던 것은 항쟁의 밤이 마지막이었던 것처럼. 그래서인
가. 오히려 그 날의 기억은 방금 전에 겪은 양 생생하기 이를 데 없었다.
저택을 감쌌던 횃불, 거대한 소환수의 모습...그리고 홀로 호숫가에 앉아 있다가 보았던 정체 모를 괴
물, 나타나주었던 형의 질책 어린 외침조차도...선명하다. 그래서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다른 것은 이토
록 분명한데 왜 어느 순간 이후의 기억만이 이렇게 엉망으로 흔들려 버린 것인지.
안개 속이었다. 마지막으로 나는 기억이라고는 아버지가 늪가에서 삼촌과 대치하고. 자신은 형과 등을
맞댄 채 서 있다가 뭔가 모를 이유에 의해 바닥에 주저앉던 기억 정도일까.
그게 도대체 뭐였지?
무언가 지독한 공포와...전율의 감정이 기억을 떠올리려 할 때마다 등골을 싸늘하게 타고 내려갔다. 더
생각해내려 하다가는 정신이 이상해지지 않을까 싶어질 정도로 어지러웠다.
갑자기 예프넨이 고개를 들었다.
"보리스. 이리 와서 이걸 들어봐라."
예프넨이 내민 것은 다름 아닌 허리에서 끌러낸 윈터러였다. 보리스는 영문을 알지 못한 채 다가가 검
을 받았다.
"뽑아서. 휘둘러 봐."
"지금?"
보리스는 조금 망설이다가 두 발짝 물러나 허공을 향해 검을 뽑았다. 솔직히 쉽지 않았다. 칼집에서 뽑
아내는 것까지는 할수 있었지만 팔을 뻗는 순간 무게 때문에 몸이 휘청했다. 윈터러는 정체 모를 구성
물질 때문에 철로 만들어진 일반적인 바스타드 소드보다 가벼운 편인데도 그랫다.
"아직 무린가......"
예프넨이 일어나 다가오더니 등뒤에 서서 보리스의 팔을 받쳐 주었다. 형의 팔이 부목처럼 대어지자
그나마 검을 들고 있는 것이 수월해 졌다. 두 손으로 보리스의 손목을 잡은 채로 예프넨은 천천히 검을
허공에 휘두르게 했다.
"이렇게......"
반원을 그리며 무지개처럼 뻗어나가는 찬란한 칼날... 날카롭게 다듬어진 칼끝과 희게 스치는 낮의 빛,
그곳에 머물러 영원히 떠나지 않을 것만 같은 기억의 광채와......
동생을 감싸안은 형의 따스한 체온, 나의 형.
어느새 입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가지 마, 형, 가지 마.
날 혼자 두고 가지 마.
"네가 조금만 더 컸더라면 좋았을 텐데."
머리 뒤에서. 형이 가만히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보리스는 진심으로 그렇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이렇게 무력한 어린아이가 아니라 형을 도울 수 있는 존재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열 일곱, 아니 열 여
섯만 되었어도.
흰 날의 윈터러가 텅 빈 들판에서 상대할 적도 없이 허망하게 저어지고 있었다. 위로, 아래로, 다시 옆
으로... 뭔가 단 하나라도 더 동생에게 남겨주고 싶어 안간힘을 쓰는 예프넨의 눈동자 역시 시력을 잃을
정도로 하얗게 빛나는 칼날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귓가에서 속삭이듯, 예프넨의 목소리가 보리스에게 말했다.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으시지... 아버지는 돌아올 수 없는 곳에 계셔. 벌써부터, 아주 전부터 말이지. 집
사 님이 함께 계실 테니 불편하진 않으실 거다. 우리가 없어도 그 분께서 아버지의 뜻을 언제고 충실히
따라 주실 거야."
"......"
보리스는 대답 없이 듣고만 있었다. 분명히 모르고 있었던 뜻밖의 사실인데, 어쩐지 가슴이 들끓지 않
았다. 알고 있던 사실을 단지 확인 받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제야 자신이 이미 오래 전부터 이런 결과를 짐작했던 것이 아닌가 싶어졌다. 아니 그보다도 실은 모
든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싶었다. 아버지의 죽음도. 형의 고통도.
전부터 정체를 알 수 없는 망각이 몸 속에 들어와 있어서 그의 기억 일부를 삼킨 채 침묵하고 있는 것
뿐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하나씩 꺼내진다고 생각하는 순간.......
번쩍, 눈앞을 가리는 영상이 있었다.
쿠르르릉......
그것은 지난날의 천둥이었다. 영지에서의 마지막 밤. 그 순간 가운데서도 가장 마지막 기억이 억지로
감춰져 흐려졌다가, 갑작스럽게 수정 구슬 속을 보듯 명확해졌다.
거대한 날개를 보았었다.
예프넨은 보리스의 팔이 갑자기 떨리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고 더욱 힘주어 그의 팔을 감쌌다. 동생이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충격을 받은 거라고 생각하고는 가능한 한 따뜻하게 감싸주려 했다.
"하......"
베일에 걷히고 기억이 책장처럼 하나씩 펼쳐져 갔다. 안개로 만든 듯 너울거리는 적회색 날개. 장려한
날갯짓과 함께 그것은 실로 5미터는 넘을 법한 길이로 펼쳐졌었다. 그러나 아름다움은 아니었다. 피막으
로 뒤덮인 섬뜩한 날개를 둘러싼 것은 수백 개는 되어 보이는 커다란 발톱들이었다. 날개 끝을 빙 둘러
이빨처럼 박힌 채 희생자를 노리는 발톱이었다.
목소리가 기억난다. 그것은 갈퀴로 철문을 긁어대는 듯한 소리가 아니었던가. 가슴속조차 후벼팔 듯.
피부와 점막을 온통 따갑게 스치는 소리가 아니었던가.
보리스가 윈터러를 떨어뜨렸다. 잔풀이 듬성듬성 자란 흙바닥에 검이 비스듬히 꽂혔다. 예프넨이 와락
보리스를 끌어안았다. 동생의 몸이 온통 화끈거리고 덜덜 떨리는 것이 확연히 느껴졌다.
"보리스, 너......"
망령이라고 했었다. 그래, 망령이었다. 그것은 이 세계에서는 죽은 생물이었다. 마치 이계에서 몸의 일
부만 소환되어 온 저 뱀 모습의 환수 크리갈처럼. 실체를 가지지 못한 불투명한 날개 안쪽으로 너무도
생생하게 번뜩이는 불덩이 같은 눈동자와...아아, 날개에 가려져 놈의 모습을 제대로 ** 못한 것이 얼
마나 다행이던가.
"혀, 형... 그, 그... 그... 날개......"
예프넨은 동생의 몸을 돌려 바로 얼굴을 바라보게 하고는 천천히 물었다.
"기억났니?"
압도적인 장면에 대한 기억이 돌아오자 곧장 그때 벌어진 장면들이 파도처럼 빠르게 밀려왔다. 그 날
밤, 오랫동안 두려워하던 에메라 호수의 명령을 눈앞에서 맞닥뜨려 넋이 나갔던 보리스는 갑가지 형이
앞으로 뛰어나오며 자신을 와락 뒤로 밀치는 것을 느꼈었다. 너무 세게 밀어서 중심조카 잡지 못한 채
바닥에 처박혔고, 그 다음 본 것은 거대한 날개가 형을 향해 내리쳐지는 모습이였다. 그 끝에 달린 발톱
들이 피를 원하는 이빨들처럼 번뜩거렸고......
그는 달아났다. 자신이 그럴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었는데, 공포에 사로잡혀 정신 없이 달아나고
있는 자신이 거기에 있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늪을 향해 후퇴했고. 거기에서 앞 뒤 사정은 알지 못한
채 아버지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하고 말았다. 마지막 외침이 있었나? 그래...달아나, 이곳에서 떠나. 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귓가에 지금까지도 쟁쟁했다.
영상이 흔들렸다. 그 순간 그는 확실히 기절했던 것 같았다.
"형...형은 어떻게 된 거지? 어떻게...된 거지?"
그러나 보리스는 이제 서서히 깨닫고 있었다. 자신이 기억을 부분적으로 잃고 있었던 장면에 대해서,
그것은 결코 받아들이고 싶지 않는 장면을 보았던 까닭이었다. 가장 원하지 않았던, 언제고 두려워하던
일이 순식간에 눈앞에서 벌어져 버렸고, 연약한 그의 정신은 그 사실을 기억하길 원치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예프넨은 대답하지 않았다.
밤은 추웠다.
형제는 너울거리는 불꽃을 마주보며 앉아 있었다. 낮에 있던 그 장소 그대로였다. 그들은 이제 더 어디
론가 여행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이제 어디로 가는 것은 다 소용없었다.
보리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형, 그만 자."
예프넨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리고 다시 모닥불로 눈길을 보냈다. 어머니의 유품을 팔아 얻
은 돈으로 만들 수 있었던 모닥불이었다.
한참만에 예프넨이 입을 열더니 뜻밖에 말을 했다.
"내일 아침 일어나거든 혼자 가라, 보리스. 우리 헤어지는 편이 낫겠다."
모든 진실들에도 불구하고 그 말은 보리스에게 가장 싸늘한 충격을 안겨 주었다. 그는 급히 고개를 저
었다.
"싫어."
"싫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냐. 난 이미 너하고 함께 있을 수 없어. 이미...얼마 남지도 않았다."
보리스는 모닥불 너머 형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다시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는 아주 완강하게.
"절대로 싫어. 끝까지 형의 곁에 있을 거야."
예프넨의 눈이 슬퍼졌다. 그는 일부러 긴 나뭇가지로 모닥불을 뒤적이며 조용히 말했다.
"내가 다시 발작하면, 너를 죽일 지도 모르는데도?"
망령, 에메라 호수의 망령...그것이 바로 예니 고모를 죽였다고 형이 말해 주었다. 보리스는 예니 고모
의 얼굴을 몰랐다. 그런 사람이 집안에 있었다는 사실 밖에는 아무 것도 몰랐다. 저택 안에는 예니 고모
의 방이 있었고. 그곳은 어머니의 방처럼 늘 말끔히 청소되어 있었다. 한 번인가 들어가 보았을 때 그
방에 딸린 자그마한 거실에서 그리다 만 그림을 발견했었다. 보리스의 눈으로는 얼마나 훌륭한 솜씨인
지 이해할 수 없는 그 미완의 그림은 한 젊은 남자를 그려 놓고 있었다.
죽은 자의 고요한 방에 얼굴 윤곽과 단아한 턱선 만으로 남은 남자.
" 예니 고모는 착하고 상냥한 분이셨지. 나, 그 분의 손에서 과자도 많이 얻어먹었다. 어머니께서 숨기고
주지 않는 달콤한 과자들은 예니 고모의 치마를 잡고 애처로운 눈빛으로 쳐다보기만 하면 쉽게 내 손에
쥐어졌어. 그 분은 마음이 너무 여려서 아무 것도 거절하지 못하는 분이었으니까. 고모가 곹 혼인해서
저택을 떠나게 되었다고 했을 때 내가 얼마나 울면서 매달렸는지 고모는 방에 들어가서 며칠이고 나오
지 않으셨단다. 내 얼굴을 보게 되는 것이 겁나서 말이지."
그런 고모가...블라도 삼촌의 거짓말에 속아 약혼자를 찾겠다고 그토록 두려워하던 에메라 호수까지 갔
었다. 약혼자는 다친 데도 없이 살아서 저택의 지하실에 갇혀 있었는데. 도대체 왜 트라바체스의 인간들
은 화합하지 못하고 언제까지나 쌓어야 하는 것일까. 서로의 핏줄조차 잊고, 끝끝내 자신이 아끼던 자의
마음을 더럽히고, 피로 물든 결말이 맺어질 때까지.
"찾으러 갔을 때는 이미 늦었어. 그들이 발견한 것은 아리따운 금발처녀인 예니 고모가 아닐라 발광하
여 옷조차 찢어발긴 채 날뛰는 짐승 같은 ** 여자였지. 난 기억이 나... 고모를 찾으러 나가셨던 아버
지와 병사들이 돌아왔을 때 어머니가 황급히 나를 당신의 방으로 붙잡아 들이고는 결코 나가지 못하게
막던 것을 말이지. 난 걱정이 되고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더. 나도 고모를 몹시 좋아했으니까. 무섭다
는 호숫가에 혼자 간 고모가 많이 다친 것은 아닐까. 설마 죽거나 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 두려웠지. 그
래서 나는 끝내 어머니의 손을 뿌리치고 밖으로 뛰어나가고 말았어. 어머니가 뒤쫏아왔지만... 난 이미
모든 걸 봐버린 후였지."
병사 세명이 간신히 붙잡고 있었던 예니 고모는 너덜거리는 옷자락 속으로 감추던 처녀의 몸을 다 드
러나 보였고, 산발한 머리 곳곳에 피가 얼룩져 무시무시한 모습이었다. 고모는 예프넨은 물론이고 아버
지를 비롯한 가족 중 누구도 알아** 못했다. 오직 주위의 모든 인간들이 적으로 느껴지는지 이해할
수 없는 괴성만을 지를 따름이었다. 그것은 평소 듣던 고모의 부드러운 목소리와는 조금도 같지 않았다.
그건 단지 괴물의 울부짖음이었다.
"아버지와 삼촌은 무섭게 싸웠다. 지금에야 생각하는 거지만 삼촌은 고모가 차마 그렇게 까지 될줄은
생각하지 못하셨던 것 같아. 단순히 삼촌이 속한 당파의 부하들이 혼자 나간 고모를 납치하기만을 기대
한 거였지. 아버지도 정파가 다른 집안을 택한 고모의 결혼이 달갑지는 않았기에, 감히 고모를 에메라
호수로 보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지하실로 갇힌 약혼자에 대해서는 방관한 모양이야. 어찌 됐든
죄인이 된 삼촌의 입지는 약했지. 아버지는 단호하게, 호수의 망령에게 당해서 일으킨 광증은 죽여서 해
소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하셨어."
그리고 묻혔던 집안의 과거는 이제 갑작스런 현실이 되어 눈앞에 있었다. 보리스는 받아들일 수 없는
사실 앞에서 미칠 듯한 답답함을 느꼈다.
울며 말리는 할머니와 차마 ** 못하겠다며 밖으로 나가 버린 할아버지도, 결국 이미 실질적인 집안
의 주인이 되어있는 아버지의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고모는 죽었다. 그게 누구의 손에 의해서였든 간
에, 예프넨은 아버지의 성격상 예니 고모를 다른 사람이 죽이도록 내버려두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
다.
세월이 지난 지금에 있어서는 단지 두려운 악몽이었을까. 그러나 이제는 그것이 자신의 일이었다.
단순에 나타나야 할 광증이 지연되다가 이제야 천천히 진행되는 것은 자신이 고모와는 달리 약한 상처
만을 입었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절망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에는 애써 희망을 **려고 애썼었다.
상처가 가벼우니까. 어쩌면 괜찮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보리스가 혼자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 정도로 성
장한 후에야 진행될 지도 모른다. 제발 그렇게만 된다면, 그렇게만 되어 준다면 어떤 대가라도 치를텐
데, 어떤 추한 몰골도 견뎌낼 텐데.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현실, 어김없이 그의 곁도 비껴 가지 않았다.
"상관...없어."
낮부터 저녁까지 오랜 대화를 차례로 떠올리던 보리스가 드디어 입을 열어 말했다.
"형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 하지만 형도 알다시피, 혼자 남은 내가 얼마나 오래, 잘 살
아갈 수 있겠어? 윈터러 때문에 며칠 동안 일어난 일들도 너무나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어. 난 이대로
끝까지 형 곁에 있을래. 그래서 차라리 형 손에......"
"보리스!"
손간적으로 벌어진 일이었다. 몸을 일으켜 다가온 예프넨은 보리스의 빰을 힘껏 때렸다. 그리고 소리쳤
다.
"너, 우리가 창고에서 나와 윈터러를 찾으러 갈 때 내가 했던 말, 벌써 잊어버린 거냐? 벌써 잊어버렸
어! 내가 그때 뭐라고 했지? 뭐라고 했는지 말해 봐!"
형이 자신에게 이토록 화내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그러나 형이 왜 화를 내는가는 짐작하고도 남았다.
"살아...남으라고......"
예프넨은 아버지와는 달랐다. 그의 발광한 여동생을 자기 손으로 죽여서 끝을 맺어주는 성격이 아니었
다. 자신이 아끼는 사람이 살 수 있는 데까지 살아남아서...고통스런 삶 속에서도 한 줌의 행복을 찾아
움켜쥐기를 바랬다. 누구의 가능성도 빼앗고 싶지 않았다. 그였다면 방황한 동생을 골방에 가두어서라도
끝끝내 제정신으로 돌아올 날을 기다렸을 것이다. 죽을 때까지 돌보게 되더라도 말이다.
"다시는 죽는다는 말 하지마."
예프넨은 감정을 억누르는 사람처럼 빰을 실룩거리면서 말했다.
"네 삶은 나와는 별개야. 단지 너 자신만을 따르는 거다. 다른 사람의 사정에 귀 기울이지 마. 결코, 널
약하게 하는 자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마."
보리스는 그 말의 뜻을 다 생각하기도 전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예프넨은 계속해서 말하고 있었
다.
"내가 죽고 나면...넌 정말로 강한 마음을 잦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아무도 네 방패가 되어주지 않을
거고, 누구 앞에서도 방심할 수 없어. 힘들겠지만... 그건 할 가치가 있어. 왜냐면 살아남는 일이니까. 네
삶에 깃들인 무한한 가능성을 모조리 다 실험해 볼 때까지 살아남기 위한 일이니까."
예프넨은 보리스에게서 물러섰다. 그리고 멀찍이 떨어져 앉았다. 그가 고개를 수그렸을 때, 보리스는
형이 스스로 한 말이 자신에게는 해당될 수 없음에 슬퍼하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결코 잊을 수 없는 마지막 세 번째 모습이었다.
보리스가 천천히 다다가 형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 상태 그대로 아주 오랫동안 있었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예프넨은 잠들지 않았다.
그러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의 몸은 갈수록 쇠약해졌고 이제는 깨어 있을 때조차 발작을 일으키는
일이 잦아졌다. 윈터러는 이미 보리스에게 주어 가지고 있게 했다. 검을 주면서 예프넨은 여차하면 자신
을 찔러도 좋다고 말했다. 보리스는 단지 형을 위해서 고개만 끄덕였을 뿐이었다. 그가 정말로 그런 일
을 할 수 있을리 없었다.
이제 예프넨은 자신의 기억 곳곳이 비어버리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몇 시간이고 광증을 일으켰을 댸
의 기억이 사라지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면 낮이었고. 한밤중에 모
닥불을 피우던 것이 기억나고 나서 그 뒤는 새벽 별이 뜨는 모습이었다. 그때마다 그는 동생이 눈앞에
없는 것에 감사했다. 이미 형과 함께 제대로 잠들지 않게 된 보리스는 좋지 않은 기미가 보일 듯하면
재빨리 그의 곁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또한 멀리 가지는 않았다.
그 날 밤, 예프넨은 스노우가드를 벗어서 동생에게 주었다.
"이제 네가 가지고 있어. 내겐 필요 없으니까 말이지."
"하지만, 그건 형 거야."
보리스는 아직도 형이 곧 죽어야 할 사람이라고 받아들이고 싶어하지 않았다. 예프넨이 희미하게 웃었
다.
"죽은 사람에게 갑옷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
예프넨은 억지로 눈빛 찬란한 갑옷을 동생에게 입혔다. 그리고 다시 겉옷을 입혀 주고 나서 오랜만에
즐거워했다. 뭔가 하나라도 주어서 동생의 몸을 지키게 되었다는 사실이 다행스럽게 생각되는 모양이었
다.
그 날 예프넨은 평소와는 약간 다른 이야기를 했다. 바로 삼촌에 대한 것이었다.
"그래, 결론적으로 삼촌이 아버지를 죽게 한 것은 사실인 거다. 그렇지만 결국은 호수의 괴물들과 그
붉은 눈의 악령이 아버지의 목숨을 빼앗었어. 물론 삼촌이 미라 아버지에게 상처를 입혀 놓지 않았더라
면 아버지께서 그리 호락호락 당하지는 않았을지도 몰라. 그리고 결국 희생된 것은 삼촌이었을 지도 모
르고, 어찌됐건 책임을 묻자면 한없이 거슬러 올라가 따지고 씌울 수 있을거야. 보리스, 나하고 한간지
약속하겠니?"
"응?"
"결코, 복수하지 마."
복수하지 말아야 할 대상이 누구인가는 뻔했다. 보리스는 이해하지 못한 채 눈을 크게 떴다.
"네게 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난...너만은 그 복잡한 집안의 은원에 말려들지 않기를 바란다. 그것이 몇
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야. 정치적 파벌의 문제는 언제고 트라바체스의 수많은 가족들이 갈가리
찢어 왔지. 그것은 그들이 결코 잊지 않기 때문인 거란다. 어느 한쪽이라도 잊어 줬더라면 그건 반복은
없었을 텐데. 또는 용서해 줬더라면."
"하지만 아버지는......"
예프넨이 보리스의 말을 막았다.
"만일 살아 계셨다면 아버진 네게 이렇게 말하지 않으셨겠지. 이럴때는 오히려 네가 어리다는 것이 다
행으로 느껴진다. 더 자라면서 많은 일을 보고 겪을 테니까 어린 시절의 일은 잊어. 아니 용서해 버려.
그렇지 않고는 너도 그 끊어지지 않는 사슬에 다시 말려들게 돼. 그리고 네 아랫대의 사람들 역시 그
피의 유산을 물려받겠지."
보리스는 여전히 다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미 다른 문제로 충분히 고통받고 있는 형의 뜻을 거스르고
싶지 않았다. 형의 마음이 편해지는 것 외에 지금의 그가 바라는 것은 없었다.
보리스가 알겟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예프넨은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당부하며 약속을 시켰다. 그때 그
것을 약속하던 보리스는 곧 죽게 될 사람과 하는 약속이 얼마나 큰 무게를 지니는가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 날도 예프넨은 잠들지 않으려 애썼다. 가장 먼저 일어난 발작이 잠들어 있던 때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만큼이나 악화된 자신이 다시금 잠들었을 때 얼마나 끔찍한 일을 저지를지 몹시도 두려웠던 것이다.
보리스는 모닥불 가까이에서 잠들었다. 그는 붉어진 눈으로 동생을 지켜보며 자신의 정신을 온전하게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나흘째 잠들지 못한 그가 쉽게 졸음을 참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지금까지 버틴 것도 이미 초인
적인 노력인 것을. 점점 정신이 혼미해지며 꿈과 현실을 구별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그 상태로 혼
들거리며 그는 한밤 중까기 견뎌냈다. 그러나 이미 아무 것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꿈인 듯, 생시인 듯, 귓가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따뜻한 입김이 그를 기분 좋게 했다. 마지 어머니의 목
소리인 양.
"괜찮아, 형. 그냥 자... 쉬어도 돼. 편안하게......"
따사로운 햇볕을 받으며 들판에 누운 듯, 부드러운 흰 시트에 지친 몸을 묻듯, 따뜻한 물 속에 온 몸을
잠근 듯, 그를 둘러싼 세상이 갑자기 평화로워졌다. 마음이 삽시간에 녹아 내리는 기분이었다. 동시에
그는 어떤 진실을 깨달았다.
이 고통스러운 현실이 닿을 수 없는 잠에 대해서.
이젠 동생의 기척이 다시 자리로 돌아가고 누워 잠을 청하는 것까지 인지할 수 있었다. 정신이 맑아지
고, 깨끗해졌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너무도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단지 단 하나 남은 일, 자신이 동
생을 위해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일이었다.
이제 그 때였다.
보리슨 어렴풋한 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영상을 보았다.
형이었던가... 한 사람이 검 한 자루와 손만 가지고 흙바닥을 파내고 있었다. 너무도 이상한 모습이라
그는 단지 묘한 꿈이라고만 생각했다. 혼미한 정신이 곧 눈앞에 영상을 덮었다.
