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CC게시판
마법, 검술 학원 네냐플 Chapter 1. 네냐플의 살인귀 (1)
1
아노마라드 남부의 3월은 아직 쌀쌀했다. 티치엘은 네냐플 교복 위에 덧입은 외투의 단추를 전부 채웠다. 목도리까지 동원한 중무장 덕에 찬바람이 옷깃 속으로 파고드는 일은 없었지만 문제는 손이었다. 1학년 필수 과목 외에도 마법 관련 강의을 몇 개 더 선택해 듣는 그녀는 자연스레 들고 다녀야 할 책들도 많았다. 그 책들을 품에 가득 안고 가노라면 두 손이 무방비가 되는 것이었다. 그녀는 속으로 완전개방형인 시나이 루블 관의 창들을 널빤지로라도 다 막아버리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기숙사에서 나올 때 장갑을 챙기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하지만 건물 안으로 내리쬐는 화사한 햇살에 마음을 빼앗겨 버린 티치엘은 자신도 모르게 노랫가락을 흥얼거렸다. 그녀의 노랫소리가 책들을 타넘고 복도의 대리석 바닥에 부딪혀 떠다니다가 오전의 투명한 태양빛 속에서 두어 바퀴 휘감겼다.
그대 눈을 감아요.
꿈결에 떠오르는 연녹의 정원.
아무도 모르는 우리만의 세계.
그대 내게 키스해 주세요.
라라라라라라….
라라라라라라….
"노래 잘 하는데?"
"에엣?"
깜짝 놀란 티치엘이 비틀거리자 누군가가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다시피 하여 잡아 주었다. 곧이어 읏차,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팔 위에 있던 책들이 가벼워졌다. 티치엘은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 뒤돌아섰다. 상대방은 키가 훤칠해서 얼굴을 보려면 한참 올려다봐야 했다.
"어, 스베니안 선배?"
스베니안이라고 불린 남자는 대답 대신 히죽 웃어보인 뒤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그러자 티치엘이 쪼르르 달려와 그의 옆에 바싹 붙었다.
"지금 어디 가세요?"
"애니 관. 너 다음 시간 초급 마법학이지?"
티치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떻게 아셨어요?"
"원래 선배는 다 아는 거야." 스베니안은 말을 돌리며 티치엘을 내려다보았다. 재차 바람이 불어 길게 기른 앞머리가 눈을 가리자, 그는 머리를 한 번 더 흔들었다. 사사삭, 하고 머리카락들끼리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눈앞의 검은 장막이 걷혔다.
"치이, 그렇게 빠져나가기에요?"
약간 토라진 듯한 티치엘의 목소리. 스베니안이 뒤늦게 '나도 너처럼 신입생이었던 시절이 있었으니까' 하고 대답해 주었지만 그녀의 마음을 돌리기엔 너무 늦은 듯했다. 시나이 루블 관의 로비에 다다랐을 때 그는 책들을 바닥에 내려놓은 뒤 티치엘의 눈치를 살폈다. 고양이처럼 작고 귀여운 입을 삐죽 내밀고 있던 티치엘은 스베니안이 갑자기 멈춰 서자 어리둥절하여 자신도 그 자리에 섰다. 왜 그러냐고 물어보려는 순간, 스베니안의 손바닥이 티치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귀끝까지 새빨개진 티치엘이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있는 사이, 그녀의 정수리를 가만가만 어루만지던 그가 돌연 짖궂은 표정을 지었다.
"꺄악!"
단정하게 빗겨져 있던 티치엘의 금빛 머리칼이 스베니안에 의해 헝클어졌다. 깜짝 놀란 티치엘이 벗어나려 했지만 스베니안에 두 손으로 그녀의 관자놀이를 부드럽게 감싸자 꼼짝달싹 못하게 되었다.
"뭐가 보여?"
"네, 네?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요?"
티치엘의 눈은 그녀의 백금발로 뒤덮여 있었다. 하지만 스베니안은 다시 질문했다.
