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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치엘
소설

illusion-환상 로맨스 No 1. 메아리

네냐플 왕녀 2006-07-28 16:54 631
왕녀님의 작성글 4 신고

-_-;제가 mtales.net에서 연재중인 환상로맨스 illusion 시리즈입니다.
속 안좋고 할일 없고 심심해서 올려봅니다. <.....
다시보니까 어째 수정하고픈 마음이 팍팍 드는데..;;
배경관은.....별로 중요하지 않으니까 나름대로 알아서..(좀 애매하지만..;)
그나저나 왠 필터가 이리 많은지..;;
참고로 시점이 남자일뿐. 저는 여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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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있다. 분명히.

 


적어도 그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현실은 성립되지 않으니까.
그날의 화창한 봄이 눈이 부셨다. 거의 적색의 머리가 바람결에 휘날려 햇빛에 반짝였다. 힘차게 뛰는, 붉은 머리의 청년.
머리에는 크기는 그다지 크지 않지만 화려한 큐피트 비녀와 머리색깔과 맞는 빨간빛의 베레모가 머리 위에 반듯하게 씌여져 있었다.

 

“어-왔냐?”

 

그를 웃으며 반기는 것은 한 보리스. 여어, 하는 행동이 아주 익숙한 듯, 그 둘은 친구였는가 보다. 그는 메트라 일진문자를 들고, 조금은 붉은 빛을 띄는 밝은 갈색으로 온 몸을 염색하고 있었다. 보랏빛이 도는 그 숲은 암울한 분위기와 맞지 않게 사람이 차있었다.


“아아-먼저 와 있었냐?”
“1분 늦었다, 이놈아.”
“꺼/져.”


말은 험했지만 표정은 하나도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웃으면서 가볍게 장난조로 말했을 뿐.

 


언제부터였을까. 보랏빛 풀빛이 익숙하리만큼 발 끝에 다가온 것은.
저 파란빛의 하늘이 정말 ‘하늘’이 되어버린 것처럼.
하늘의 태양빛이 정말로 이 세계가 있는 것처럼 증명시켜주는 우주의 증거물이 되었을 처럼.

 

아무것도 현실로 인정하고 싶지 않다면, 이곳에서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었다.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웃는 데까지는 시간이 걸렸으리라.

 

 

 

 

*llusion- 환상 로맨스

 

No 1. 메아리
-作 Eli
무단 도용을 금합니다.

*테일즈위버 바로잡기 Mtales.net*

 

 

 

 

 

 


어느 날 인가였다.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환상이 현실로 다가온 순간.
나르비크의 바닥은 정말로 하얗고, 깨끗했다.
라이디아는 정말로 울창했다.
클라드는 여유로우며, 평화로웠고,
카울의 풀 밭은 마치 그들 고유의 땅인 듯 했으며,
아드셀은 차갑고, 조용했다.

 


모든 게 현실이었다.
어느 날, 문득 정말로 자다가 일어나보니
갑자기 이런 식으로 현실이 되어버린 것처럼.

 

아무도 인정하지 못했다.
자신의 모습을 겨우 비춰보았을 때, 그것은―자신이 알고 있는 ‘나 자신’이 아니었다.
적색의 긴 머리카락. ‘시벨린’의 모습. 눈동자만큼은 틀린.
하지만 모든 게 느껴지고, 보이고, 만져졌다. 하나도 부정할 수가 없었다.


‘이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그렇게 퀸이 나타났다.
마스터라고 해야 옳은 그녀.
그녀는 말 그대로 모든 걸 지배했다.
처음엔 많은 사람들이 부정하고, 부정했다. 이것은 도리에 어긋나는 일, 또는 현실에서 환상을 뒤쫓는 재앙,
있을 수 없는 현실. 하지만 그녀의 존재가 나타남으로써 더욱 확고해져버렸다.


그녀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어찌 인간이 그런 형상을 가질 수 있을까―.
얼굴, 눈동자, 아무것 하나 보이는 것이 없었지만 목소리만은, 그녀가 적어도 이 세계에서 ‘신’에 버금간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었다. 처음 들었을 때의 중압감은, 분명 아무도 잊지 못할 것이다.

 

‘당신들을 환영합니다. 어서 오세요, 나의 사랑하는 세계에.’

 

 

그것은 심히 아름답고, 차갑고, 따뜻하고, 이루 말할 수 없이 포근하고, 또 한순간 내쳐져버리는 느낌.
지상 그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다.
그렇게 그들은 그녀가 사랑한다는 그 세계의 첫 번째 주민이 되었다.

 

‘당신들은 인정할 수 없겠지만, 앞으로 3년 동안을, 당신들은 나의 세계에서 안식하게 될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것은 찰나의 꿈, 그리고 밤의 꿈이야말로 현실. 그것이 깨어질 때 당신들은 당신들이 기억하는 현실로 분명히 돌아갈 것입니다.’

 

마치 어린아이를 살살 달래듯 말을 하는 그녀. ――하지만 처음엔 수많은 사람들이 인정하지 못했다.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대로도 미련 없기도 했다. 만약 이게 지금, 현실이라면,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그녀의 말 또한 사실이라면, 3년이라는 시간 뒤에, 이 꿈같은 현실-혹은 현실 같은 꿈-은 분명히 깨어날 것이었으니까. 하여간 그는 그대로 납득하기로 했다. 그것은 이 세계의 주민으로 들어온 지 3일만의 일이었다.

 


예전과 다른 게 있다면, ‘퀸’ 혹은 ‘마스터’의 뜻에 절대 불복종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사실, 그녀의 존재에 대해서는 이미 비밀스럽게, 혹은 아주 음침하게. 뒤에서는 그녀에 대한 반대 조직이 이미 일어서고 있다는 몇 번 들었지만 그다지 흥미는 없었다. 어차피 그녀에게 불복종 해봤자 여기서 탈출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테일즈 위버’의 주민이 되고난 지 일주일이 되었을 때 어느 멍청한 놈은 그걸 첫 번째로 시행하는 불쌍한 희생양이 되었다. 공개적으로 나르비크 플리마켓-그래도 좀 생각은 있었던지 사람 많은 곳에서-에서 소동을 피웠다.

 

‘퀸은 그저 우리를 농락하는 괴물일 뿐!’
‘우리는 다시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 그것도 빠른 시일 내에!’

 

처음엔 아주 수상쩍은 이야기도 오고갔다. 세계의 비밀 조직에서 새로운 발명의 연구를 위하여 우리들을 납치하여 게임을 대상으로 이런 실험을 하는 거니, 어쩌고, 마치 영화 ‘큐브’같은 이야기가 오고갔고, 어떤 놈은 세계의 암흑 조직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그래봤자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렇게라도 이야기에 그쳤으면 모르겠지만 하여간 그 놈은 그렇게 일주일을 넘게 그곳에서 이를테면, 반정(?)운동을 시작했다. 수도 없이 외쳤다. 그 와중에 먹는 건 먹고 잘 때면 자는데도 인정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일주일 넘게 그곳에서 외쳐대는 그의 정성에 감복한 건지 그때, 두 번째로 ‘퀸’이 나타났다.


‘돌아가시고 싶으십니까?’


우리에게 정중하게 대우해주는 그녀를 ‘퀸’이라 총칭하는 것은 그녀의 목소리와 존재감 때문일 것이다. 기이하게도 그것에 대해서는 우리 중 아무 누구도 부정하지 않았다.


‘나타났구나!!괴물!!’


그놈에게는 아직도 꽤나 버틴 정신력이라 칭찬해주고 싶다. 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에도 그 놈은 악살같이 버텼다. 그리고 퀸이 천천히 그놈에게로 내려왔다-.


‘돌려보내드리겠습니다. 당신에게 편안한 안식을.’


