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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도 알겠지만, 내가 이렇게 자네와 제자들을 부른 건…."
공회당의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섭정 스카이볼라는 일부러 말을 돌리고 있었다. 상황은 그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눈앞의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강요하면 결국 자신의 위신만 땅에 떨어질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계속해서 뜸을 들였다. 섭정은 이곳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 단 한 사람만이 그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할 용기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무슨 말을 할 것인지도.
"알고 있습니다."
내내 땅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던 그가 고개를 들어 섭정을 쳐다보았다. 본래 섭정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는 것은 엄하게 금지되어 있었다. 만일 이를 어긴 자는 감히 달여왕의 전능함을 눈에 담았다 하여 눈을 폐함, 즉 눈알을 뽑는 잔혹한 형벌에 처해졌다. 그러나 태양의 이름을 가진 검의 사제는 눈을 뽑는 형벌도, 달여왕도 두렵지 않다는 듯 섭정을 노려보았다. 섭정은 그런 그의 행동을 예상하고 있었음에도 괜히 모골이 송연해졌다. 이는 공회당에 모인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데스포이나 사제도, 펠로로스 수도사도, 그리고 제로까지도 할 말을 잃은 채 검의 사제가 달여왕의 대리자에게 정면으로 맞서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섭정께서 원하신다면야, 기꺼이 섬을 위해 나서야겠지요."
이제 그는 턱을 잔뜩 치켜들고 조롱하는 듯한 눈빛으로 섭정을 보고 있었다. 그의 모습은 오만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 오만함 뒤로는 비장함이 흘렀다.
검의 사제, 일리오스는 이죽거리며 한 마디를 더 던졌다.
"그걸로 모자란다면, 아예 죽어드릴까요?"
의도한 것인지 우연인지 허리춤에 찬 우레의 룬이 일리오스의 다리에 부딪혀 '덜컥'하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효과는 뛰어나서 공회당은 다시금 침묵의 늪에 빠져들었다. 일리오스는 섭정이 물러가도 좋다는 말을 채 하기도 전에 돌아서서 공회당을 나갔고, 그의 제자들 또한 그의 뒤를 따랐다.
written by iRis
전언(傳言) 上 - 출사
데스포이나 사제는 갓 끓여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를 자신과 일리오스의 찻잔에 따랐다.? 일리오스는 잔을 들어 향을 맡은 뒤 한 모금을 마셨다. 그가 접시 위에 잔을 내려놓을 때 '달그락' 소리가 약간 크게 울렸다. 그러자 차를 음미하던 데스포이나 사제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느꼈는지 일리오스는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차를 마실 때에는 항상 마음가짐을 가지런히 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일리오스. 누차 얘기했지만 넌 조심성이 없는 것이 유일한?…"
"예, 예 알고 있습니다 누님. 오늘 낮의 일 때문에 화가 나신 게지요."
"그걸 아는 사람이, 그렇게밖에 처신할 수가 없었더냐."
데스포이나 사제의 언성이 높아졌다. 그녀가 조금 격해진 동작으로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런데도 잔은 전혀 흘러넘치지 않았다. 그것을 본 일리오스가 신기하다는 듯 휘파람을 휘익 불었다. 그가 자신의 말을 귀담아듣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데스포이나 사제는 한숨을 푹 내쉰 뒤 말했다. 조금 전보다는 확연히 침착해진 목소리였다.
"명심해라 일리오스. 너는 검의 사제다. 검의 사제는 결코 경솔하게 움직여서는 안 되는, 매우 무거운 자리다. 만일 네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혼자 남은 이솔렛은 어떻게 되겠느냐. 그 아이는 이제 열 살을 겨우 넘겼을 뿐이다. 물론 널 닮아 강인하게 자라겠지만, 아직은 네가 곁에서 보살펴 주어야 할 나이야."