그것이 마지막인데도. 그렇게.
늦은 아침이 되어 깨어난 보리스는 이제 꿈이 아닌 현실의 결말을 보았다. 자신이 잠들었던 곳에서 조
금 떨어진 위치에 바로 꿈속에서 봤던 구덩이가 있었다. 그것은 잠결에 본 것보다 휠씬 넓게 파져 있었
다. 파낸 흙이 한쪽에 작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좋은 날씨였다. 높이 비상하는 종다리가 아침 노래를 지저귀었다. 이미 떠오른 해와 함께 하늘은 푸른
강물처럼 말갛게 개었고, 공기는 적당히 차고 맑았다. 소년은 커다랗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형이 없었고...그리고 윈터러가 없었다.
벌떡 몸을 일으켰다가 소년은 다시 동작을 멈추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천천히 구덩이를 바라보며 생각
을 거듭했다. 자신이 받아들여야 할 현실이 무엇일지에 대해서.
굵고 뾰족한 바늘이 가슴속을 깊숙이 찌르고 들어오는 듯 그토록 아픈 것을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창
에 꽂힌 작은 짐승처럼 고통스러워하며 목으로 치미는 무엇인가를 삼켰다. 간신히 옆은 숨소리만이 흘
러나올 따름이었다. 목이 꽉 막혀 말 한 마디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애써 일어난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형은 눈을 감고 잠들어 있었다. 그가 속삭였던 대로 아주 편안하게, 그렇게 깨어나지 않는 잠을 자고
있었다. 마치 자장가를 들으며 잠든 듯 그렇게 평온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가슴 약간 아래쪽 명치 부분에 깊은 상처가 보였다. 그 주위에 시커멓게 변한 핏자국이 말라붙어 있었
다. 그러나 검은 그 자리에 꽂혀 있지 않았다. 윈터러는 구덩이 한쪽에 쓸쓸하게 버려져 있었다.
긴 검인 윈터러는 분명 자살을 하기에 좋은 무기는 아니었다.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바닥에 꽂거나
해서 그 위에 몸을 던졌을 것이고, 동생이 보게 될 것을 대비해서 마지막 힘을 다해 검을 다시 뽑아 낸
것이다.
밤새 흙을 파냈을 형이 손끝이 갈아지고 누렇게 얼룩진 것이 보였다 산 자에게 단 하나의 수고로움조
차 남기지 않으려 한 그 노력은... 살아남은 자로서 실로 원망스럽기까지 한 것이 아닌가.
왜, 왜 당신은 당신의 삶을 살지 못하고서......
소년은 그 앞에 앉은 채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이윽고 해가 떠오르고, 낮의 바람이 뺨을 스쳐갔다. 세
월처럼 시간이 흘러갔다......그러나 돌로 변하기라도 한 듯 소년은 움직이지 않았다. 눈물도 흐르지 않았
다.
중천에 떠올랐던 해가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얼마 후 석양이 황량한 풍경을 더욱 불게 물들었다. 꼬리
긴 바람이 들판의 풀들을 훑고 자나가며 소년의 긴 머릿결을 흩날리게 했다. 살아있는 사람과 마찬가지
로, 바람은 창백한 뺨을 한 스무 살 젊은이의 머리카락도 쓸로 지나갔다. 이제 다시는 나이먹지 않을,
영원히 청춘을 갖게 된 젊은이의 잠든 얼굴을 위로하려는 것처럼.
문득, 보리스가 움직였다. 그는 겉옷을 벗더니 그 안에 입고 있던 스노우가드를 벗어 들었다. 그리고
구덩이 안으로 내려갔다.
형의 시체를 끌어당겨 일으켜 세우고. 그의 몸에 다시 스노우가드를 입혔다. 힘이 부쳐 땀을 벌뻘 흘리
면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애쓰는 그의 얼굴은 흡사 **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 사람
의 ** 행동이라 해도 결코 무시할 수 없을 단호한 결심이 그 얼굴에 서려 있었다.
애쓴 끝에 결국 성공할 수 있었다. 다시 눕혀진 형의 몸에서 이제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흰 갑옷은 그
대로 흰 수의가 되었다.
나지막하고 약간 쉰 듯한 목소리가 새어나왔을 때 이미 하늘에는 별이 하나씩 솟아나기 시작하고 있었
다.
힘든 하루가 지나갔으니 이제는 잠잘 시간
별똥별도 꼬리 끌며 엄마별 곁으로 자러 갔네
걱정말고 편히 자거라, 내가 지켜 줄 테니
아무도 우리 아가를 깨우지 못할 거예요.
일어난 소년은 구덩이 밖으로 나와 천천히 쌓여있던 흙더미를 밀어넣었다. 잔돌이 섞인 흙덩이들이 백
색의 갑옷을 걸친 창백한 얼굴의 젊은이 위로 쏟아져 내렸다.
캄캄한 밤이 무서워도 곧 아침이 오니까
힘든 세상 모두 잊고 눈물도 흘리지 말고
잘 자라고 키스해 줄게, 내가 곁에 있어 줄게
행복한 꿈꾸다 보면 긴 밤도 금방 가니까
이제는 다시 볼 수 없을 얼굴이 흙에 덮이고. 그렇게 덧없이 사라져 갔다.
다 만들어진 무덤에는 봉분도 없었다. 며칠을 지내는 동안 자나가는 사람 한 명 없던 황량한 들판이었
다. 소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뭔가 표시를 하는 대신 주위의 모든 것을 가슴속에 새겨 넣었다.
이제 떠날 시간이었다.
"잘 자, 형."
이미 한밤이었다. 그러나 더는 떠나는 것을 지체하지 않았다.
다시 돌아** 않은 채, 천천히 걸어서 그 곳을 떠나는 보리스의 마음은 이미 열두 살 아이의 그것이
아니었다.
그 밤으로부터. 달빛조차 없는 길고 긴 겨울이 시작되었다.
3장 Blinding
1. 로즈니스 아가씨
산이 내려다보고 하늘이 내려다 본다.
어디까지라도 뻗은 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한 채 걷는다.
그이 뒤로 계절이 진다.
그림자가 진다.
"아이 참! 왜 내가 그런 하녀들이나 입는 옷을 입어야 한다는 것야!"
"하지만 아가씨... 다른 옷이 있어야지요."
화가 난 어린 아가씨의 비위를 맞추는 시종들은 연신 굽실거렸다. 실은 처음부터 이토록 까다로운 아
가씨를 모시고 먼 외국까지 여행을 나온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그러나 주인님이 허락해 버린 걸 그
들이 감히 어쩌겠는가.
덕택에 여행은 하루도 빠짐없이 무슨 일인가 터져 삐걱거렸다. 그래도 극히 다행스러운 것은 이제 여
행의 볼일은 끝났고 본국으로 돌아가는 중이란 점이었다.
"다른 옷을 가져와! 난 백작 가문의 아가씨라고! 이런 옷을 입고 다니면 아버지의 체면이 깎인단 말이
야!"
뭐,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곳이 떠나온 본국 아노마라드의 장원 안이었다면 말이다. 그러나
여기가 본국의 장원과는 열흘 거리도 넘게 떨어진 타국 땅 트라비체스였고, 백작 가문의 체면을 논할
아노마라드 귀족은 아무 데도 없었다.
"하지만 아가씨, 아무리 그러셔도 여긴 시골이라 새 옷을 사올 데가 없는뎁쇼."
나올 대답은 뻔했다.
"뭐 그 따위 나라가 다 있어!"
열두 살 먹은 백작 가의 꼬마 아가씨 로즈니스는 자신이 가는 곳마다 아노마라드의 수도 겔티카의 거
리처럼 곳곳에 최고급 의상실이 줄지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허술한 옷을 입을 바엔
아예 평생 밖에 나오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할 그녀인데 이런 여행길에 이따위 사고라니!
전날 밤에 내린 비로 길에 진창이 생겨서 그들은 호숫가에 마차를 잠시 세웠었다. 그런데 누구의 부
주의인지 닫혀 있어야 할 마차의 문이 갑자기 열리는 바람에 아가씨의 드레스 상자가 통째로 물에 빠져
버렸던 것이다.
아침부터 바람 쐰다고 마차에서 내려 돌아다녔던 로즈니스는 아미 드레스 자락을 흙탕물에 다 망쳐버
린 뒤였고, 이번 여행에서 아가씨의 시중을 책임지고 있는 고참 하녀 윌라는 마차의 문을 제대로 다지
않은 사람이 누구인지 잡히기만 하면 손목을 분질러 버리겠다고 별렀다. 그녀는 뼈대가 굵고 키가 겄
으며 몸무게도 보통 남자의 배는 넘었기에 그런 결심이 실행에 옮겨질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
다.
"싫으면 지금 그 옷을 계속 입고 다니려무나, 로즈."
구원가가 나타났다. 마을에 잠시 나갔던 백작 일행이 돌아온 것이다. 또래 아이 여덟은 합쳐 놓은
만큼이나 까다로운 꼬마 아가씨지만 단 하나, 고분고분 말을 듣는 상대가 있긴 했다.
벨노어 백작은 딸을 몹시 귀여워해서 늘 로즈라는 애칭으로 부르고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 가져다주었
지만, 버릇없이 구는 것만은 용서하지 않는 아버지였다. 하인들고 얽힌 일에서도 언제나 공정해서 피고
용인들조차 모두 백작을 존경했다.
"아빠, 이건 흙이 묻었는걸..... "
애교를 섞어 조금쯤 항변해보려 하지만 곧 소용없다는 것 깨닫고 하녀 윌라가 내미는 옷을 마지못해
받아들었다. 로즈니스의 말이 아예 틀리지는 않았다. 그 옷은 잔심부름하는 소녀인 캐미아의 옷이었
다. 그래도 백작 집안 하녀의 옷이니 만큼 그리 지저분하거나 나쁜 옷도 아니었다.
옷을 다 입고 난 로즈니스는 장식도 별로 없고 심지어 길이조차 무릎 언저리까지밖에 오지 않는 치마
때문에 잔뜩 부아가 났다. 바로 옆에 나이도 똑같은 어린 하녀 캐미아가 있었다. 로즈니스는 화풀이를
그 애에게 했다.
"저라 가! 네가 옆에 있는 걸 보니까 화가 나 죽겠어!"
캐미아는 얼른 종종걸음쳐 마치 뒤로 돌아갔다. 하긴, 자기가 아가씨와 똑같이 생긴 옷을 입고 있느
니 이런 때 그 앞에 서 있는 건 좋은 수가 아니었다.
"로즈, 흙탕물에 다시 옷을 더럽힐 지도 모르니까 마차 안에 들어가 있거라."
아버지가 말할 때만 옳은 말을 옳다고 받아들일 줄 아는 로즈니스여서 곧 고개를 끄덕이고 마차 문을
열었다. 윌라가 다가와 번쩍 안아 안에 들여놓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고래를 돌려 휴, 한숨을 내쉬
었다.
마차가 세 대나 되는 대 행렬이었다. 백작의 신분으로 왕국 아노마라드를 떠나 트라바체스 공화국까
지 온 것은 아내 쪽으로 먼 친척이되는 어떤 유력한 선제후를 만나 몇 가지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였다.
항상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트라바체스였기에 어느 날 갑자기 정권이 뒤집혀 친분으로 엮어 두었던 관
계들이 박살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벨노어 백작의 장원은 아노마라드 왕국의 식민령인 티아
를 제외하면 트라바체스와 가장 가까이 맞닿아 있었으므로 결코 이 나라와의 관계에 소홀할 수는 없었
다.
남부 아노마라드는 예로부터 포도아 아몬드, 그리고 미식가들은 이름만 들어도 입에 침이 괸다는 송
로(버섯의일종)의 산지로 대륙에 이름을 떨치는 곳이었다. 남부 아노마라드를 가로로 자르며 솟은 파노
라자fp 산맥의 양 끝자락을 각각 아라종, 그리고 벨크루즈라고 부르는데 두 지방 모두 천혜의 따사로운
기후와 아름다운 시골 풍광, 그리고 남부 특산물들이 풍부하게 나는 것으로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고 했
다.
벨노어 백작의 장원이 바로 그 벨크루즈에 속해 있었다. 트라바체스에도 돈 많은 부자들이 있는 고
로 미식을 탐내지 않을 리 없었다.
무역을 위해 길을 뚫는 것은 언제나 중요했다. 비록 수도에 왕이 있다해도 이 정도의 권한은 영지의
주인인 백작의 것이었다.
백작이 자리를 비운 동안 일행을 지키는 책임을 맡은 비서인 휴가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백작이 말
했다.
"그래, 달리 문제가 있거나 하지는 않았겠지?"
"물론입니다. 주인님께서 가신 일은 잘 되었습니까?"
"암, 잘 되었지."
고개를 끄덕인 휴는 화제를 바꾸어 말했다.
"제가 사람을 보내어 알아보니 티아 국경까지 사흘 정도면 닿을 것 같다더군요. 티아 땅에 들어서면
아가씨께서 편히 쉬실곳 정도는 얼마든지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맞닿아 있으니 만큼 대국 아노마라드의 비위를 거스를 생각이 없는 티아의 군소 기사나 영주들
은 벨노어 백작을 언제고 깍듯하게 모셨다.
"그래, 오랜 여행이라 로즈가 많이 지치기도 했겠지. 늘 집에서만 지내던 아니인데."
"그래도 그만하면 얌전하게 버티셨습니다. 이제 곧 다시 상냥해지시겠지요."
휴의 말은 별로 진실이 아니었다. 로즈니스가 상냥하게 구는 상대는 몇 명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휴
는 그 안에 절반 정도만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직업 의식이 투철한 그는 개의치 않았다.
친창길이 어는 정도 말랐기에 마차 행렬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녁이 되기 전에 닌근에서 가
장 큰 성인 그와레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별로 친분이 없는 곳이라 성에서 쉴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좋은 여관은 몇 군데 있을 터였다. 가서 맛있는 음식으로 우울해진 로즈니스를 달래고 불확실한 정보
도 좀더 확인할 마음이었다.
"저기, 저 녀석 좀 봐라."
"웬 어린놈이 어른도 없이 혼자 돌아다니지?"
"저런 게 어디서 난 거야?"
그와레는 큰 성이긴 했지만 일종의 장원이라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은 이웃과 외지인을 한 눈에 구별할
수 있었다. 성이 크다 해도 교통상의 요충지에 자리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외지인의 비율은 항상 일정
수준으로 정해져 있었다.
그나마 오늘 들어온 외지인 가운데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은 세 대나 되는 마차에다 말 탄 기사가 열
둘이나 따라붙은 어느 외국 귀족의 행렬이었다. 맨 앞에 일행의 주인인 듯한 30대 중반 가량의 남자가
훌륭한 백마를 타고 가고 있었다. 그런 일행은 갈 곳이 뻔했다. 틀림없이 그와레에서 가장 훌륭한 '사
프란 대문' 여관일 것이다.
그와레를 비롯해서 트라바체스 중남부에는 고급 향료인 사프란이 많이 나서 그나마 몇 안 되는 수출품
이 되어 주고 있었다. '사프란 대문' 여관에서 가장 훌륭한 요리는 당연히 사프란을 듬뿍 깔고 나오는
훈제 연어 스테이크였다. 물론, 해안 지방에서 훈제 연어를 잔쯕 싣고 오는 장사꾼이 성에 들어오는 날
만.
"많이 지쳐 보이는데."
성 사람 몇이 선 채로 주고받는 화제의 대상이 된 것은 번화한 길거리를 혼자 느리고 걷고 있는 한 소
년이었다. 행상이 그리 초라하지 않아서 소년 거지는 아닌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 오히려 그들의 의아하
게 했다. 그러나 소년이 여러 사람의 눈길을 끈 가장 큰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소년이 질질 끌며 가고
있는 한 소지품이었다.
그건 검임에 분명해 보였다. 무엇으로 만든 건지 새하얀 칼집은 상점의 램프 빛만 받아도 수십 가지
빛깔로 희번덕거렸다. 어린 소년이 들기에는 지나치게 컸고. 또 지나치게 좋은 것으로 보였다. 칼을 매
다는 혁대는 차고 있긴 했지만 블레이드가 워낙 길어서 소용이 없었고, 소년 역시 검을 옆구리에 낀 채
끝을 질질 끌며 걷고 있을 따름이었다. 눈길을 끌게 되긴 해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 같았다. 아
직 어린 소년인데 그만한 검은 가벼운 짐이 아니었다.
소년을 쳐다보고 있는 것은 평범한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거리 곳곳에서 의아한 눈동자로 그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는 몇몇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
벨노어 백작 집안의 얼니 하녀인 캐미아는 로즈니스의 성화에 못이겨 새 드레스를 구할 데가 없을까
하고 거리에 나와 있었다. 사람들에게 물어 가며 거리도 구경할 겸 천천히 걷던 그녀의 눈에 검을 끌고
가고 있는 소년의 모습이 뛰었다. 워낙 희한한 모양새라 캐미아의 눈도 한참이나 그 뒤를 따라갔다. 그
리고 무심결에 뒤따라 걷기 시작했다.
의상실은 아니었지만 그럭저럭 커 보이는 바느질 집을 발견한 캐미아가 걸음을 멈췄을 때, 소년도 멈
춰 서서 거리의 한 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허술한 여관처럼 보이는 건물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백작 저택에서 자라 온 캐미아였는지라 어쩐지 저런 여관 안에는 거친 깡패들만 자리잡고 있을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소년에게 말을 걸었다.
" 얘! 저런 덴 너 같은 어린애가 들어가기엔 위험하다고."
소년은 얼른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느리게, 아주 느리게 시선이 캐미아의 얼굴로 옮겨갔다. 소년의 얼
굴을 똑바로 바로 본 캐미아는 문득 움찔했다. 자기 또래 정도로 생각되었는데 눈빛은 결코 어린아이의
것이 아니었다.
12년 동안 주위 사람들의 눈치만 보며 자라 온 캐미아에게는 사람 보는 눈이 저절로 길러져 있었다.
소년의 눈은 어둡고 움푹했다. 단순히 굶거나 고생을 해서 해쓱해진 것이 아니라 눈 주위에 검은 그늘
이 한겹 드리워져 있었다. 아직 어린 캐미아는 거기까진 몰랐지만 그런 눈은 한때 결코 보아선 안될 자
면을 보고 애써 견뎌낸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눈이었다.
"괜찮아."
짧은 대답이 떨어졌다. 소년은 몸을 돌려 여관 안으로 들어갔다. 캐미아는 잠시 당황하고 있다가 곧 정
신을 추슬러 바느질 집으로 돌아들어갔다.
그날은 보리스가 형을 떠난 지 닷새 째 되는 날이었다.
형이 어머니의 유품을 팔아 남겨 준 돈이 아직은 약간 남아 있었다. 그 닷새 동안 그는 천지간에 버려
진 아이 같았던 자신 곁에 형이 있었던 것이 얼마나 큰 그늘이 되어 주었는지 선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전이라고 알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생각만 하는 것과 실제로 형이 없는 현실에 직접 부딪치
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첫날, 그는 돈을 아끼기 위해 가다가 만난 인가에서 구걸을 했다. 집을 지키고 있던 아주머니는 의심쩍
은 눈으로 보다가 그가 정말 오갈 데 없는 아이라는 것을 알고는 들여보내어 죽 비슷한 것을 한 그릇
주었다. 그가 죽을 허겁지겁 먹어치우고 아주머니가 가리킨 대로 헛간에 들어가 잠을 청하고 있는데 밤
이 되어 집 주인인 남자가 돌아왔다. 보리스를 보고 친절한 채 마음놓고 쉬라고 말하더니 안으로 들어
갔다.
생각이 많아 잠을 쉽게 이루지 못하던 그의 귀에 벽 너머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리 봐도
거지는 아닌 것 같은데 저런 아이를 넘겨주면 부모를 찾아내어 돈을 받고 파는 사람들이 있다는 얘기였
다. 물론 아이를 넘긴 그들 역시 몇 푼의 돈을 받을 수 있었다. 만일 그 자들이 부모를 찾지 못하면? 그
러면 노예 제도가 있는 아노마라드에 팔아 버리거나 용병단 따위에 넘긴다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그리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닌 모양이었다. 상황을 보아하니 아주머니도 혹하는 눈치였다.
보리스는 부부가 잠들기를 기다려 살그머니 헛간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밤새 걸어서 그곳을 벗어났
다.
주위에서 큰 새만 푸드덕거리며 날아놀라도 깜짝 놀랐다. 저택에서 지낼 때는 형과 함께 자고새 사냥
을 나가서 한두 마리 잡아오기도 했었던 그가 이렇듯 변해 있었다. 밤이 되어 불을 피워보려 했지만 아
무리 애써도 되지 않았다. 형이 시범을 보여주었던 그대로 했건만 불씨는 제대로 붙기도 전에 피시식
** 버렸다.
바짝 웅크린 채로 밤을 지새고 다음 날 다시 걸었다. 방향조차 알길이 없었다. 유일한 유품이라 할 만
한 윈터러는 점차 더 무거워졌다. 하루 종일 아무 것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형과 지낼 때 가끔씩 잡곤
했던 토끼 같은 작은 동물이나 심지어 새알조차도 그의 눈에는 발견되지 않았다. 무엇인지도 모르고 하
나 때서 먹은 열매는 시고 떫은 맛만 났다. 그래도 그는 고통조차 느끼지 못한 채 그것을 다 먹어치웠
다.
다음 날 순전히 운이 좋아 발견한 마을에서 그는 다시 인가로 가 구걸을 해야 할 지 아니면 여관으로
가야 할 지 결정이 서지 않았다. 그는 결국 어디로도 가지 못한 채 빵만 조금 사서 사람이 드문 구석을
찾았다. 아직 가을걷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지 않아 곡식을 쌓는 창고가 비어 있었다. 텅 빈 창고에는
짚단조차 없었다. 이제 차고 딱딱한 바닥에 대해서는 아무런 감상도 없는 그는 빵을 몇 입 뜯어먹은 다
음 거기에 누워 눈을 붙였다.
새벽이 채 밝기도 전에 그는 잠에서 깨었다. 갑자기 가슴 한쪽이 아파지면서 눈물이 한 줄기 주르륵
흘렀다. 그러나 그는 애써 눈물을 닦아내고 마른 입으로 다시 빵을 씹었다.
그는 이미 고모할머니를 찾아가는 것은 포기하고 있었다. 그도 트라바체스에서 나고 자란 만큼 서로
대립되는 정파에 속한 친척이란 것이 얼마나 의미 없는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인가? 그는 홀로 생각한 끝에 그가 갈 곳이란 없고 어딘가에서 심부름꾼
으로라도 써 준다면 뭄 붙이고 사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출신이니 자존심이니 하는 따위, 이
미 이런 상태에 이르러서는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형의 말대로 살아남은 것만이. 오직 그것만이 중요할
뿐이었다.
만일 일을 얻는다면 그래도 큰 도시 쪽이 나을 것 같다고 생각하고 그는 그 마을을 떠나 일전에 들어
두었던 그와레 성을 목표로 삼았다. 그리고 닷새 째 되는 날 그와레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방 좀 주십시오."
여관의 카운터를 맡아보고 있는 토냐는 열 여덟 살 먹은 주인의 딸이었다. 그는 조그마한 소년이 혼자
걸어와서 어른스런 말투로 방을 달라고 말하자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너 혼자니?"
"그렇습니다."
소년은 작았지만 말투로 보아 철없는 아이 같지는 않았다. 목소리는 겁먹은 것도 아니었고 당황하거나
망설이지도 않았다. 토냐는 잠시 후 어깨를 으쓱하며 뭐 어떠랴, 하는 얼굴이 되었다.
"그래, 싼 방으로 줄까?"
"그렇게 해 주세요."
"5엘소란다. 저쪽 부엌 옆에 딸린 방이야. 침대가 좀 작지만 너한테는 상관없을 것 같구나."
보리스는 미리 세어 두었던 은화를 호주머니에서 꺼내 내주었다. 돈주머니를 내보이는 것이 좋지 않다
는 것은 직감으로 알고 있었다. 토냐가 돈을 받자 보리스는 좀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저, 그리고......"