아주 간단해서 기가 막힐 정도였다. 그리고 퀸의 팔이, 손목이, 내려앉아 그의 머릿속에 닿는 순간, 그는 가루가 되어 사라지고 말았다. 그는 우리 서버에서 그래도 꽤나 잘나간다면 잘 나간다고 할 수 있었던, 나와 같은 시벨린 이었다. 그때 순간 동정심 보다는 떠오르는 것은 ‘공포’였다. 퀸의 공포. 그녀는 저 유약해 보이는 손가락 하나로도 우리를 가루처럼 만들어버린다.  


‘두려워하지 마세요.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당신들이 꿈에서 깨어났을 때, 꿈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 뿐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는 이 세계의 주민이 될 자격을 박탈당했다.
그것은 아마 본보기였을 것이다. 그 이후, 퀸을 공개적으로 모욕하거나 불평을 터뜨린다고 해서 퀸이 나타나는 일은, 다시는 없었다. 다만, 규칙이 있었을 뿐. 그것이 바로 이전과 현실이 된 지금과의 제일 큰 다른 점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성격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걸핏하면 시비를 거는 놈들은 모조리 주먹으로 해결했다.
그것은 테일즈 위버 에서도 변하지 않아, 주먹이 창으로 바뀐 것일 뿐, 도플에서 치고 박고하는 것을 여전히 좋아했고, 때로는 마음에 안 드는 녀석을 그렇게 눌러버렸다. ‘억울하면, 강해져라.’ 그것은 곧 내 신조였다. 겉으로는 아무리 ‘약육강식’이나 약자를 괴롭히는 것이 정의가 아니라고는 해도 곧 그게 정의였다. 적어도 내 눈엔 그랬다. 성격이 좋지는 않았지만 나는 처음 이 곳에 왔을 때 욕지거리를 해댔을 뿐 절망에 빠져있지는 않았다. 이 현실 같지 않은 곳에서 살아가려면 그래야 했다. 내가 생각하기엔 그랬었다.
그치만 나는 생각보다 레벨이 높은 건 아니었다. 소위 유저들이 싸고 말하는 악질일 것이다-아마도. 왜냐면 나는 도플2에서만 난동을 피웠기 때문이다. 솔직한 말로, 나는 아직도 거길 다니는 레벨이었고, 도플3을 가기 위해서는 좀 더 높은 레벨이 되어야 했다. 그렇다. 나는 그저 좁은 세계에서 나의 강함을 으스대고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나는 욕을 쳐 먹거나 말거나 상관없었다. 나는 원래 그런 놈이었으니까. 오히려 즐거웠다. 그 강함을 으스대는 것이.

 

그날도 나는 버릇처럼 도플갱어의 숲 2를 가기 위해서 메아리의 계곡을 건넜다. 바인딩을 찍어뒀어야 했는데 성격은 이 꼬라지에 말투가 곱상하지가 않으니 티치엘 들이 그다지 반겨하지 않았던 데다가 내 자신이 만들어야 하는 귀찮음과 동시에 결국 그나마 있던 한 개를 다 쓰고, 걸어 다니는 중이었다. 어차피 거리도 별로 되지 않는 터라 뛰어다녀도 별 상관이 없었다.


‘엥?’


그 날은 날씨가 좋았다. 햇빛은 푸른 하늘 중편에 높이 떠 있고, 선선한 바람까지 불어 덥지도 햇살이 따갑지도 않았다. 오히려 따스하게 느껴질 정도로 좋은 날씨. 어쩌면 ‘거기’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느꼈는지도 모른다. 이름 그대로 높은 언덕을 자랑하는 메아리의 계곡은 아래 바다인지, 강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멀고 깊은 물살이 흐르고 있었고, 셀바스 평원 5를 지나가는 길에는 나무다리가 길게 놓여 있었다. 그 반대쪽에는 자살하기 딱 좋다고 소문이 날 정도로 위험해 보이는 계곡 언덕이 하나 있었다. 그리고 거기, 그곳에. 그녀가 있었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그것은 마치 ‘신성함’ 혹은 ‘아름다움’? 퀸에게 느꼈던 것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나는 평소에 티치엘을 좋아하지도 않았고, 여자들에게 특별히 관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그렇다고 여자친구가 없었던 건 아니다)그런데 난생 처음 그날, 그런 걸 느꼈다. 애처롭게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들에게 손을 내미는 그녀의 옆모습은 마치 그림 같았다. 이 세상에 있을 수 없는, 그래서 상상으로만 오직 가능한, 그런 거였다. 애달프고도 옅게 띄는 그 미소가 좋았다. 날리는 은발이 새하얗게 빛나서 마치 날개가 등 뒤로 떠오르는 것 같았다. 바람이 그녀와 한 몸이 되어 나에게 오는 것 같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녀의 뒤로 다가갔다. 하지만 그 때까지 그녀는 몰랐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넋을 잃고 뚫어지게 쳐다보는 때에도 그녀의 관심은 오직 새들을 향해 웃는 것뿐이었다.

  

 

 

 

 

 

 

알 수 없다.
그는 스스로를 이해하지 못했고, 자신의 행동을 이성적으로 용납할 수 가 없었다.
누군가를 좋아했다고 생각했던 지난 과거가 완전히 무(無)로 돌아가 버리는 순간 이었다.
물론 여자친구들을 적지 않게 있었다. 하지만 그런 감정은 무척이나 생소했다. 그는 매일을 몇 번씩이나 지나가는 그 곳에 하루도 빼놓지 않고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매일을 거기 있었다. 마치 약속한 것처럼 그곳에 줄곧 서있었다. 때로는 꽃을 봤고, 때로는 하늘을 바라봤고, 때로는 새들을 안기었다. 그렇게 언덕에 위태롭게 서 있는 그녀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너 무슨 일 있냐?”
“무슨 엉뚱한 소리냐, 쿠로.”


쿠로라는 그 놈은 내가 테일즈 위버를 시작했을 때부터 친한 친구 사이였다. 솔직히 말해서 직접 본 일은 없었지만, ‘주민’이 되면서 그 놈은 못지않은 B.F(베스트 프렌드)가 되었다.


“너 요즘 엄청 이상하잖아?”
“그래?”


무심히 넘기는 나의 말에 쿠로는 더 이상 묻지 않았지만 이상한 눈초리를 흘겨보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짜증이 치밀어 “관심 꺼!”라고 날려주고는 그대로 또다시 메아리의 계곡으로 향했다.


“어?”


늘 그림처럼 거기 있던 그녀가 오늘은 없었다.
어쩐지 뭐가 가슴에서 하나 빠져버린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뭔가가 울컥했다. 언제는 자신이 왜 그녀를 보러오는지 자기 자신한테 화가 났으면서도, 늘 그곳에 있던 그녀가 없으니까 너무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뭔가가 싸하게 머릿속에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쳇! 누가 그딴 계집 보러 온댔나?”


아무도 들을 리 없건만 괜히 화풀이 할 데가 없자 혼자서 성을 내며 중얼거렸다. 그는 그녀가 서 있던 계곡 위에 서 봤다.
그곳엔 그녀가 늘 바라보던 꽃들이 있었고, 하늘이 있었다. 사람이 다가오자 이제는 익숙한 듯이 새 한 마리가 다가왔다. 나는 그것이 무언가 우스워서 팔을 내밀었다.


“새 주제에 그래도 내 외모는 알아보는 군? 째깍 달려드는 거 보니.”


알아듣는지 마는지 꾹꾹대며 울어대는 그 새는, 비둘기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하고, 이제는 인간들 사이에 너무 섞여버려 날지 않는 걸로도 유명한 그 더러운 새가 아니던가. 그치만 ‘이곳’의 비둘기들은 다 하얗고, 내가 알던 비둘기의 모습보다 좀 더 작았다. 그래서 그런지 오히려 낯설지 않았다.

 

“근데 어쩌냐. 나는 너한테 줄 먹이가 없거든?”

 

평소엔 그런 거 키우지 않는다, 나는. 하지만 그런데도 내 팔에 붙어있는 그 놈을 보고 나는 뭔가 기특한 마음이 들어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그때였다.