이솔렛의 얘기가 나오자, 그녀가 예상했던 대로 일리오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일리오스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옆으로 밀어놓았다. 사기 접시와 나무 탁자가 부딪히는 소리가 데스포이나 사제의 귀에까지 똑똑히 들렸다. 그의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부터 이솔렛은 일리오스의 유일한 삶의 낙이었다. 이솔렛을 위해서라면 검의 사제 자리를 포기하는 것쯤 그에겐 일도 아니라는 것을 데스포이나 사제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이솔렛은 이미 많은 상처를 받았다. 아니, 그 아이의 나이를 감안하면 가혹할 정도지. 자기 어머니를 잃은 뒤로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는 걸 너도 잘 알지 않느냐. 게다가 나우플…"
"그 자식의 이름은 입에도 담지 마십시오!"
일리오스가 노성을 터뜨리며 탁자를 내리쳤다. 어찌나 세게 내리쳤던지 탁자가 두 쪽으로 쪼개져 버렸다. 자리에서 일어난 일리오스는 그래도 화가 덜 풀렸는지 잡아먹을 듯한 표정으로 데스포이나 사제를 노려보았지만 차마 더 대들지는 못하고 바닥으로 시선을 내렸다. 한심함과 안쓰러움이 뒤섞인 표정으로 그를 지켜보던 데스포이나 사제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직도 그를 용서하지 못한 게냐. 이제는 흘러간 세월에 띄워 보내도 될 만큼 과거의 일이 되었거늘…."
"그는 제게 씻을 수 없는 모욕을 주었습니다. 죽기 전에는, 아니 죽은 후에도 제가 그를 용서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일리오스가 떠나려는 듯 돌아섰을 때, 그녀의 날카로운 한 마디가 그의 귀 옆에 날아와 꽂혔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를 원정대에 포함시키지 않은 게냐. 그의 검이 네게 충분한 도움이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면서 말이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건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게 어때서요. 전 단지 녀석이 마음에 들지 않을 뿐입니다. 그런 녀석에게 달의 섬을 맡기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를 사지로 내몰고 싶지 않은 것이겠지."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한 차례 얽혔다. 일리오스는 그녀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대강 짐작할 수 있었지만 잠자코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나우플리온이 찾아왔었다. 오늘 낮에, 네가 이곳에 오기 직전이었지. 그는 네가 자신을 데려가지 않은 이유를 알 수가 없다면서 내게 막무가내로 부탁하더구나. 자기도 섬을 위해 싸우게 해 달라고. 너도 알다시피 원정대의 최종 결정권자는 나니까. 물론 나는 그를 말렸지만 그는 한사코 가야겠다면서 물러서지 않았단다. 정말이지, 그 황소고집은 너를 그대로 빼닮았더구나."
고개를 숙인 채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던일리오스는 자신이 우려하고 있던 말이 데스포이나 사제의 입에서 나오자 눈이 휘둥그레져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지금 제정신이십니까, 누님? 그 녀석이 아무리 매달려도 어차피 최종 결정권자인 누님께서 거절해 버리시면 그만 아닙니까. 애초에 제가 데려가려 하지 않았으니 거절할 명분도 충분하고요. 도대체가, 누님께선 너무 무르셔서 탈입니다. 이번 원정대는 섬의 운명이 걸린 신성한 임무르 짊어지고 있습니다. 그런 망나니 녀석을 원정대에 뽑으라구요? 안됩니다. 저는 원정대의 명예를 떨어뜨리는 그런…"
"어째서!"
찻잔이 넘어지면서 그녀의 옷자락에 찻물이 튀었다. 일리오스는 말문이 막혔다. 여지껏 데스포이나 사제가 이렇게까지 화를 낸 적은 없었다. 데스포이나 사제는 옷이 더러워지건 말건 신경쓰지 않고 일리오스를 노려볼 뿐이었다.
