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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0. Prologue : 겨울이 녹은 자리
1
겨울이 녹은 자리에 눈이 왔다.
봄이 만개한 자리에 여름이 오고, 여름이 불탄 자리에 가을이 오고, 가을이 언 자리에는 겨울이 온다. 하지만 이번엔 조금 특별했다. 섭리마저 무시한 채 기나긴 겨울을 살아왔던 소년의 가슴에도 마침내 봄이 찾아온 것이었다. 가냘프고 위태로웠던 소년은 열 여덟 살이 되었고, 소년을 잡아먹으려 난동을 부리던 하얀 검은 이제 그의 등에 잠자코 매어져 있었다.
"…네냐플은 이제 완전한 봄이에요. 그곳에도 봄이…"
얼마 전부터 보리스에게는 새로운 습관이 생겼다. 시간만 나면 새하얀 천 조각을 매만지는 것이었다. 지갑처럼 한 바퀴 감긴 그 안에는 이솔렛이 머리칼이 들어 있었지만 보리스는 행여나 바람에 날려갈까봐 그것을 열어 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아직은 보고 싶지 않았다. 양가죽 신을 신은 이솔렛, 일리오스 사제의 일지를 읽는 이솔렛, 동굴에서 비를 피하는 이솔렛, 두 자루의 쌍검을 뽑아든 이솔렛, 그리고 신성 찬트를 부르는 이솔렛…. 보리스의 가슴 속에는 언제나 그녀의 모습들이 숨쉬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금빛 머리칼을 보게 된다면 도저히 견딜 수가 없게 될 것 같았다. 란지에도, 루시안도, 네냐플에 와서 만난 친구들도 버려둔 채 달의 섬을 달려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보리스는 벌써 몇 번이고 절반 가량 열었던 천 조각을 다시 여몄다.
"…당신 생각을 해요. 자주, 아니 항상…"
문득 이솔렛을 지나 나우플리온에게까지 생각이 미쳤다. 벨크루즈에서는 월넛이었고 렘므에서는 이실더였으며, 달의 섬에 가서야 비로소 나우플리온이 된 남자. 보리스에게 나우플리온의 존재는 단순히 검술 스승이나 생명의 은인이 아닌 그 이상의 것이었다. 보리스는 그와 처음 만나던 때를 떠올렸다. 벨노어 백작이 붙여 준 검술 스승…, 그것은 우연이었을지도 몰랐다. 그 다음은 로젠버그 관문….
보리스는 그 대목에서 피식, 하고 웃어 버렸다. 첫 번째는 우연이지만 두 번째부터는 운명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나우플리온은 끝까지 우연일 뿐이라고 잡아뗐었지만 보리스는 그것이 운명이었다고 믿고 싶었다. 그들의 만남에 운명보다 더 어울리는 말은 찾기 힘들었다.
"…나우플리온 사제님께도 안부 전해 주세요."
아직 종이의 절반도 채우지 못했지만, 보리스는 깃펜을 놓았다. 고작 서너 줄을 쓰는 데 세 시간이나 걸렸다. 글을 읽는 것과 쓰는 것은 꽤 큰 차이가 있음을 뼈저리게 깨달은 보리스였다. 그는 힘들게 쓴 편지를 품 속에 갈무리한 뒤 의자에서 일어섰다. 사람이 없는 조용한 장소를 찾아 돌아다니다 발견한 곳이 바로 이 뒷산 입구였는데 서둘러 돌아가지 않으면 도토리 빌라가 발칵 뒤집어질 것이 뻔했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빌라 전쟁 때문에 혈안이 된 루시안과 조슈아가 틈만 나면 작전 회의랍시고 그와 막시민을 끌고 술집으로 향하는 일이 잦아지고 있었다.
"…너무 짧은가?"
빌라로 돌아가던 보리스는 자신이 쓴 편지를 다시 꺼내어 보았다. 정확히 네 줄. 그나마 네 번째 줄은 마지막 문장 끝부분이 잘려 내려간 것이라서 줄이라 하기에도 애매했다. 이솔렛에게 편지를 쓰면 왠지 편지지가 모자랄 것 같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가슴에 담아 두었던 말을 다 쏟아냈다고 생각했지만 종이 위에 옮겨진 것은 네 줄이 전부였다. 문득 루시안이 조슈아가 쓰던 편지에 대해 이야기하던 것이 생각났다. 보리스는 빌라에 돌아가면 편지에 무슨 말을 쓰면 좋을지 조슈아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2
"응? 편지?"
빌라 전쟁 준비에 여념이 없던 조슈아는 보리스의 뜬금없는 질문에 고개를 갸웃했다.