 

“그 애가 당신이 마음에 드나 보네요.”

 

조용하고, 침착한 목소리. 나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림이 현실이 되는 순간 이었다.
하늘하늘한 머리, 갈색 빛이 나는 것 같기도 한 회색빛의 옷. 아름답게 뒤척이는 날개를 가진 새들이 그녀의 주위로 몰리는 순간 나는 처음 느꼈던 그 날처럼 또다시 그녀의 등에서 날개가 나는 듯 한 착각을 겪어야 했다. 

 

“꾸룩.”


내 팔에 충실히 매달려 있던 그 놈은 그녀가 다가오자마자 그녀에게로 잽싸게 날라 가버렸다. 나는 아, 한 채 말도 못 이으고 그대로 그녀를 쳐다봤다. 그녀는 늘 그랬던 것처럼, 버릇처럼, 아름답게 웃으며 서있었을 뿐이었다.


“당신, 왜 여기에 매일 있는 거죠?”


대뜸 꺼낸 말에 그녀는 나를 고개를 돌린 채 놀란 눈초리로 동그랗게 눈을 뜨고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아시는지….”
“그야 맨날, 여기 지나가는데 보이니까….”


나는 말을 얼버무리고 말았다. 사실은 그녀를 보러 매일을 여기 왔었다는 사실을 들키기가 싫었을 뿐이다.


“그렇군요. 제가 주변머리가 없어서 뵙질 못했네요.”


현실이 된 그림은 여전히 아름답다.

 

 

 

 


나는 그 뒤로 종종 그곳에서 만나는 그녀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녀는 나에 대해서 경계심이 없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고, 무엇인가 말할 때면, 그녀는 잘 들어주었다. 내 격한 성질도 그녀와 있을 때만큼은 튀어나오지 않았다. 쿠로는 가끔, 실실 웃어대거나-쿠로 놈의 말로는 그렇다-무언가를 숨긴다거나 하는 수상쩍은 내 태도를 보며, “틀림없이 여자가 생긴 거야”하며 때때로 중얼거렸지만, 나는 곱게 씹어주었다.
그렇게 그녀와 알게 된지 5일 쯤을 지났을 때였다.


“―여기서 뭐하는 거야, 사라!”


익숙하지 않은 낯선 사내의 목소리가 성나게 들려온다. 그것도 내가 향하는 방향에서. 나는 왠지 모르게 기분 나쁜 느낌이 들어 달려가 보았을 때, 그녀와 낯선 보리스가 서 있었다.

 

“클럽도 나가고, 연락도 다 끊어버리면, 못 찾을 줄 알았어?!”
“―놔요!”


나는 처음으로 그녀가 화를 내는 모습을 보았다. 내 기억속의 그녀는 늘 웃고 있었고, 향기로웠고, 고왔다. 그리고 아름다웠다. 근데 그녀의 손을 세차게 잡으며 화를 내는 사내에게 그녀가 화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제 당신과는 상관없잖아요. 그러니까….”
“왜 상관이 없어! 사라, 그건….”


나는 그 순간 열이 뻗쳐 막바로 그의 어깨를 잡고, 그의 등을 돌려, 그 망할 자식의 얼굴에 카운터를 날려주었다. 이게 ‘주민’이 된 후, 가장 편한 점이다. 이제는 열 받아서 ‘야, 너 도플로 와. 뜨자’라는 말 따위 귀찮게 안 해도 되었으니까. 여태까지야, 퀸에게 찍히기 싫었으므로, 마을에서는 꽤 잘 참고 있었는데, 그 망할 놈은 도저히 가만 둘 수가 없었다. 그를 치자 그녀가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야, 너 뭔데 여기서 지X이야.”
“너, 너는!”
“어라? 이제 보니 ‘뫼비우스’ 클럽장 연가님 아니신가?”


나는 내 주먹을 맞고 밑에 깔린 그놈을 보며, 내 특유의 비웃음을 날려주었다. 그런 내 표정에 그 놈이 벌떡 일어나 반격하려는 순간 이었다. 사라-가 덥석 그를 말렸다.


“그, 그만해요!”
“사라, 너 이런 녀석하고 알아? 도플2에서 소문난 난봉꾼, 마신을?”


나는 그 순간 내가 그런 놈이라는 사실에 난생 처음 가슴이 철렁했다. 왠지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그걸 알면 그녀도 날 싫어할까. 그녀도 다른 사람들처럼 나를 기피하게 될까. 그녀는 어느새 울면서 그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몰라요. 알고 싶지도 않아요. 그냥 가요!”


그 놈은 할 수 없다는 듯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연락해. 시일 내에 다시 찾아올게.”
“오지 마요. 다시는 보고 싶지 않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어쩐지 억지로 내뱉는 것 같이 기분이 나빴다. 그 놈은 그냥 그녀를 쳐다보다가 결국 사라졌고, 나는 멀뚱히 서있는 채로 그녀와 남았다. 그녀는 등을 돌리고 서 있었지만, 우는 것 같았다.


“…다시는 그러지 마세요.”
“……뭘요?”
“그 사람…때리지 마세요.”


나는 기가 막혔다. 하! 지금 뭐라고?


“뭐? 싫다며 난리를 치던 건 당신 쪽….”
“그렇게라도 안하면 자꾸 찾아오려고 하니까….”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등이 어쩐지 무척이나 가냘파보여서 나는 아무 말도 못했다. 다만 속에서는 별별 욕이 다 떠돌고 있었지만. 겨우 목까지 올라온 그 대사들을 참고서 나는 제일 궁금한 질문을 했다.


“그 놈이 누군데요?”
“전에…사귀던 사람이요.”


오늘 정말이지 이놈의 심장이 가라앉기를 몇 번 씩 한다. 뭐? 사겨? 아하, 그래서 난리 부르스를 쳐댔던 건가. 나는 나도 모르게 머릿속에서 점점 뚜껑이 열리고 있었다.


“전에 사귀었다면, 지금은 끝난 거 아냐? 근데 왜 여기까지 와서 난리를 펴고 있는데요!”
“내가 멋대로 사라져 버려서 화가 난 것뿐이에요, 그 사람은. 다 내가 잘못한 거니까.”
“하?”


기가 막히다. 분명 그 사람과 헤어진 거 아닌가? 말하는 건 과거형이었는데 그녀의 행동은 그렇지 않아 보여서 나는 점점 더 화가 났다. 머리끝까지 무언가가 피어올랐다. 내가 기가 막혀서 잠깐 말이 막힌 사이 그녀가 또 한번, 강하게 말했다. 그녀의 연약해 보이는 모습 어디서 그런 목소리가 나오는 걸까. 또박 또박 이어지는 말은 무언가의 ‘단절’을 요구하는 듯 하여 나는 가슴이 막혀버렸다.


“그 사람을 욕할 수 있는 사람은…세상에 그 아무도 없으니까.”

 

 

 

 

 

 

 

 

“제/기랄!”


나는 요 몇 일 완전히 초저기압 이었다. 혼란 7층까지 뛰어가서 며칠을 살며 사냥에 미쳐보았지만 기분은 도무지 떠오르질 않았다. 그럴 만 한 것이, 나는 메아리를 가볼 수가 없었고, 더불어 도플도 찾지 않았다. 그래서 모처럼 사냥에 집중을 하고 있었지만 계속 그녀의 눈동자가, 그 얼굴이 떠올라서 도저히 집중할 수가 없었다. 수백 번도 넘게 생각했을 것이다. 분명 새를, 하늘을 쳐다보던 그 다정한 눈동자는 자신과 똑같았는데, 그 사람을 욕하지 말라며 자신에게 말을 하는 그녀는…


‘틀려.’


‘틀리다’라는 것은 굉장한 것을 의미했다. 아니, 사실 분명히 말해서 ‘다르다’였다. 하지만 그렇게 인정하고 싶지 않다. ‘욕하지 말라’고? 그렇다면, 그 망할 놈을, 헤어진 후에도 아직도, 좋아하고 있다는 뜻인가? 저절로 욕지거리가 입에서 튀어나왔다.