"뭐가 보이지? 있는 그대로 얘기해줘."
"있는 그대로라고 해 봤자, 온통 어두컴컴해서…."
"그냥 깜깜해? 그게 다야?"
티치엘은 고개를 끄덕였고, 스베니안은 실망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내렸다.
"그런데 그건 왜 물어보신 거에요?"
"아 그거? 실은 아까 머리 때문에 눈이 안 보였을 때 온통 까맣더라고. 보다시피 내 머리가 검은색이잖아. 그래서 호기심이 생긴 거야. 티치엘은 금발이니까 이렇게 하면 눈앞이 온통 황금빛으로 가득 차지 않을까 해서. 그치만 뭐… 그냥 깜깜하다니까, 어쩔 수 없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어깨로 유리문을 밀어 여는 스베니안을 보며 티치엘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상급생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의 순진함이었다. 이렇게 대책없이 순진한 사람을 또 꼽으라면… 아마 루시안 정도밖에 없을 터였다.
"흡, 푸후훗."
티치엘이 고개를 숙이며 실소하자, 스베니안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왜 그래?"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누가 좀 생각나서요."
"누구길래 그렇게 웃기까지 하는 거야? 남자친구니?"
'남자친구'라는 말에 티치엘의 얼굴이 다시 빨개졌다. 도토리 빌라 멤버들과 조슈아처럼 그녀의 주변에 남자'인' 친구들은 많았지만 스베니안이 물어본, '사귀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도 티치엘은 무심결에 무슨 대답인가를 하려 했다. 정신을 차린 그녀가 재빨리 자신의 입을 막은 덕에 그 대답은 목구멍 안에서 맴돌다 사라졌다. 두 사람 다 듣지 못했지만, 그것이 '남자친구 없어요'가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저 먼저 가볼게요!"
결국 티치엘은 스베니안을 내버려둔 채 애니 관을 향해 뛰어갔다. 홀로 남겨진 스베니안은 엄청난 속도로 멀어져가는 티치엘의 뒷모습과 자신이 들고 있는 책들을 번갈아 보더니 이내 그녀를 쫓아가며 외치기 시작했다.
"잠까안! 책은 가져가야지이!"
"나중에 주세요오!"
"수업은 어쩌고오!"
"몰라요오!"
2
"여기 9번 테이블에 맥주 한 잔 추가!"
갈색머리의 소년이 코끝까지 흘러내린 안경을 밀어올리며 악을 쓰듯 소리질렀다. 그러자 시끌벅적한 와중에도 용케 알아들었는지 '네 곧 나갑니다!' 하는 대답이 들려왔다. 갈색머리의 소년은 '봤지?' 하는 표정으로 친구들 쪽으로 몸을 돌렸지만 그들의 눈에는 그가 주정을 부리는 것으로밖에 비치지 않았다. 그의 옆에 앉은 노랑머리의 소년의 맞은편에 앉은 청동빛 머리의 소년의 옆에 앉은, 쉽게 말해서 갈색머리의 소년의 맞은편에 앉은 회색머리의 소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막군, 우리 테이블은 9번이 아니라 6번이야."
"뭐어? 내 눈이 잘못된 게 아닌 이상 저 숫자는 9가 확실한데."
조슈아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건 막군 네가 테이블 건너편에 앉아 있기 때문이야. 9를 뒤집으면 6이 되잖아."
"조군 너 말이야," 막시민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원래 9번 테이블인데 네녀석이 반대편에 앉아서 6으로 보이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안 해봤냐?"
평소 같았으면 궤변과 비논리로 가득 찬 입씨름으로 몰고갔을 조슈아였다. 그러나 그는 왠일인지 순순히 백기를 들었다. 조슈아 쪽에서 대답이 없자 막시민도 더 떠들지 않고 눈을 비볐다. 도토리 빌라 4인방 가운데 최고의 주량을 자랑하는 막시민이었지만 오늘은 컨디션이 별로인지 취기가 일찍 올랐다. 그때 맥주잔을 쟁반에 받쳐 든 급사가 주방 쪽에서 걸어나왔다. 주방을 등지고 앉은 탓에 그것을 ** 못한 막시민이 눈을 감고 잠시 조는 사이, 급사는 벽 쪽에 위치한 테이블에 다가가 말했다.