서글서글한 성격인 토냐는 혼자 여행하는 어린 소년에게 호기심을 느꼈으므로 평소보다 친절한 목소리
로 되물었다.
"그리고?"
"혹시, 저기. 저 같은 어린아이라도 써줄 만한...그런 곳을 알 수 없을까 하고요. 돈은 주지 않더라도 그
냥 먹고 잘 수만 있으면 되고....그런 데요."
보리스도 어느 정도는 예프넨과 비슷한 성격이었기에 그런 말을 꺼내는 데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다.
토냐는 눈을 약간 크게 뜨며 상대를 다시 한 번 살펴보았다.
"일자리를 구하니?"
이번엔 대답이 쉬었다.
"네."
"흐음......"
보리스는 토냐의 얼굴을 처음으로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자기가 그녀 정도의 나이만 되었더라도 얼마
나 좋을까 생각했다. 토내도 보리스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장사꾼인 그녀는 이 소년이 평민 가정에서
자란 것 같지는 않다고 짐작했다.
"정말로 아무 일이나 상관없어?"
그리고 토냐의 입에서 뜻밖의 대답이 나오자 보리스는 저도 모르게 긴장하며 대답했다.
"네, 어떤 일이든지."
"뭐 나도 확신은 할 수 없어. 저번에 대장간의 부닌 아저씨가 조수가 필요하다고 했던 것 같으니까 일
단 물어 볼게. 아니라면 이 근처에 드나드는 상인들이 잔심부름꾼을 필요로 할 것 같기도 하고."
눈을 천장으로 굴리며 중얼거리던 토냐는 불쑥 이어 말했다.
"너처럼 예쁘게 생긴 애는 돈 많은 마나님들도 시종으로 마음에 들어할 것 같은데."
보리스는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않는 얼굴로 약간 눈을 바로 떴다가 다시 내리깔았을 뿐이었다. 그런
소년을 내려다보며 토냐는 웃는 것처럼 입가를 실룩거렸다.
"어쨌든 혹시라도 좋은 얘기가 있으면 전해 줄 테니까 그만 방에 가서 쉬도록 해."
보리스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 방에 들어간 후 토냐는 저 애가 저녁은 먹은 걸까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서 없더란 말이야?"
캐미아는 동갑내기 아가씨의 얼굴을 보는 것이 두려웠다. 아직도 아가씨는 자신과 같은 옷을 입고 있
을 터였으므로. 게다가 좋은 소식도 없었다.
"그럼 다른 델 찾아보면 되잖아! 이만큼이나 큰 성인데 여기 귀족들은 그럼 뭘 입고 산단 말야!"
"여긴 시골이라서요 아가씨... 아가씨 같은 분이 입으시는 옷은 주문을 받아야만 만든대요."
"흥!"
로즈니스는 화가 나서 침대에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로즈, 아버지다. 들어가도 되겠니?"
아직 어린 딸이지만 꼬마 숙녀 취급을 해 주는 아버지였기에 이런 모습으로 있을 수 는 없었다. 로즈
니스는 얼른 발딱 일어나서 치마를 정돈하고서 대답했다.
"네, 아버지."
문을 열고 들어온 벨노어 백작의 팔에 걸쳐진 젓은 로즈니스가 가장 좋아하는 초록빛 천으로 만든 귀
여운 드레스였다. 완전히 새 것이였고. 만족스러울 정도로 고급이었기에 로즈니스는 깜짝 놀라며 소리쳤
다.
"아빠!"
뒤따라 들어온 비서 휴가 문을 닫았다. 벨노어 백작이 말했다.
"우리 꼬마 숙녀님이 옷이 없어서 쩔쩔매는 것을 보고 아버지가 얼른 가서 구해왔단다. 마음에 드느
냐?"
벌써 드레스를 받아들어 몸에 대어보고 있던 로즈니스는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마음에 들고말고요!"
"그럼 얼른 입어라. 아버지와 밤나들이 가자꾸나. 다른 나라의 풍습도 많이 구경해야 현명한 숙녀가 되
지."
"네!"
백작이 나가고 나서 로즈니스는 캐미아의 도움을 바당 싫었던 옷을 벗어버리고 서둘러 드레스로 갈아
입었다.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본 그녀의 얼굴에 슬그머니 미소가 피어올랐다.
밝은 레몬빛 머리카락을 곱게 늘어뜨리고 초록색 눈을 보석처럼 빛내는 자신은 스스로도 깜짝 놀란ㄹ
만큼 예뻐져 있었다. 실은 단순히 드레스 때문에 아니라 반나절 동안 구질구질하던 기분이 맑아졌던 탓
이었다. 캐미아도 옆에서 손뼉을 치며 아가씨의 비위를 맞춰 주었다. 곧 둘은 신이 나서 아래층으로 내
려왔다.
백작은 이미 타고 갈 말 준비를 끝내고 기다리고 있었다. 백작이 말에 오르고, 하인의 도움을 받아 두
다리를 안장 한쪽으로 모아 내린 채 말에 탄 로즈니스는 궁금하던 것을 물어보았다.
"그런데 아빠. 어디서 옷을 구하셨어요? 캐미아는 바느질 집밖에 못봤다는데."
"아버지도 그 바느질 집에서 샀지."
로즈니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떻게요?"
"이웃 마을에서 주문 받아 만들고 있던 드레스를 두 배 값을 주고 사왔지."
"아아."
로즈니스는 그제야 생긋 우승며 이해했다는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 고삐를 쥔 아버지의 품에 편안하게
기댔다.
말이 출발했다. 백작의 뒤로 비서 휴와 기사 셋이 역시 말을 타고 따랐다. 캐미아는 떠나는 말들을 바
라보며 저렇게 좋은 아버지가 있는 아가씨가 부럽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딸이 태어나자마자
귀족 집의 몸종으로 팔아먹었고, 돈 몇 푼만 생기면하루도 빠짐 없이 취해 있는 주정뱅이였으며 그나마
도 몇 년 전에 집을 나가서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얘, 얘... 문 좀 열어 봐."
토냐는 소년의 이름을 물어두지 않은 자신의 바보스러움을 탓하며 문을 두드렸다. 한참 잠들었을 테니
금방 일어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금방 대답이 들리고 문이 열렸다.
"이리 나와 봐. 대장간 아저씨가 널 좀 보자고 하셔."
보아하니 소년은 잠들지도 않았던 모양이었다. 걸어가는 동안 토냐가 이름이 뭐냐고 물었다.
"보리스...입니다."
"난 토냐라고 불러."
왠지 모르게 진네만이라는 성을 말해서는 안될 것 같았다. 토냐도 더 묻지 않은 채 그를 한쪽 구석의
테이블로 데려갔다. 거기에는 키가 크고 유난히 팔뚝만 굵은 40대 남자가 앉아 맥주를 들이키고 있었다.
"부닌 아저씨. 얘에요."
남자는 곁눈으로 슬쩍 보리스를 훑어보더니 말했다.
"비리비리한 녀석이군. 너, 대장간 일을 견딜 수 있겠냐?"
대장간 일이 무엇인지 알 리 없는 보리스였다. 그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이려다 마음을 고쳐먹고 입을
열었다.
"솔직히 어떤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허."
부닌이라는 남자는 맥주잔을 내려놓더니 다시 한 번 소년을 살피는 눈치였다. 그러더니 말했다.
"거짓말하는 녀석은 아니군. 널 딱 보고서 한 눈에 평민 출신은 아니란 걸 짐작했다. 어느 집안이냐?
최근에 항쟁이 있었나?"
"......"
보리스의 어두운 눈동자가 문득 마음에 걸린다 싶었다.
부닌은 대장장이였기 때문에 항쟁에 쓰일 무기를 댄 일이 여러 번 있었고. 덕택에 그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항쟁이란 주로 지배 계층들끼리 일어나는 법이고 주인이 바뀌어도 장원의 평민들은 그냥
살아가면 되었기 때문에 그와 같이 대뜸 짐작하여 물을 수 있는 사람은 드문 편이었다. 트라바체스가
공화국이 되었어도 아직은 틀림없는 계급 사회였다. 평민들에겐 선제후나 의원을 뽑을 투표권조차 없었
다.
"말하지 실은 게냐?"
말없이 서 있는 보리스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부닌이 재차 물었다. 그리고 대답을 기다리지 않은 채 맥
주를 마저 들이키더니 말했다.
"내일 아침 일찍 대장간으로 와라. 일을 조금 시켜 보고 별 볼일 없으면 쫒아버리겠다."
보리스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지만 토냐의 얼굴은 환해졌다. 그녀는 부닌 아저씨를 잘 알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면 합격이나 마찬가지란 걸 알고 있었다.
"얘, 어서 감사하다고 말하지 않고 뭘 하고 있어?"
보리스는 토냐가 다그치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고, 다시 그녀의 손에 이끌려
방으로 돌아왔다. 토냐는 잠깐 기다리라고 하더니 주방으로 가서 따뜻한 수프를 한 그릇 가득 떠 가직
돌아왔다.
" 너 저녁 안 먹었지? 이거라도 마셔 봐."
수프는 속에 든 것도 없이 허여멀건 물이 아니라 꽤 충실하게 야채니 고기 조각이니 하는 것이 들어
있었다. 보리스는 토냐를 잠시 쳐다보다가 수프 그릇을 받아들고 한 모금 마셨다. 토냐가 피식 웃더니
말했다.
"얘, 너는 고마우면 고맙다고 말하는 버릇 좀 들여야겠다."
탓하려고 꺼낸 말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미 보리스의 눈에서 충분히 고마움을 일었던 것이다.
"고마워요...누나."
좀 창피하게 느껴지긴 했지만 보리스는 주머니에서 말라비틀어진 빵조각을 꺼내어 수프에 찍어 먹었
다. 그러나 토냐는 그저 미소만 지었을 따름이었다.
먹고 나니 몸이 좀 따뜻해졌다. 토냐가 그릇을 가지고 돌아가자 보리스는 잠시 침대에 누워 생각에 잠
겼다.
대장간이라는 곳은 아마 농기구나 무기 따위를 만드는 곳이나 분명 힘들고 거친 일일 터였다. 그러나
그런 것은 별로 문제되지 않았다. 오히려 문제가 되는 것은 최근 얼마간 겪어 온 일들로 인해 그의 마
음에 생겨난 교훈 같은 것이었다.
저들을 믿어도 좋을까.
생명의 은인인 양 접근해서 탐내던 검을 빼앗고 용병단에 팔아버리는 자들도 있었다. 친절하게 재워
주는 체 하며 역시 어떻게 돈이나 몇 푼 챙겨 볼까 하는 어른들도 보았다. 친한 동료처럼 보이는 자들
도 간단한 위기만 닥치자 금방 서로를 배신했다.
토냐 누나나 부닌 아저씨 지금 친절해 보이지만 사실은 다른 꿍꿍이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지금까지
유난히 친절한 체 하던 자들일수록 꼭 더 악랄한 계획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마음속으로 이리 저리 고민하던 보리스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검을 옆에 끼고 밖으로 나왔다. 이미
늦은 밤이 되어 있었다. 그는 카운터에서 바쁘게 일하는 토냐의 눈을 피해 여관 밖까지 나왔다. 대장간
이 정말로 있는지 찾아볼 셈이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대장장이가 정직한 사람인지도 알아볼 생각이었
다.
여관 문 앞에서 거리로 걸어나오던 그는 갑자기 달려오는 네 마리나 되는 말에 그대로 밟힐 뻔했다.
그의 잘못이 아니었다. 기수들이 길거리의 사람들을 무시하고 부주의하게 달려왔던 것이다. 거리에는 사
람들이 이리저리 개미처럼 흩어지고 있었다.
"워엇!"
보리스가 미처 피하지 못한 채 바닥에 바짝 웅크렸을 때, 그의 등바로 위에서 말이 멈추었다. 멈추고도
다리를 움직거리던 말이 보리스의 옆구리를 툭 걷어찼다. 간신히 옆으로 굴러 빠져나왔지만 통증이 멈
추지 않았다.
"뭐냐! 죽고 싶어서 길을 막는 거냐!"
길을 막았다는 것은 순 억지였다. 보리스가 애써 몸을 일으켰을 때 기세 등등한 네 명의 기수가 푸르
륵 대는 말을 세운 채 그를 똑바로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마치 시비를 걸기 위해 나타나기라도
한 것처럼 저들끼리 피식거리는 웃음을 주고 받았다.
"이 어른의 앞길을 막았으면 얼른 엎으려 빌 것이지 뭘 그리 쳐다보고 있느냐!"
그들의 기세가 하도 높아서 주위 사람들은 감히 끼여들고 싶지 않은 듯 눈치만 보며 흩어져 갔다. 보
리스는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할 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는 아직 고개 속이는 데 익숙하지 못했다.
"길을 방해해서 죄송하지만...사람 많은 거리에서 말을 달린 아저씨들도 잘못인 것 같습니다."
"허어?"
"저 녀석 말하는 것 좀 봐라. 아직 정신이 덜 든 모양이구나."
기수들이 어이없어하며 헛웃음을 흘리는데 한 명이 말했다.
"정신 번쩍 나게 형님이 맛 좀 보여주지 그러오."
"안 그래도 그럴 참이었다!"
맨 앞에서 달려왔던 자가 말채찍을 높이 들었다. 그리고 다짜고짜 보리스를 향해 내리쳤다.
철썩!
채찍은 피할 겨를도 없이 등과 어깨에 감겨 날카로운 상처를 냈다. 그런 일격을 맞고 서 있을 어린아
이는 없었다. 보리스가 비틀거리며 주저앉자 그들은 히죽거리며 다시 한 번 채찍을 들었다. 살갗이 터져
나가는 통증이 다시 한 번 피부를 파고들었다. 채찍 끝이 얼굴에 스쳐 입가에도 피가 흘렀다.
"형님이 버릇을 가르치니까 저절로 무릎을 꿇는군요."
보리스가 쓰러진 것을 보고 한 남자가 킬킬거리며 말했다. 또 다른 남자가 말했다.
"알겠냐, 꼬마야? 송장 치우게 되기 전에 얼른 무릎 꿇고 빌어라."
토냐는 밖이 소란스럽다는 것을 느끼고 뭔가 싶어 밖으로 나왔다가 이 꼴을 목격했다. 그녀는 화가 치
밀어 올랐지만 동시에 어쩔 줄을 몰랐다. 그녀도 저들처럼 행색 좋은 망나니들에게 함부로 대들었다가
는 무슨 수모를 당하게 될 지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망설이다가 여관으로 뛰어들어간 그녀가 소
리질렀다.
"아빠! 아빠 어디있어요! 부닌 아저씨, 이리 좀 나와 보세요!"
보리스는 주위의 모든 것이 벌떼처럼 윙윙거린다고 느꼈다. 통증보다도 수치심이 얼굴을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그는 옆구리에 낀 윈터러의 자루를 보았다. 이 검을 휘두를 수 있을 정도로 내가 자라기만 했
더라면, 아니 여기에 형이, 예프넨이 있기만 했어도......
그러나 소용없는 기원일 뿐이었다.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그는 비척거리며 검을 짚고 있어났다. 후들
거리는 다리조차 가누기 힘들었지만 그는 똑바로 섰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더 이상 항변하지도 않았지만, 여전히 굴복하지도 않았다.
"저런 표독스런 자식을 봤나......"
한 사람이 말에서 내렸다. 넷 가운데 가장 막내인 듯한 사람이었다. 그는 다짜고짜 보리스의 멱살을 움
켜쥐더니 힘껏 여관의 기둥에 부딪쳤다. 얼마나 세게 내리쳤는지 기둥이 다 흔들렸다.
"너 같은 놈은 혼쭐내서 버릇을 가르쳐야 해. 어딜 거지 자식이 귀족한테 대드나, 대들길!"
쾅!쾅!
두 번 연속으로 기둥에 처박더니 다른 손으로 얼굴을 움켜쥐고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커다란 손은 소
년의 얼굴 전체를 덮어 일그러뜨렸고 강인한 손목이 머리를 옆으로 꺾어 돌렸다. 목이 뒤로 꺾어질 지
경이 되었을 때 다시 한번 기둥으로 밀쳐 박았다. 심한 충격으로 머리가 텅 비어버리는 느낌이 들었다.
"정신이 번쩍 나냐?"
"......"
대장장이 부닌이 토냐와 함께 밖으로 뛰쳐나와 그 꼴을 보는 순간이었다.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우직
한 사내인 그가 다짜고짜 달려들려는 그 때 등뒤에서 엄숙한 목소리가 울렸다.
"이 무슨 소란이냐!'
사람들의 눈이 뒤로 돌아갔다. 오늘은 말 탄 자들이 연이어 들어닥치는 날인 모양이었다. 다섯 마리나
되는 말이 멈춰 있었고 그 가운데 맨 앞에서 백마를 탄 고급스러운 옷차림의 남자가 호통을 치고 있었
다. 토냐가 보니 아까 저녁 무렵 성으로 들어온 외국 귀족이 분명했다.
"뭐야!"
보리스를 구타하던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그 때 백작 일행의 두 남자가 말에서 뛰어내려 그에게 달려
갔다. 그리고 당장 그 자를 붙잡아 밀치고 보리스를 부축했다.
보리스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깨달을 정신이 아니었다. 머리를 심하게 얻어맞아서 정확한 판단
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대로 부축하는 자들의 손에 축 늘어졌다.
"넌 뭔데 참견이야!"
말채찍을 휘둘렀던 자가 따지려 했지만 백작의 목소리가 단호하고도 위엄 있게 그를 눌렀다.
"난 이곳 사람은 아니지만 너희 같은 무뢰배들이 어린아이 하나를 때리는 모양을 그냥 보아 넘길 사람
은 아니다. 매운 맛을 보고 싶지 않거든 썩 물러나라."
"어쭈, 제법 큰소리치는데!"
결국 칼싸움으로 번질 모양이었다. 여기저기서 무기를 뽑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은 슬금슬금 뒷걸음
질치면서도 구경을 하려는 자세가 되었다. 토냐와 대장장이 부닌은 손쓰기가 뭣해져서 그들이 하는 양
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구경꾼들의 기대대로 되지는 않았다. 백작이 일단 칼을 뽑고 그 부하들이 말머리를 나란히 하
자 처음의 무뢰한들은 그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특히 중년 백작의 칼 솜씨는 매우 놀라워서 단숨에
두 사람을 말 등에서 떨어뜨리고도 상대가 크게 다치는 것은 교묘히 피했다. 말에서 떨어진 자는 욕을
퍼부었지만 그들 패거리가 모두 지는 것을 보고서 얼굴빛이 변해서 엉금엉금 기어 구석으로 달아났다.
백작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어서 네놈들의 말을 끌로 이 자리에서 썩 사라져라!"
더 추궁하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그들은 한 마디 대거리도 없이 시킨 대로 얼른 달아났다.
"아이를 말에 실어라. 그리고 의사도 수소문해 봐라."
백작이 명령하지 한 사람이 고개를 숙이더니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토냐에게 다가와 이 근처에 의사
가 있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뭔가 씁쓸한 기분으로 대답했다.
"의사는 아니지만 저쪽 골목을 돌아가서 세 번째 집에 약사 할머니가 살아요."
상황이 해결되자 백작은 말을 돌려 비서 휴가 안고 있는 로즈니스에게 다가갔다. 갑작스레 칼싸움 장
면을 보게 된 로즈니스는 눈이 동그래져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괜찮다. 로즈, 다 끝났단다. 아버지가 늘 말했지? 불의한 상황을 보고 그냥 지나치는 것은 귀족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너도 기억해두거라. 귀족에게는 귄리만큼이나 다 나름의 의무가 있는 거란다."
로즈니스는 아버지가 거느린 기사 한명이 안아 말을 태운 보리스를 바라보았다. 소년은 이미 정신이
반쯤 혼미해져 있었다. 그래서 이후에도 이날 로즈니스가 내뱉은 말을 금방 기억해 낼 수는 없었다.
"난 저렇게 더러운 아이는 싫어!"
로즈니스가 뭐라고 말했든 백작 일행은 보리스를 데리고 여관 앞을 떴다.
2. 삶의 갈림길
"으, 으음......"
천장에 무늬 있는 벽지가 발라진 방이었다. 순간 롱고르드의 저택에 돌아온 것은 아닌가 하는 착각이
일었다. 그것도 저택에 있는 어머니의 방, 더 어렸을 때 무심결에 잠들었다가 깨어난 일이 있는 그 침대
인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에게는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 방이었지만, 형에게는 늘 느껴진다는 그 어머니의 냄새를 맡아보려
했었다.
혼수 상태에서는 깨어났지만 한쪽 눈이 부어 올라 제대로 떠지지 않았다. 정신을 차렸다고 생각되는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내 검은?"
몸을 일으키려는 그를 다시 눌어 눕혀버리며 눈가에 물수건을 얹어 주는 목소리가 대꾸해 왔다.
"검이라고?:
낯선 여자의 목소리였다. 대략 서른 정도 먹은 아주머니인 듯했다.
"여기가...어딘가요?"
보리스는 다시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아까의 손이 사정없이 그를 도로 눌러버리며 이번에는 어
깨를 싸고 있던 붕대를 풀었다. 서른 먹은 아주머니라는 생각은 정정되어야 할 것 같았다. 손의 힘은 같
은 나이대의 아저씨와도 맞먹었다.
"가만히 좀 있어. 궁금한 건 차근히 가르쳐 줄 테니까."
시킨 대로 보리스는 상대방이 몸 곳곳의 붕대를 풀어 상처를 닦고 다시 새 붕대로 감도록 가만히 기다
리고 있었다.
치료가 끝나자 몸이 한결 시원해졌다. 한쪽 눈이나마 뜨고 옆에 애써 바라보니 매우 뚱뚱한 아주머니
가 더러운 붕대와 대야를 챙기고 있었다. 다른 하인이 들어와서 그것들을 가져가고 나자 아주머니는 그
제야 보리스의 얼굴을 바로 바라보았다.
"집은 어디냐?"
갑자기 눈앞에 어지러울 정도로 어머니의 방이 머릿속에서 어른거렸다. 그는 눈을 감은 채로 답했다.
"없어요."
"떠돌이라고?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 바른 대로 말해 봐. 피해는 끼치지 않으니까."
아주머니의 목소리는 퉁명스러웠지만 악의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집이 있다 해도 돌아갈 수 없으니까 없는 거나 다름없어요."
"흥, 너도 네가 비극의 주인공인 줄 아는 가출 소년이야?"
너무 어이없는 반응에 보리스는 뭐라 답해야 할 지 몰랐다. 아주머니가 뭘 말하고 싶은 건지도 알 수
없었다.
"꼭 집안 환경도 좋은 것들이 제 집이 제일 편한 줄 모르고 가출해서 헛소리들을 지껄인다니까. 아버지
가 동생만 사랑해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둥, 살짝 돌아서 어머니한테 마음 아플 소리를 해버렸으니
돌아갈 면목이 없다는 둥......"
"......"
"얼른 솔직히 말해. 어느 집이야? 넌 입은 옷도 좋은 것이고 손에 박힌 굳은 살이라고는 겨우 검을 잡
았던 흔적밖에 없으니 평민의 자식일 리가 없단 말이다. 백작 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서 널 구해주셨지만
언제까지나 데리고 다닐 거라 생각해선 안 돼. 얼른 집에 가서 얼토당토않은 오해나 푸는 게 옳지."
보리스는 점차 이 아주머니가 소설을 너무 많이 읽은 것은 아닌가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말도 끊
을 겸 낯선 단어를 질문했다.
"백작...님이요?"
아주머니는 이불을 바로 펴서 덮어 주면서 말했다.
"그래. 백작 님...아참, 이 나라엔 백작이 없지? 널 구해주신 분은 아노마라드의 귀족이신 벨노어 백작이
시다. 설마 백작이 무엇인지 모르는 건 아니지?"
보리스가 뭔가 대답하기도 전에 문이 덜컥 열리더니 한 소녀가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월라 아줌마!"
보리스는 기억하지 못했지만 소녀 쪽에서는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사뿐사뿐 들어오더니 눈을 흘기는
시늉을 했다.