‘내가 무슨 상관이냐고!’


그녀가 그 헤어진 놈을 좋아하고 있건, 말건, 사실 자신과는 관계없는 일이지 않은가.
하지만 잊혀 지지 않는다. 그렇게 자신에게 뒤돌아 말하던 그 갈색 눈동자는 너무나도 단단해서 차마 깨뜨릴 수 없다 싶었다. 그것은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외치고 있다. 그녀에게 ‘다가갈 수 없다’고―.

 

‘더럽게 짜증나는군.’


이럴 때면 현실이 그립다.
끊은 지 꽤나 한참 되었던 담배 한 개피가 엄청나게 그리웠으니까.

 

 

 

 

 

 


“야, 나 인크 지르는데 어디서 지를까.”
“개/쉑. 또 지르는 거냐? 저번에도 불멸에 한번 바르다가 날렸잖아. 정신 아직도 못 차린 거냐?”
“무슨 소리. 원래 인생은 도박이라고.”


며칠 만에 마을로 내려와 마주친 쿠로놈이 익숙한 분홍빛의 스크롤을 가져오더니 하는 말이었다. 인크라, 인크립트라―. 바를 것도 없는 신세로군. 좋지 않은 기분에 기껏 몇 일만에 내려와서 칙칙한 남자 놈과 마주쳐 이런 대화나 하려니 역시나 기분이 나아질 건수는 한 개도 없었다.


“신전 가서 바르던가. 꼴에 비아누라고 거기 성수도 나오지 않냐.”
“그럴까나.”


그냥 게임을 할 때만 해도 알지 못했던 제르나의 얼굴은 지금은 제법 소문난 편이었다. 다정다감한 목소리에, 친절한 인상. 그러고 보니 닮았군. 젠/장, 또 생각해버렸다. 도대체 생각을 안하려고 하는데도 이런 상관없는 데서도 가끔, 그리고 꽤 자주. 그녀가 떠오르고는 했다. 나는 곧 그 생각을 지워버렸다. 내 입김이 먹히거나 말거나 이미 바람이 들어간 쿠로놈은 나를 데리고 신전으로 향했다.

 

“그래, 좋아! 이번엔 반드시 성공하겠어. 그래서 반드시 6베기 불멸을-.”
“아서라.”


쿠로가 지대한 결심을 하건 말건 나에겐 관심 밖의 일이었으므로 무심하게 신전을 둘러보았다. 신전엔 제르나 말고도, 제르나가 보살피는 아이들이 종종 있었다. 이곳 탄광촌 클라드 마을은 꽤 시골이라 젊은 사람이 그렇게 흔하지 않았던 데다가 마을 자체가 위험지대여서 다들 낮에는 밖에 일하거나, 지키러 나가있었으므로 마을 대부분의 아이들이 신전에서 보살핌을 받고 있었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아, 저 축복을 좀 받으려고-.”


축복은 개뿔이가 축복. 그것도 다 돈 벌 작심으로 온 거면서 무슨 얼어죽을 축복이냐. 비아누가 진짜로 있기는 한가? 나는 성수가 쏟아지는 신전 안쪽의 비아누 신상을 바라봤다. 저런 거, 있기는 한가? 신조의 깃털이 있는 거 보면 있을 수도 있겠다만, 나는 ‘퀸’의 존재를 차라리 믿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작 증명도 되지 않는 저런 새대/가리를 믿느니 그래도 미인 쪽을 믿는 게 나을 거다. 고개를 돌리자 제르나가 쿠로에게 신경 쓰는 사이, 신전 안의 아이들이 비아누 신상을 이상한 눈초리로 쏘아보고 있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형, 형은 원래 그렇게 빨-개요?”


왠 남자애가 대뜸 나를 쳐다보며 하는 말이었다.


“뭔 소리냐.”
“머리도 옷도 눈동자도 다 빨간 걸.”
“아? 이거? 컨셉이지. 피를 몰고 다니는 마신이라고. 들어는 봤냐.”


고작 어린 아이의 호기심이었을 뿐인데 나는 꽤나 자랑스럽게 말을 하며 자세를 잡았다.

 

“헥? 그럼 동화책에서나 나오는 마왕?”
“아니, 그거랑 좀 틀려.”
“그럼? 그럼?”
“걘 내 아래야. 나는 그 위.”
“와- 진짜?”


꽤나 잘 속아 넘어가는 아이들에게 나는 조금씩 기분이 나아졌다. 이거, 꽤 괜찮은데-? 나는 어느새 어린애들 사이에서 영웅 그 못지않게 굉장한 관심을 모으며 거만스럽게 놀고 있었다. 어쩐지 평소의 기분과 다르지 않다. 그 좁은 도플갱어 2 라는 곳에서 강함을 으스대고 있던 나와 말이다. 그 순간 뒤에서 익숙하고도 그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와- 사라언니다!”


그 순간 나에게로 몰려있던 애들은 목소리가 들려오자마자 입구로 달려갔다. 나 또한 그곳을 쳐다보았다. 나의 이 작은 즐거움을 뺏어간 그녀는―지난 몇 일간 나의 머릿속에서 도무지 떠나가지 않았던 그녀였다. 아이들에게 환호 받으며 작게 미소짓는 그녀는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여전히 아름다웠다. 나는 지난 몇 일을 폐인 같이 보냈는데 말이다.


“언니- 있죠-. 저기 저 아저씨가 마신이래요, 마신-.”
“동화책에서 나오는 마왕보다 높대요!”


알고나 말하는 건가. 마왕보다 높으면 무서워해야 하는데 전혀 그러지도 않는 눈치다. 어쨌거나 그녀가 의아하게 에? 하면서 나를 쳐다보던 그 순간 그녀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나는 어쩐지 또 한번 더러운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다. 그때, 마지막으로 나를 봤을 때의 당당함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이번엔 그녀가 고개를 돌려버렸다.


“아, 오늘도 오셨군요, 사라님.”
“안녕하세요, 제르나 님….”


오늘도, 라는 걸 보니 이곳을 찾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닌가 보다. 어쩐지 좀 닮았더라 했었지. 쿠로놈이 가자고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운도 더럽게 없군.


“그러고보니 오늘은 그 분과 같이 안 오셨군요. 무슨 일 있으신가요?”
“네? 아….”


눈동자가 아까보다도 심하게 흔들린다. ‘그 분’이라면 틀림없이 그 놈일 것이다. 연가라는 놈.


“…여러가지로, 바빠서….”
“그렇군요. 하긴, 클럽장이시니까 어쩔 수 없겠죠. 그럼 오늘도 아이들하고 조금만 놀다 가 주세요. 안 그래도 요 몇 일 오시질 않아 사라님을 얼마나 따르는지 몇몇 아이들은 언제 오느냐고 물어보기도 한 답니다. 여러 가지로 실례를 끼쳐드려서 어찌나 죄송한지….”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아이들은 알고 있다. 그녀가 어떤 존재인지, 어떤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지, 얼마나 아름다운지, 얼마나 고독한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아이들을 사랑해주는 건 그녀는 자신이라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사랑받는 것은 그녀다. 그리고 그것을 나 또한 알고 있다.


“저기 저기, 아저씨. 마신이란 게 마왕보다 높으면, 아저씨도 사람들을 괴롭히는 악당이야?”
“하?”


그 동안 철면피의 성격을 가지고 살아온 나지만, 어쩐지 이런 질문을 저런 신뢰가 가득한 눈으로 직접 듣자니, 기가 막혔다. 오히려 앞에 서있던 사라가 당황해 하며 여자아이를 말렸다.


“레니, 그런 말은…!”
“그-래, 그러니 날 아저씨라고 부른 널 잡아먹어야 겠다-!!”
“끼야-.”