"주문하신 맥주 나왔습니다, 손님."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막시민의 귀가 쫑긋, 하고 움직였다.
"그거 이쪽에서 시킨 거야! 거 미안하게 됐수다!"
허리를 절반쯤 굽힌 채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던 급사는 눈앞의 손님과 막시민을 한 번씩 쳐다보았다. 잠시 뒤 9번 테이블의 손님이 고개를 끄덕였고, 급사는 막시민의 테이블에 맥주잔을 올려놓았다. 막시민은 잔을 입으로 가져가기 전 인사하듯 허공에 한 번 들어 보였다. 그 손님은 외투에 달린 모자를 깊이 내려쓰고 있어서 그가 막시민을 봤는지는 알 수 없었다.
"막시민, 너 그래도 돼? 저 사람이 기분 나빠하면 어떡해?"
루시안이 걱정스럽다는 투로 말하자 막시민은 잔을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으며 손사래를 쳤다.
"무슨 소리야. 기분 나쁘기는커녕 되려 나한테 고마워해야 할 걸? 생각해봐. 첫째로, 이 맥주의 소유권은 나한테 있어. 왜냐구? 맥주를 시킨 건 이 막시민 리프크네지 9번 테이블이 아니니까. 그건 술집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라구. 만약에 9번 테이블이 비어 있었었봐. 결국 술집 같은 이윤 추구 업소는 돈을 낼 수 없는 테이블보다는 돈을 낼 수 있는 나를 우선시할 수밖에 없는 거지. 손님은 왕이다 손님은 왕이다 하는데 그거 다 뻥이야. 엄밀히 말하면 돈을 내는 손님만 왕이라구. 둘째로, 나는 저 손님이 괜히 낼 뻔한 술값을 대신 내 줬으니 감사의 인사를 받아 마땅해. 게다가 저 손님은 애초부터 맥주를 마실 생각이 없었어. 내가 소리질렀을 때 순순히 맥주를 넘겼잖아. 누구는 마음에도 없던 맥주를 안 마시게 돼서 좋고, 누구는 맥주 마시게 돼서 좋고, 또 누구는 맥주 값 받아서 좋으니 이 정도면 다 된 거 아니야?"
청산유수처럼 쏟아지는 막시민의 말에 세 사람 모두 할 말을 잃었다. 그 모습을 본 막시민은 의기양양하게 맥주를 홀짝였다.
"그만 가자. 막시민 너 취한 것 같다."
보리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걸치며 말했다.
"뭐? 아니야, 나 안 취했어!"
막시민은 팔을 내저어 반항하려 했지만 어느샌가 다가온 보리스의 억센 손이 그를 붙잡아 질질 끄고 갔다. 젖먹던 힘까지 짜내어 버티던 막시민이 절규하는 목소리로 외쳤다.
"대체 어딜 봐서 내가 취했다는 거야앗!"
보리스의 대답은 간결했다.
"너답지 않게 의외로 논리적이라서."
==================================================================================
네, 챕터 제목과는 어울리지 않게 즐거운 분위기로군요.
아직 1편에 불과하니깐...
본의 아니게 티치엘과 스베니안의 알콩달콩 이야기가 많아졌는데, 저 두사람 어디까지나 친한 오빠동생 사이에요. ㅎㅎㅎ
민족의 대명절 설날입니다.
세뱃돈 많이 챙기세요 ^^
- 전체 댓글 :
- 1
-
네냐플 Rossini、2012.01.30네냐플 학원 팬픽인가요 재미있네요 ㅎㅎ(특히 막시민 대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