"거 봐. 그런 여관에 들어가니까 문제가 생기는 거라고."
캐미아가 보리스의 부어오른 눈을 보더니 조그맣게 혀를 찼다. 그러나 그녀는 기본적으로 보리스를 다
시 만나게 된 걸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캐미아는 곧 입을 열어 말했다.
"어쨌든 우리 주인님께서 마친 그곳을 지나고 계셔서 다행이었다. 아가씨께선 많이 놀라신 모양이지만
지금은 괜찮으시고. 우음...너, 집으로 돌아갈거니?"
보리스는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처음에 아주머니의 질문은 어른인 만큼 당연한 것이었을 지 몰라
도 캐미아는 자신과 비슷한 또래였다. 더구나 캐미아의 어조는 마치 '아니'라는 대답이 나오길 기대하고
있는 듯해서 더욱 이상했다.
옆에서 윌라 아주머니가 다시 불쑥 끼여들었다.
"그럼 당연한 게 아니겠느냐, 캐미아. 주인님께선 어서 영지로 돌아가셔야 할 분이신데."
캐미아는 일부러 아주머니의 말을 외면하는 체 하며 다시 말했다.
"으응, 뭐 돌아갈 곳이 있다면 가야겠지만."
윌라는 평소 로즈니스의 곁에 붙어 있는 캐미아가 뭔가 주워들은 이야기가 있는 것 같다고 딱 짐작했
다.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물어대기 시작했다.
"주인님께서 무슨 말씀이 있으셨대냐? 응? 로즈니스 아가씨께서 무슨 얘기라도 하셨어?"
"아아, 아직 확실하지도 않은 이야기인걸요."
"이 에... 아니, 이름도 모르잖아. 하여튼...쟤가 어느 집안 앤지 알아내셨대?
보리스는 순간적으로 긴장했다. 그는 캐미아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러나 캐미아는 고개를 내
저었어다.
"난 몰라요. 내가 그런 걸 어떻게 알아요? 아이 참. 난 그만 아가씨한테 가볼래요. 찾는데 없다고 또 꾸
중들을지도 몰라."
그러더니 캐미아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보리스에게 가벼운 미소를 보냈다.
"또 봐."
보리스가 윈터러를 다시 보게 된 것은 그 날 저녁 무렵이 되어서였다. 혼란한 꿈속에서 문득 깨어나
보니 윈터러는 검은 보자기에 둘둘 감아져서 침대 바로 아래에 놓여 있었다.
전날 밤으로부터 하루를 꼬박 잠을 보낸 것이다. 어질어질하던 머릿속에 토냐와의 약속이 떠오르고서
야 그는 자신을 돌봐주고 있는 이 사람들이게 뭔가 말해야겠다고 느꼈다. 때마침 윌라가 몸이 좀 나아
졌으니 백작 부녀와 함께 저녁을 들도록 하라는 전갈을 가지고 왔다.
눈의 붓기가 가라앉고 붕대로 감았던 곳도 어느 정도 옷으로 덮어 입을 수 있게 된 터였다. 그가 안내
된 곳은 이 여관 안에서도 특실에만 딸려 있는 거실 겸 작은 식당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이미 백
작과 로즈니스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음식 시중을 들기 위해 윌라와 캐미아도 들어와
있었다.
"어서 오거라."
백작이 먼저 말하자 로즈니스도 비교적 나쁘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서 와."
빈 의자가 여러 개 놓여 있어서 보리스는 어디에 앉아야 할 지 몰랐다. 백작이 로즈니스의 바로 옆자
리를 가리켰다.
"저기 앉거라."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처럼 소수의 사람이 즐기는 만찬치고는 꽤 푸짐한 편이었다. 얇게 자른 햄
과 흰 치즈를 얹은 빵, 샐러드 접시가 나오고 나서 곧 요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테이블 가운데 커다란
빵 덩어리가 놓여 있었는데 보리스는 그것이 무엇에 사용하는 것인지 몰랐으나 백작 부녀가 하는 것을
보고 곧 알게 되었다. 그것은 접시에 남은 부스러기를 닦아 내는 꽤나 사치스러운 용도였다.
토끼고기를 잘게 썰어 양념한 질그릇 요리와 통후추 열매를 드문드문 뿌린 큼직한 벨크루즈 소시지,
그리고 포도주빛이 도는 얇게 썬 양고기 등등이 붉은 포도주와 함께 나왔다. 보리스는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 않게 된 사람처럼 식사를 시작하기 전에 간단하게 감사 인사를 한 뒤 두 사람을 기다려 식사를
시작했다.
잠시 후 조금 늦게 오믈렛이 하나 사왔는데 그걸 보며 아버지와 딸은 서로 의미심장한 미소를 주고 받
았다. 백작이 말했다.
"이걸 먹어 보면 벨크루즈의 진짜 맛을 알게 되지."
무엇인지도 모르고 보리스는 오믈렛을 한 조각 잘라 입에 넣었다. 그리고 약간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입에서는 두툼하게 자른 일종의 버석이 씹혔는데 그 맛이 아주 희한했다. 부드럽고 촉촉했으며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진하고 독특한 향미가 입안에 퍼졌다. 소년의 표정이 바뀌는 것을 보고 로즈니스가 재빨
리 말했다.
"송로야. 우리 집안의 영지에서 나는 것은 아주 유명하거든."
처음 먹어 보는 것인데도 진미라는 것을 금방 느낄 수 있었다. 보리스는 설명에 감사하듯 로즈니스에
게 가볍게 고래를 숙여 보였다. 로즈니스의 등위에 서 있던 캐미아가 살짝 입술을 비죽거렸다.
그러고도 로즈니스는 보리스가 식사하는 양을 슬쩍슬쩍 곁눈질해 쳐다보았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익숙한 손놀림과 정확한 식사 예법을 보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차츰 안심하기 시작했다. 이
낯선 소년이 불쾌한 일을 저질러 자신을 곤란하게 만들 가능성은 많이 줄어들었다고 느낀 탓이었다.
식사가 끝나자 오랜만에 잘 먹은 탓에 보리스의 마음도 약간은 풀렸다. 그러나 여전히 경계심을 완전
히 버리지는 않은 채 후식으로 나온 타트와 차를 맛보았다. 브랜디를 마시던 백작이 하녀들을 나가게
하더니 드디어 입을 열었다.
"정식으로 소개를 안했군. 나는 아노마라드 남쪽 지방인 벨크루즈의 절반을 차지하는 벨노어 영지의 백
작 가**드 다 벨노어다. 이 아이는 내 외동딸이자 상속녀인 로즈니스 다 벨노어라고 하지."
보리스는 순간 당황했다. 상대방이 이렇듯 정식으로 소개하면 자신의 신분도 밝히지 않을 수 없게 되
는 것이다. 보리스는 입 속으로 약간 망설이다가 외국인인데 그리 크지도 않은 자신의 가문을 설마 모
르겠지 하고 생각하며 말했다.
"보리스 진네만입니다."
그러나 예상을 깨고 백작이 되물었다.
"롱고르드의 그 진네만 가문인가?"
거짓말을 할 수도 없게 되었다. 망설이긴 했지만 보리스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백작은 의아
한 표정이 되었다.
"그곳이라면 트라바체스에서도 이름 있는 무사 가문이라고 언뜻 들었는데...집안에 무슨 변고라도 생긴
것인가?"
다행히도 백작은 앞서 소설 좋아하는 아주머니처럼 얼토당토않은 지레짐작은 하지 않았다. 이쯤 되니
솔직하게 털어놓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보리스는 짧게 말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삼촌께서 집안을 관리하게 되셨습니다."
"흐음......"
로즈니스의 상식으로는 보리스의 말이 무슨 상황을 뜻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셔
서 삼촌이 집안을 맡게 되었다면 그 아래에서 계속 보호를 받으면 될 일 아닌가? 그렇다면 그 말은 '아
버지께서 돌아가셔서, 삼촌께서 집안을 관리하게 되셨다' 가 되었어야했을 것이다. 그러나 보리스의 말
속에서 인과관계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백작은 잠시 후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는 자주 트라바체스에 드나들었던 만큼 아 나라의 고
질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들어 알고 있었다.
"역시 정치적인 견해가 다른 것인가? 그런 것이겠군."
"......"
문득 외국인 앞에서 자기 나라의 치부가 드러나는 듯한 기분에 얼굴이 붉어졌다. 아직 정치에 대해서
잘 모르는 나이이지만 이런 식의 공화정이라면 신물이 난다고 스스로도 생각하고 있었다. 아노마라드는
왕정이라고 들었는데 그 나라는 좀더 나은 상태일까?
"그렇다면 이제 어디에 몸을 의탁할 생각인가?"
보리스는 솔직하게 말하기로 작정했다.
"딱히 정해진 곳은 없습니다. 다만 이 도시의 대장장이 어른께서 도제로 거둬 주실 지도 모른다고 하셔
서 그곳에 찾아가 볼 생각입니다."
로즈니스는 대장장이를 '어른' 이라고 말하는 보리스의 말을 들으며 푸훗, 하고 웃었다. 이 희한한 대화
가 즐겁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거기에 약간의 우월감이 또한 그녀를 기분 좋게 했다.
"그래, 그럼 대장간 조수가 되겠군. 전에도 그런 일에 관심이 있었나? 그 일이 마음에 들 것 같나?"
그럴 리가 없었다. 보리스는 고개를 저으며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만은 달
리 말했다.
"이제부터 마음에 들도록 노력해야겠지요."
웃고만 있던 로즈니스가 불쑥 끼여들더니 말했다.
"아빠, 그럼 이 소년은 귀족인가요? 귀족이 대장간 일을 하게 되나요?"
"아니다. 로즈. 이 나라에는 아노마르드에서와 같은 귀족이 없단다. 다만 오랫동안 세습되어 온 선제후
와 의원이라는 것이 있어서 그들이 나라의 중요한 일을 책임질 사람들을 뽑지."
로즈니스는 장차 영지를 상속할 딸이였기에 아버지로부터 여러 가지 들은 것이 조금 있었다. 그래서
반문했다.
"그러면 나라 안의 영지들은 어쩌고요? 귀족이 없다면 누가 그것들을 관리하나요?"
"영지들에는 대대로 내려온 주인이 있지. 그러나 그들도 귀족은 아니란다. 대부분은 앞서 말한 선제후
나 의원 가운데 뜻을 함께 하는 사람을 찾아서 그들에게 조력을 제공하고 반대로 도움을 받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한 영주들의 투표가 선제후와 위원을 결정하게 되는 만큼 그들의 지지를 얻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인 것이지. 어찌됐든 그들 윗사람이 힘을 갖느냐, 또는 쇠망하느냐에 따라서 영지들은 때때로
그 윗사람과 운명을 같이하게 되고, 그럴 때면 영지의 주인도 바뀌게 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백작이 길게 설명을 하면서 대장간에 대한 것은 어쩐지 뒤로 밀려나 버린 것 같았다. 보리스는 외국인
인 백작이 우리나라에 대해 상당히 잘 아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다시 말했다.
"그런 까닭에 오랫동안 염치없이 신세를 지고 있었습니다만, 이만 떠나 대장간으로 가볼까 합니다. 본
래는 아침에 가기로 했는데 늦어지게 되었으니 저도 그 분께 면목이 없게 되어서 더 지체할 수가 없을
것같아요."
백작은 잠시 말하지 않고 조용한 눈길로 보리스를 바라보았다. 이것저것 생각하던 로즈니스도 아버지
의 분위기에 동요되어 같이 보리스를 쳐다봤다.
보리스가 두 사람의 눈길에 불편해할 정도가 될 무렵, 백작은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를 꺼냈다.
"보리스 진네만이라고 했지? 자네, 대장간으로 가기보다는 우리와 함께 아노마라드로 가는 것이 어떻겠
는가?"
보리스도 놀랐지만 로즈니스도 금시초문이었던 모양이었다. 깜짝 놀란 얼굴로 아버지를 바라봤다.
"아빠! 얘가 우리와 함께 간다고요? 우리 집으로요?"
백작은 빙그레 웃었다.
"그건 진네만 군이 결정할 문제지. 난 일단 제안을 했을 뿐이니까."
그들이 몇 마디 나누는 사이 보리스는 갑작스런 제안으로 인한 혼란에서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당장 질문이 튀어나왔다.
"죄송합니다만, 어째서입니까?"
"어째서라. 이유를 듣고 싶은가? 두 가지 선택이 있다. 원한다면 이유를 들려주겠지만 난 듣지 않는 쪽
을 권하고 싶군."
보리스는 잠시 테이블 아래로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나 곧 단호하게 고개를 떨쳐 들며 말했다.
"전 듣겠습니다."
그러자 백작도 망설이지 않고 단숨에 말했다.
"자네를 이용하고 싶어서다."
보리스는 숨을 훅, 하고 짧게 들이켰다. 그리고 말했다.
"이용...이라고 하셨습니까?"
보리스는 이 낯선 귀족이 뜻밖에 친절을 베풀 때부터 이미 약간의 의심을 품고 있었다. 게다가 심지어
함께 가자는 이야기까지 꺼냈을때는 더 망설임 없이 이자가 자신을 이용하려 한다고 판단했다.
보리스는 이제부터 그게 무엇인지 상대방의 변명으로부터 추론해 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듣게 된 대답
은 전혀 엉뚱한 것이어서 그는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백작의 눈이 묘한 빛으로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직 어린 보리스가 속내를 알아보기에는 너무
도 다의적인 의미를 품고 있었다.
"여기까지만 말하고 그 뒤를 말하지 않을 순 없지 그래, 난 실제로 자네가 필요 없다. 내게는 무엇 하
나 부족한 것이 없고 사랑스런 딸애가 있으니 더 이상의 자식도 원치 않아. 그런데 뜻밖으로 내게 딱
네 나이의 소년이 필요한 일이 생겼다. 실은 소년이 아니라 소녀라도 생관 없었지 네가 좋은 검을 갖고
있는 걸 봤다."
보리스의 눈동자도 그 즈음에서 어린아이답지 않은 차가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주도면밀한 자세로 그
는 상대의 말을 들었다.
"난 오래 전. 로즈가 태어나기도 더 전에 여러 친구들 앞에서 한 친구와 내기를 걸었었다. 결혼하여 자
식을 낳게 되면, 그 아이가 열 세살이 되었을 때 서로 검을 겨루게 시켜서 이기는 쪽이게 진 쪽이 무슨
소원이든 들어 주기로 말이지. 그 후로 로즈가 태어났고 난 오랫동안 그런 내기는 잊고 있었다."
전혀 뜻밖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들으며 보리스는 더욱 정신을 차려 상대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그리고 바로 작년에, 아주 오랜만에 그 친구의 소식을 다시 듣게 되었지 그 자는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맏아들 쪽은 불행하게도 백치라고 하더군. 그는 내가 딸을 가졌다는 것을 알고는 동생 쪽을 맹렬하게
교육시켜서 그 나이에 보기 드문 소년 검사로 만들었다고 했다. 그 자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 바로 내
딸 로즈였지 그는 백치인 아들과 내딸을 혼인시키기를 바라고 있는 거다."
"어머나!"
로즈니스가 깜짝 놀라 컵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엎질러진 음료수를 닦아 낼 하녀들은 이미 밖으로 나
간 상태였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로즈니스는 얼굴이 새파래져서 아버지를 다그쳤다.
"아빠, 그게 정말이에요? 백치하고 저를 결혼 시키신다고요?"
백작은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딸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내 모든 명예와 이름을 걸고 그런 일은 없다. 안심해라. 로즈."
아버지의 단호한 말에 로즈니스는 조금 안심한 것 같았지만 그래도 미심쩍은 표정으로 보리스를 다시
쳐다보았다. 보리스가 입을 열었다.
"그러면 그 사람과 싸울 소년으로 저를 택하시려는 것인가요? 하지만 저는 백작 님의 아들이 아닌데
어떻게 그 소년과 싸울 자격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딸에게서 고개를 돌린 백작은 웃지도 않고 말했다.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지. 오래 전에 양자로 들여 다른 지방에서 키우던 아이를 이번에 데려왔다고
하면 되는 일이야. 그 외에도 수많은 방법이 있으나 모두 내가 신경 쓸 일이고 자네가 고민할 문제는
아니네. 다만 자네는 내 제안에 찬성 또는 반대를 표해 주기만 하면 되는 거지. 만일 나를 따라 준다면
나와 함께 아노마라드의 내 성으로 가서 내 아들과 마찬가지의 대접을 받으며 자내게 될 것이지만 검술
훈련만은 혹독할 걸세. 오랫동안 훈련을 받아 왔을 그 소년을 반드시 이겨야만 하니까 말이지. 기간이
그리 길지도 않아. 만일 성공하게 되면 나는 자네에게 큰 사례를 하고. 원한다면 다시 혼자 자유롭게 살
아갈 수 있도록 충분한 지원을 해주겠네."
"만일 지게 된다면?"
백작은 무표정한 눈동자로 보리스를 내려다보더니 내뱉듯 말했다.
"벌써 그런 것이 걱정되마?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것은 아닌가 염려되는군. 걱정 말게. 실패한다고 해서
자네에게 벌주지는 않아. 다만 조용히 내 집에서 나가 주면 되는 것이지. 그러면 나는 로즈를 그 자에게
보내지 않기 위해서 좀더 부자연스러운 술책을 쓰지 않으면 안되게 되겠지. 나는 여러사람 앞에서 한
내기 약속을 지키는 차원에서 이 불미스러운 일을 마무리짓고 싶네."
보리스의 얼굴도 굳어졌다. 그도 이제 이 일이 단순히 어른으로부터 친절을 받고 보답하는 차원이 아
니라 대등한 입장에서 거래하게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느끼고 있었다. 결코 예의로 인사하고 웃고 헤어
지는 아야기는 아닌 것이다.
다음으로 느껴진 것은 약간의 서글픔이었다. 로즈니스에게는 아버지가 있어서 그녀의 문제를 뭐든 해
결해 주려고 협상의 전면에 나서 있지만 자신은 혼자뿐이었다. 누구도 자신에게 조언해주지 않았고, 결
정을 대신해 줄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 막대한 권력과 부를 지녔을 외국의 귀족 앞에서 자신은 돌아갈
집조차 없는 초라한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보리스는 천천히 입을 열어 말했다.
"그러나 왜 하필 저를 택하신 건가요? 저는 어제 우연하게 백작 님의 은혜를 입게 되었을 뿐, 저에 대
해 어떤 것도 모르시지 않습니까?"
백작은 약간 얼굴을 누그러뜨리고는 말했다.
"진네만이라는 가문이 윗대부터 검으로 유명한 곳이라는 이야기도 들어 알고 있다. 자넨 아직 어려서
많은 교육은 받지 못했겠지만 틀림없이 어느 정도의 기초적인 재능이 있겠지. 그리고 자네가 가진 그
검, 그걸 보고서 처음 이 계획을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된 것이야. 그만한 검을 지닌 집안이라면 분명 자
질 있는 자손을 가졌을 거라고 말이다."
보리스는 조금 냉랭하다 싶을 정도의 어조로 말했다.
"전 제게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 모릅니다."
"그래? 그럼 시험해 보고, 아니라면 다시 내치면 그만이다. 내가 자네를 택한 것에는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는데, 바로 자네가 일종의 귀족- 물론 트라바체스에는 귀족이 없지만- 출신이면서 돌아갈 곳이 없
다는 사실이 그것이야. 평민 소년이라면 열 명도, 스무 명도 쉽게 구할 수 있다. 하지만 바로 자네 또래
이면서 어려서부터 귀족답게 교육받아 온 소년을 구하는 일은 쉽지 않아, 아노마라드로 가면 자네는 내
양아들로서 행동해야 할 텐데 예법도 격식도 모르는 평민 소년에게 그런 것까지 가르칠 여유는 없네."
백작은 말을 끊었다가 강조하듯 다시 말했다.
"또한 실수를 저질러 나나 로즈를 무안하게 만드는 일 따위도 없기를 바라고."
반쯤은 경고에 가까운 말이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백작은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모두 다 한 셈이 되었
다.
보리스는 혼자서 생각에 잠겼다. 수많은 생각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 가운데는 토냐와 대장장이
부닌 씨에게 약속한 것에 대한 부담감도 분명히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미래에 대한 계획은커녕 당장 몸담을 곳조차 없는 처지였는데 이제는 갈림길에서 선
택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한편으로는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이란 것이 이런
형편인데도 인간이 미래에 대해 뭔가를 짐작하여 준비하거나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것이 과연 가능
하기나 한 일일까?
아노마라드는 그의 관념에서 까마득히 멀리 있던 땅이었다. 지리적인 거리만이 문제가 아니라 지금까
지 그의 삶에서 그랬다는 것이다. 또한 백작이 제안한 새로운 삶은 그야말로 도전과 시험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해낸다면 그만큼 큰 보답이 있을 테고, 실패한다면 스스로의 능력 없음을 탓할 밖에 도리가 없
을 것이다.
그에 비해 대장장이 조수로서의 삶은 더 이상의 격랑 따위와는 거리가 먼, 안정되고 조용한 삶을 그에
게 가져다 줄 거라고 생각되었다. 최근 얼마간 너무나 많은 원치 않는 일들을 겪었기에 오히러 그런 삶
이 주는 매력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는 끌렸다. 그런 곳에 조용히 숨어서 지내게 된다면 어떤 새로운 아
픔도 없겠지. 어떤 새로운 희생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겨우 열두 살이었다. 삶의 변화와 가능성을 모두 묻어버리기에는 아직 너무 어린 나이인
것이다. 보리스의 정신은 본래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나 막연한 동경 같은 것과는 거리가 먼 편이
었다. 그러므로 그런 모든 것보다도 그의 마음을 실질적으로 끈 사실은 바로 한 가지였다.
트라바체스를 떠난다는 것.
이 땅을 떠나, 한동안 돌아오지 않아도 좋다는 것.
"데러가...주십시오."
우선은 블라도 삼촌의 추격을 피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 다음으로는 마음의 독립을 얻을 수 있을 거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를 죽이고 형을 죽인 땅이었다. 그런 죽음이 온 대지 곳곳에 만연한 땅이었
다.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그 땅을 등지고 싶었다. 아버지와 형의 죽음을 잊으려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조차도 그러한 지독한 운
명에서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는 자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일종의 분노였다. 왜 그렇게
밖에 살아갈 수 없는가에 대한 답답함과 억울함이었다. 결코 원치 않았는데 단지 이 땅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휘말려 잃은 것이 얼마인가. 얼굴을 알 수 없는 고모로부터, 자신이 태어나서 지금까지 가장
사랑한 사람. 예프넨 진네만이 이르기까지.
나중에 이 결정을 잘 했다고, 결코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잘 결정해 주었다. 그만 돌아가 쉬고......"
백작은 말을 약간 끌더니 덧붙였다.
"만일 원한다면 그 대장간에 가서 인사를 하고 와도 좋네."
보리스는 일어나 백작 부녀에게 깊숙이 절하고 밖으로 나갔다.
3. 아노마라드
야트막한 구릉이 소박한 굴곡을 가지고 끊임없이 이어지며 따라왔다. 지금 바라보고 있는 이 땅은 아
노마라드였다. 트라바체스가 자리한 조개 반도를 시계방향으로 꺾어 돌며 그 지역의 기후를 결정해버
리는 카투나 산맥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축복 받은 녹색 대지를 가로지르는 파노자레 산맥 아래 아름다
운 땅으로 들어온 것이다.
고봉준령보다는 샘과 고원을 많이 품고 있는 파노자레 산맥 아래에는 수많은 크고 작은 영지와 지방들
이 산채해 있었으며 그 모두가 남부의 화창한 기후의 은혜 아래 있는 곳들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아름다운 곳을 말하라면 대부분의 남부인들 모두 의견이 일치했다. 서쪽 끝자락을 타고 내리며 탁 트인
평원으로 이어지는 백포도주의 아라종, 그리고 동쪽의 비교적 가파른 능선을 싸고 돌며 곳곳으로 뻗어
나는 송로의 벨크루즈, 그 두 지방.