마치 괴수 흉내를 내며 달려드는 나를 보고 그 레니, 라는 여자애는 기겁하며 도망쳤다. 클클, 이거 재밌잖아? 마치 어렸을 적 여자애들을 괴롭히던 철없는 남자애가 된 것 같다. 그런데 오히려 그런 모습에도 애들은 나에게 관심을 가지며 ‘으아아-’거리고는 도망치는 것이었다. 사라는 황당한지 그대로 그곳에 굳어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풋.”


그녀가 갑자기 웃었다. 나와 애들이 그런 그녀를 쳐다보자 그녀는 당황해 얼굴이 빨개지면서, ‘아, 아니, 이건 그러니까.’라며 핑계도 못 대고 말을 더듬거렸지만 애들은 그런 그녀를 보며 웃었다-며 기뻐했고,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애들 사이에서 고작 어색한 괴물 흉내나 내며 쫓아다니는 내 꼴이 내가 일평생 살아왔던 무엇보다 웃기겠지만, 그래도 좋았다. 그렇게 그녀가 나를 보며 웃는다면 나는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이외로 애들하고 잘 어울리시네요.”
“이외인가-요?”
“네, 정말로.”


아직도 그녀는 내 꼴이 제법 우스웠었는지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환하게 미소짓는 건 도통 메아리의 계곡에서는 보/지 못했던 모습이라, 우습다고 말하는데도 꽤나 즐거운 느낌이 들었다. 그치만 그런 사실을 애써 숨기려고 그렇게 미소짓던 그녀를 보며 기가 빠진 표정을 짓고 있던 내게 그녀가 문득 가라앉는 듯한 태도로 말을 꺼냈다.

 

“…저, 그때는…실례했습니다. 저도 모르게 흥분을 해서, 그런 말씀을 드렸네요…생각해 보면, 다 제 탓인 것을….”
“…그 연가, 라는 사람하고 여기 종종 왔었나 보죠?”
“…네. 거의 일주일에 한번씩은…. 이제는, 무리겠지만….”
“왜 헤어졌어요?”


매우 직설적인 질문이었지만 나는 피해가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라도 알고 싶었다. 연가라는 존재는, 그녀에게 있어서 무엇인가.


“…다른 사람이 나보다 좋다고 해서…요.”


결국 바람, 아니면 양다리인가. 그렇게 안 봤는데 꽤나 후리는 놈이었군.

 

“어쩔 수 없겠죠. 나란 애는…애초에 그 애보다 잘난 게 없었던 걸요.”
“그 애?”
“네…. 그 아이는 늘 빛이 나는 것 같았고, 늘 웃고 있었어요. 사람을 사귀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던 제게 늘 언니라고 따르며, 귀여운 동생이 되어주었죠. 그 아이는, 정말 사랑스러운 아이니까.”


그 말은 지금, 결국 아는 동생을 좋아하게 돼서 이쪽은 이제 관심 없다 이거 아냐. 나는 일순간 화가 치밀었지만 그대로 듣고 있었다. 빛이 나는 것 같다고?―그녀는 그녀 자신을 너무나도 모른다. 그녀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지를.


“연락은 왜 끊었는데요?”
“내가 있으면 분명 그 둘은 제대로 지내질 못할 거에요. 그 사람도, 다정한 사람이니까…그래서.”
“저번에 태도 보면 안 그런 거 같던데.”
“…내가 갑자기 없어져서 걱정이 되었던 거에요.”
 

어쩐지 그런 그녀의 태도가 점점 불만스러워 졌다.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저번하고 비슷한 느낌이었다.

 

“헤어진 거면 말 그대로 깨끗이 끝낸 거 아니에요?”
“…저는 다만.”
“아니면…그 사람 아직도 좋아하는 건가요?”


나도 모르게 아주 대담한 질문을 내 뱉었을 때, 나는 내 가슴에서 마치 불이 타오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저녁이라, 그다지 덥지도 않았는데도, 신전의 안도 아니고 바깥에서 나무 그늘 사이에 앉아있는 그 순간에도, 마치 내 피가 타오르는 것처럼. 그렇게 심장이 뛰었다.――나는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는 건가? 그녀는 고개를 떨군 채로 어렵게 단 한마디를 비껴냈다.


“…네.”


두근.
무언가가 속에서 울렁였다. 그것은 일종의 분노-아니 그것과는 조금 틀린.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그랬다.
나는 그 순간 되돌이킬 수 없는 짓을 하고야 말았다. ‘획’하며 그녀의 얼굴이 바로 앞에서 마주친 순간, 그녀의 당황스럽고 놀란 눈동자가 마주쳤지만 나는 그만두지 않았다.


“―흡!”


일방적인 입맞춤-이었다. 네,하고 그녀가 내뱉은 그 단 한마디의 의미가 너무나, 용서되지가 않았다. 그녀가 세차게 품안에서 반항했다. 나는 그녀의 손목을 꽉, 잡고 있었지만 그녀는 최대한 벗어나고자 하는 듯 발버둥을 쳤다.


-찰싹!


꽤나 거대한 소리와 함께 나는 쓰라림을 느끼며 뒤로 물러나야 했다. 그녀가 내 얼굴을 때린 손을 그대로 들고 있는 채로, 숨을 가쁘게 쉬며 울면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입술이 까져서 피가 흘러나왔는지 입 안에서 비린 피 맛이 났다.


“―어째서!! 어째서, 이런 짓을-!”
“…아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렇게 있었을 뿐. 주위에는 매미 소리만이 밤하늘을 울렸고 조용한 클라드 마을은 아무도 지나가지 않았다. 나무그늘, 어둠 속에서 단지 그녀와 오직 나만이 또렷하게 마주보고 있었을 뿐.


“소문대로, 당신이 정말 그런 사람인가요? 그래서 내게 이런 짓을 하는 건가요?”
“여자에게 치근덕댄다는 소문은 없었던 것 같은데.”


나는 입가에 묻은 피를 손으로 묻어내며 말했다. 내 목소리는 무언가가 타오르는 듯한 그 느낌과는 다르게 엄청나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니, 아주 평소 같았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것처럼.


“당신이 자꾸만 짜증나게 하니까.”
“……예?”
“다른 여자가 좋아서 쌩하니 달려가 버렸다는 놈을 잊지 못한 채로 뒤에서 궁상 떨고 있으니 짜증이 나서.”
“…무슨 소리에요.”


그녀의 손이 점점 내려가는 채로 나를 당황스럽다는 듯이 쳐다본다. 아무래도 나는 그녀에게 있어 그런 존재밖에 되지 못하는가 보다. 그녀의 눈동자는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그렇게 써져 있었다.


“누가 뒤에서 그렇게 떠난 놈을 위해 클럽까지 나온다고, 눈 앞에서 사라준다고 알아줄 것 같지? 당신은 그저 그런 ‘척’하고 있을 뿐이야. 사실이 그렇잖아! 단지 기대하고 있어! 그 놈이, 다시 한번 눈 앞에 나타나서 그렇게 외쳐주기를! 당신이 바라는 대로, ‘좋아하고 있다’고!”

 

내가 생각해도 말이 안 돼는 소리였다. 하지만, 나는 너무나도 원하고 있었다. 그저 다른 여자가 좋다고 달려간, 그런 놈을 어째서 바라보고 있는지, 그런 눈동자로 그 망할 놈을 바라보는지만. 분명 그녀는 원하고 있다! 자신의 마음이 보답받기를. 아주 억지스럽게 나는 그렇게 멋대로 단정시키고 있었다. 나머지 뺨 한쪽을 더 맞겠구나 싶을 정도로 흥분해서 외쳤지만, 그녀는 그렇지 않았다. 그대로 고개를 떨구고 있었을 뿐. 우는 건가 싶어서 나는 그대로 가만히 있다가 그런 그녀를 조심스럽게 쳐다보았다. 그녀가 문득 그늘에 가려져 제대로 보이지 않는 얼굴을 숙인 채로, 나지막하게 말을 꺼냈다.