"아, 그때 루시안이 보고 너에게 말해 준 모양이구나. 그건 말이지…"
"미래의 부인에게 쓰는 거래!" 마찬가지로 빌라 전쟁 준비 중이던 루시안이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내가 궁금한 건 그게 아니야." 보리스의 말에 조슈아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모습은 쑥쓰러운 것 같기도 했고, 또 어딘가 슬퍼 보이기도 했다. "내게는 무척 소중한 사람이야. 어느 정도인지 나조차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그런데 편지에 쓸 말이 없어…. 미래의 부인이라면 조슈아 네게도 소중한 사람이겠지. 넌 그 사람에게 무슨 말들을 쓴 거야?"
조슈아가 대답을 떠올리는 데에는 몇 초면 충분했다. 하지만 그는 입을 열기 전 주위를 둘러보았다. 루시안은 이미 보리스와 조슈아에게 흥미를 잃고 이번에는 티치엘을 붙잡아 떠들고 있었다. 티치엘은 굉장히 난감한 표정으로 루시안과 시계를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급한 일이 있어서 가야 하는데 성격상 루시안의 말을 중도에 자르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그녀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막시민 쪽을 곁눈질했지만, 잠에 취해 인사불성인 그가 도와줄 리 만무했다. 세 사람의 모습을 보던 조슈아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넌 참 욕심이 없구나 보리스."
"응?"
"말 그대로야. 편지에 무슨 말을 써야 할 지 모르겠다는 건 그만큼 그 사람에게 달리 바라는 게 없기 때문이야. 그저 같은 하늘 아래서 같은 공기를 마시며 살아준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고맙고, 또 그 사람을 많이 사랑한다는 뜻이지. 하지만 보리스, 정말로 사랑한다면, 가끔은 욕심도 부려보는 게 어때?"
보리스는 고개를 숙였다. 조슈아의 회색 머리칼 위로 과거의 목소리들이 지나갔다.
「틀렸어! 넌 네 삶을 스스로 빈약하게 만들고 있어. 네게 부족한 건 바로 의지야! 죽은 사람의 삶은 그걸로 끝이라고 말하면서 어째서 네 삶의 가치를 자꾸만 그들의 죽음에 두는 거냐? 정말로 끝이라고 생각한다면 모조리 끝장내어 버리고 넌 너대로 네 욕망을 쫓으며 새롭게 살아라, 아니면! 그들을 위해서라도 더 힘껏, 더 오래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 네가 불멸자가 될 수 없는 한, 너는 네 삶의 밀도와 가치를 높임으로서 그들이 잃어버린 삶을 대신할 수밖에 없다, 만일 네가 그러고 싶다면!」
「그런 식으로 하여 끝내 원하는 것을 모두 잃고 나면 그 때도 내 앞에서 네가 '소원의 인간'이라 말할 수 있을까? 인간은 소원을 잃을 수 없기에, 그리고 불멸하지 않기에, 마음을 돌궤처럼 닫고 살 수는 없다. 열어버려라! 네 형제가 닫아버린 그 마음을 열고 네 소원을 찾아내어 끝까지 이루어내라! 살아남기 위해 닫았던 욕망을 다시 꺼내놓으란 말이다!」
「정말로 사랑한다면, 가끔은 욕심도 부려보는 게 어때?」
보리스는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다른 시간, 다른 공간의 사람들이었지만 결국 그들은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겨울 대장장이를 만나고 돌아온 뒤로, 보리스는 나름대로 자신의 욕망을 따라 살아보려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부닌 아저씨의 대장간 조수로 남기 위해 롤리아니 부인의 제안을 거절했지만 어머니의 유품을 되찾느라 칼츠 상단의 고용인이 되어 그와레를 떠나야 해서였다. 그리고 루시안을 따라 네냐플로 오고…. 엄밀히 말하면 그는 아직 자신의 욕망을 제대로 열어**도 못한 셈이었다.
"그래도… 되는 걸까?"
다시 앞을 바라보자, 조슈아는 거기에 없었다. 그는 거의 울상이 된 티치엘을 구제하려 자신이 대신 루시안의 수다를 받아주는 중이었다. 조금 전까지 그가 앉아 있던 탁자에는 한 줄의 메모가 놓여 있었다. 보리스는 손을 뻗어 그것을 집어들었다.
'사랑은 때로 사람을 관대하게 만들지.'
조슈아는 보리스의 머릿속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보리스는 메모지를 들고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그 와중에도 루시안의 수다는 그칠 기미가 없었다. 같은 자세로 오래 앉아 있자니 조금 지루해진 조슈아는 기지개를 켜며 몸을 좌우로 돌렸다. 순간 둘의 눈이 마주쳤고, 그들은 각각 윙크와 미소로 인사를 대신했다.
3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보리스는 문을 닫고 책상에 앉았다. 조슈아의 메모를 보고 나자 편지에 쓸 말이 떠올랐다. 하지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달아올라서 그 말을 편지지 위에 옮기는 데는 수 차례의 심호흡이 필요했다.
"보고 싶어요, 이솔렛."