최고가 둘이라는 것은 항상 문제였다. 두 지방 사람들의 자부심은 몹시 대단해서 그들 앞에서 함부로
이 화제를 꺼냈다가는 본전도 건지지 못하는 경우가 흔했다.
그러나 평범한 방문객의 입장에서는 어느 쪽도 빠지지 않는 경치인 쪽이 오히려 즐거운 것이다. 그리
고 당사자들 역시 방문객들이 입을 딱 벌리며 연달아 감탄사를 내뱉을 때 가장 큰 자부심을 느낄 수 있
는 법이었다.
그런 면에서 보리스는 환영 받을만한 방문객으로서 아무래도 실격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서서히 마차
가 벨크루즈로 들어설 무렵부터 로즈니스는 보리스가 언제 감탄하는 얼굴이 되나 하고 줄곧 쳐다봤지만
거의 소득을 올리 수가 없었다. 소년의 무심한 눈동자는 연신 창 밖을 향해 있었지만 얼굴에는 어떤 놀
란 기색도, 입에서도 칭찬의 말 한 마디 나오지 않았다.
"치잇."
재미없었다. 차라리 캐미아를 놀리는 편이 휠씬 나을 것처럼 생각됐다. 비록 잠깐이긴 하겠지만 아직껏
가져본 일 없었던 동생( 또는오빠)가 생기게 되는 것인데 도대체 재미있을 기미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얘, 나 좀 봐."
보리스는 고개도 움직이지 않은 채 시선만 로즈니스에게 돌렸다. 로즈니스는 어깨와 허리, 끝단에 분홍
빛 라인이 들어간 베이지색 드레스 차림으로 스무 살은 먹은 아가씨처럼 새침하게 앉아 있었는데 캐미
아만은 아가씨가 심심해서 어쩔 줄 몰라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너 열두 살이랬지? 그런데 나도 열두 살이어서 말야, 그럼 우리 중에 누가 동생이 되는 거야?"
로즈니스는 이 문제가 재미있는 논쟁이 될 줄 알았다. 아마 저쪽에서도 오빠가 되겠다고 우길 테니까...
그러면 태어난 달을 따져보자고 하고. 그래도 안되면 내가 먼저 이 집에 있었지 않느냐고 우길 참이었
다. 만일 말도 안된다고 나오면? 그러면 넌 양자고 난 친딸이니까. 라고 주장하면 된다!
그러나 보리스는 로즈니스를 잠시 바라보다가 짧게 말했다.
"좋을 대로 해. 누나 쪽이 좋으면 그렇게 부를게."
"에에......"
로즈니스는 혼자 이것저것 짐작으로 계획을 세워서 그게 하나씩 맞아들어 가는 것을 몹시 좋아했다.
그런 것을 아는 주위 하인들이나 하녀들은 일부러 그녀가 원하는 답만 차례대로 해서 비위를 맞추곤 했
었다. 물론 로즈니스 자신은 그런 사실을 몰랐지만.
어쨌건 이렇게 허무한 결론은 그녀의 취향에 전혀 안 맞았다. 이마를 살짝 찡그렸다가 펴더니 저도 모
르게 입을 열고 말았다.
"네 생일은 언젠데? 난 4월 8일이야."
"7월 12일"
이게 어찌된 일이지? 또다시 그녀가 미리 세워 놓은 계획은 쓸모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캐미아는 로즈
니스의 얼굴을 슬쩍 건너다보고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그맣게 킥킥거렸다. 이건 벼로 내키는 진행이
아니잖아, 라는 것이 표정에 그대로 드러나 있었던 탓이었다.
끄응, 하는 소리를 목에서 낸 로즈니스는 참지 못하고 목소리에 힘을 주며 다시 말했다.
"어차피 생일 같은 건 별로 의미 없잖아? 우리가 진짜 남매도 아닌데. 중요한 건 우리가......"
그때 마차 밖으로 나타난 아름다운 아몬드 나무들을 바라보고 있던 보리스가 고개를 돌리더니 말했다.
"그래 알았어. 그럼 오빠와 여동생으로 해 둬."
로즈니스의 얼굴빛이 갑자기 확 바뀌었다. 자기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그순간 깨달았던 것이다.
"그......"
"푸후하하하하하......"
캐미아가 참지 못하고 폭소를 터뜨려 버렸다. 물론 그 다음에는 아가씨에게 수도 없이 다리를 꼬집혀
야 했지만.
여덟 명의 기사들과 함께 마차 밖으로 말을 타고 가고 있던 벨노어 백작이 안에서 나는 웃음소리를 듣
더니 비서에게 말했다.
"아이들이 잘 어울리는 모양이군."
"그런가 봅니다."
"다행이로군."
그렇게 백작과 비서의 오해와 함께 마차는 달려 가을 물이 들기 시작한 나뭇잎들이 떠가는 시냇가를
따라가다가 무지개 모양의 돌다리를 건넜다. 벨노어 가문의 문장인 마르그리트꼿이 돌다리의 난간에 섬
세하게 새겨진 것이 내다보였다. 작지만 고풍스러운 돌다리였다.
부드러운 빛이 내려와 물결을 황금빛으로 적셨다. 푸르고 노란 잎새들이 뱅글뱅글 돌며 흘러가는 가운
데 햇살은 단단하고 매끈한 후박나무 잎새에도, 갸름하고 소복한 월계수 잎사귀에도 너울거리며 춤을
췄다. 창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것은 숲의 알싸한 냄새였다. 귓가에 뭔가가 속삭이고 있었다. 어서 와,
어서 이리로 와.
사철 금빛으로 반짝이는 땅. 벨크루즈의 향긋한 숲이 이곳이야.
"먼저 알려가 도착을 알려라!"
비서 휴의 명령으로 두 병의 기사가 성을 향해 말을 달려갔다. 깃털구름이 하늘 머리에 길게 누워 마
차 행렬을 굽어보았다. 로즈니스를 태우기 위해 가져간 사두 마차가 하나였고, 두 마리씩의 말이 끄는
나머지 두 대에는 여자 한인들과 함께 트라바체스에서 사온 선물이 가득 실려 있었다.
마차가 마지막 모퉁이를 돌았다. 드디어 등나무 덩굴이 멋지게 감겨 올라간 벨크루즈의 명물 벨노어
성이 정면으로 보였다.
전체적으로 약간의 베이지빛을 띠는 벽에 둥글게 튀어나온 탑들의 지붕이 고풍스런 진갈색으로 마무리
된 벨노어 성은 비록 4층밖에 되지 않았지만1백 25개나 되는 방과 맨 위층까지 뚫인 세 군데의 대형홀,
2백여 마리의 말이 들어갈 수 있는 마구간 등이 딸려 있는 유래 없이 거대한 규모의 성이었다. 이만큼
의 규모의 성이었다. 이만큼의 규모와 시설을 가진 성은 수도 켈티카까지 가기 전에는 아노마라드 안에
서도 찾아볼 수 없다고 했다. 검은 황금이라고도 불리는 송로의 주산지 벨크루즈가 얼마나 대단한 부를
이룩하고 있는지 상징적으로 나타내어 주는 건물인 셈이었다.
기사가 가서 알렸기 때문인지 정문 앞에는 십여 명의 하인들이 나와 시립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이
성의 안주인이라고 여겨지는 여자가 하녀 둘을 거느리고 서 있었다.
백작이 말에 내리고 하인들이 다가와 마차의 문을 열었다. 로즈니스가 내려 어머니에게 달려가고 나서
뒤늦게 내린 보리스는 성의 위용을 채 느끼기도 전에 좁고 긴 드레스에 녹색 숄을 걸친 여인을 먼저 보
게 되었다. 그녀는 마침 남편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저 아이가......?"
백작이 작은 목소리로 뭐라 대답하자 그녀는 보리스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건 순간적으로 상대를
당황하게 할 정도로 거리낌없는 시선이었다.
다행히 이 자리에서 인사를 하는 불편함은 겪지 않게 되었다. 백작부인은 아직까지도 드레스를 입은
채로 뛴다고 로즈니스를 약간 꾸짖었고 로즈니스도 어머니 앞에서는 응석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지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윽고 그들은 성 안으로 들어갔다.
보리스는 처음부터 벨노어 백작부인이 대하기 힘든 사람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떻게 아이를
낳았을까 싶을 정도로 선병질적으로 마른 체구에다가, 꽤 미인이긴 했으나 유난히 미간이 좁아서 까다
로운 인상을 주는 여자였다. 잘 웃지도 않았고, 하녀들 역시 암암리에 그녀 앞에서 행동을 조심하는 것
이 느껴졌다. 이런 백작부인이 천방지축으로 쾌활한 로즈니스와 닮은 점이라면 오직 환한 레몬빛 머리
카락밖에 없었다.
하인에 의해 성 안의 어떤 방으로 안내된 보리스는 잠시 마음놓고 쉬기도 전에 다시 부름을 받았다.
이번에 간 곳은 커다랗고 화려한 응접실이었다. 백작과 백작부인, 그리고 로즈니스가 모두 실내복으로
갈아입고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외출복 차림인 것은 자신밖에 없었다. 어쩐지 약간의 위화감이 느껴져
마음이 불편했다.
하인이나 하녀는 한 명도 들어와 있지 않았다. 의자에 가서 앉긴 했으나 딱히 뭐라 말할 수 없는 어색
함이 감돌았다. 테이블에서는 쿠키와 차가 식고 있었다.
백작부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미 전갈을 받기도 했었고, 대강의 이야기는 다 들었다. 여기 있는 동안은 내 집인 양 생각하고 편히
지내도록 해라."
그러나 말투에서는 전혀 그런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형식적으로 하는 말은 아니었고. 다만
감정이 결여된 듯한 인상을 주었다. 로즈니스가 불편한 기색을 느낀 듯 생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어머니, 전 오래 전부터 오빠를 갖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제가 동생이 되기로 했어요."
"그러니?"
딸에게 하는 대답에서도 아버지인 백작이 하듯 넘치는 애정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딸에게 애정이 없어
서라기보다는 예의를 보다 강조하는 어머니인 듯했다. 보리스는 문득 이 부인이 아주 대단한 집안 출신
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백작이 입을 열었다.
"이곳에 있는 동안은 나를 아버지, 그리고 여기 있는 이자보를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이 좋겠다. 너는
트라바체스 공화국 그반스크 지방의 몰락한 영주인 캄브 엘굴덴의 막내아들로서 다섯 살 때 내 양자가
되었지만, 지금까지는 재정적 지원만을 받으며 친아버지와 함께 자랐다.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셔서 얼굴
을 모른다. 그러나 올해 갑자기 아버지도 돌아가시는 바람에 이곳으로 옮겨와 살게 된 것이다."
마치 소설처럼 술술 쓰여지는 자신의 과거에 귀를 기울이는 기분은 참으로 이상했다. 그리고 그것은
어쩐지 자신의 진짜 과거와 조금씩 일치하는 부분도 있었다. 백작은 이어서 말했다.
"이 성의 사람들 가운데 네가 이곳에 오게 된 사연을 조금이라고 아는 사람은 d제부터 내가 거명하는
인물들뿐이다. 내 비서인 휴, 너를 간호했던 하녀 윌라. 로즈니스의 하녀인 캐미아. 그리고 트라바체스까
지 갔던 기사들 가운데 너를 구할 /때 옆에 있었던 게리보, 델레메르, 그로미어스. 그러나 이들도 네가
어떤 목적으로 언제까지 있게 되는지는 모른다. 그걸 아는 것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부부와 잠시
네 동생이 될 로즈니스뿐이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떤 상황에서도 내가 말한 과거에 맞춰 말하도록 해
라."
로즈니스는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정말로 비밀이 지켜질수 있을까 의아해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사실 철저한 비밀이 지켜지기에는 상황에 대해 어렴풋한 단서라도 일고 있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보리
스도 백작의 말이 단지 외부에 소문이 나지 않도록 주의하기 위한 것이라고 짐작했다.
"내가 지금 말한 것을 다 기억할 수 있겠느냐?"
보리스는 낮게 대답했다.
"예."
백작부인이 입을 열었다.
"아이가 잊어버릴 지도 모르니까 정확히 써서 넘겨주도록 해요."
"안 그래도 그럼 참이오. 휴가 이미 준비해 두었을 거요."
"잘 됐네요."
아무도 차를 마시거나 과자를 손을 대는 사람은 없었다. 너무 당연한 일이고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지
만 보리스는 저들 가족으로부터 소외된 존재인 자신이 씁쓸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한 가지 선택을 한
이상 끝까지 제대로 해내겠다는 결심은 이미 서 있었다.
"그럼 당신은 보리스의 방을 준비해 주도록 하시오. 로즈의 방과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아, 그 방이
좋겠군. 문샤인 탑 2층의 그 방."
백작부인은 약간 놀란 표정을 짓더니 곧 말했다.
"알겠어요. 당신의 말대로 하죠."
로즈니스조차도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보리스는 문샤인 탑 2층의 방이 뭐 어떤 곳인지 알지도 못했고
궁금하지도 않았다. 백작이 다시 보리스를 보며 말했다.
"나는 며칠 안으로 네게 검술을 가르칠 스승을 구하마. 그 전까지는 여독도 풀 겸, 푹 쉬도록 해라. 오
늘 하룻밤 자고 내일은 로즈가 오빠에게 성을 구경시켜 주는 것이 좋겠구나. 성이 매우 넓어서 자칫하
면 길 잃어버리기 쉽단다."
마지막 말투는 문득 딸에게 하듯 자상함을 띠어서 보리스는 오히려 흠칫했다. 사실 보리스는 친아버지
로부터도 자상한 말 같은 것은 들어본 일이 없었다. 비록 백작이 무심코 말한 것이라 해도 보리스는 갑
자기 가슴이 한 번 크게 뛰는 것을 느끼고 스스로도 놀랐다.
로즈니스가 문득 말했다.
"아빠... 아버지, 오빠에게도 시종이 필요하지 않겠어요?"
어머니가 곁에 있어서 말을 조심한 것이 분명했다. 보리스가 앞에 서 있어서인지 백작부인은 딱히 뭐
라 말하지는 않았다. 백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지었다.
"우리 로즈가 벌써부터 오빠를 챙기는구나. 벌써 생각하고 있었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내일 오전은 하
인들을 모아 놓고 보리스를 소개할 생각이니 그 자리에서 오빠를 시중들 하인을 하나 뽑도록 하자."
이야기를 끝났다. 백작부인이 종을 울리자 문이 열리고. 대기하고 있었던 듯 하녀가 들어와 아무도 마
시지 않은 차 테이블을 정리했다.
보리스는 새 부모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 나서 하인을 따라 방으로 돌아왔다.
그들과 헤어지는 순간 갑자기 맥이 탁 풀리는 기분이었다. 이방에서는 이날 하루동안만 지내고 내일이
면 새 방으로 옮겨가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이 방조차도 진네만 저택에서 자신이 쓰던 방보다 오히려
나았다.
방은 언제라도 손님이 오면 내줄 수 있도록 항상 정리되는 모양이었다. 침대에는 새하얀 시트와 홑이
불, 겨울용 담비털 이불이 깔려 있었고 레이스 커버가 깔린 매끈하고 작은 탁자는 테두리에 세심하게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심지어 의자 커버조차 정교한 프티푸앵자수로 장식되어 있었다. 금색 실과 흰 실
로 수놓은 하얀 마르그리트 꽃 세 송이였다.
장롱을 열어 보니 잠옷 한 벌과 실내에서 입게 될 법한 새 옷 한 벌만 달랑 들어 있었다. 후자는 아마
도 내일 입게 될 옷인 모양이었다. 지금 옷은 외출복이라 불편했는데 마땅히 갈아입을 옷이 없었다. 어
차피 저녁 식사도 하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어 보리스는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침대에 앉았다가 뭔
가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참지 못하고 일어서서 방을 몇 바퀴 돌았다.
그제야 덧창으로 닫힌 창문이 눈에 띄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 창의 존재가 말할 수 없이 반갑
게 느껴졌다. 창의 고리를 풀고 안쪽으로 활짝 열어제쳤다.
산뜻한 바람이 불어 들어오면서 그제야 이방 안에 약간 오래된 냄새가 감돌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
다. 의자를 끌어다 앉은 보리스는 창 밖을 멍하니 내다보았다.
자신이 마차를 타고 오던 굽어진 길과 그 주위에 우거진 각종 나무들의 작은 숲, 그리고 먼 데서 반짝
거리는 시냇물까지 한눈에 다 보였다. 성 근처의 정원은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었지만 그 너머는 이슬을
품은 영롱한 숲이었다. 방금 지나온 곳인데도 그곳에 다시 가고 싶다고 생각되었다.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게 되면 꼭 가서 천천히 산책해 보고 싶었다.
그곳에도 형과 뒹굴던 언덕과 같은 곳이 있을까.
"......"
그럴 리 없었다. 트라바체스의 자연은 이곳보다 거칠었고, 손질되지 않은 웃자란 풀들의 초원이었다.
여기엔 그런 곳은 없었다. 휠씬 다정다감하고 매력적인 자연만이 곳곳에 들어차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쩐지 그와는 거리가 먼 것, 이방인이 느낄법한 낯설음만을 품고 있을 따름이었다. 예쁘긴 하지만 결국
그와는 관계없는 소녀, 로즈니스와 마찬가지로.
좀더 고개를 숙여 내려다보자 좌우로 웅장하게 뻗은 성벽의 위용이 눈에 들어왔다. 2층이었지만 아래
로 내려다보이는 바닥도 몹시 까마득했다. 저 먼 곳에서 바라보았을 때 느낀 것과는 완연히 다른 견고
함, 그리고 거대함의 장소였다.
그는 밖에서 이 성을 바라보고, 그리고 그가 있는 창문이 보일 것을 상상해 보았다. 그것은 지독히 작
아서 결코 눈에 띄지 않을 것처럼 생각되었다. 존재 자체가 불필요한 작은 점처럼, 그렇게 너무나도 작
은 일부분으로 묻혀 있겠지.
벨노어 성의 느낌은 그가 이곳에서 겪게 될 생활에 대한 인상과 정확히 일치했다. 그는 너무 작았고,
그가 헤아릴 수 없는 현실은 너무도 컸다.
이렇듯 단단하고 위압적인 곳에 파묻혀 살아가는 동안, 한껏 참았던 숨을 조그맣게 내쉴 작은 창을 발
견할 수 있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이곳은 이방의 땅이다.
다음날 아침, 그는 백작이 불러 하인들을 만나러 가게 되기 전에 로즈니스의 방문을 먼저 받았다. 그녀
는 뭔가 재미있는 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뺨이 발그레해져서 들떠 있었다.
"아침 맛있게 먹었어, 오빠?"
식사는 하녀가 방으로 가지고 왔었다. 로즈니스는 처음으로 하는 '오빠'라는 말이 약간 어색한지 쑥스
럽게 씩 웃었다.
어쩐지 겨우 대답할 수 있었다.
"......그래."
"아빠가 나하고 성 구경하라고 하셨지? 가자! 오빠가 있게 될 방부터 보여줄게. 다른 데로 보여줄 것이
아주 아주 많아! 아마 깜짝 놀랄걸?"
물론 르즈니스가 이렇게 친절하게만 말할 리 없었다. 그녀는 턱을 쳐들며 한 마디 덧붙였는데 그 모습
도 나름대로 귀엽게 보였다.
"한눈팔지 않고 내 뒤만 따라오면 길을 잃지 않을 거야."
그들은 높직한 천장에 꽃봉오리처럼 생긴 대형 램프들이 달린 복도를 가로질러 갔다. 아침 햇빛이 복
도에 줄지어 난 창으로 구석구석 새어들었다. 복도의 창은 그가 잤던 방처럼 나무 덧문이 달린 것이 아
니라 보기만 해도 황홀한 진짜 유리로 만들어져 있었다. 또한 세로로 길고 높직했다. 두 소년 소녀가 가
뿐한 걸음걸이로 지나가는 융단 깔린 바닥에는 창틀의 그림자가 빛으로 된 그물처럼 너울졌다.
위에서 볼 때 정사각형을 이루는 벨노어 성의 네 귀퉁이에는 둥그스름하게 외부로 튀어나온 곳이 있어
서 이것을 탑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성 안에서는 복도로 곧장 이어져 있었으므로 탑이라기보다는 성의
일부분에 불과한 것처럼 보였다. 문샤인 탑은 남쪽 방향에 있는 귀퉁이였다.
로즈니스는 이날 캐미아도 데리고 오지 않았다. 앞으로 달려가 손수 높다란 두짝 문을 열어제치자 전
날 보았던 응접실에 비해서도 뒤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잘 꾸며진 거실이 눈에 들어왔다. 단지 크기만이
절반 정도로 작을 뿐이었다.
사방의 벽은 땅콩버터 빛깔이었다. 곳곳에 여자들의 드레스에 달린 프릴처럼 굴곡진 무늬들이 만들어
져 있었는데 어디나 금줄로 된 라인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천장에는 수십 개의 크리스털 장식이 달
린 샹들리에가 깨끗이 닦아져 있었고 차 테이블과 서랍장, 편지를 쓰는 책상, 아름다운 의자들, 여러 권
의 책이 꽂힌 책꽂이 등등이 곳곳에 놓여 있었다. 바닥에는 흰빛과 자줏빛의 백합꽃이 패턴 형태로 둥
글게 배열된 고급 융단이 깔려 있어서 발 딛는 곳마다 푹신푹신했다.
지금까지 벨크루즈의 자연이나 벨노어 성의 아름다움에 대해 별로 감탄한 기색을 보이지 않던 보리스
도 자신이 이 방에서 실제로 지내게 될 거라는 사실 때문인지 마음이 좀 움직인 것 같았다. 그는 직접
걸어가 주위를 둘러보았고. 그리고 거실 가운데 선 채로 로즈니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그때까지 보리스의 기색을 살피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뭔가 눈치챈 듯 쌕 웃어 보였다.
그때 느지막이 아야기를 듣고 온 캐미아가 허겁지겁 안으로 들어와 로즈니스 앞에 고개를 숙였다.
"아가씨, 용서해 주세요. 제가 이렇게 정신이 없어서......"
키조차 비슷한 동갑내기 소녀들 사이에 성립되어 있는 확고한 주종관계는 보리스의 눈에 그리 달가운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이 끼여들 입장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다행히 오늘 로즈니스는 기분이 좋았다.
:됐어. 난 오빠하고 다닐 테니까 뒤에서 좀 떨어져서 따라와."
이윽고 그들은 거실 안쪽에 있던 두 개의 문 가운데 하나를 열었다. 짐작했다시피 그것은 침실이었다.
장식이나 가구의 훌륭함은 전날 잤던 방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로즈니스는 자신이 앞장서서 다가가 장
롱 문을 열더니 그 안에 가득히 들어 있는 고급 옷들을 보았다. 비록 순수한 마음에서는 아니라 해도
로즈니스는 자금 보리스에게 이것저것 베푸는 기분으로 즐거워하고 있었다.
"하인이 생기면 이런 옷들을 언제 입어야 되는지 다 가르쳐 줄 거야."
보리스는 그녀처럼 옷에 대한 관심이 강하지 않았으므로 단지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침실의 크기
는 거실보다는 작았지만 역시 꽤 컸다. 침대만을 놓는다면 다섯 개도 나란히 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로즈니스는 드레스 입은 아가씨 답지 않게 발끝을 까딱거리면서 말했다.
"이 방이 우리 성에서 부모님이 쓰시는 방을 제외하면 제일 좋은 방이야. 사실 나, 본래 이 방이 갖고
싶었는데 아빠가 나한테는 너무 크다고 그러셨어. 내가 열 다섯 살이 되면 준다고 하셨거든? 그때쯤엔
오빠가 없을 테니까 분명히 나한테 주실 거야. 그러니까 그동안 방 깨끗이 써?"
로즈니스는 그새 오빠라는 말이 입에 붙은 듯 연달아 쉽게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말의 내용은 참 묘
했다. 이렇듯 친근하게 말하고 있는데도 곧 떠날 것을 쉽게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열두 살 어린 소녀인
데도 그런 것이 그렇게 간단히 받아들여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지금은 좋은 남매, 하지만 내년이 되면
남남.