 

“나한테…나한테 왜 이러는 거죠?”


대답하려는 타이밍을 주지도 않은 채 달이 떠올랐다. 떠오른 달이 그녀를 비췄고,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보는 그 얼굴은, ‘마치 무언가를 배신당했다’는 얼굴. 나한테서? 그 무엇을? 그녀는 예상대로 울고는 있었다. 하지만 낙담한 것이 아니다. 그녀는 화를 냈지만, 그건 내 ‘예상’에서 엄청나게 빗나가는 것이었다.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남들이 뭐라고 해도 당신은 분명 좋은 사람일거라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이러는 거에요, 왜!”


가슴을 잡으며 처절한 눈동자로 나에게 외치는 그녀의 모습, 그녀의 말에, 나는 심장이 멈추어 버리는 것 같았다. 좋은 사람―좋은 사람이라. 핫. 나하고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만큼은 나를 그렇게 보아주길 바랬는데, 그게 사실은 손 안에 와 있었다니. 그렇게 그녀는 그 그늘 속에서 벗어나 버렸다. 오직 달빛만이 비추는 거리로 나아가 세차게 뛰어가 버렸고, 나는 그 뒷모습조차 잡을 수가 없었다. 나는 피식, 웃어버렸다. 비웃음도 무엇도 아닌. 웃음이되 그건 ‘미소’가 아니었다.


“…결국 또 군. 나란 인간은 결국 그런 것인가. 상처만 주고 마는….”


당신만큼은, 그녀에게만큼은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도 모르게 손 안에 있었던 것을 이렇게 허무하게 또다시 놓쳐버렸다.…결국 나는 신이 버린 인간일 뿐인가. 너무나도 환한 달빛이 도리어 사박거리는 나무 그늘 아래를 사무치도록 어둡게 만들 뿐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매미는 여전히 울어대고 있었다.

 


 

 


  “퍽!―푸욱!”

 

창이 하늘을 가로지를 정도로 높게 반짝인다. 나는 저번보다 더 저기압이었다. 그저 부딪히는 대로 피케이를 버릇처럼 했다. 테러는 아니었지만.―나는 그렇게 테러는 즐기는 편이 아니다. 게다가 ‘주민’이 된 뒤로 퀸은, 테러를 무척이나 싫어하는지 그것을 공적으로 금지시켰다. 나는 단지 강함을 으스대는 것 뿐. 남들 위에 서는 것을 좋아할 뿐. 하지만 그런 기분도 오늘의 나를 충족시켜주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점점 더 복잡하고, 더러워져 가는 느낌.


“너 어째 더 이상해진 거 같다.”


쿠로가 또다시 다가와 말을 걸었다. 그 놈은 결국 그날의 축복 덕인지 몰라도 나는 완전 꽝이었던 그 날, 인크를 바르는 것에 성공했고, 더불어 이제는 6베기 불멸이 된 그것을 끼고 다니고 있었다.


“죽어라 피케이만 하잖아? 언제는 사냥만 하더니. 드디어 맛이 간거냐.”
“신경 꺼.”


이놈에게 이야기 한들 뭐가 달라질까. 답답한 가슴을 주체할 수 없이 피케이로 발산하던 나는 문득 시끄럽게 앞쪽에서 울려대는 여자일행을 발견했다. 도플은 사실 싸우는 곳이라기보다는 때때로 아는 사람들과 노는 곳으로 치부되고는 하였기 때문에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지만 나는 그날 그것도 기분에 거슬렸다.


“기집애. 커플링 꼈구나?”
“응, 연가오빠가 끼자고 했거든.”


연가라고? 그 순간 나는 낯설지 않은 이름에 그들을 쳐다봤지만 이야기에 한참 빠져들은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녀와 똑같은 티치엘, 그러나 결코 닮지는 않은. 그리고 그 옆에 같이 수다를 떨고 있는 이스핀이 하나. 나와 똑같은 진한 빨강빛이 너무나도 거슬리는 그런. 그녀가 말할 때는 무척이나 잘난 소녀라는 듯이 표현하더니 역시나 별 것도 아니었다. 고작 저런 여자 때문에 그 놈은 그녀를 그렇게 버렸다고?


“근데 사라 언니는 어떻게 된거야? 아직도 연락이 없잖아.”
“뭐 어디선가 쳐박혀서 궁상이나 떨고 있겠지. 너 아직도 언니 성격 모르니? 뻔하잖아.”


그 순간, 나는 듣지 말아야 할 것을 듣고 말았다.

 

“야, 말하기 좀 그렇다. 너 때문에 그렇게 된 건데.”
“흥, 그만한 남자를 손에 넣으려면 이 정도 배포는 있어야지. 아, 솔직히 말해서 난 그 꼴 너무 마음에 안 들었어. 언니란답시고 맨날 구석에서 질질 짜기나 하고. 연가 오빠가 맨날 이러니 저러니 다 받아주고는 있었지만, 사실 힘들었던 거라구. 그 짜증나는 면상 보면서 맨날 언니 언니 하기가 얼마나 짜증났었는지 알아?”
“너 설마, 그러면 그거 때문에 동생 한 거였어?”
“당연하지. 아니면 내가 그런 찌질이랑 왜 언니 동생을 하고 있겠니? 처음 봤을 때부터, 연가 오빠는 딱 내 차지 였다구. 근데 그런 찌질이가 옆에 있으니까 너무너무 거슬리잖아. 안 그래? 너도 안 어울렸다고 생각했지?”


가증스럽다. 아니, 가증스럽다고 해야되나? 나는 처음부터 이름도 모르는 그런 여자는 알 지도 못했던 것을. 나비리본을 끼고, 나와 똑같은 빨강색인데, 너무나도 천박하고 천박하다. 자신이 한 짓이 어떤 행동이었는지,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한 채 웃고 있다. 웃음소리가 내 귀를 울렸고, 도플을 시끄럽게 울린다. 피가 거꾸로 솟았다.


-으아아아아아아아-!!!!!!


그날따라 날카롭게 반짝이던 창. 그리고 세차게 밟히던 보랏빛 풀. 피로 물드는 기억, 그것이야말로 내 이름. 피를 몰고 다니는, ‘마신’―. 그래. 그게 나다. 그리고 정신 차렸을 때에 주위엔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저, 부딪히는 대로, 싸우고, 싸웠을 뿐. 분명 친구라고 생각했던 쿠로가 옆에 있었는데, 정신을 차렸을 때는 쿠로도 없었고,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나는 혼자다. 그렇게 고독하게 나는 그곳에서 서 있었고. 미친 듯이 싸웠다. 그 빨강색이 눈앞에서 흔들, 흔들 거릴 때마다 나는싸웠다. 그녀를 더럽히지 않기 위해. 그녀를 더럽힌 그들에게.

 

-오빠, 저 사람이 나를-!


눈도 흐려져 제대로 비춰지지도 않는 내게 그 놈이 다가왔다. 연가, 인가. ‘왜 그녀를 죽였는지’ 이유부터 묻는다.


네가 그녀를 버렸다.
저런 인간 같지도 않은 존재를 그녀보다 사랑한다고 외치니까.
그녀의 마음을 뒤짚고, 놔주지 않으니까.
그녀가 계속 놓지 못한다. 오직 눈으로만 놓고 마음으로는 간절히 부르던 그 이름이―. 나는 그놈 또한 죽이고, 죽였다. 그리고 그 빨강빛의 티치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여전히 이 좁은 세계에서 강자였다. 하지만 강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다. 나는 그저, 미쳐있었을 뿐이다.

 

 

 


‘그대는 자신의 잘못을 아는가?’
“….”


이런 곳이 있었군.―정신을 차렸을 때에 나는, 어둠 속에 홀로 와 있었다. 아무것도 없다. 그저 ‘퀸’과 내가 그 공간에 빛을 맞대고 서있었을 뿐. 어둠속에서 오직 둘만을 비춘다. 아무것도 없었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그 아무도 없었다.