이게 과연 옳은 일일까, 하고 보리스는 생각했다. 그녀의 이름에 담긴 의미가 '고귀한 고독'임을 보리스도 잘 알고 있었다. 일리오스 사제는 자신의 사랑스런 공주님이 어떤 삶을 살게 될 지 내다보기라도 한 듯 기가 막히게 어울리는 이름을 그녀에게 선물했다. 그리고 그녀는 아버지에게서 받은 이름의 뜻을 충실히 이행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앞에 끼어들어도 되는 것일까. 일리오스 사제가 대륙에서 사용했던 성 '미스트리에'를 등에 짊어지고 실버스컬에 참가했던 보리스였다. 그는 절절하게 느꼈다. 일리오스 사제가 이솔렛에게 얼마나 큰 존재인지를.
"당신이 그리워요, 전부 다."
보리스는 펜을 멈출 수가 없었다. 자꾸만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아버지와의 추억이 깃든 땅을 떠나 자신에게 와달라는 말을 들으면 그녀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솔직히 말해서 자신이 없었다. 일리오스 사제는 이솔렛에게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많은 것을 주었다. 이름과 학식, 신성 찬트, 거기다 티엘라까지. 그리고 모든 것을 떠나서, 일리오스 사제는 이솔렛의 아버지였다. 이 세상에 고귀한 고독을 잉태시킨 거룩한 존재. 하지만 그는 무엇을 주었던가. 되려 그녀로부터 받은 것이 더 많았던 보리스였다. 달의 섬에서도 대륙에서도, 이솔렛은 위험히 닥칠 때마다 몸을 사리지 않고 보리스 또는 다프넨이었던 소년을 지켜냈다. 절벽에서 떨어질 뻔했을 때나 실버스컬에서 암살자들의 공격을 받았을 때, 렘므에서 마리노프와 톤다와 싸울 때에도. 그리고…
"…아!"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주륵, 흘렀다. 급히 고개를 뒤로 젖혔지만 그의 턱선을 타고 떨어진 눈물이 편지지를 적셨다. 거친 섬유질의 표면 위로 이솔렛의 모습이 떠올랐다. 공회당에서의 전투…. 검게 번져나가는 잉크가 괴물의 송곳 발톱에 찔린 이솔렛의 상처를 연상시켰다. 한쪽 팔을 못쓰게 된 상태에서도 그녀는 의연하게 괴물의 앞을 막아섰다. 마치 자신을 죽이기 전에는 보리스에게 손댈 수 없다고 외치듯.
깃펜을 잡고 있지 않은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타들어가는 것만 같다. 다시는 무기력하게 그녀의 뒷모습만 보고 있지 않겠다고 맹세했었다. 겨울의 검을 잡으며 몇 번이고 되뇌었던 그 차디찬 맹세를, 지킬 수 있을까. 아무것도 줄 수 없는 자신이 대체 무엇으로 그녀를 지키겠다는 거지?
"당신 곁에 있고 싶어요."
그는 웃었다. 완벽한 자조 섞인 웃음. 그리고 그 위를 덮는 눈물. 보리스는 편지를 접어 넣으며 속삭였다. '내게 와 줘요 이솔렛. 보잘것없지만 내 마음을, 내 전부를 가져가 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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룬아는 오래 읽었지만 테일즈위버는 초짜입니다.
많이 부족한 글인데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 전체 댓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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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아칸 하늘빛물의빛2014.04.01나의 보리스 이미지가 깨진다 ; ㄷㄷ 이솔렛 하고 막시민 하면 재밌을거 같은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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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냐플 화이트스크린2013.08.14으아 잘쓰셨네요 잘 읽었습니다. 흥미진진하네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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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냐플 마이팬더양2012.02.28괜찬긴 한데요.왠지 읽으면서 지루해 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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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냐플 삐얍2012.01.30저는 룬아 윈터러만 13번 '정독' 했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정말 재밌죠 아룬드 연대기도 재미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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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냐플 black라임2012.01.26재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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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냐플 lRls2012.01.22부우 / 이솔렛과 보리스는 저도 정말 아끼는 커플이에요 ㅎㅎㅎ 연재하면서 비중을 조금 둘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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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냐플 lRls2012.01.22WiterWind / 네 ㅎㅎ 시간 나는대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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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냐플 부우。2012.01.21좋은 글 감사합니다 계속 연재 해주셨으면 좋겠네영 이솔렛과 보리스의 이야기가 좀더 계속됬으면좋겠다싶엇는데 윈터러 끝이 좀.. 이거로 조금 한이 풀렷네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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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냐플 WinterWind2012.01.21계속 연재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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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냐플 lRls2012.01.19MSP / 감사합니당 ㅎㅎㅎ 다음편도 기대 많이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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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냐플 MSP2012.01.19...으악...좋다... 이 분이 아노섭이셨다면...