방을 다 구경하고 나서 아직 서로가 낮선 의남매는 다리가 아플 정도로 많은 곳을 돌아다녔다. 로즈니
스는 구경시켜 주는 방식에 기준이 없어서 전망 좋은 창을 소개했다가 손님방을 하나씩 열어 보여주기
도 하고 심지어는 거대한 부엌에까지 데려갔다. 조리를 하는 하녀들은 완곡하게 말해서 두 사람을 밖으
로 쫓아냈다.
식당은 감탄할 만했다. 대략 서른 명이 함께 앉아 먹을 수 있을 정도로 긴 테이블이 세 개나 있었고
가운데에는 휠씬 잘 꾸며진 둥근 테이블이 있었다. 그러나 평소에는 쓰지 않은 모양이었다. 로즈니스와
백작 부처는 좀더 작고 아늑한 식당에서 식사한다고 했다.
"이제 다 구경한 건가?"
로즈니스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캐미아가 다가와서 말했다.
"서재 구경을 안 하셨어요. 지금쯤 주인님께서는 비워 두셨던 영지를 돌아보러 가섰을 테니까 가 봐도
괜찮지 않을까요?"
로즈니스는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손뼉을 쳤다.
"정말 그렇겠네! 서재로 가자, 오빠 음. 서재는 책이 무지무지 많은 곳이야."
보리스도 서재가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다. 문득 아버지가 살아 생전에 서재에 앉아 계시던 모습이 떠
올라왔다. 고향의 저택에서도 서재는 아버지가 안에 계신 한 쉽게 들어갈 수는 없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아버지는 집사 튤크를 불러 자신으로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여러 가지 지시를 하곤 하셨다......
의아한 일이었다. 보리스는 그렇게도 엄하고 차갑기만 했던 아버지가 그립게 느껴지는 자신이 이상하
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것은 형에 대한 향수와는 달랐다. 아버지의 존재는 자신의 옛 삶 자체, 생활의
느낌을 직접적으로 상징하고 있었다.
서재는 3층에 있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을 때 가득히 펼쳐진 책의 바다를 감상하기도 전에 뜻
밖의 사건이 터졌다. 갑자기 로즈니스가 화난 걸음걸이로 한쪽 책꽂이 앞으로 다가가더니 손가락을 쳐
들며 언성을 높였다.
"란지에! 너 또 아버지 책 멋대로 읽은 거야?"
한 소년이 거기에 서 있었다. 옷차림으로 보아 피고용인임이 분명한 그는 손에 두꺼운 책 한 권을 펼
쳐 들고 있었다.
나이는 역시 그들과 또래인 듯. 연한 하늘빛 머리카락이 흐트러진 이마는 단단하고 곧아서 고집, 또는
그 이상의 어떤 이상에 대한 집착을 나타내는 듯 보였다. 지금까지 아노마라드에서 보았던 어떤 것과도
닮지 않았다. 그의 존재는 이 따사롭고 아름다운 고장에서 실로 이질적인 외국의 것처럼 보였다.
서늘하고, 맑았다.
그러나 그런 것을 떠나 어디에 데려다 놓아도 눈을 뛸 정도로 수려한 외모의 소년이었다. 그는 화를
내는 로즈니스 앞에서 당황하지도 않은 채 단지 책을 접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슬쩍 어깨 너머로 낯선
소년인 보리스를 쳐다보았다.
시선이 눈동자에 이르렀을 때, 보리스는 약간 놀라며 그것을 자세히 보았다. 햇빛을 받아 색깔이 다르
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분명 선명한 진홍빛이었다. 그런 빛깔의 눈동자가 있을 수 있다는 사
실을 처음으로 알았다. 루비가 아로새겨진 듯한 그 눈빛은 생각보다 몹시 아름다웠다.
"아버지 사재에 몰래 숨어 들어와서 책을 훔쳐보다니!"
로즈니스는 란지에라는 소년이 책을 다시 꽂기 전에 재빨리 빼앗더니 힘껏 바닥에 내동댕이쳐 버렸다.
캐미아가 깜짝 놀라 얼른 떨어진 책을 주웠다. 책 커버 한쪽이 이지러진 듯 보이자 안절부절못하며 손
으로 만져 바르게 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책을 던진 당사자인 로즈니스는 전혀 신경 쓰지 않은 태도로
손가락을 들어 란지에의 이마를 쿡쿡 찔렸다.
"네 분수를 좀 알아! 아버지께 말씀드려서 내쫓게 할까보다!"
보리스는 하인에 불과하지만 고상한 자태를 가진 이 소년이 뭐라고 대꾸할 까 궁금해졌다. 그러나 그
의 대답은 보리스의 기대와 어긋났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제가 잘못했어요."
뭔가 그 외의 대답을 기대한다는 것은 사실 무리가 아닌가? 그러나 말투는 완전히 굽혀 고분고분한 것
과는 좀 달랐다. 로즈니스도 오랫동안 아가씨로 떠받들어지며 살아온 만큼 그런 것에 대한 눈치는 빨랐
다. 여전히 불만스런 눈치로 한 발짝 물러서더니 보리스를 힐끗 보며 쏘아붙었다.
"오늘은 오빠가 옆에 있어서 참는 거야. 다음에 한 번만 더 이런 짓하다가 걸리면 그대로 아버지한테
일러버릴 테다!"
오빠라는 단어는 분명 그에게는 낯선 것이었을 텐데도 란지에는 궁금한 기색을 보이지 않은 채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는 보리스의 곁을 지나 밖으로 나갔다. 캐미아가 얼른 달려오더니 책을 책꽂이에 꽃았다.
그제야 로즈니스도 책이 상하지는 않았나 살펴보는 기색이었다.
"뭐, 괜찮겠지. 저 정도는"
나름대로 하인들을 다루는 방법 정도는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로즈니스였다. 그런데 작년 초에
아버지는 켈티카에 갔다가 데려운 시종 소년만은 간단하게 되지 않았다.
겉으로는 소리 지르면 고개 숙이고 무리한 일을 시켜도 고분고분한 듯 보이지만, 속내로는 자기 따위
조그마한 아가씨쯤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태도가 점점 더 강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지금 신분이며 처
지가 어쩔 수 없는 만큼 원하는 대로 굽혀주겠지만 내 마음만큼은 네가 어쩌겠느냐, 라는 그 눈빛이 불
쾌했다.
다른 하인이나 하녀들처럼 주인이 오늘 짜증을 내지는 않는지, 화가 나는 일은 없었는지( 그 이유는 무
엇이었든 간에_ 조심조심 눈치를 살피다가 어떻게든 기분 좋게 만들어 드려서 운 좋으면 칭찬이나 보답
을 받게 되고. 아니라 해도 어쩔 수 없는 관계, 주인이 이기고 싶어하면 져 주고, 잘난 체 하고 싶어하
면 멍청한 체 해 주는 그런 것이 로즈니스가 원하는 하인의 이상이었다. 비록 란지에와 자신이 한 또래
지만 나는 주인 아가씨고 너는 하인인데 그런 식으로 수평 관계를 유지하려 하는 것은 단지 가증스러운
시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다만 란지에에게는 유일한 약점이 있었다. 바로 여동생이었다.
4. 란즈미, 10세, 자페아.
"구경 다했지? 그만 가자."
들떴던 기분이 갑작스레 식어버린 로즈니스는 서재를 구경시키는 것 따위에는 이제 관심이 없어진 듯
쌀쌀맞게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버렸다.
보리스는 본래 책에 큰 관심을 두는 성격이 아니었다. 다만 나가기 전에 다시 한 번 둘러본 빽빽한 책
꽂이 앞은 백작과 같이 필요한 지식만을 얻어 가는 사람보다는 몰래 숨어 한 권 한 권 읽어나가는 란지
에 같은 소년이 좀더 어울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문득 떠올랐다.
"너희들이 지금 보고 있는 이 사람들은 내가 7년 전에 양자로 들인 보리스 벨노어다. 이제부터 성에서
함께 지내게 될 테니 로즈니스와 마찬가지로 정성을 다해 모셔야 한다."
"예, 알겠습니다."
백작의 말에 대표로 대답한 것은 늙은 집사인 말투였다. 보리스는 이 노인이 본래 트라바체스 출신이
라는 이야기를 들어서 벌써부터 크게 경계하고 있었지만 상대방 쪽에서는 그리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
었다.
성 안에서 두 번째로 큰 홀에 모인 성의 피고용인들은 백작의 말을 들으며 다들 백작 곁에 나란히 선
보리스를 쳐다보고 있었다. 백작은 보리스의 어깨에 손을 얹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정말로 아버지와 아
들인 양 매우 친근해 보였다.
아내와 딸의 황산 머리빛깔과는 달리 검은 머리를 갖고 있던 백작이었기에 곁에 선 보리스의 어두운
청동빛 머리는 더더욱 두 사람이 비슷하게 보이게 했다. 하인들 가운데 몇몇은 양아들이 아니라 어딘가
다른 여자와의 사이에서 난 아이를 데려온 것은 아닐까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기까지 했다.
보리스는 수많은 사람의 시선이 불편하게 느껴졌지만 이만한 일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제
부터 어떤 외줄타기가 시작될지도 모르는데 이런 정도에 기가 죽어서는 안 되었다. 무감정하게, 대담하
게, 그리고 신중하게.
"자. 이 가운데 네가 마음에 드는 시종을 골라 보아라. 아니면 네가 원하는 것을 말하면 내가 적당한
사람을 골라주마."
보리스는 나이 많은 하인과 함께 다니며 행동을 조심하게 되는 상황은 피하고 싶었다. 언제 어떤 실수
를 할지 모른다면 비슷한 또래일수록 슬쩍 넘어가기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저와 같은 나이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정확한 발음으로 그렇게 말하는 보리스의 눈동자는 맨 끝줄 즈음에 서 있는 란지에에게 향해져 있었
다.
실은 꼭 그가 아니라도 상관없을 것이다. 오히려 너무 영리한 시종보다는 조금 멍청해서 속여넘기기
좋은 편이 나을 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보리스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자꾸만 궁금했다. 호감과는 약간
달랐고. 오히려 호기심과 비슷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과 완연히 다른 사람이었다. 그 다른 것이 오히려
마음을 끌었다.
백작은 약간 곤란한 표정이 되었다가 곧 마음을 고쳐먹은 듯 말했다.
"저 맨 끝에 선 아이는 란지에 로젠크란츠다. 그 애를 네 시종으로 삼고 싶으냐?"
조금 망설이다가 결국 대답이 나왔다.
"예."
결정이 나는 순간까지도 란지에는 보리스의 얼굴을 관심있게 쳐다** 않았다. 백작이 손짓하자 그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왔다. 그리고 허리를 굽혀 인사하며 말했다.
"란지에 로젠크란츠입니다. 도련님."
그 목소리를 들었을 때 보리스는 문득 로즈니스가 그를 어떻게 느끼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도 그순간 느꼈던 것이다. 상대방에게 굴복하는 듯 하지만 실제로는 가벼운 존중조차도 내주지 않은
감춰진 어감을.
"보리스 도련님이다. 정성을 다해 모시거라. 이제부터 보리스의 시중이 네 일차적인 임무가 될 것이다.
그동안 맡고 있던 일들은 이제 그만두어도 좋다."
"예. 주인님."
백작에게 말하는 목소리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백작은 어른이었기 때문에 어린 소년의 사소한
감정 상태에는 그리 유념하지 않은 것 같았다.
백작의 명령으로 모였던 하인들이 흩어졌다. 백작은 집사인 말쿠와 할 이야기가 있는 듯 둘에게 그만
가보라는 손짓을 했다.
둘은 나란히 걸어서 복도로 나왔다. 란지에가 입을 열었다.
"도련님의 방으로 가시지요. 성에서 편히 지내시기 위해 아셔야 할 것들을 이야기해 드리겠습니다."
이번에는 한결 차갑게까지 들리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보리스는 단지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탁, 탁, 탁. 탁.
결코 친구가 아닌 그들의 방으로 걸어가는 도중 우연하게 발소리가 맞춰지고 있는 것을 느꼈다. 잠시
후 란지에 쪽에서 의식적으로 걸음을 조정했다. 보리스는 무엇인가를 느끼고 이번에는 천천히 그의 걸
음에 맞쳤다. 다시 발소리가 똑같아지자 란지에의 걸음은 더 느려졌다.
그런 일은 조금 더 지속된 후 보리스가 불쑥 말했다.
"불편하다면 내가 먼저 가 있지."
대답도 듣지 않고 보리스는 걸음을 빨리 해서 앞질러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리고 돌아서서 란지에
가 따라 들어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문을 닫고. 화려한 거실의 중앙까지 온 그는 보리스를 똑바로 보면
서 말했다.
"먼저 앉으시지요."
둘은 마주 앉아 잠시 말이 없었다. 한참만에 보리스가 말했다.
"목이 마른데."
란지에가 일어섰다. 그리고 한쪽의 차 테이블에 놓여 있는 은주전자에서 물 한 잔을 따라 쟁반에 받쳐
들고 왔다. 보리스의 앞에 물이 찰랑거리는 크리스털 잔이 놓여졌다.
"드시지요."
그건 어쩌면 장난감 극장에서 하는 인형놀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당연한 말을 또박또박 되풀이해 말
하면서 자신의 배역을 망치지는 않겠다는, 최소한의 성의와 같은 것. 보리스는 잔을 들어 물을 마셨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하겠다던 이야기를 해 줘."
"먼저 주인님 가족의 생활에 대해서 말씀드리지요."
보리스는 란지에의 붉은 눈동자를 바라볼 때마다 기분이 이상해졌다. 차분한 말소리가 이어졌다.
"주인 어른께서는 열흘에 한 번 정도 영지를 시찰하시고 두 달에 한번 꼴로 타지 여행을 떠나십니다.
목적지는 켈티카 행이 가장 많고 나머지는 대부분 송로 거래가 이루어지는 외지의 영지들입니다. 여행
은 짧으면 닷새 정도에서 길어질 때는 한달 이상 걸릴 때도 있습니다. 성에 계실 때는 오전 중에 주로
서재에 계시고 오후에는 마님과 담소를 나누시거나 로즈니스 아가씨와 산책을 하거나 하며 지내십니다.
사냥을 좋아하셔서 기사 분들을 이끌고 근처의 산으로 떠나실 때로 있는데 며칠씩 돌아오지 않으시는
일도 있습니다. 주인님은 주위 사람들에게 너그러운 분이시지만 일단 경우에 어긋나는 일은 또한 쉽게
용서하지 않는 분이시기도 합니다."
외운 대사를 기계적으로 나열하듯 하는 목소리였다. 보리스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계속해서
말하기를 기다렸다.
"주인 마님은 바깥출입이 거의 없으신 분입니다. 거의 항상 성 안의 살롱에서 자수를 놓으시거나 햇빛
을 쬐며 편지를 쓰시거나 합니다. 아침에는 몹시 일찍 일어나시고 주무실 때로 일찍 주무십니다. 마님은
건강이 좋지 않으셔서 작은 잘못에도 크게 마음을 상하실 수 있는 분이니 그 분의 심기를 잘 살펴 헤어
려 드리십시오."
보리스는 란지에가 완곡하게 돌려서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마도 백작부인은 몹시 하인들에게
까다로운 마님임에 틀림없다는 것 같았다. 그것은 잠시 자식 노릇을 해야 하는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이
리라.
"로즈니스 아가씨는......"
란지에는 말꼬리를 살짝 끌다가 멈췄다. 아침의 사건을 기억하고 있는 보리스는 그가 무슨 말을 할 지
궁금해졌다.
"이미 어떤 분인지 충분히 아시겠지요."
란지에라는 소년은 곤란한 상황을 빠져가는 데 재수가 있었다.
그러고도 그는 계속해서 이어 말했다. 성 안에서 주로 가게 될 방이나 홀들의 용도에 대해서, 이 방 안
의 여러 가지 물품들을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서. 하인들의 성품에 관해서. 영지의 구성에 관해서. 특별
한 행사들에 관해서.
"......다음 달에 마님의 생신이 돌아오면 수도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많은 손님들이 오십니다. 대부분은
마님의 친정 집안인 크레산느후작 가문의 친지들과 그 가문을 섬기는 집안의 부인들이십니다. 이틀 정
도 걸리는 파티가 열리고 밤에는 무도회가 벌어집니다. 도련님께서는 춤을 잘 추십니까?"
갑작스런 질문에 보리스는 대답을 망설였다. 트라바체스에는 귀족이 있지도 않았고. 영주를 비롯한 지
배 가문들도 서로 경계하고 파멸시키기에 급급한지라 우의를 다지기 위한 여흥 모임은 그다지 발달하지
못한 곳이었다. 더구나 진네만 가문에는 오래 전부터 안주인이 없었다. 보리스가 그런 것을 배울 기회가
있었을 리 없었다.
그러나 무작정 모른다고 말하는 것도 불안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가 망설이는 동안 란지에가 먼저
말했다.
"익숙하지 않으신 모양이군요. 원하신다면 제가 가르쳐 드릴 수도 있습니다만."
더더욱 뜻밖의 말에 보리스는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 지 몰랐다. 그러나 란지에는 별 감정 없는 얼굴
로 다시 말을 시작했다. 몇 가지 더 언급한 뒤 란지에의 이야기는 곧 끝났다. 그러고 나자 두 소년은 더
이상 말이 없게 되었다.
보리스는 뭔가 말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섣불리 말을 꺼냈다가 실수라도 자신의 정체를 암
시하게 될까봐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때 문득, 상대방의 이야기를 물으면 되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쓰쳤다.
"넌 내가 오기 전엔 지금까지 이 성에서 어떤 일을 했니?"
"백작 님을 가까이에서 시중드는 임무를 맡고 있었습니다."
"여긴 언제 왔지?"
"작년 초입니다. 1년 반 정도 있었습니다."
"그 전에는?"
"켈티카에서 살았습니다."
조금 이상한 말인 것 같았다. 보리스는 당연히 켈티카에 가본 일은 없지만 그곳이 엄청나게 멀다는 것
만은 알고 있었다. 아노마라드의 수도이지만 북쪽에 상당히 치운친 도시였다. 그곳에서 여기까지 오게
된 이유가 뭐란 말인가?
문득 가난한 집안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런 곳에서는 아이들을 부자들의 하인으로 팔기도 한다고 했
던가.
"부모님은 살아 계셔?"
란지에에게는 보리스의 질문을 거부할 권리가 없었다. 주인이 묻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보리스는 그
순간 란지에의 얼굴을 보며 이런 질몬을 다른 사람이 했더라면 결코 답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확신에 가
까운 직감이 들었다.
"잘 모릅니다. 적어도 저와 헤어질 때는 살아 계셨으나 지금은 어떻게 되셨는지 알 수 없지요."
보리스는 이 이야기를 더 진행시키는 것이 란지에의 기분을 상하게 할 것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멈추지 않고 물었다.
"그럼... 지금은 혼자 뿐인 거군?"
란지에의 눈동자는 분명 따뜻한 진홍빛인데 지금은 너무도 차갑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한 톤 낮아
진 목소리로 답했다.
"여동생이 있습니다. 주인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이 성 안에 함께 살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더 끄는 것은 심한 감정적 대립을 초래할 것 같아 보리스는 질문을 중단했다. 이미 점심 시
간이었다.
나흘이 흘렀다. 보리스도 점차 성 안의 생활을 배워나가고 있었다.
작정을 하고 배우려 한 탓인지 진전도 몹시 빨랐다. 벌써 성 안의 웬만한 곳에서는 길을 잃지 않을 정
도가 되었고 하인들을 대하는 것도 자연스러워졌다.
로즈니스와는 그럭저럭 잘 지냈다. 시시각각으로 기분이 변하고 기본적으로 거만해서 그렇지 본성이
그리 나쁜 것은 아니어서 적당한 선만 유지하면 얼굴 붉힐 일은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일단 보리스는
로즈니스의 비위를 건드려 봤자 시끄러운 일만 만들게 된다는 것을 일찌감치 터득했다. 또한 로즈니스
도 보리스가 이 성에 와있는 것이 자신을 위해서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인지 하녀들이 뜻밖이라고 쑥
덕거릴 정도로 보리스를 살갑게 대해 주었다.
주로 방에 박혀 있다는 백작부인과는 그다지 마주칠 일이 없어서 그나마 안심이었다. 남는 시간에는
거실에 꽂힌 책을 이것저것 꺼내보며 지냈다. 사실 책은 그다지 재미가 없었다. 오히려 자신이 약속한
임무에 대한 책임감 탓인지 빨리 검을 연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불안감이 있었지만 백작이 아직 적당
한 선생을 물색하지 못한 터라 교육은 미루어지고 있었다.
윈터러는 여전히 검은 천에 싸여진 채로 침대 밑에 보관되고 있었다. 그는 전날 밤에 그것을 단 한 번
꺼내보았다.
자신에게는 아직도 무거운 검이었다. 그런 그것을 능숙하게 휘두르던 형의 모습이 희미하게 떠올라왔
다. 여러 가지 의미로. 그것은 아득히 멀리 있는 영상처럼 여겨졌다. 그는 검을 도로 넣고 다시는 꺼내
** 않았다.
"보리스 도련님."
점심을 먹고 여전히 재미없는 책을 하나 펼져 보고 있는데 란지에가 다가와 그를 불렀다.
"허락하신다면. 잠시 여동생에게 갔다가 오겠습니다."
보리스는 본래 시종이 항상 곁에 있어야 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런 청이 오늘 처음인 것도
아니었다.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갑자기 그 편이 좀더 흥미롭게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나도 같이 갔으면 좋겠는데."
란지에의 얼굴에 감정이 나타나는 것을 보는 것은 재미있었다. 그는 이번에 오래 망설였다. 그의 얼굴
은 마치 숨겨 놓은 보물을 구경시켜 달라고 부탁 받는 사람의 그것과 비슷했다.
역시, 거절할 수 있다면 거절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겐 그런 힘이 없었다. 보리스가 그런 일을 할 사
람이 아니긴 했지만 백작이나 백작부인에게 거절하더라는 이야기를 해버리기라도 하면 어떤 결과가 올
지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모든 판단을 끝내고도 그는 좀더 망설였다. 그리고 내키지 않는 목소리로 답했다.
".....알겠습니다."
여동생이 있다는 방을 향해 나란히 걸어가는 도중 란지에가 갑자기 말했다.
"도련님, 당신은 신사이십니까?"
"뭐?"
무슨 소리를 하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란지에는 곧 이어 스스로 답해버렸다.
"그렇다고 믿겠습니다."
방은 아담했고.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다.
크기는 보리스가 쓰는 침실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한쪽에 침대. 자그마한 장롱. 탁자와 의자 두 개가
그 안에 있는 가구의 전부였다. 그중 한 개의 의자를 창가에 끌어다 놓고 돌아앉아 있는 소녀가 눈에
띄었다.
오빠와는 전혀 다른 황금빛 머리카락이 햇빛을 받아 찬란했다. 그러나 길게 자라지 못한 채 귓가에서
싹둑 잘려 있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잘려나가 나풀거리는 머리카락은 가슴 아픈 느낌이었다.
사람이 들어오는 기척에도 불고하고 소녀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란즈미."
오빠의 목소리에 드디어 반응이 왔다. 소녀의 왜소한 어깨가 약간 움찔거리더니 힘겹게 몸을 돌려졌다.
란지에가 가까이 다가가더니 소녀의 자그마한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보리스는 소녀의 얼굴을 보고 약간 충격을 받았다. 그 오빠의 여동생이니 만큼 짐작은 했었다. 좁고 갸
름하며 창백한 얼굴, 덜 자란 흰 튤립의 봉오리처럼 연약하고 고운 미소를 가진 소녀였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놀란 것은 아니었다.
얼굴에 표정이 없었다.
흡사 영혼이 없는 밀랍인형처럼. 그린 듯 섬세한 눈썹이며 눈동자, 빰도 입술은 어떤 소리나 장면 앞에
서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더구나 눈동자에는 정확한 초점이 없었다. 오빠를 보고도 그것은 마찬가지였
다.