 

‘테러는 분명 공적으로 금지된 사항. 그것은 사람에게 아픔을 주고, 피를 시리게 한다. 그대는 그러한 잘못을 몇 번이고, 몇 명이고 저질렀다. 잘못을 인정하는가?’


아아, 그래. 이제야 기억이 난다. 나는, 그 놈들을 몇 번이고 없앴다. 없애고, 없앴다. 손은 무감각 했고, 눈은 흐려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제서야, 나를 말리던 쿠로의 얼굴이 기억난다. 그놈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하고, 처절했다.너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다는 것을.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미치지 않고서야, 그렇게 하지 않고서야,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모욕당했고, 더럽혀졌다. 그런 인간도 아닌 존재에게 그녀는 미소를 내주었는데.

 

‘공적으로 금지된 사항을 어긴, 그대, 마신이여. 그대에게 내려진 [주민의 자격]을 박탈하겠다. 그대는 죄를 지었으므로, 더 이상 이곳에서 살아가지 못한다. 다만, 어떤가? 이곳에서의 벌을 기억하겠는가, 기억하지 않겠는가?’
“기억?”
‘큰 죄를 지었으므로.’


‘기억’-그것은 곧 내가 벌을 받는 이 괴로움을 짊어지고 가라는 뜻. 어떤 식으로든 좋다. 그녀를, 기억할 수만 있다면. 그것은 이 조용하고도 삭막한 어둠속에서 나에게 내려진 단 하나의 운이었다.―마지막, 신의 선물인가.


“기억…하겠다.”


평소에는 정신마저도 아름답게 울리던 퀸의 목소리가 이제는 더 이상 와닿지 않는다. 나플에서 그렇게 간곡히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고 외쳤던 그 놈도 사실은 나와 같은 심정이 아니었을까? 그래, 그 남자에게는 현실에 놔두고 온, 놔두고 올 수 없는 소중한 것이 있던 거였다. 그리고 나도 똑같은 절차를 밟은 것과 다름이 없다. 퀸에게 있어 ‘불복종’을 한 것은 다른 방식이나 어차피 마찬가지 아닌가.

 

‘이대로 괴로운 꿈을 안고 진실에서 벗어나기를…. 그대에게 편안한 안식을.’


퀸의 그 손이 나의 머리로 다가왔다. 아아, 그래. 더없이 차갑구나.―역시 인간이 아니구나, 하는 느낌일 뿐이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다가온 그 느낌은 그녀를 생각나게 했다. 그래, 당신이 로구나…. 메아리에서, 그리고 신전에서, 그 나무 그늘 아래서 보았던 그 모습들. 웃고, 울고, 화를 냈다. 아름답고,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 중의 한 목소리만이 나를 스쳐지나간다. 마치, 바람처럼.

 

‘저에게는 가장 무서운 일이 있어요. 누군가에게 미움 받는 것보다는 잊혀지는 것이 더 두려워요. 누군가 분명, 어느 순간.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처럼 한 순간에 잊혀져버리는 것이 제일 두려워요. 그래서, 나는 언제나 아는 사람들에게서, 잊혀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나를…미워하더라도.’

 

메아리에서, 그저 작게 소곤소곤 속삭이던, 그 목소리.
아름답고 다정하게 울려퍼져 단 한마디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


그것이 제일 두려운 일이라면서 그 사람에게만은 잊혀지고 싶어했다.
그렇게 마음 속으로부터 외치는 당신의 눈동자가 나를 향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처음 만나던 날 부터, 변하지 않은 채로.


‘당신은 날 기억해주겠지….’

 

그렇게 미움을 받았으니까.
사실은 알아주길 바랬다.
하지만 결국 이런 식으로 미움 받고 끝나는 거라면
잊혀지는 것보다 나을 것이다.

 

 


나의 여신.
언제나 당신은 내게 환상 같은 그림이었고, 언젠가는 사라져 버릴 것 같은.
메아리를 통해 되받았을 뿐이다.

 

 

 

 

 

 

 

 

“――찰싹!”


유난히 새하얘보이는 은발이 바람결에 휘날렸다. 아니, 바람이 아니다. 빨간빛으로 물든 티치엘이 아주 고집스러고, 표독스럽게 쳐다보며 그녀를 노려보며 발칙하게 손을 올린 것이다. 우연히 카울에서 만난 동생과의 반가운 만남은 아주 예상치 못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주위에 사람들이 다 그런 그녀들을 바라보며 웅성대고 있었다.


“어째서….”


아무 말도 못하고, 의문만 가득한 눈동자로 사라가 그녀를 쳐다보았다. 분명, 그녀는 빛이었다. 아니,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한치의 추오도 없었는데. 그래서, 그래서. 그래서 자신이 아니라 그녀가 사랑받는 게 이상하지 않다고 느낄 정도로.

 

“흥! 밖에 나가서 뭘 하고 놀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연가 오빠 말을 들어보니 기가 막히더군! 마신이라는 악질놈하고 놀아나더니, 결국에는 나와 우리 클럽을 이렇게 만들어?!”
“무슨 소리야…그게.”


또, 그 사람이구나. 대체 왜, 어째서일까. 왜 항상 당신은 내게 이런 의문만 가지게 할까. 이렇게 당황스럽게만 만드는 것일까.


“순진한 척, 모른 척 하지마! 그놈 시켜서 또 울고불고 짜댄 거지? 그래서 그 놈이 나하고, 우리 클럽원들 덮치게 만든 거지! 하여간 요령도 좋군! 어디서 또 그런 놈은 꼬셔대 가지고….”
“뭐? 덮치다니?”


그녀의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태도와 말이 오갔지만 그녀는 단 하나만이 이해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다. 그 사람이 무엇을 어찌하였다고?


“도플2에서 잘나가던 놈, 하나 쌔벼서, 테러하게 만든 거 아냐!하, 아주 건져도 제대로 건졌던데! 덕분에 그 놈은 아주 목숨을 걸고 죽이더군.”
“…테러를? 그 사람이?”


오직 한 마디가 귀에 박힌다. 말도 안 된다고 머릿속에서 또 한번 울리고 있었다. 카울에서 울려퍼지는 아이들의 노랫 소리가, 그 정겨운 북소리가, 아무것도, 매일을 초원위에서 울려대던 그 소리가 아무것도 와 닿지 않는다.


“하! 기가 막혀서. 덕분에 아주 아파서 몸이 쑤시는 줄 알았지. 잘 들어! 그래봤자 연가 오빠는 너한테 가지도 않고, 내어주지도 않아!-야!”


말도 끝까지 듣지 않고 가버리는 사라를 향해 그녀가 기가 막힌 듯 외쳤지만 뒤돌아보/지 않았다. 언니, 언니 하던 애였다. 그렇게 자기를 따르던 동생이었다. 다만, 사랑하던 사람이-그렇게 믿고 있던 사람이 그녀에게로 갔을 때부터는 어색하게 되었긴 했지만 그래도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배신이라고 생각할 여유도, 무엇도 없었다. 그 사람이 테러를 했다고-테러라면 ‘퀸’에 대한 불복종에 해당한다. 목숨을 걸고―목숨을 걸고-
어떻게든 찾아야 했다. 그를. 그의 흔적을.

 


    

 


“쿠로 님…이신가요?”


그 보리스를 본 적이 있었다. 제르나를 찾아갔을 때, 그렇다. 그가 애들 사이에서 그, 이름과 어울리지 않는 역할을 흉내내고 있었을 때. 제르나 곁에 그 사람이 있었다. 적색이 감도는 밝은 갈색 빛의 머리. 겨우 기억해 낸 그는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며 사라는 어떻게든, 자신의 예감이 틀려나가기를 간절히 바라고 바랬다.


“당신은….”
“저, 마신 님이…. 이상한 소리를 들어서….”