"어째서 나뿐 아니라 네 자신에게도 거짓말을 하는 것이냐, 일리오스. 네가 언제부터 명예를 핑계로 인재를 거부하는 족속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더냐. 너는 고작 그런 비겁한 이유로 내게 화를 내서는 아니 되었다. 솔직히 말해 보거라 일리오스. 너는 나우플리온을 아끼면서도 그가 네 자존심에 상처를 낸 것 때문에 그를 원망하는 '척'하고 있는 것이 아니더냐?"
일리오스의 눈썹이 꿈틀, 하고 움직였다. 데스포이나 사제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태풍처럼 몰아치지도, 파도처럼 요란하지도 않았지만 면도날처럼 그의 신경을 건드렸다. 자존심… 맞는 말이었다. 검의 사제이자 티엘라의 계승자로서 쌓아올린 그에겐 이솔렛 못지않게 소중한 것이었다. 하지만 정녕 이것 때문에 나우플리온을 그토록 원망했던 것일까. 일리오스는 마음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어쩌면 그가 미워한 사람은 나우플리온이 아니라 그 자신이었는지도 몰랐다. 자신의 의사와는 아무 상관 없이 약혼을 파기당하고, 정든 집을 떠나 아무도 없는 산 위의 오두막으로 옮겨와 살게 되면서 받은 상처로 인해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이솔렛을 보며 매일 남몰래 피눈물을 흘렸던 그였다.
"누님 말씀이 옳습니다.
일리오스는 다시 한 번 뒤돌아섰다. 그는 이번에는 정말로 떠날 생각이었다.
"그 녀석에겐 잘못이 없습니다. 따지고 보면 모두 저의 불찰이었지요. 그렇지만 그를 용서하게 되면 저는 그 죄의 댓가를 제게 전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건 제 자존심이 허락하질 않는군요. 그만 돌아가겠습니다. 나우… 아무튼 그 녀석에게도 각오 단단히 해두라고 전해주십시오. 굉장히 위험한 전투가 될 것 같거든요."
"제정신인 게냐, 일리오스!" 데스포이나 사제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일리오스는 이미 집 밖으로 한 발짝 내딛은 뒤였다. 그는 그 상태로 잠시 멈춰 섰다.
"아무리 자존심이 네게 중요하다고 해도 목숨보다 더 중할 수는 없다. 정녕 한순간의 객기일지도 모르는 그 자존심 때문에 목숨을 내던져도 좋다는 말이냐? 너는 죽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이솔렛은 아니야. 일리오스, 이솔렛을 봐서라도 한 번만 다시 생각해 다오!"
화를 내던 데스포이나 사제의 목소리는 어느새 간곡한 애원조로 바뀌어 있었다.
"누님, 뭔가 오해하고 계신 모양인데," 줄곧 문 밖을 바라보던 일리오스가 고개를 돌렸다. 문간에 걸려 있던 등불이 그의 얼굴 위로 그림자를 늘어뜨렸다. 누런 불빛 아래 들어난 일리오스의 반쪽짜리 얼굴이 씨익, 하고 웃어 보였다.
"저는 죽으러 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윽고 문이 닫혔다. 텅 빈 거실에는 등불만이 일렁이고 있었다. 데스포이나 사제는 일리오스가 마지막으로 남긴 웃음을 곱씹어보았다. 불빛에 드러난 반쪽 얼굴로는 자신만만하게 웃고 있었지만 나머지 반쪽으로는 조소를 띄우던, 그의 반쪽짜리 웃음. 일리오스는 언제나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었지만 그녀는 왠지 이번만큼은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전언(傳言) 上 - 출사 fin.
전언(傳言) 下 - 귀환 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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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의 룬아 팬픽이네요. 드디어 한 편을 완성했습니다. 도대체 하나 쓰는데 얼마가 걸린건지 우어어 ㅠㅠㅠㅠ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글 나오는 속도가 너무 느린 것 같아요 으어어엉
이래서 다른 분들하고 합작같은거 하면 마감 못맞춰서 폐 끼칠까봐 엄두를 못 내겠어요...
아무튼, 다음 편 작업이 남아 있으므로 다시 집필에 착수하도록 하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다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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