"도련님. 그쪽의 의자에 앉으십시오."
보리스는 뭔가 ** 말아야 할 것을 보아버린 기분으로 의자를 당겨 앉았다. 그가 있는 곳과 남매가
있는 곳 사이에는 세 걸음 정도의 거리가 있었다. 란지에는 바닥에 무릎을 반쯤 꿇고 앉아서 누이동생
의 손을 감싸쥔 채 또박또박 느리게 말을 걸었다.
그것은 자신이 아니라 그 누구라 해도 쉬이 침범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광경이었다. 바로 가까이
있는 데도 손닿을 수 없는 먼 곳에 있는 것 같았다. 란지에는 천천히 누이의 손을 쓰다듬으며 날씨에
대한 이야기, 성에서 일어난 이야기, 오늘은 무엇을 먹었고 무엇이 즐거웠으며 란즈미는 오늘 어떻게 보
이는가에 대해서 말했다. 그리고 오늘 본 아름다운 것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해 나갔다.
도중에 가끔 질문 조로 말을 던지기도 했지만 누이동생은 고개를 숙여 오빠의 말을 듣고 있을 뿐 결코
대답하는 일은 없었다. 란지에도 이미 그것을 알고 있는지 조금 기다리다가 곧 다른 이야기를 시작하곤
했다.
그것은 마치 가만히 앉아서 남의 내면을 몰래 들여다보는 듯한 경험이었다. 란지에가 오늘 무엇을 어
떻게 보고 듣고 느꼈는지에 대해 스스로 말하는 나직한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는 것이다. 그것
이 모두 진실은 아닐지 몰라도 보리스는 약간 놀라고 있었다. 차갑고 딱딱한 녀석이라고만 생각했던 란
지에의 눈에 얼마나 아름다운 것들이 자주 비치는지에 대해서, 상상조차 못했던 일이 아닌가.
보리스에 대한 이야기도 몇 마디 나왔다. 모두 좋은 이야기뿐이었다. 본래 나쁘거나 슬폈던 일은 이야
기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란즈미. 기분이 좋아 보이는구나. 오늘 보니 머리도 많이 자란 것같으니 이런 식이라면 금방 다시 길
어질 거야. 햇볕을 쬐는 것도 너무 오래 하면 건강에 좋지 않으니까. 그만 들어가서 낮잠을 한 잠 자는
게 어때? 푹 자면서 밀르 아즈체나를 마저 모으는 꿈을 꾸는 거야. 저번에 아이린과 크리스티나를 찾아
냈다고 했지? 그럼 이번에는 질리언을 찾을 차례구나?"
밀로...뭐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짐작도 가지 않았다. 아마 남매 사이에만 있는 어떤 비밀 같은 것이리라
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여자아이들이 좋아할 법한 비밀.
란즈미가 살짝 고개를 끄덕인 것 같았다. 그러자 란지에는 일어나 누이동생을 번쩍 안아들어 침대로
데려갔다. 그 나이 소년으로 쉬운 일은 아닐 테지만 란즈미가 워낙 약하고 가볍기 때문에 가능했다.
동생을 눕힌 그는 이불을 끌어당겨 덮어 주고 휘장을 내려 주었다. 그리고 그제야 보리스 쪽으로 몸을
돌리더니 말했다.
"그만 가시지요. 도련님."
그 말이 들렸을 때 보리스는 마치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약간 멈칫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먼저 문밖으로 나갔다.
란즈미는 란지에보다 두 살 적은 열 살이었다. 란지에가 성에서 시종 역할을 하고 있는 반면 란즈미는
단지 보살핌만을 받고 있었다. 어려서 겪은 소아마비의 후유증으로 절름발이인데다 약한 자폐 증세까지
있으서 하녀가 되기는커녕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조처 없는 처지였던 것이다.
다만 이 가녀린 소녀의 외모만은 오빠와 마찬가지로 빼어나게 예뻤다. 오갈 데 없는 처지였다. 이 남매
를 벨노어 백작이 받아들였을 때. 란지에는 급료를 주지 않는 대신 동생을 돌보아 달라고 청했다. 그 요
청이 받아들여져서 란지에는 백작을 곁에서 모시는 시동이 되었고. 란즈미는 방 하나를 얻오 다른 하녀
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살아가게 되었다.
란지에는 동생을 지극히 아꼈다. 모든 일에 있어서 우선이었고 시중을 드는 데에도 헌신적이었다. 로즈
니스가 오빠를 갖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란지에가 동생에게 하는 것을 보아 온 탓도 어
느 정도는 있었다.
"그 애 봤어? 아휴, 난 걔가 싫어.정말 짜증스러워."
아마도 로즈니스가 가정교사와 공부하다가 기분이 많이 나빠진 모양이었다. 공부가 끝나자마자 다짜고
짜 캐미아를 끌고 오빠의 방으로 쳐들어온 그녀는 란지애가 아버지의 부름을 받아 잠시 나간 것을 알자
망설임 없이 툭툭 내뱉었다. 먼저 이야기를 꺼낸 보리스가 무안해질 지경이었다.
"왜 싫은데?"
"바보 같잖아! 하루 종일 우두커니 앉아서 창 밖으나 내다보고, 남한테 폐나 끼치면서 백치처럼......"
갑자기 그녀는 말을 중단했다. 백치라는 말에서 자신이 자칫하면 시집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집안의 아
들이 연상된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그녀는 고개를 젓거나 미간을 찌푸려 가며 몇 번이고 불쾌하다는 감
정을 다양하게 표현했다.
"그런 애야말로 질색이야. 말할 줄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말은 왜 안해? 초점 없이 쳐다보는 눈동자를
보면 한 대 때려주고 싶다니까."
보리스는 그때까지 란즈미가 벙어리는 아닌가 생각하고 있었기에 로즈니스의 말이 다소 의외였다.
"어디 아픈 것 아닌가? 환자처럼 보이던데."
"환자는 환자겠지! 어쩌면 지독히 게을러서일지도 모르지만 말이야. 그 애가 실질적으로 아픈 데라고는
약간 저는 다리밖에 없어. 다른 덴 다 멀쩡한단 말이야. 그런데도 방안에서 꼼짝도 안 하잖아! 책을 읽
거나 자수를 놓은 것도 아니고 무엇 하나 배우는 것도 없어. 게다가 그 오빠라는 애도 무슨 금덩어리나
되는 것처럼 숨겨 놓고 누가 보자고 하면 끔찍이 싫어한다니까!"
그때 그 오빠라는 자가 문을 두드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보리스는 계속해서 로즈니스가 이런 헌담을
늘어놓을까 봐 긴장했는데 놀랍게도 로즈니스는 이야기를 그쳤다. 그리고 의식적으로 그러는 것처럼 다
른 얘기를 꺼냈다.
"아참, 아빠가 드디어 오빠의 검술 사범을 구하셨대. 오늘 아침을 먹고 아빠한테 가니까 그렇게 얘기해
주셨어.:
"그래?"
그건 듣던 중 반가운 얘기였다. 보리스가 더 묻기도 전에 로즈니스는 줄줄 아는 것을 다 말했다.
"내일 오전 중에 오기로 했다나 봐! 그런데 조금 특이한 사람이어서 오빠가 고생할지도 모른대. 실력은
최고인데 성격이 괴팍하다나, 뭐 그래."
"음......"
그건 직접 만나보기 전에는 모를 일이었다. 예전에 형이 가르쳤던 검술 선생이 두 명 있었는데 나중에
형이 이런 이야기를 해 주었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란 묘한 것이어서 다른 사람에게는 최악의 스승인데
어떤 사람에게는 최고일 수도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다고 했다.
예프넨은 처음 가르쳤던 사람은 최악의 스승 쪽이었다. 아버지가 몹시 신경 써서 고른 인물이었던 모
양인데 형과는 영 성격이 맞지 않아서 늘 티격태격하며 실력은 제자리걸음이었다. 그 사람을 내보내고
두 번째로 만난 사람은 그다지 큰 명성은 없었는데 놀랍게도 예프넨에게는 적격이었다. 형이 그 후 일
취월장하는 실력을 갖게 된 것은 모드 그 선생 덕택이었다.
어이없는 일이었지만 형은 얼마 가지 않아 그 선생의 실력을 뛰어넘었다. 그러고도 그들은 꽤 오랫동
안 스승과 제자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와 헤어지고 나서 형에게는 더 이상 스승이 필요 없었다.
갑자기 로즈니스가 뜻밖의 소리를 했다.
"아빠한테 **서 나도 검술을 배운다고 해야지!"
"......"
말릴 수야 없는 노릇이었지만. 그녀의 성격으로 얼마나 배울 수 있을지는 자못 우려가 됐다.
5. 후두 선생
보리스는 이날 아침 식사를 마치고 성문 밖으로 나갔다. 며칠 동안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다 보니 굳어
져서 검술 선생이 오면 처음부터 고생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성 입구를 떠나 천천히 길을 따라 숲이 있는 곳까지 걸었다. 마차를 탔을 때는 금방 지나쳐 온 길이었
는데 걷다 보니 꽤 긴 길이었다. 그래도 아침 공기는 상쾌하고 쾌적하게 걸을 수 있었다.
일부러 란지에도 데리고 나오지 않았다. 시종이 곁에 있으면 분명 편한 점도 있지만 혼자 있는 시간은
갖기가 힘들었다. 보리스는 본래 여러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을 즐기는 성격이 아니었다.
걷다 보니 아직 덜 익은 열매들이 잔뜩 달린 커다란 나무가 줄지어 있었다. 호두나무였다.
날씨가 서늘해지기 시작해서 익은 열매가 없지는 않을 것 같은데 얼른 눈에 띄지 않았다. 바닥에는 오
래 쌓인 푹신하고 해서 그는 잠시 나무에 기대어 앉았다. 그리고 나무에 올라가 보는 것은 어떨까 궁리
하기 시작했다.
예전 같으면 형에게 무등 태워 달래서 얼른 올라갔겠지만 지금은 주위의 이목이 있는지라 혹시라도 해
서는 안 되는 행동일까 봐 걱정스러웠다. 꼭 호두가 먹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다만 소년의 본능으로서
가지마다 그득그득 달린 열매들을 보니 따고 싶은 충동이 들었던 것이다.
후둑, 후두두둑......
갑자기 머리 위에서 십여 개의 열매가 후드득 떨어져 내리는 바람에 보리스는 놀라 벌떡 일어섰다. 그
리고 얼른 옆으로 피해 위를 올려다보았다.
처음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뭔가 살아 있는 것이 그 위를 왔다갔다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느낄수 있었다. 보이는데도 그 모습은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문득 두려
운 생각이 들었다. 혹시 이상한 짐승 같은 것은 아닐까? 그것도 에메라 호수에 있었던 것처럼 위험한!
조금 더 생각해 보니 지금이 환한 아침이었고. 여긴 대여서 걸음만 걸어나가면 마차가 지나가는 길이
나오는 곳인데 그런 것이 있을 리 없는 노릇이었다. 쓸데없이 예민해진 자신의 신경을 생각하며 피식웃
는데 갑자기 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호두 좋아하냐?"
역시 사람이었다. 사실 너무 당연한 일이 아닌가. 보리스는 참지 못하고 키득키득 웃기 시작했다. 스스
로는 깨닫지 못했지만 그건 형이 죽은 후로 처음 소리내어 웃은 웃음이었다.
"거기 호두 좀 모아놔라!"
명령조로 들린 목소리에 대꾸도 하기 전에 머리 위에서 호두들이 천둥 치듯 와르르 떨어지기 시작했
다. 한 나무에서뿐만 아니라 사방 곳곳에서 다 굴러 떨어졌다. 호두를 줍기는커녕 머리를 감싸쥐고 피해
야 할 판이었다.
후둑둑, 툭.
갑자기 쏟아지던 호두 소나기가 멈췄다. 그리고 수상한 기척이 척척 나무를 닫는 소리와 함께 쏜살같
이 아래로 내려왔다. 보리스는 몇걸음 뒤로 물러섰다. 다시 한 번 척, 하는 소리와 함께 녹색 그림자 하
나가 눈앞에 내려섰다.
"하. 참, 호두 좀 모아 놓으라니까. 되게 많이 떨어졌네. 야, 좀 도아봐라. 자칫하다간 종일 걸리겠다."
얼토당토않게 멋대로 지껄이고 있는 그 자가는 190센티미터는 되어 보이는 후리후리한 장신에 길게 기
른 숱 많은 갈색 머리를 높직하게 올려 묶고 있는 모습의 중년 남자였다. 등위로 유난히 블레이드가 긴
검 하나가 붙들어매어진 것이 보였다.
겉에는 비 올 때나 들쓰고 다닐 법한 큼직한 로브를 입었는데 그걸보니 나무 위에서 그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로브는 온통 나뭇잎 색깔과 같은 녹색이었다. 그런 색깔 로브를 입
고 다니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보리스가 쳐다보는 것을 느끼고 그는 온통 짤막한 수염투성이인 턱을 움직이며 씨익 웃어 보였다. 그
러더니 주섬주섬 로브를 벗었다.
"뭐가 이상하냐? 여기에 호두나 담자."
그런데 놀랄 만한 일이었다. 머리 위에는 아직 덜 익은 호두가 잔뜩 달렸는데 떨어진 놈은 모두 제대
로 익은 것들 뿐이었다. 발끝으로 특특 건드리면 저절로 껍질이 까질 정도로 튼실하게 여물어 굴러다니
고 있는 호두열매들 가운데 하나를 의아한 눈으로 집어들자 남자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임마! 껍질 안 깐 호두는 손으로 집으면 피부병 생긴다!"
그 비슷한 이야기를 형에게 들은 것 같기도 했는데. 보리스는 얼른 호두를 떨어뜨리며 손을 뒤로 감춘
채 다시 사내를 쳐다봤다.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로브 안에 거의 7,80 개는 되지 않을까 싶은 호두들이 담겼다. 남자는 로브를 둘
둘 말아 마치 자루처럼 한쪽 어깨에 둘러메더니 앞장서서 성큼성큼 걷지 시작했다.
보리스는 볼수록 그 남자가 재미있었다. 그래서 뒤따라가며 물었다.
"어디로 가시지요?"
"저기, 저기 보이는 저 성."
"왜 가기는데요?"
"그건 네가 알아서 뭘 해."
"거기가 어딘지는 아시는 건가요?"
"뭐? 저기에 이 벨크루즈에서 둘째가라면 서럽...은게 아니라. 아무도 둘째가란 소리 따위는 하지 않는
호화 찬란한 성이란 걸 모르는 자도 있느냐? 음, 그런데 성 이름이 뭐랬더라."
보리스는 이 사람이 자신이 누구인지 아직 모르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생각건데 오늘 아침에 오
기로 했다는 그 검술 선생이 맞는 것 같은데 길가다 만난 소년을 대하듯 모든 대화가 자유스러웠다. 물
론 보리스는 그런 것을 더 좋아했다. 진짜 백작의 아들도 아닌데 도련님 어쩌고 하며 굽실거리는 것이
오히려 불편했다.
이 자가 진짜 선생이라면 어느 정도 친해 놓는 것이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리스는 그와 비슷
하 수준으로 대화를 하기로 마음먹고 뒤따라 걸으면서 말했다.
"그럼 그 호두는 선물이군요?"
"으흠. 남의 집에 방문하면서 변변한 선물 하나 없이 갈 수는 없는 법이지."
"집 주인이 선물을 마음에 들어 할까요?"
"손님이 가져온 선물이 마음에 안 든다 해서 그걸 내색하는 자라면 주인 자격이 없는 놈이야. 그런 놈
은 집 없는 비렁뱅이 노릇이 딱 알맞지."
"그럼 역시 선물은 아무거나 가져가도 되는군요?"
"그건 또 손님의 예의가 아니지. 자고로 선물이란 말이야......"
선물의 유래와 방식의 주의할 점과 실례 따위에 대한 강좌 아닌 강좌가 끝날 무렵이 되어 그들은 성
입구에 도착했다. 보리스는 은근히 이 자를 놀리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문지기를 불렀다.
"아버지께 손님 오셨다고 알려라."
"아, 예, 도련님."
문을 지키는 병사 가운데 한 명이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 보리스는 고개를 모로 꼬며 상대방의 얼굴을
살펴보려 했다. 워낙 키 차이가 많이 나는 터라 웬만큼 머리를 들어서는 얼굴이 보이지도 않았다.
"뭘 쳐다봐"
도련님이라는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바뀐 말투가 아니었다. 그제야 보리스는 이 사람이 아
까부터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련님. 손님과 응접실로 드시랍니다. 주인님께서 아가씨와 힘께 기다리고 계십니다."
나타난 다른 하인의 뒤를 따라 그들은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이 자는 로브 안쪽으로도 뭔가 오래 입
어서 닳은 듯한 옷가지들만 걸치고 있어서 곳곳에 화려한 장신이 된 성의 복도와는 지나칠 정도로 안
어울렸다. 보리스는 예전에 형이 검을 잘 쓰는 자들 가운데는 이상스런 괴짜도 많다고 얘기했던 것을
떠올리고 일단 그런 쪽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나 심지어 자루처럼 짊어진 로브 안에서 호두열매가 한씩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떨어진 호두는
그 충격으로 껍질이 벌어지기도 했고 그냥 떽데구르르... 굴러서 복도 구석에 처박히기도 했다. 그러나
이 자는 주울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심지어 떨어진 사실조차 모른다는 것처럼 계속 성큼성큼 걷고 있
을 따름이었다.
처음에는 의식적으로 모르는 체 했는데 조금 있자니 지나가던 하녀들이 입을 막고 칵칵 웃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좀 더 지나니까 이제는 호두를 주워 가는 하녀들까지 생겨났다. 보리스가 슬쩍 뒤를 돌아보니
까 앞치마에 몇 개 담아서 소르륵 사라지고. 도 다른 어린 하녀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가 호두 몇 개
를 주워서 쪼르르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들도 귀족 집안의 하녀인 만큼 먹을 것이 부족해서
그런 것은 아니고 다만 소녀들의 성격상 먹을 수 있는 열매가 한 개도 아니고 r:P속 내버려져 있는 것
이 자꾸 눈에 밟혀서 그런다는 쪽이 정확했다.
그들 일행이 응접실 앞에 도착했을 때 로브 안에 호두는 이미 반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그가 걷는 내
내 호두들이 그 안에서 서로 바지락거려서 보리스조차도 자꾸만 나오는 미소를 멈출 수가 없었다.
"어서 오시오."
문을 여니 백작이 직접 일어서서 그들을 맞았다. 백작부인은 어제부터 몸이 불편하다고 식사시간에조
차 나타나지 않더니 이곳에도 오지 않았다. 로즈니스는 호기심 가득한 눈동자를 기대로 잔뜩 부풀린 채
저 호두를 짊어진 남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우려했던 일은 벌어지고 말았다. 남자는 어깨에서 호두 더미를 내리더니 갑자기 백작을 향해 불쑥 내
밀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미흡하나마 선물을 가져왔습니다."
말투는 그럴싸했는데 그 내용물이라는 것은......
그러나 백작은 역시 비렁뱅이가 되어야 할 체질은 아니었다. 무엇인지 들쳐**도 않은 채 일단 정중
하게 감사를 표하더니 하나을 불러 그것을 가져가도록 했다. 그런데 건네주는 과정에서 짓궂은 호두 한
개가 탁자 위로 뚝 떨어지고 말았다.
"어머!"
로즈니스의 눈이 동그래져 버렸다. 이제 뭔가 하는 표정이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흘끔 눈길은 준 남자
는 보리스에게 말하던 것과는 사뭇 다른 어조로 말했다.
"이건 비밀의 열매예요. 아가씨. 아가씨 같은 사람이 먹으면 한 개 먹을 때마나 나이가 한 살씩 먹는
거죠. 여덟 개만 먹으면 하룻밤 자고 일어나자마자 스무 살짜리 처녀가 될 수 있는 거랍니다."
로즈니스는 더더욱 놀라서 테이블에 떨어진 채 시치미떼고 있는 갸름한 호두열매를 빤히 쳐다보았다.
물론 로즈니스가 호두가 무엇인지 모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금 이 호두는 아직 겉껍질을 벗기지 않았
기 때문에 흔히 보는 오톨도톨하고 반질거리는 연갈색 껍질이 드러나지 않은 상태라서 숲 같은 데 나다
니지 않는 그녀로서는 정체를 알아 볼 길이 없었다.
더구나 훌륭한 검술 선생이라고 모셔온 자가 그런 소리를 하니 어린 마음에 혹시나...하는 마음이 드는
모양이었다.
보리스가 보고 있으니 로즈니스의 눈동자는 점점 더 호두열매의 집중되어서 나중에는 두 눈동자가 가
운데로 붙을 지경이었다. 보리스는 웃음을 참기가 힘들었다. 방금 전에 숲에서 따온 호두를 놓고 비밀의
열매라니. 게다가 저란 거짓말을 능청스런 얼굴로 잘도 해내고 있잖아.
문득 그는 한 가지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선생님. 선생님께서 로즈니스가 어떻게 열두 살인지 아셨죠?"
"그거야 한 번 보면 딱 알 수 있는 법. 너도 열두 살이지?"
보리스는 고개만 조금 끄덕이면서 이 사람이 백작으로부터 미리 들었던 거겠지, 하고 생각해 버렸다.
백작조차도 딸이 하는 양을 보더니 은근슬쩍 그 남자의 장난에 동참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
서 갑자기 비밀의 열매로 둔갑한 호두들은 하인의 손으로 정중히 운반되어 갔다.
로즈니스는 잠깐 눈치를 보다가 테이블 위에 혼자 남은 열매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때 보리스가 점잖
게 주의를 주었다.
"그건 손으로 그냥 만지면 피부병이 생겨."
닿으려던 손가락이 움찔, 하며 떨어졌다. 그리고 이제는 더 신기한 눈동자로 그녀석을 살펴봤다. 뭐 보
리스로서는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게 되었다. 호두 겉껍질을 만지면 안 되는 것은 틀림없으니까.
잠시 후 하녀의 손으로 따뜻한 차가 차려지고 나서 백작이 입을 열었다.
"그럼 휘틀러 선생. 이쪽은 내 아들 보리스. 그리고 이쪽은 딸 로즈니스......"
갑자기 의자에 앉았던 남자가 고개를 젓더니 말했다.
"아, 휘틀러는 내 진짜 이름이 아닙니다. 이 지방에 와서 잠시 말들어 쓴 가명이 뿐이죠."
"그러면 본명이 어떻게......"
백작은 이 아름다운 응접실에 어울리지 않는 거친 옷차림의 남자를 매우 점잖게 대하고 있었다. 그러
나 남자는 엉뚱한 대답을 했다.
"죄송하군요. 저는 본명을 밝힐 수가 없습니다. 제게는 어떤 신념상의 이유가 주어져 있어서 다른 사람
에게 이름을 밝힐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휘틀러라는 이름으로 다시 부른다면 되겠소?"
"그건 안되지요. 생활하는 곳이 바뀌면 가명도 바뀌어야 합니다. 음. 그렇지. 윌넛 선생은 어떨까요. 그
거 괜찮은데."
이쯤 되면 로즈니스도 알아챘어야 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저 비밀의 열매의 효능이 잔뜩 궁금해져서 거
기에 빠진 나머지 이들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있지 않았다.
"그럼 원하는 대로 그렇게 부르도록 하겠소. 어쨌든 이렇듯 만나게 되어 반갑소이다. 앞으로 아이들을
잘 지도해 주시길 바라오."
"아니, 그러면 따님도 함께입니까?"
백작은 곤란한 듯한 미소를 지으며 로즈니스를 한 번 바라보고는 답했다.
"그렇게 되었게 되었소. 그냥 같이 보고 연습이나 좀 할 정도면 되겠소이다."
백작의 어조를 듣고 월넛 선생도 알아챈 모양이었다. 로즈니스는 성격상 고운 손에 굳은 살이 박히고
몸 곳곳이 쑤시고 하는 훈련을 견뎌낼 수 있는 아이가 아니었다. 아마도 여기 앉아서 내내 아버지를 졸
라댔을 것이다. 호기심이 왕성한 것만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으니까.