차마 말로 꺼낼 수 없다. 그러면, 왠지 현실이 되어버리는 거 같아서. 아니라고 하고 싶다. 우물쭈물거리는 그녀의 모습에 쿠로가 나지막히 말을 건넸다.


“…당신이 사라, 인가요?”
“네…? 어떻게….”
“퀸이 마지막으로 자비를 베푼 ‘전언’입니다.”

 

둥글게 말린 스크롤. 연 보랏빛이 옅게 비추는 그것은 느낌이 아주 오묘하고, 싸했다. 쿠로가 내미는 그것은 마치 펼쳐보/지 말아야 할 무언가였다. ‘퀸’의 마지막 자비. 그녀는 아주 용기 없이, 하지만 반드시 깨달아야 하는 무언가를 생각하고, 느끼며 그것을 펼쳤다.

 

 

 

 

 

 

―사박.


절벽 아래로 빛나는 강이, 바다가 아름답다. 하지만 그 날은 날씨가 좋지 않았다. 비가 내린 것도 아니다. 그저 구름이 하늘을 집어삼켰을 뿐. 하지만 바다인지, 강인지는 겉모습만으로는 구별되지 않지만, 끝도 없이 이어지는 옅은 파란빛의 빛나는 물결이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 위로 위태위태하게 서 있는 한 소녀가 그곳에 우뚝 서 있었다.
소녀는 늘 그곳이 좋았다. 은발의 머리가 찰랑이며 바람이 불었지만 그녀의 몸은 꼼짝도 안 했다. 그저 위태롭게 보일 정도로 그곳에 서서 하늘과 바다를 바라보았다. 멀리 수평선조차 희미한 그곳은 떨어지면 다시는 나올 수 없을 것처럼 위험해 보였지만 그녀는 그런 하늘 가운데에 오직 그녀가 서 있었다. 늘 거기 서있던 것처럼, 익숙하게. 절벽 가까이 조그맣게 핀 꽃이 그녀의 걸음에 움츠러들었다. 그녀가 서 있었는데도 새들은 다가오지 않는다. 알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들은.


“이쁘구나….”


마치 누군가에게 칭찬이라도 하는 듯이 말하는 소녀의 말투는 어쩐지 좀 가라앉아 있었다. 소녀는 바다를 보고 말한 것일까, 하늘을 보고 말한 것일까? 알 수 없었다. 그녀의 눈은 저 먼 중간에 다가앉아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웃는다. 왜 웃을까?-꽃이 단지 아름다워서, 그래서 그 아름다움에 취했을 뿐이어서? 그러나 곧 미소가 지워져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떨어질락 말락 위태롭게 서 있다가 순간 아래를 쳐다보고 말았다. 아름답게 출렁이는 물결이 어느 때보다도 아름답다. 마치 하얀 보석을 갈아 뿌려 놓은 것처럼 아름다운 그 물이 좋았다. 하지만 너무 거리가 멀어서 얼굴은 비춰지지 않았다.
늘 그곳에 비춰지는 아름다움이 좋았다. 넓게 자신의 손에는 잡히지 않으나 눈앞에 다가와 앉는 그 바다와 하늘과 수평선이 좋았다. 이 절벽이 좋았다. 그리고 저 멀리 보이지 않게 들려오는 그 ‘대답’이 좋았다. 소녀는 버릇처럼 먼 곳을 응시하다가도 한껏 숨을 들이쉬었다.


“잘―있나요―?”
“―잘…있나요-?”


소리였다. 그녀가,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곧 대답이 저 먼 곳에서부터 흘러나왔다. 누군가에게 안부를 전하듯, 모처럼 만났으니 반갑다는 듯. 그리고 그에 대한 똑같은 질문이 먼 저편에서부터 건너왔다. 그것은 마치 대답이라기보다는 물었던 그대로를 그대로 돌려보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모습을 그대로 비추는 거울처럼…. 하지만 소녀는 또다시 질문을 던졌다. 이번에도 잔뜩 숨을 들이 마쉬더니 손을 얼굴에 가져다대고 힘껏 소리를 질렀다.


“보고―싶지―않아요―?”


이번에도 보이지 않는 먼 곳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가 또 한 번 들려왔다. 


“보고―싶지―않아요―――…?”


매번 들려오는 그 목소리는 어쩐지 소녀의 목소리하고도 비슷했다. 그리고 그 말도 똑같았다. 마치 대답이라기 보다는, 역시나 그대로 돌려보내는 듯한, 그 느낌 그대로. 절벽에서 울려 퍼지는 그 목소리는 소녀의 목소리보다는 작았다. 마치 저 먼 저편에서 누군가 그녀처럼 소리를 지르는 듯이. 그리고 더 이상 소녀가 소리 지르지 않자, 그곳에서도 더 이상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소녀는 슬픈 눈으로 먼 곳을 응시하더니 품속에 보랏빛의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곱게, 아주 소중한 듯이 집어 올리는 그것은 둘둘 말은 양피지.


“처음부터…아무것도 몰랐던 것을.”


처음 만났을 때도, 이야기 했을 때도, 아무것도 자신은 모르고 있었다. 그저 그 사람의 말처럼 나는 그저 뒤에서 울고 있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무엇도 아니었다. 나는 진심으로 행복을 바란다고 하고 있었는데 그 사람의 말처럼 어쩌면 그저 마음속으로부터는 외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이런 나를 알아달라고’―그래서 당신이 왔나보다. 새들에게만 속삭이던 그 소리를 당신이 들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순간, 마음속으로부터 외치는 순간, 그가 왔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나 자신을 그저 속이고, 바보같이 웃고만 있었을 뿐이다. 울고만 있었을 뿐이다, 그렇게. 그리고, 메아리에서 혼자만이 ‘무언가’를 납득했던 것이다. 자신이 질문을 던지고, 마음을 외쳐보고, 그렇게 응답받기를. 그리고 지금도――또다시 그렇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소녀가 꽃잎을 바라보며 울었다. 절벽을 바라보며, 절벽 밑 물결을 바라보며 울었다. 하늘을 바라보며 눈물이 흘렀다. 소녀는 넘치는 눈물이 흐르는 얼굴에 양손을 갖다 댔다.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아. 하지만 견딜 수 없어. 그런 마음에 흘러내리는 눈물이 작은 꽃잎의 비가 되었다.


밤이 되었다. 약간의 불빛만이 애처롭게 앉아있는 그녀만이 보일 뿐, 빛나던 파란 물결도 아득한 수평선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까맣게 흐르는 정적 안에서 애처롭게도 소녀의 눈물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호한 결심. 
   

“……걱정 말아요. 절대…잊지 않을 테니까.”

 

 

 

 

바람이 분다.
메아리도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계곡 위에는 아무것도
서 있지 않는다.

 

 

 


바람결에 날리는 보랏빛 편지 한 장.

 

 

 

 

물결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 처럼
거대한 소리 한 번만을 울린 채
그곳의 깊고 깊은 심연속으로
소녀를 삼켜 버리고 말았다.

 


처음부터, 그리고 지금도
그곳엔 아무 것도 없다.

 


아무것도 더 이상
들려오지 않는다.

 

 

그 아무것도――――외치지 않는 이상.

 

 

 

 

 

 

 

 

전체 댓글 :
4
  • 보리스
    네냐플 다프넨Boris
    2006.10.07
    흐음;; 왕삼 ;; 소설도 쓰는거였음??
  • 나야트레이
    하이아칸 해파리궁금증
    2006.07.30
    끼야!! 잘 쓰셨어요~ ㅠ 슬프고, 가슴아프기도 한.... 너무너무 잘 봤습니다~
  • 보리스
    네냐플 슬픈운명의아이
    2006.07.29
    ㅡㅜ 너무 잘 쓰셨어요...
  • 티치엘
    하이아칸 혜림☆
    2006.07.28
    헉, 길어요~ 조금 많이 줄여서 2~4편으로 나눠 올리시는게← /여하튼 너무 잘쓰셨어용....ㅇㅅㅇ!!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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