"곧장 오늘부터 시작할 것이라면 하인에게 연습장으로 안내하라고 하겠소이다만......"
"아니, 뭐 그렇게 바쁜 일이 있다고. 공부는 내일부터 하고 오늘은 얼굴이나 좀 익히지요. 아참. 한 가
지 양해를 구할 것이 있군요. 제 방침상 교육을 하는 동안 아이들에게 존대는 하지 않겠습니다."
백작은 선선히 그러라고 허락했고 조금 더 대화가 오간 뒤 월넛 선생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보
리스를 보더니 말했다.
"먼저 네 방으로 가서 얘기나 하자. 여자 애는 조금 있다가 얘기하기로 하고."
로즈니스는 자신을 '여자 애' 라고 지칭하는 소리를 평생 처음 들어보았다. 어이가 없는 동시에 화가
났지만 아버지가 허락한 이상 딱히 할 말도 없게 되었다. 월넛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백작에게 인사한
다음 손가락을 휘휘 저으며 보리스더러 방으로 안내하라고 말했다.
"너, 머리가 그게 뭐냐? 길렀으면 깔끔하게 좀 묶어봐라."
문샤인 탑에 있는 방으로 와 자리에 앉자마자 한 첫마디가 그것이었다. 월넛의 머리는 높이 울려 묶었
는데도 길이가 허리 언저리까지 닿았지만 보리스는 기껏 어깨를 조금 넘을 정도라 굳이 묶을 필요까지
는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선생은 다짜고짜 주머니에서 리본을 하나 꺼내더니 보리스의 머리를 질끈 올
려 묶어 버렸다. 그러자 마치 작은 월넛 선생이 하나 생겨난 것처럼 되었다.
"하, 이제 보기 좋군 그래."
란지에가 차를 드시겠냐고 물었지만 월넛은 ' 이 집은 밤낮 차만 주단 말아냐. 난 헛배부른 것은 질색
이다.' 라고 말하더니 잠시 궁리하다가 뭔가 입맛 다실 것을 가져오라고 일렀다. 란지에는 밖으로 나갔
다가 조금 후 깨끗하게 까서 먹기 좋게 만든 호두를 한 접시 가져왔다.
"주방에서 드리는 선물이라고 전래 드리랍니다."
보리스는 뒤따라오며 호두를 줍던 하녀들을 떠올리고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란지에는 며칠 전 만난
이후 지금껏 소리내어 웃는 법이 없던 보리스는 기억하고 있었기에 약간 뜻밖이라고 느끼는 듯했지만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월넛 선생이 란지에를 보며 말했다.
"시종이라면서 꼭 도련님이나 되는 것처럼 생긴 녀석이구나. 너도 검이나 배워볼래?"
갈수록 보리스는 상식과는 어긋나는 행동만 하는 선생이었다. 아무나 붙들고 '검이나 배워볼래?' 라니
보통 훌륭한 검술을 가진 자는 아무한테나 그걸 전수하지는 않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란지에는 예의바르게 답했다.
"저는 그런 임무는 받지 있지 않습니다."
"허."
그는 자기 복을 스스로 차버린다는 둥, 다 타고난 복이 있어서 어쩔수 없다는 둥 혼자서 중얼대다가
갑자기 의자에 풀썩 기대앉으며 말했다.
"문샤인 탑이라. 거 이름 한 번 좋구나."
또다시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탑 이름은 어떻게 아셨지요?"
"선생을 뭘로 보냐.넌? 선생은 본래 모르는게 없는 거야."
"......"
점차 이 자가 제대로 된 교육을 해줄 것인가 의심되고 있는데 월넛이 다시 불쑥 말했다.
"너, 아까 그 여자 애하고 친남매 아니지?"
보리스는 물론 란지에도 약간 의외라는 얼굴이 되었다. 어차피 숨길 일도 아닌지라 보리스는 솔직하게
말했다.
"예, 말씀대롭니다."
"그 여자 애가 백작의 친딸이지? 넌 그럼 양자냐?"
더더욱 놀랄 일이었다. 이 자가 보기보다는 눈치가 빠른 건가?
"그렇습니다."
"보리스. 보리스라... 혹시 트라바체스 출신이냐?"
그것까지도 백작이 만들어 준 과거에 속해 있었다. 보리스 역시 고개를 끄덕었다. 그러지 월넛은 더더
욱 황당한 소리를 했다.
"내가 어떻게 알았게?"
이거야 정말. 장난을 하자는 것도 아니고.....
보리스가 입을 다물고 있는데 뜻밖으로 란지에가 입을 열어 말했다.
"도련님과 아가씨는 나이가 같으시니까요."
월넛은 란지에를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끄덕 했다.
"그래, 너 역시 보기 '만큼' 똑똑하구나. 그러면 내가 둘이 나이가 같다는 것은 어떻게 알았게?"
"그건......"
란지에도 딱히 대답을 하지 못했다. 사실 백작 님께 이미 들은 것 아닙니까. 라고 하면 가장 그럴법한
답이었지만 어쩐지 그런 답을 원하는 것 같지는 않아서였다.
"말해주지. 그건 내 초능력이야."
"네?"
"초능력 몰라? 특별한 능력이라니까. 남의 나이 맞추는 거 말야."
"그럼 란지에는 몇 살인지 아십니까?:
보리스가 묻자 월넛은 란지에를 잠시 쳐다보다가 말했다.
"역시 열두 살. 달수로는 너보다 많다."
보리스는 란지에를 돌아보며 물었다.
"란지에, 몇 월 생이지?"
란지에도 놀라고 있었다. 그는 짧게 대답했다.
"2월입니다."
역시 맞았다. 이번에만은 놀라움을 감출 길이 없었다. 보리스가 다시 물었다.
"어떻게 알아보시는 겁니까? 그냥 보기만 하면 저절로 압니까? 아니면 오랜 경험으로......"
"경험은 무슨 얼어죽을 놈의 경험이야. 난 그냥 사람을 보면 나무의 나이테를 보는 것처럼 얼마나 살아
왔는지 딱 보인다."
보리스는 슬쩍 물었다.
"그럼 로즈가 저보다 어리다는 것도 아셨겠군요?"
이건 떠보는 말이었다. 어차피 로즈니스는 그를 오빠라고 부르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월넛은 얼굴을 찌
푸리더니 갑자기 큰 소리를 쳤다.
"선생을 놀리려 들어! 그 아이가 너보다 석 달은 일찍 태어났다!"
더 이상 반론을 펼 여지도 없었다. 보리스는 7월 생, 로즈니스는 4월 생. 정확히 석 달 차이였다.
잠시 후 월넛 선생은 얼굴을 풀더니 보리스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흥, 너도 소질이 전혀 없지는 않구나. 잘하면 훌륭한 검사가 되겠어."
이번엔 뭘 보고서 하는 소리일까?
"그런 것도 딱 보면 알 수 있는 건가요?"
"무슨 소리야! 네가 거짓말하는 걸 보고 한 소리다."
이 자와의 대화에 있어서는 넘겨짚는다는 것이 전혀 소용이 없었다. 그야말로 말이 어디로 튈 지 알
수가 없었다.
보리스가 항변했다.
"거짓말과 검술은 도대체 무슨 상관입니까?"
"그럼 넌 대륙에 이름난 훌륭한 용사라는 작자들이 다 하루종일 검만 휘둘러서 그렇게 된 줄 알았냐?
아니지. 검이 아니고 도끼를 쓰는 놈도 있긴 하군. 하여간 에 무기만 잘 휘두른다고 훌륭한 용사가 되는
게 아냐. 필요한 것은 빠른 직감, 그리고 상대보다 앞서 생각하는 머리다. 그게 없는 놈은 비록 나름대
로 일가를 이루는 검술의 소유자가 될 수 있을 지는 몰라도. 앞서 말한 게 갖춰진 놈을 만나면 바로 패
해버려. 똑바른 길만 걷던 놈은 꼬불꼬불한 길에 가면 어디로 가야 될지를 몰라. 평지에서만 싸움하던
놈이 비탈진 곳이나 발을 물에 담그고 싸워야 되는 데를 가면 어어 소리만 지르다가 그냥 끝장나는 거
지."
알쏭달쏭한 소리만 하는 주제에 말은 무진장 빨랐다. 어쨌든 처음으로 검에 관해 늘어놓기 시작한 장
광설이라 끝까지 들어볼 마음으로 월넛을 쳐다보았다. 그는 호두를 한 줌 집어서 입안에 털어 넣더니
우물우물 씹으면서 계속 말했다.
"머리가 좋은 놈이 응용도 잘한다. 남의 동작을 먼저 읽어야 그보다 먼저 공격을 할 수 있는 거야. 한
수 앞질러 생각하는 놈들이 가장 잘하는 것이 뭘까? 바로 거짓말이지! 남을 속이는 건 아무나 하는 줄
아냐? 속이고 싶어도 못 속이는 놈들이 세상에 깔렸다. 예를 들면 아까 그 계집애처럼 말야. 하루바삐
처녀가 되고 싶어하는 애한테 그런 거짓말을 하니까 바로 먹히지 않든?"
보리스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로즈니스가 얼른 처녀가 되고 싶어하는 애였나?
란지에는 다른 이유로 희한한 표정이 되었다. 로즈니스 아가씨더러 계집애라니?
그러나 계속 훌륭한(?) 이야기가 진행될 줄 알고 있었던 두 소년은 곧 다시 한 번의 충격을 맞았다. 그
는 아까 입에 넣은 호두를 다 씹어 삼키고 남은 호두까지 두 줌으로 끝장을 내더니 갑자기 기지개를 켰
다.
"아, 쓰, 말을 많이 했더니 피곤해서 졸립군. 남은 얘기는 언제 생각 날 때 다시 하자. 저 안에 침실이
지? 선생님 한 숨 잘란다."
"......"
대답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성큼성큼 침실로 가더니 문을 닫지 않고 깨끗한 침대에 벌렁 드러누워
눈을 감아버렸다.
나은 얘기는 생각날 때 다시 한다고?
좀 전에 난데없이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을 때도 어쩐지 이건 앞뒤차례로 없이 아무데나 뚝 잘라 말하
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긴 했었다. 그러니 이제 정체가 밝혀졌다. 저 자의 교육이란 체계라고는 싹
도 안 보이는 방식이었다. 그 교육 전체의 질이야 어찌 됐든.
저만치 누어 있던 월넛의 큼직한 발바닥(흡사 개구리처럼 발가락사이가 벌어져 있었다.)을 바라보던 보
리스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접시를 들고 밖으로 나가는 란지에의 입가에 까닭을 알 수 없는 미
소가 머물렀다.
아노마라드의 호두를 익게 했던 가을을 트라바체스에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서서히 적황빛을 띠기 시
작하는 창 밖의 낙엽을 바라보며 블라도가 말했다.
"여름이 끝났군."
누군가가 다가오더니 탁자 위에 촛대에 불을 붙였다. 세 가지로 갈라진 촛대에 꽂힌 초에 하나하나 옮
겨지자 어둠 속에서 동그란 빛이 세 개 떠올랐다.
"그래서 성과가 있었다고?"
"예, 주인님."
롱고르드의 진네만 저택에 있는 서재는 저 벨크루즈의 벨노어 성에 있는 굉장한 서재의 규모와는 비교
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몹시 어둡기도 했다. 벨노어 성의 서재에는 많은 창문이 있었고 그것도 모두 유
리였다. 그러나 이곳의 창문은 단 하나뿐이었다.
블라도는 그 창문을 닫았다. 그리고 이 서제에서 한 달 전과 유일하게 달라진 것이 있다면 바로 자신
이라는 생각을 하고는 피식 웃었다. 테이블에 놓인 종이를 집어 들더니 촛불에 비추어 가며 읽었다. 모
드 읽고 내려놓은 다음 그는 그것을 가져온 자를 바라보았다.
진네만 집안의 집사 튤크가 그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흥......"
저 자에게는 진네만 지금의 주인이 형인가 동생인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인가. 그럴 지도 모른
다. 어찌 보면 블라도 자신과 아주 잘 어울리는 집사가 아닌가. 그 역시 본래의 주인을 배신하고 지금의
주인인 칸 선제후를 섬기게 된 것이니까 말이지.
"그래, 꼬마 녀석이 아노마라드로 갔단 말이지."
"예, 그 귀족은 아노마라드 출신이 분명해 보였다고 합니다. 다만 여관에서 가명을 썼기 때문에 정확한
정체는 알 수는 없었습니다. 조만간 수소문하여 그가 누구인가를 알아내겠습니다."
블라도가 보리스를 찾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그의 입에서 바로 그 질문이 나왔다.
"윈터바컴 킷도 함께?"
튤크는 여전히 눈을 내리깐 채 대답해 왔다.
"그건 알 수 없습니다. 그 형인 예프넨의 행방이 아직 불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보리스로 추정되
는 소년이 흰 칼집에 든 커다란 검을 들고 있었다는 것만은 확인되었습니다."
"적어도. 원터러라는 거군."
이제 튤크는 율켄의 두 아들을 도련님이라고 지칭하지 않았다.
아내도 없고 자식도 없는 블라도는 저택을 고치라거나 형의 물건을 버리라거나 하는 지시는 내리지 않
았다. 그는 그런 것에는 관심조차 없어 보였다. 율켄이 쓰던 서재를 그대로 사용하고. 그가 앉았던 침대
에 누워서 잤다.
튤크를 데리고 와서 쓰게 되면서 집안의 하인들도 대부분 갈아치우지 않고 그냥 썼다. 다만 율켄이 키
운 병사들만은 달아난 자를 제외하고는 모조리 죽였다.
그러나 하인과 하녀들은 이미 대다수가 싸움이 일어나던 밤에 도망쳐 버려서 숫자는 율켄이 있던 때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블라도는 그것조차 개의치 않았다. 그에게는 저택을 수시로 청소하고 다듬
고 할 사람들의 존재 같은 것은 애당초 관심 밖이었다.
수백의 병사들이 삼엄하게 지키고 있는 저택의 모습은 몹시 황량했다. 칸 선제후가 빌려 준 마법사 종
그날은 벌써 선제후의 성으로 돌아갔지만 그가 소환했던 환수 크리갈이 부슨 지붕은 수리되지 않은 그
대로였다. 그나마 종그날의 힘이 며칠 동안 최대한으로 쏟아 부어져 강력한 정화를 거치고 나서야 크리
갈의 독액을 없애고 돌아갈 수 있게 된 집이었다.
그러나 지붕이 뚫려 지금도 2층의 일부까지 비가 새는 상태에서 곧 겨울이 닥치면 크게 고생하게 돌
거라는 것은 ** 않아도 뻔했다. 그러나 블라도는 저택에서의 안락한 삶 따위는 생각하지도 않는 것처
럼. 아니 사실은 이 저택이 자꾸만 부서져 완전히 사라지기를 기대하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저택의 그
어떤 곳에도 손대지 않았다.
한 번 크리갈의 독액에 부식된 돌들은 시시각각 헐어가고 있었다. 실은 그 안에서 계속 지내기에도 위
험한 저택이었다.
"좋다. 녀석을 추적해라. 그리고 예프넨의 행방도 계속 알아봐라. 그 놈이 나머지 반쪽을 가졌을 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알겠습니다. 주인님."
튤크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여 보이고 물러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블라도는 천천히 턱을
괴었다.
눈앞에서 촛불이 무엇엔가 흔들렸다. 바람이 들어오는 곳이 없는데도, 자꾸만 흔들렸다. 저택을 돌**
않고 있으니 만큼 어딘가 낡아져서 뚫려버린 구석에서 공기가 들어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촛불을 바라보며 입끝을 조금씩 올렸다. 조금 더. 조금 더 올려서 마침내 미소와 비슷한 것을 만들어 냈
다.
"형님, 아직도 여길 뺏긴 게 분하우?"
촛불이 약간 부풀어오르더니 다시 한꺼번에 왼쪽으로 흔들렸다. 주름진 얼굴에 박힌 블라도의 노란 눈
동자는 꼼짝 않고 춧불을 주시하고 있었다. 긴 그림자가 등 너머에서 날개처럼 일렁였다.
"원한다면 한번 자리에 앉아 보슈. 내 몸 위로 그냥 앉을 수 있을 거 아니우? 유령이란 본래 그런 게
아닌가?"
실재하는지도 알 수 없는 유령을 향해 말을 걸고 있는 블라도는 이상하게도 씁쓸한 얼굴을 하고 있었
다.
사실은 승리의 가을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블라도는 마침내 그가 오랫동안 별러 오던 것을 모조리 갚
았다. 자신을 핍박하던 율켄 형은 죽었고 그 자식들은 가 곳 없이 뿔뿔히 흩어졌다. 누이의 망령도 더
이상은 꿈에 나타나지 않았다.
비록 형을 자신의 칼로 죽이지는 못했지만. 저 배신한 집사 놈이 대신 일을 끔하게 해주었다. 생각하면
저 집사 놈도 참 의란 걸 조금도 모르는 놈이다. 그 상황에서 섬겨 오던 주인을 등위에서 찔러 늪에 내
던지는 것은 트라바체스 사람으로서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닐 터인데.
그러나 결국 저 자의 마법 덕택에 그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저 붉은 눈의 악마가 나타나는 것을
놈을 벌써 알고 있었던 거다. 조금 더 지체했더라면 모두 몰살이었겠지. 종그날조차 저 자에게 은혜를
입고 말았다. 단지 혼란 중에 말을 빼앗겨 두 조카를 놓친 것만이 분할 뿐이었다.
아직 그 속을 알 수 없는 놈이긴 해도. 곁에 두는 것은 편리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형에게 충성하던 자
를 손에 넣었다는 일종의 자긍심도 있었다. 복수심 역시 만족시켜 주었다.
그런데도... 어딘가 모르게 가슴속이 싸늘했다.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부족했다. 충족되지 못한 곳에 바람이 드나드는 구멍이 뚫린 듯 추웠다. 별다른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분명 큰 승리를 했는데.
다음 달에 있을 선거에 대한 막바지 준비로 한층 바쁠 칸 선제후조차 항쟁의 승리는 축하한다는 친필
서신과 힘께 선물로 순금으로 된 커다란 괘종시계를 보내왔었다. 물론 빠른 시일 내에 윈터바텀 킷을
되찾길 바란다는 내용을 덧붙여서. 블라도가 갖게 된 진네만 저택에서 바뀐 것이 있다면 입구로 들어오
자 마자 맞닥뜨리게 되는 홀 정면에 놓이게 된 그 시계뿐이이었다.
시계의 몸체를 이루고 있는 휘황찬란한 순금 기둥은 과거 율켄이 관리하고 있던 진네만 저택에도 어울
리지 않을진대, 내버린 집이나 다름없이 쓰고 있는 지금은 더더욱 거슬릴 정도로 이질적이었다. 더 나쁜
것은 시계의 종소리였다.
뎅, 뎅, 뎅......
종소리는 고요한 저택 전체를 구석구석 울리며 퍼졌다. 아홉 번 울릴 것이다. 그는 마음 속으로 계산했
다. 저녁을 먹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좀 전에 여덟 번 울린 일이 있었던 것만은 기억했다.
삶이 오직 저 시계의 종소리만 흘러가는 기분이었다.
뎅......
마지막 음향이 서서히 잦아들 즈음 촛불이 다시 몸을 비틀었다. 그러더니 하나가 훅 꺼졌다.
"형님도 저 시계가 싫수?"
블라도의 목소리도 메아리 가진 것처럼 서재를 울렸다. 대답은 없었다.
12시. 설핏 들었던 잠에서 퍼뜩 깨어난 보리스는 이상하게 몸에 한기를 느꼈다. 이불을 끌어당겨 덮고
아시 잠을 청하려 했지만 쉽게 되지 않았다.
별난 스승은 이 방 침대에서 무려 네 시간이나 퍼져 자다가 간신히 란지에가 깨워서야 나가더니 세수
도 안한 채 로즈니스를 보러 가겠다고 수선을 떨어서 또한 말려야 했었다. 보리스는 월넛 선생이 재미
있는 사람이지만 과연 검을 제대로 가르칠 지는 잘 알 수 없다고 느꼈었다. 그가 잘 해주지 않는다면
로즈니스를 위해 맞서 싸우게 될 그 소년을 꺾지 못할 것이다.
그가 꼭 이겨야 하는가?
그건 모호한 질문이었다. 일단 백작 일가의 도움이 아니고서는 결코 누리지 못했을 안락한 생활. 그리
고 추적자나 도둑들의 눈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준 것. 두 가지만으로도 충분히 백작에게 신세를 졌다고
할 수 있었다. 그걸 갚고 싶다는 생각은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그는 냉정하게 말해 단지 거래를 한 것에 불과했다. 결코 신세를 지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백작은 이기면 좋고. 지더라고 할 수 없다고 말했었다. 지나치게 조건 좋은 거래인 것 같지만 어쨌든 그
는 주어진 환경 내에서 할 수 있는 노력은 해 보고. 아니만 그만인 것이었다. 사실 그 이상을 그에게 바
란다는 것은 무리였다. 아직 이길 수 있는 실력이 없는 그를 데려오기로 결정한 것은 백작이었다.
그건 어쩌면 무리한 계획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저러한 것들을 그가 모두 신경써야 하는가? 자신은 생존하기 위해서 택해야 하는 많은 길
들 가운데 하나를 택한 것뿐이었다. 중요한 것은 살아남는 것이었다. 만일 백작이 약속을 지키지 않고
실패한 그를 벌주려 한다면 '책임을 지고 무슨 벌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라고 할 것이 아니라 재빨리
달아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는 백작의 목적을 달성시켜 주기 위해 태어난 자가 아니었다. 오직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 태어난 자였다.
하지만, 일단은 노력하자.
검을 잘 쓰게 된다는 것은 장기적으로 그 자신에게도 이익이었다. 그리고 가장 큰 욕망 가운데 하나인
저 검. 형이 물려준 분신과도 같은 저 윈터러를 제대로 휘두를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싶었다. 그 검을 다
른 자에게 빼앗기지 않을 만큼 강해져서. 누구의 참견도 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 되고 싶었다. 누구의
신세도지지 않고.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고.
보리스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내려와 침대 밑에 두었던 검을 찾았다.
손을 아래로 넣어 더듬었다. 그런데 당연히 잡혀야 할 검을 싼 천자락이 얼른 집히지 않았다. 팔을 더
깊이 넣어 만져 보았지만 역시 없었다. 침대가 너무 커서 반대쪽 모서리까지 팔이 닿는다는 건 무리가
였다. 저쪽으로 넣었던가?
반대쪽으로 넘어가 팔을 넣어 더듬어보던 보리스는 차츰 긴장했다. 뺨과 코로 차가운 뭔가가 흘렀다.
이마에서 줄줄 흐르는 식은 땀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지금까지 그는 알지도 못했었다.
"......"
드디어 손에 잡힌 천이 질질 밖으로 끌려나왔다. 그것 뿐이었다. 침대 밑으로까지 기어 들어가 봤지만
소용없었다.
없었다. 아무 데도 없었다.
그곳에 두었던 윈터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 2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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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냐플 천재천하2009.10.23고생하셨지만 저작권침해로 어떻게 될 지 몰라요. 자진 삭제하는게 정신겅강에 이로울듯. 그리고 저도 다 아는 내용이니 올리지 ㅏ세뇨 -
네냐플 판타지2009.10.17똑같이 내용을 해주셨네; 저작권법 침해에요 -
네냐플 바르시믈레2009.09.19고생한건 안되셨지만 자삭해주세요. 이런거 들켜봤자 괜히 님만 안좋습니다. 운없게도 좀 뭣한사람 눈에들기전에 어서 삭제하세요. -
네냐플 바르시믈레2009.09.19님, 룬아가 좋은책이고, 한건 맞는데요, 똑같이 이렇게 퍼오는건 저작권 침해입니다만.책앞부분에 이책의 전체또는 일부를 허락없이 인용할수없습니다, 뭐그런 뉘앙스의 문구가 있었던걸로 기억하는데, 이거치느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